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옥언니를 보고 왔다. 성옥언니는 나와 동급생이었다.
그는 맨 뒤에 앉았었고 나는 늘 앞자리에 앉았었다. 성옥언니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까웠다.
중학교에 가서도 같은반이었는데 성옥언니는 수업시간이 끝나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게로 와서 묻곤 하였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위였다. 그런데도 나는 별 생각 없이 "성옥아, 성옥아" 불렀는데 하루는 성옥언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세 살 위인데 언니라고 불러줄 수 없겠니? 그러면 좋겠는데..."
처음에는 어색해서 언니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성옥이를 "성옥언니"라고 불렀다.
퇴직하고 광주를 떠나왔을 때 죽전으로 언니를 찾아 갔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 구조도 마음에 들고 깨끗하였다.
"너 서울 한 복판에 살지 말고 여기로 이사 와라. 나랑 같이 살자."
성옥언니가 말했다. 나는 죽전으로 옮겨와서 2년을 성옥언니와 가까이 지냈다. 그 후에 내가 다시 서울로 이사했는데,
그때도 언니 정신이 아주 맑지는 않았지만 죽전에서 언니 곁에 살 때 참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냈던 생각이 난다.
언니는 몇 년 후에 요양병원으로 가더니 점차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요양병원을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다. 그러다가
오늘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언니를 만났다. 많이 수척힌 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아무리 설명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언니의 둘째아들 도헌이랑 함께 갔는데 도헌이에게도 아무 말이 없어서 답답했다.
"언니, 나 향아야. " 언니는 주눅이 든 어린애처럼 시선을 맞추지 않다가 이따금 마주치면 엷은 미소를 띠었다. 참았던
울음이 터졌지만 언니는 별 표정을 짓지않았다. 요양원에서도 활발하여 노래 경연 대회에 나가 '아모레미요'를 열창하고
유명해졌다는데 코로나를 두 번 앓고 난 다음에 확 바뀌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돌아올 때 인사를 해도 못들은 척하였다.
아들 둘, 딸 둘을 낳아서 모두 잘 길러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남편은 일찍 보냈지만 애들이 모두 잘 되어 별 걱정 없이
지냈다. 애들이 성공했어도 본인이 건강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인가.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첫댓글 성옥언니도 교수님도 힘내십시오. 환절기 따뜻하게 목도리 하고 외출하십시오.
성옥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모두 환영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비애처럼 느껴집니다.
다친 곳은 나았는지 눈 주위로 몰린 피는 가라 앉았는지요? 두 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기온차가 심히고 독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독감한테 혼나고 보니 코로나보다 더 무섭게 느껴 집니다 조심조심 가만가만 건너가야지 싶은 겨울 입니다.
많이 나았습니다. 18일에 지방의 문학행사에 축사하기로 약속이 되어서 갑니다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아주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25일 후쯤에는 없어질까?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기는 해요.
교수님 이제는 체중을 더 이상 뻬지 마셔요. 낙상 하신 것도 아마도
너무 감량해서 어질 했을 것입니다.
흉터가 빨리 회복 안되면 어쩌죠.? 계란으로 문지르면 멍든 자국이 엷어진다 합니다.
낙상을 하시다니요 ? 호사다마라고 했습니다. 그정도라 천만다행입니다. 주위에 치매환자가 많아서 우리의
처신이 어렵습니다. 언제가는 치료약이 나올것이고 그때 제정신을 차린 분들이 주위 친지들이 안타까워 했던
일들을 기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 영혼까지 치매에 걸리지는 않을테니까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치료약이 나왔으면 좋겠지만 언제 나올는지...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을 때 절망했습니다.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당분간은 나지 않을 것 같아요. 천만다행, 천만다행 속을 이리저리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는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