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 내가 만난 한국현대사의 산 증인 하기와라 료(萩原 遼/자유기고가) 필화 (수필가, 번역가)옮김 유성철(兪成哲)씨⦁전 조선인민군 작전국장 타시켄트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황혼이 짙을 무렵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구 소련의 국내 편 에어로플로트로 3시간이 걸렸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다. 이곳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20만으로 알려진 고려인이 살고 있다. 그 때문에 몹시 혼잡하여 붐비는 공항의 여기저기에서 한국어가 들려온다. 이 공항의 여행사 사무실 앞에, 유성철씨의 부인 김용옥(金龍玉)씨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다. 소개하는 사람도 없고 면식도 없으며 모스크바에서 전화만 걸었을 뿐이었다. 밖은 벌써 어두워졌으며, 무거운 백을 어깨에 메고 건물을 찾고 있는데, 친절한 고려인청년이 “제가 찾아 들이겠습니다. 선생님은 여기 계세요.” 하고 두 손으로 메가폰을 지어 “유성철 선생님” 큰소리로 연거푸 부르면서 붐비는 사람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어쩌면....., 부부가 함께 마중 나와 주신 것이다. 유씨는 자애로운 아버지와도 같이 미소를 띠우면서 내손을 잡으셨다. 부드러운 손이다. 1991년 11월 말이었다. 유성철씨는 1917년생이다. 함경북도 출신이지만 조부 대에서부터 소련에 이주해 살아온 3대이다. 한국전쟁에서는 인민군작전국장으로 중장이었다. 김일성의 오른팔로 활약한 사람이었으나 1959년 김일성의 숙청을 피해 5인 일가족이 소련에 망명, 계속 타시켄트에 살고 있다. 유씨는 90년 9월 한국을 방문하여 놀라운 증언을 했다. “한국전쟁은 북으로 부터의 남진이었다. 선제타격계획이라는 작전에 의한 것으로 나도 계획입안에 참여했다.” 나는 워싱턴에서 증언이 게재된 한국일보를 읽고 “드디어 이런 인물이 입을 열기 시작하는가.” 하고 놀랐다. 또 한 가지 깜짝 놀란 것은 이 사람이 1943년부터 45년까지 김일성과 같은 하바롭스크의 소련군 여단(극동방면 군 산하에 있는 제88특별저격여단)에 있었고, 김일성의 통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 일본 패배후인 1945년 9월말 김일성 등 수 십 인의 조선인 대원과 북한의 평양에 들어온 것을 증언한 것이다. 조선현대사에서도 가장 의문으로 되어있는 김일성의 출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만나야 한다! 1년 후, 어렵게 그 기회가 있어 워싱턴에서 날아온 것이다. 택시로 두 분 부처(夫妻)는 2LDK의 단지의 자택으로 안내해 주셨다. 30이 넘은 독신 아들을 가까운 친척집에 보내고 그 방을 나에게 제공해 주셨으며, 부인은 재빠르게 깨끗한 시트를 곁들여 침대를 정리해 주셨다. 그날은 밤이 늦어 호의로 받아들였으나, 다음날부터는 폐를 끼쳐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오늘밤에는 어디 호텔로 옮기겠습니다.” 유씨는 “우리 집 식사가 입에 맞지 않은가보네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도 폐스러워서요.” “그렇다면 계속 여기에 있어주세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좋으니까요.” 그렇게 하여 1주간이나 머물면서 이야기를 들었으며, 부인이 지어주는 한국식 식사와 보드카(Vodka/러시아산 독한 증류주)를 대접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2주간 러시아 요리만 먹어 질렸었는데 쌀밥과 김치, 두부를 곁들인 된장찌개는 입에 맞았다. 유성철씨의 이야기는 나의 책 「한국전쟁」에도 썼다. 다소 중복되지만 김일성 가까이 있었던 산 증인만이 할 수 있는 귀중한 이야기여서 적어두고 싶다. 김일성이 제2차 대전 때, 소련에 있었던 것은 북한 역사에서는 아예 감추어져 왔다. 김일성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가 패배하기까지 시종 만주에 머물러 항일유격대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승리하여 조국에 개선했다. -----고 하는 것이 김일성과 조선 노동당의 주장이다. 하지만 1941년 무렵, 소수의 만주항일유격대는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 령으로 들어갔으며, 소련군의 보호 하에 있었던 것이 지금은 주지의 사실이다. 1994년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함께」제5권에는 「1944년, 우리들은 하바롭스크 주변의 훈련기지에서 대일작전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쓰여 져 있다. 김일성이 공표한 놀라운 새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구 소련이나 중국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표되게 하였고, 숨겨서 덮어지지 않도록 되었기 때문에 몽땅 고친 것으로 보인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 유성철씨의 증언이다. 유씨는 1943년, 하바롭스크 근교의 부야프코에 마을에 있었던 소련군 제88특별저격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이 여단은 대일전쟁에 대비하여 소련군이 만주나 한국의 지리에 밝은 중국인, 한국인의 게릴라 부대를 종합하여 훈련하고 있던 첩보부대였다. 이 여단에서 유씨는 김일성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유씨가 26세였고 김일성이 31세 때였다. “자네, 조선말 할 줄 아는가?” 이것이 초대면의 김일성이 최초로 한 말이었다. “할 줄 압니다.” 유씨가 대답하자 “좋아, 나의 러시아어 통역을 해 줘.” 라고 김일성은 말하였다. 유씨는 김일성으로부터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몸은 연약하고 지도자다운 데가 하나도 없었으며 대원들에게 인망도 없었다고 유씨는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소련군 상부의 인기는 좋아, 제1대대장으로서 독립된 통나무집에 부인인 김정숙과 같이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장남인 김정일(金正日)이 태어난다. 이것은 다음 「김정일의 유모」항목에서 언급한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의 대일참전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관동군은 어이없이 와해되고 8월 15일의 패전을 맞았다. 김일성 일단에게 아무런 출정역할도 없이 조선은 36년간의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9월 초순 여단은 해산되었으며 김일성, 유성철 등 조선인 대원 일행 약60명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배에 타고, 9월 19일 조선의 원산항에 상륙,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이었다. 이 귀국 루트의 증언도 김일성의 역사왜곡에 일격을 가했다.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945년 8월 9일, 드디어 조선인민혁명군의 전 부대에 조국해방의 최종공격명령이 내려졌다. 주석의 명령에 접한 인민혁명군 각 부대는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대일전쟁에 참가한 소련과의 긴밀한 제휴 하에 질풍과 같이 진격했다....... 부대의 맹공격과 인민의 과감한 반일 항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일본제국주의는 조국해방전쟁을 개시한지 불과 1주일후인 1945년 8월15일 마침내 무조건 항복했다.”(「김일성주석 혁명 활동사」1983년 평양, 외국문출판사) 마치 만화와 같은 창작이다. 김일성이 말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란 환영(幻影)의 군대가, 소련군을 조연으로 해서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일본군을 무찔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는 김일성 등 수십 명의 조선인 대원, 즉 「조선인민혁명군」은, 하바롭스크의 소련군 여단에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면서 9월 초까지 어쩔 도리도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가 9월 말이 가까울 무렵, 전원 평양에 와 닿은 것이다. 소련군에 의해서 평양에 옮겨온 김일성은, 그들의 손으로, 전설적인 항일영웅인 「김일성(金日成)장군」으로 슬쩍 바꿔쳐 45년 10월 14일, 조선해방축하집회에 등장한다. 이때도 유성철씨의 증언은 귀중하다. 유씨는 이때 집회의 경비를 하면서 민심을 탐색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장군귀국」뉴스를 평양방송이 사전에 흘렸기 때문에 북조선 주민은 그 민족영웅 김일성장군이 조국에 돌아왔다고 믿고 평양 모란봉 산기슭에 있는 공설운동장(현 김일성 스타디움)에 8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연단에 오른 인물은, 모두가 머릿속 에서 그리고 있는 김일성장군과는 얼토당토 않는 애송이였다. “가짜다!” “저건 애들이잖아. 뭐가 김일성장군이야!” 슬슬 돌아가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유씨는 말한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920년대부터 용명(勇名)을 떨치고 있던 진짜 김일성(金日成)장군은 50세를 지나야만 했다. 그러나 단상의 인물은 당시 불과 33세였다. 분명히 가짜다. 단상의 인물은 소련군이 하바롭스크에서 데리고 온 소련군 대위다. 그것이 어째서 김일성장군에 바꿔치기 된 것인가. 다음은 나의 추측이다. 단상의 인물은 본명을 김성주(金成住)라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중국에 이주하여 있었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반대하는 중국인의 항일투쟁이 높아졌으며 여기에 참여한 것이 김성주였다. 그는 중국공산당원으로서 항일 게릴라 투쟁의 말단 지휘관으로 있었다. 이때부터 김일성(金一星)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한자로 음이 같기 때문에 발음하면 「김일성」과 같이 되는 것이다. 김성주도 젊은 혈기의 소치로 위대한 장군 김일성(金日成)을 닮아 같은 영향력을 갖는 김일성(金一星)이라는 가명을 득의양양하게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이, 지배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바꿔치기 한 것으로 나는 본다. 확실한 증거는 아직 나와 있지 않지만, 어차피 역사는 진실을 밝혀 줄 것이다. 점령 소련군은 북조선을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는 위성국으로 굳힐 것을 노리고 있었다. 러일전쟁 이래, 소련에 있어서 조선은 언제나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의 발판이었고 병참기지였으며 연병장이었다. 옆구리에 찬 단도(短刀)와 같은 조선반도를 「민주화」하는 것이 소련의 안전을 위하여 긴급한 과제였다. 일본군국주의의 2대지주(支柱)인 지주(地主)와 자본가를 박멸하기 위해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가 소련군 점령 후 지체 없이 시행되었다. 친일분자의 숙청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조치이다. 이것을 집행하는 현지의 대리인으로서, 소련군 대위인 김성주가 바뀐 「김일성 장군」을 조선으로 대려와 조선인민의 지도자로 밀어붙인 것이다.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는 산 증인의 생생한 증언을, 날마다 유성철씨로 부터 들으면서 순식간에 1주일 가까이 되었다. “이야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내일은 시내의 바자르(bazaar/시장)으로 안내하고 싶어요. 그런데 선생은 개고기를 드십니까?” 하고 유씨가 묻는다. 나는 당황했다. 개는 무척 좋아하지만 개고기는 전혀 먹지 않는다. 유씨는 많은 고려인들과 같이 개고기 요리를 아주 즐겼다. “그거 안 됐군요. 그럼 타시켄트의 명물인 양고기 구이를.” 이튿날은 포근하고 따뜻한 날씨에 하늘은 푸르렀다. 모스크바의 잔뜩 흐린 겨울 정경과는 달리, 이 중앙아시아의 도시는 따뜻하고 한가로운 분위기에 싸여있다. 바자르는 사람들로 흥청거리고 있었다. 체육관과 같은 둥근 지붕의 시장에는 수박이랑 멜론, 오이 같은 온갖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조선 코너에는 김치, 쌀, 명태, 두부 같은 조선요리에는 빠질 수 없는 재료가 수북하게 늘어 놓여있었다. 파란 하늘 밑에 피어오르는 양고기 고치구이의 연기가 자욱하다. 부인인 용옥(龍玉)씨가 열사람 쯤 늘어선 행렬을 따라, 큰 쟁반에 가득히 사왔다. 포장마차 옆에는 나무로 된 테이블과 걸상이 달려 있다. 맥주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그 지방 차(茶)가 가득 담겨있는 주전자가 테이블에 놓였다. 부인도 조선인민군의 간호중위로, 조선전쟁 때 낙동강의 피투성이 전쟁터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북으로 생환한 역전의 용사이다. 60세를 조금 지났지만, 버스에 뛰어 타고 자리를 확보할 때의 재빠른 몸놀림에서 왕년의 인민군 장교의 편린이 엿보인다. 유씨는 조부 때부터 소련의 연해주에 살았는데, 1930년대 스탈린의 대 숙청때, 조선인들은 일본스파이가 되기 쉽다고 타시켄트에 강제로 집단이주를 시키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소 전쟁에도 종군하였다. 일본의 패배와 조선의 해방을 맞았다. 김일성과 함께 평양에 들어가 조선의 건국활동에 종사하였으며, 이윽고 작전국장으로서 조선전쟁을 맞게 된다. 두 사람 앞에서 생각하니, 진부한 표현이지만 풍설기십성상(風雪幾十星霜)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김용옥씨(金龍玉/전 조선인민군 간호중위) 1주간이나 머물러 있어, 천천히 모스크바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성철씨는, “내일은 선생하고 여동생 생일파티에 같이 갔으면 해요.” 하고 말했다. “동의합니까.” 하는 말이 유씨의 입버릇이다. 인민군의 말투와 같다. 나도 익살스럽게 답했다. “イェー, トンイハムニダ. チャクチョン. クッチャン. トンジ(예 동의합니다. 작전국장 동지)” 유씨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떠올린다. 이튿날 타시켄트 근교의 공동농장에 셋이서 버스로 나갔다. 유씨 여동생 부부는 드넓은 공동농장 한쪽, 널찍한 집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의 남편은 농장의 간부로 있다. 아이들을 포함하여 여남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태어 난지 얼마 안 되는 강아지 3마리가 뜰을 재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둘레에는 자류지(自留地/사회주의 국가에서 농민이 공동작업 외에 개인적으로 경작할 수 있도록 인정된 경지)로, 채소를 심었고 돼지와 닭을 많이 사육하고 있다. 생활은 넉넉한 듯이 보였다.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이 널찍하게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조선식 성찬이 차려졌다. 주방에는 몇 사람의 여성들이 음식을 만드느라고 바쁘게 일하고 있다. 보드카도 나왔다. 몇 순배 돌았을 무렵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김용옥씨의 차례가 되었다. 뜻밖에도 일본어 노래다. 전쟁 전에 일본에서 유행했던 노래다. 자전거를 사용하여 가벼운 기분으로 갑시다 가로수길 미풍에 밝고 푸른 하늘 .......... 용옥씨는 한마디도 일본어를 말하지 않아, 아주 모르는 것인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멋진 가사(歌詞)다. 유성철씨는 소련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어는 전혀 할 수 없다. 조선어는 조부의 고향인 함경북도의 강한 사투리가 섞인 말씨다. 그녀는 “타카미에 미애코가 불렀던 겁니까?” 하고 본래의 조선어로 돌아와 나에게 질문했다. 나도 종전 시 8살로 이 노래를 알고는 있었지만, 가수까지는 몰랐다. 일본에 돌아와 알아봤더니 소화18(1943)년 도호에이가(東寶映畵) 「하나코 상)」의 주제가로서 토도로키 유키코(轟 夕起子)가 노래를 불렀다. 용옥씨가 일본의 식민지로 부터 해방된 것은 16세때였다. 그해 9월 유성철씨와 만나게 된다. 유씨는 그때 28세로 헌병대의 장교였다. “그때의 인상은 어땠지요.?” 나의 질문에 유씨는 수줍어하면서 말해 주었다. “커다란 눈을 크게 뜨고 용옥이는 내 얼굴을 말끄러미 주시하고 있었지. 그때 나는 한눈에 반해버렸어.” 그러나 용옥은 아직 너무나 앳되어서 좀 더 공부를 시키겠다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쳐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 이야기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나,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말해준 이야기를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부산 가까이까지 남진 그후 용옥씨는 평양에 있던 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간호사의 길에 들었다.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인민군국경경비대의 야전병원에 배속되었다. 머지않아 시작된 조선전쟁에서 간호소위로 임관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개전 직전에는 38선에서 가까운 연천(漣川)에 집결했다. 그녀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그것이 북으로 부터의 선제적인 남진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훈련으로 이동 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개전하였다. 서울이 해방되었으며 수원, 대전, 대구로 남진하였고, 8월에는 최남단에 가까운 진주 남쪽 12km까지 진출하였다. 대하 낙동강에 둘러싸여 부산 근방에 틀어박힌 미군과 한국군이었다. 10만 인민군은 미군의 맹폭격 하에 엄청난 희생을 내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도하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때 용옥씨는 정예 제4사단 제18연대에 배속되어 속출하는 부상자 치료와 후송에 사생결단의 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9월, 미군은 맥아더의 진두지휘 하에 서울에서 수십km인 인천에 1.000기의 비행기와 수백 척의 함정을 투입하여 상륙작전을 강행했다. 낙동강의 인민군은 퇴로가 끊겨 몽땅 포위당한 것이다. 저돌적으로 맹렬히 진격했던 김일성의 대실책이었다. 용옥씨의 제4사단도 개전시의 11.000명이 약10분의 1로 줄어, 극히 작은 수의 장병이 겨우 북으로 패해 돌아갔다고 한다. 뿔뿔이 산악지대를 기어올랐으며 풀뿌리 같은 것을 씹으면서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녀도 그 일원이었다. 그때의 일을 그녀는 별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마도 말하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기억으로 가득할 것이다. 극적인 재회 1951년 봄, 어느 날이었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열린 「참전여성 좌담회」에 그녀는 게스트로 초빙되었다. 거기에 우연히도 유성철씨가 온 것이다. 6년만의 재회였다. 열여섯 살의 소녀는 스물두 살의 인민군 장교로 성장해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극적인 재회였지요.”유씨의 말이다. 잇달아 프로포스를 하였고. 곡절을 겪은 후 두 사람은 결혼했다. 1953년 정전과 동시에 김일성은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대규모의 숙청에 나섰다. 먼저 박헌영(朴憲永) 부수상 일파 남조선노동당계를 「미제(美帝)의 스파이」로 몰았다. 이어서 유씨를 비롯한 소련 계를 숙정한다. 1958년 소련 사관학교에서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유씨는 지체 없이 구속되었으며 「사상검토」라는 수개월에 걸친 정신적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빨리 죽여 다오.” 하고 절규할 정도의 고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만 겨우 건져 소련으로 망명한 것이 59년 12월이었다. 고난의 나날에 찍은 사진 유씨 부처는 자택 거실 작은 유리 케이스에 소중한 사진 한 장을 액자에 넣어서 장식하고 있다. 북에서 출국하기 직전에 일가 다섯 사람이 기념으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선생에게 드리지요.” 하고 유씨는 액자에서 꺼냈다. “그런 소중한 사진인데, 저에게 주시다니요......” “아니 좋아요. 한 장이 더 있으니까.” “그럼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책에 꼭 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나는 공손히 받았다. 평양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이 사진 한 장뿐이라는, 고난의 나날이 새겨진 일가의 사진을..... 한 주간이나 폐를 끼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날, 두 분은 또다시 공항으로 나와 주셨다. 통풍(痛風)을 두 번이나 앓아 다리가 불편한 유씨다. 하필이면 공항 대합실에는 의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선생님 피곤하신데 그만 들어가시지요.” 몇 번이나 내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요.” 한 시간 이상이나 내내 서 있다가 내가 출발 게이트에 사라질 때 까지 배웅해 주셨다. 손 자루에는 용옥씨가 들려준 선물이 들어있다. 저녁때 아카하타(赤旗) 모스크바 지국에 도착하여 꾸러미를 끌러보니 두부와 기름으로 튀긴 갈치였다. 카타오카(片岡)특파원과 취재의 성공을 축하하면서 갈치를 안주로 건배를 들었다. 가슴에는 따뜻한 그 무엇이 복 바쳐 온다. (朝鮮と旅のノート/‘15.9.15譯) 하기와라 료(萩原 遼1937. 高知縣 生) ⦁大阪외국어대학 한국어과 졸 ⦁「赤旗(아까하타)」기자, 평양특파원 ⦁워싱턴 체재, 미 공문서관에 비장된 미군 탈취 북한문서 160만 페이지를 3년 걸려 독파하고 ⦁「한국전쟁- 김일성과 맥아더의 음모」저 ⦁「북조선으로 간 친구와 나의 이야기」저 ⦁大宅社 제30회 논픽션 상 수상 ⦁기타 저서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