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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자화상] 제작연도 미상(1928년경?)
캔버스에 유채ㅣ 60×48cm ㅣ 개인 소장
부리부리한 두 눈에 오뚝한 코, 굳게 다물어진 입매로 다소 강한 인상을 자아내는 이 여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신여성답게 웨이브 진 단발 머리에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녀가 이렇게 생겼었던가? 몇 장의 흑백 사진으로 전해지는 나혜석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사진에서 본 그녀는 분명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영민함이 느껴지는 가늘고 긴 눈매, 완만하고 둥근 턱 선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나혜석은 온데간데 없고 화폭 안에는 뚜렷하다 못해 과장된 이목구비의 어느 서양 여인이 앉아 있다.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이 그림은 과연 자화상일까? 자화상이라면 화가는 어째서 자신의 모습을 이토록 다르게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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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 출신, 최초의 신여성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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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문제들을 풀기에 앞서, 먼저 나혜석의 성장 및 활동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혜석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듬해인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나기정은 사법관 벼슬을 지내고 일제 강점 이후에도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한동안 지냈으므로 나혜석의 성장기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유복한 환경에 남다른 영특함과 재능 넘치는 그녀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여동생 지석과 함께 다닌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1회 수석으로 졸업하면서부터였다. 이 소식은 1913년 <매일신보> 4월 1일자에 게재되었고, 세상의 이목을 끈 수재 소녀는 같은 해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 최초의 조선인 여학생이 된다.
나혜석 이전에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운 이로는 고희동(1886-1965), 김관호(1890-1959), 김찬영(1893-1960)이 있었다. 이 세 명의 남성 화가는 차례대로 1915년, 1916년, 1917년에 도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후 고희동, 김관호 등은 작품 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는 듯 했으나, 공교롭게도 훗날 모두 절필함으로써 서양화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에 비해 나혜석의 행보는 남달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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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직후의 나혜석 | |
1918년 3월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귀국 후 3. 1운동 참여, 1년 간 정신여학교 미술교사, 고려화회 설립으로 후학을 지도하는 한편 일본에서부터 병행한 문인 활동의 일환으로 여성 문학가 김일엽과 함께 여성을 위한 잡지 <신여자>를 1920년에 창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업화가로서의 활동이었다.
나혜석은 1921년 서울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는 서울에서 열린 유화 개인전으로는 최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우리 나라 최초의 유화 개인전은 1916년 평양에서 개최된 김관호의 전시였다). 70점의 유화 작품을 내건 전시에는 5천 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고 20여 점의 작품이 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당시 나혜석은 결혼 1년 차, 만삭의 몸이었다. 남편은 일본 유학 시절 오빠 경석의 소개로 만난 교토대학 법학부 출신 변호사 김우영으로, 1920년 4월 10일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이들 신지식인 남녀의 결혼 소식은 신문에도 날만큼 장안의 화제였다. 나혜석은 열살 연상인데다 전처와 사별한 김우영에게 결혼 조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 사항,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할 것, 그림 그리기를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줄 것’을 약속 받은바 있었다. 따라서 서울에서의 개인전 개최는 두 번째 조항의 결실인 동시에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 |
이후 나혜석의 작품 활동은 1922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창설된 미술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약칭 조선미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제 치하 관전(官展) 형식이라는 맹점에도 불구하고 <조선미전>은 당시 미술가들의 등용문이었다. 나혜석은 제1회전부터 꾸준히 참가해, 7회와 8회 두 차례를 제외하고 1932년 제11회전까지 총 18점을 출품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때의 출품작들은 모두 망실되어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농촌 풍경], [만주 봉천 풍경] 두 작품에서 1920년대 <조선미전> 초기에 출품한 나혜석의 화풍을 짐작하게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연대 미상과 학자에 따라서는 [농촌 풍경]의 진작(眞作) 여부를 의문시하는 경우도 있어 화가의 기량이 십분 발휘된 출품작들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부부동반 세계일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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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희] 1927년~1928년 캔버스에 유채, 41cm×3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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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경] 1928년 목판에 유채, 23.5cm×33cm, 개인 소장 |
이제 앞서 제기한 [자화상]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몇몇 학자들은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나혜석이 구미여행에서 돌아올 즈음인 1928년 전후로 추측한다. 이는 기존 일본에서 익힌 서양화풍에서 진일보하여 나혜석이 파리에서 습득한 야수파 화풍을 가미해 그린 자화상이라는 설을 뒷받침한다. 여행 이후 서구에 대한 동경과 갓 배워온 미숙한 표현법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 전혀 닮지 않은 화가의 얼굴, 강렬한 이목구비 표현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작품 속 모델은 화가 자신이 아닐뿐더러 그림 하단 좌, 우측에 영문 이니셜과 한글로 두 개의 서명이 적혀있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에서 위작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전하는 나혜석의 작품 가운데 일부는 위작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초의 신여성 서양화가, 서울에서 유화 개인전을 처음으로 개최하고 그 어떤 남성 서양화가들보다 적극적으로 화업에 주력한 나혜석의 대표 작품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 작품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불행한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최린과의 관계에 분노한 김우영과의 이혼, 이후 유래 없는 [이혼고백서](1934) 발표와 최린을 상대로 낸 정조유린 청구소송과 같은 파격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잣대로도 쉽게 용납되지 않는 이 같은 일들을 벌인 나혜석을 당시 사회와 사람들이 이해할 리 만무했다. 이혼 후 그녀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겨워하면서도 작품 제작에 몰두했고(현존 유화 가운데 [선죽교]를 이 시기 작품으로 보고 있다), <조선미전> 출품 지속에 1935년에는 개인전도 열었으나 미술계와 언론의 반응은 차가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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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제작연도 미상(1933년?) 목판에 유채, 23cm×33cm, 개인 소장 |
든든한 후원자였던 오빠 경석에게조차 외면당하면서 나혜석은 더욱 고립되었다. 진보적인 여성관을 내세운 글들을 문학지 <삼천리>에 게재하고 여전히 그림도 그렸지만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그녀가 불교와 사찰 순례에 심취하고 수덕사 아래 수덕 여관에 오랜 동안 머무르게 된 것도 이러한 어려운 상황 탓이었을 것이다. 이후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나혜석으로 추정되는 이의 사망 사실이 이듬해 3월 국가에서 발행하는 <관보(官報)> 행려사망 항목에 기재되었다. 모두가 주목했던 그녀의 삶은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마감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그러나 너무나 앞선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나쁜 여자로 기억되고 사회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린 나혜석이 다시 부활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이다. 특히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드물게 서구의 당대 미술을 직접 접했던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그간에 정리된 자료를 바탕으로 최근 더욱 세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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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