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이 세우는 금강경이론 7
금강경강의 (7회)
제8의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에서는 모든 불법(佛法)이 금강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설합니다. 금강경의 수지 독송과 타인을 위한 설법의 복덕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의 물질보시의 복덕보다도 더욱 뛰어남을 설하고 있으며, 모든 불법(佛法)과 모든 불타의 무상정등각이 모두 금강경으로부터 출생함은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불법(佛法)이라는 언설에의 집착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이 불법 아님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를 설하기 위하여 불타는 수보리에게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했다면 이 사람이 얻는바 복덕은 많지 않겠느냐.”라고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한다는 것은, 귀중한 보물을 극히 많이 보시한다는 의미로 설하고는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많은 칠보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또는 칠보가 그렇게 많은 것이라면 그 칠보가 과연 귀중한 물건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보다도 더욱더 큰 규모의 표현이 금강경의 설법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금강경의 척도와 규모가 과연 크기는 크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금강경이 그만큼 큰 규모와 척도로 보시와 복덕을 설할 수 있다는 위대함에 감탄하면서 금강경이 설하는 그 뜻을 이해했으면 합니다.
삼천대천세계는 우주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도 더 큰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 남쪽은 염부제, 동쪽은 불바제, 서쪽은 구야니, 북쪽은 울단월)가 있고 그밖에 9산(九山)과 8해(八海)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수미세계로서, 위로는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으로부터 아래로는 지하의 풍륜(風輪)까지 포함됩니다.
이 하나의 수미세계를 1000개 모은 것이 소천세계(小千世界)라 하고, 이 소천세계를 다시 1000개 모은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라 하며, 이 중천세계를 또 1000개 모은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합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는 이와 같은 소(小) 중(中) 대(大)의 세 가지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는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게산해 보면 10억개의 수미산세계가 됩니다.
일곱 가지 보옥(寶玉)을 말하는 칠보(七寶는 경전마다 다르지만 ① 금(金) ② 은(銀) ③ 유리(琉璃) ④ 파려(玻瓈:수정) ⑤ 자거(硨磲:백산호) ⑥ 적주(赤珠:적진주) ⑦ 마노(瑪瑙:짙은녹색의 보옥) 등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있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불타는 이상과 같은 귀중한 칠보를 10억개의 세계가 되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매우 많지 않겠느냐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양(量)인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는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어. 왜 그러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신 것이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언뜻 들으면 논리의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복덕이 많다는 이유가, 복덕은 바로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시의 복덕이 많다든가 적다든가하는 말은 세속에서 주고받는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지금 불타와 수보리는 세속에서의 복덕을 주고받다가 이를 뛰어넘어 출세간의 복덕을 설합니다. 상이 없어진 무주상보시는 머무름이 없는 보시이기 때문에 그 복덕 또한 머무를 데가 없는 것입니다. 보시한 내가 없고, 보시를 받은 네가 없는 주관과 객관이 끊어진 자리에 무슨 복덕의 성품이 있겠습니까.
이 뜻을 알아차린 수보리가, 불타가 설하는 복덕은 법성진여의 자리에서 설하는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많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법성진여의 자리에는 적다 많다는 언설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상대적인 관념으로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어서, 복덕의 성품이 아니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받고, 짓는 복덕은 세속(世俗)에서의 복덕을 말하는 것이고, 복덕의 성품이 아니라고 한 것은, 출세간, 본체 즉 제일의(第一義諦)에서 볼 때 복덕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래서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다시 세속의 언설을 빌어 말하는 것은 세속의 중생들을 위하여 상대적 언설로 복덕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부정, 긍정을 되풀이 하면서 상대적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중생심을 불타의 세계에 끌어올리기 위해 방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복덕의 성품은 영원한 불생불멸의 자리에서 성취되는 진리의 복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조께서는「‘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서 보시하면, 복을 얻음이 비록 많다하더라도, 자성(自性)에는 하나도 이익이 없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고 수행하여, 자성으로 하여금 모든 유(有)에 떨어지지 않게 하면, 이것을 복덕의 성품이라 한다.」고 말하고, 또한「마음에 나와 남이 있으면 복덕의 성품이 아니요, 나와 남이라는 마음이 사라지면 이를 이름 히여 복덕의 성품이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불타 여기에서 물질보시의 복덕을 설하면서, 불생불멸의 반야바라밀을 의지한 복덕의 성품(福德性)을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준다면 그 복은, 앞에서 설명한 물질보시보다도, 더 뛰어난 것’이라고요.
결국 금강경의 수지 독송과 타인을 위한 법보시(法布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구게(四句偈)는 금강경의 근본사상을 게송으로 요약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구게만이라도 남을 위해 설해준다는 것은 금강경의 근본사상을 요약하여 남을 위해 설해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드시 금강경 속에 나오는 사구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이 저 복보다 뛰어나다는 기복승피(其福勝彼)는 재시(財施)보다는 법시(法施)의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등 무주상(無住相)보시의 공덕을 다시한번 여러 각도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가사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 찬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했다하더라도, 그보다도 어떤 다른 사람이 한번 식사할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이라도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였다면, 앞의 공덕은 이것과 비유될 수 없다.」고 말하여, 불법(佛法)공덕의 수승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불타는 수보리에게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무상정등정각의 법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설합니다.
일체의 부처님도 이경에서 나왔고 일체 부처님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법도 모두 이 금강경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깨닫는 법도 모두가 금강경으로부터 출생하였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문과 한글역 및 영역문을 보겠습니다.
第8 依法出生分(불법이 여기서 나온다. Truth Come From This Sūtra.) 須菩提、於意云何。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是人所得福德寧爲多不。須菩提言、甚多世尊。何以故。是福德卽非福德性。是故如來說福德多。若復有人於此經中、受持乃至四句偈等爲他人說、其福勝彼。何以故。須菩提、一切諸佛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皆從此經出。須菩提。所謂佛法者卽非佛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 써 보시했다면, 이 사람이 얻는바 복덕은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러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설하신 것이옵니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등 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은 저것보다 더 뛰어나리라.
왜 그러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니라.”
"Subhūti! what do you think about it? If anyone offered seven kinds of jewels filled within immeasurable great world, does this one attains great reward of virtue?
Subhūti said, "Extremely great, World-Honored Buddha! Because there is no reward of virtue in nature of Truth. Therefore the Buddha says that the reward of virtue is great."
"But if there is anyone else to receive and keep a four line verse song of this sūtra and teach it for others, his reward of virtue would exceed that of the former."
Because Subhūti! all of the buddha and all of the Truth of perfect enlightenment come from this sūtra.
Subhūti! what is called the Truth of Buddha is not Truth of Buddha"
지금까지 불타는 수보리와의 대화를 통하여 모든 불법(佛法)이 금강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설하였고, 금강경의 수지 독송과 타인을 위한 설법의 복덕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의 물질보시의 복덕보다도 더욱 뛰어남을 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불법(佛法)과 모든 불타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 모두 이 금강경으로부터 출생함은 강조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돌연히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중생이 불법(佛法)이라는 언설에의 집착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이 불법 아님을 설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경, 이법하면서 불법(佛法)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중생들이 분별심으로 그 불법이라는 언설에 현혹되어 집착할까봐 불타는 다시 ‘수보리에게, 이른바 불법이라고 한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차안(此岸)의 것입니다. 피안(彼岸)에 이르기 위한 뗏목에 불과합니다. 이 법에 의해서 이미 일체의 부처가 탄생하고 정각(正覺)을 이루었다면 그는 차안에서 탈출하여 이미 피안(彼岸)에 도착한 것입니다. 뗏목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면 그 뗏목은 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저절로 버려진 것입니다. 어찌 버려진 불법이 불법(佛法)이겠습니까. 그래서 ‘불법이 불법이 아니다’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도올 김용욱)는 이 말에 대하여「참으로 충격적인 최후의 일언(一言)이다.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 여기서 불(佛)은 “깨달음”이다. 불법(佛法)은 곧 깨달음의 법이다. 이 최후의 충격적 일언(一言)은 바로 대승불교의 마지막 선포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다!」라고 차안(此岸)에서의 인식으로 언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 그 자체의 부정’이 아닙니다. 깨달음 그 자체의 경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도 차안(此岸)의 말이 아닙니다. 피안(彼岸)의 말입니다. 우리 독자는 혹자와 같은 안타까운 오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 09. ·21.
대승기신론연구회장 전종식
chuncs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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