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인권 관련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근현대사에서 인권 탄압에 맞서온 명동성당과 중구 세종대로의 6·10항쟁 선언 현장 등 인권 수호의 생생한 역사를 간직한 장소에 ‘서울시 인권 현장 바닥동판’을 설치하였다
(2019년 6월 기준 총 61곳에 설치되어 있다)
∇= 국가 폭력, ○ = 시민 저항, □ = 제도 내 폭력
주소는 답사하면서 동판의 위치를 기준으로 하였다
<기타 동북쪽 9곳>
① 건국대 구속사건 현장 (서울시 광진구 능동로 120, 화양동 1)
1986.10.28
민주화운동 시기에 단일사건 최대인 1,288명이 구속된 '건대항쟁' 자리
10.28 건대항쟁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1991년 10월 28일 만든 기람상은 10.28 건대항쟁 당시 가장 많은 학생이 농성했던 사회과학관(현 경영관) 앞에 세워졌다 - 김봉준이 조각했고, 기림상 앞 바닥에는 서울시 인권현장 바닥동판이 새겨져 있다
학원자율화 조치 발표 후 1984년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1985년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탄생하는 등 학생운동은 활기를 찾는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27개 대학 2천여 명 학생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시위를 벌이고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을 출범시킨다
애학투련은 노선과 조직이 흩어져 있는 학생운동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만들었다
10월 28일 오후 애학투련 결성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강제 몰이를 시작한다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현 언어교육원), 대학본관(현 행정관), 사회과학관(현 경영관), 학생회관, 교양학관(현 법학관) 5개 건물로 흩어졌다
건국대의 경찰 철수 요청과 시위 학생 측의 자진 해산 요구를 경찰은 거부한다
경찰의 '계획된' 진압으로 '계획에 없던' 3박 4일간의 점거 농성이 시작되었다
여러 건물에 시위대를 강제 몰이한 경찰은 전기와 물을 끊고, 언론을 통해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시위 학생을 용공세력으로 몰아 10월 31일 아침 경찰은 강제 진압을 시작한다
학생 시위 진압 과정에 최초로 헬기를 동원하고, 소방차 30대, 연인원 18,900명의 전투경찰을 진압에 투입했다
('황소 30'이라는 작전명으로 건대 시위 진압을 지휘한 경찰 책임자는, 박종철 군 사망 발표 때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다)
사흘 밤, 나흘 낮 66시간 50분 동안 진행된 이 항쟁으로 1,525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8명이 '공산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역사상 단일사건으로는 최대의 연행, 구속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각본 아래 건대항쟁은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건대사태)'으로 둔갑되었고 방송과 신문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이 기세를 힘입어 금강산 댐 수공설을 퍼뜨린 전두환 정권은 반공의식 확산과 이를 통한 정권의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천 만 명의 인원에 달하는 북한 규탄대회가 일어날 정도로 전두환 정권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애학투련은 이들의 발족 선언문, 구호, 유인물을 살폈을 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란 용어도 없으며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순식간에 공산혁명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② 성수대교 붕괴사고 터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1가, 성수대교 북단 하행선 보도)
1994.10.21
부실한 공사와 안전관리로 다리가 무너져 출근길·통학길에 있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대표적인 재난현장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되면서 사고 부분을 달리던 시내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 모두 차량 6대 탑승자 49명이 추락했고 이 중 32명(남성 19명, 여성 13명)이 사망했다
사상자 대부분이 거꾸로 뒤집혀 추락한 16번 시내버스에서 발생하였고 운전기사를 포함한 탑승자 31명 중 사망자가 29명이나 나왔다
생존자였던 두명은 각각 신원미상의 20대 남성, 43세 여성 권모씨였다
마침 사고 발생 시각이 아침 출근 및 등교시간이라 등교하던 학생들을 비롯해 출근하던 직장인과 교사 등 평범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그 버스를 타고 아침에 등교하던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과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이 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 참사로 여학생 9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 무학여중고는 한동안 초상집 분위기였다)
32명이라는 사망자 수만으로 본다면 광복 이후의 인명참사 규모로 10위권 밖이다
그러나 인명피해가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비행기가 추락한다거나, 고속도로 위에서 차량이 충돌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일이었던 반면, 이 사고는 수도 한복판에 있는 한강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을 가져왔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국민들의 뇌리에 남은 대형 사고다
사고 발생 7년 후 대법원은 본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동아그룹 자체도 2001년을 끝으로 완전히 해체되면서 동아건설도 프라임개발을 거쳐 현재 SM그룹 계열이 되었다
이 사고 이후 광진교와 한남대교, 마포대교, 양화대교도 재시공되거나 전면보수에 들어갔다
광진교는 철거 후 완전히 재시공했고, 한남대교는 확장도 할 겸 하류 쪽에 새 교량을 건설하고 기존 교량은 상판을 뜯은 뒤 재시공, 양화대교도 상판을 뜯은 뒤 재시공했다
마포대교는 때마침 확장 계획이 잡혔기에 신교량을 2000년에 건설하고 기존 교량을 철거하고 다시 지었다
③ 청계천판자촌 철거 현장 (서울시 성동구 청계천로 530, 마장동 610)
1969
정부가 도시빈민들의 주거권을 박탈하여 광주대단지(성남)로 강제 이주
1966년 서울시의 인구는 약 38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1/3가량이 무허가 판자촌에 살았다
특히 청계천과 중랑천에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정부는 1966~68년 도시미화 정비라는 명목으로 청계천 복개공사를 결정하고 서울전역 4만3천동 무허가 판자촌을 대책도 없이 강제 철거했다
그리고 철거민 50만을 수용할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계획을 세워 그 후보지로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20km에 위치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을 선정하고 ‘광주대단지’라 칭하고 이곳에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를 설치했다
청계천변에 살던 판자촌 사람들을 하루에 수천 명씩 차에 실어와 정비도 안 된 언덕에 실어다만 놓았고 기반시설은 텐트가 전부여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하나의 텐트에서 두 가족 이상이 살 정도로 주거환경은 열악하였다
그 후 정부는 철거민들에게 천막 부지로 사용했던 20평씩의 땅을 평당 2,000원 가격에 할부로 분양해주며 철거민이 스스로 집을 짓도록 하여서 산기슭과 구릉지에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철거민들은 도시계획이나 건축법과 상관없이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집을 지었다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산등성이 여기저기에 집을 짓고 물을 멀리서 길어다 먹으며 고단한 삶을 시작하며 이어 오던 곳이, 바로 40여 년 전 성남의 모습이었다
④ 4·18선언 현장 (서울시 성북구 안암로 145, 안암동5가 1-2)
1960.4.18
고려대 학생들의 선언 4·19 혁명으로 타오르다
1960년 4월 16일은 고려대생들의 신입생환영회가 계획된 날이었다
마산 2차 시위에 고무된 고대생들은 이날 시위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낌새를 챈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신입생환영회와 시위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4월 18일 아침 고대생들은 학교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점심시간 싸이렌이 울리면 교정에 있는 인촌 동상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동태를 알아챈 학교 측이 싸이렌을 울리지 못하도록 하자 학생들은 "인촌 동상 앞으로"라고 외쳤고, 순식간에 3천여 명이 교정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고대신보] 박찬세 편집국장이 기초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교문으로 나와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향했다
구호
1.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1.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1. 우리는 행동성이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1.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1.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였다
고려대 총장이던 유진오씨가 학생들 앞에 나와 정부요로에 반영시키겠다고 약속을 한 후 학생들은 종로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해산을 시작했다
학교로 돌아가던 중(밤 9시 30분경)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임화수 일당들에게 습격을 받아 일부 학생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1960년 4월 19일자 피습사건이 보도되자 서울시내 각 시위가 촉발되어 결국 자유당 독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⑤ 새한버스 기숙사 터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 648, 우이동 6-1)
1976.4.29
시내버스 안내양 40여 명, 여기서 인간선언을 울부짖다
버스안내양에 대한 승객들의 인식은 이중적이었다
승객들은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빼곡히 갇힌 채 급정거, 급커브에 몸이 휘청거렸고, 제시간에 발차 요구, 요금 시비 등 불만이 많았다
버스안내양은 이러한 불만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손님 대 종업원, 어른 대 어린 것, 남자 대 여자, 배운 것 대 못 배운 것의 대립 구조에서 버스안내양은 후자였다
가욋돈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일부 차주들은 삥땅이 지나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눈감아 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운수 업계의 '빵땅 문화'가 정착되었다
버스안내양들은 삥땅의 주범 뒤에는 공범(그것도 위계질서가 분명한 공범 - 다름 아닌 운전사와 여감독)들이 숨어 있기 때문에 삥땅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공범들은 삥땅을 약점 삼아 상납을 요구하였고, 거절할 때는 못살게 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삥땅도 강요했다
1980년대 초까지도 버스안내양은 운전사에게 드링크와 담배를 사주는게 관례였는데, 물론 그 비용은 삥땅으로 충당했다
(1970년 지학순 신부는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였다)
⑥ 상계동철거민 투쟁 현장 (서울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396, 상계동 173-1)
정부의 강제철거에 맞서 상계동 주민들이 주거권 투쟁을 전개하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상의 보기 싫다는 이유로 1986년 6월 26일 상계동 173번지에서 전투경찰과 백골단, 용역 깡패들이 동시에 들이닥쳐 철거민촌 주민들의 터전인 상계동 판잣집을 덮친 처참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한 해 전(1985년)부터 서울 외곽 지역의 무허가촌을 갈아엎는 짓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상계동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은 그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광기 어린 폭거에 해당되었다
판자촌은 형편없이 부서지고 짓이겨지고 있는 가운데, 용역 깡패들은 상계동 철거민촌을 돕기 위해 와 있던 수녀들의 가운을 벗기고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보다 못한 상계동성당의 손인숙 수녀가 김수환 추기경께 전화를 걸었다
"추기경님! 큰일났어요. 지금 용역 깡패들이 상계동 철거민촌을 짓밟고 있고, 우리 수녀님들까지 마구 두들겨 패고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 네?"
얼마 후, 김수환 추기경이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 직접 찾아와 멈춰줄 것을 호소했지만 기세등등한 전투경찰, 백골단, 용역 깡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수십 때의 트럭을 동원해 천막과 살림살이까지 몽땅 싣고 남양주의 배 밭이나 부친의 고강동으로 쫓아냈다
공무원들은 고강동으로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구실을 붙여 뼈대만 세운 가건물 마저 철거해 버렸다
(철거민들이 땅굴을 파고 살게 된 어느날, 올림픽 성화가 5분 만에 그곳을 지나갔다
군사독재 시절의 끝자락에 벌어진 비정한 소극(笑劇)이었다)
⑦ 상봉동 연탄공장 터 (서울시 중랑구 망우로 353, 상봉동 500)
1988
무연탄 분진에 의한 주민 진폐증 사건을 시민참여로 승소한 대표적인 공해추방운동 현장
서울특별시 중랑구(당시 동대문구) 상봉동 삼표연탄 공장 주변에서 8년 동안 살아온 박길래(당시 45세 - 2000년 4월 29일 사망, 57세)가 1988년 1월 국립의료원으로부터 진폐증 판정을 받았다
연탄공장에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살던 박길래는 1985년부터 각종 호흡기질환과 가슴통증에 시달려왔다
박길래는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연탄공장을 상대로 9,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 지방법원에 내 이듬해 1월, 1,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승소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헌법상의 기본권인 환경권과 공해로 인한 신체적 피해를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던 1980년대 서울 시내 17곳에 연탄공장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 강원산업 삼표연탄공장이 있었는데, 연탄을 찍어내기 전에 탄가루를 산처럼 쌓아놓는 저탄소가 있다
문제가 된 한참 이후에야 덮개를 씌웠지만, 그 전에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덮지않고 노천에 쌓아 놓았었다
그 주변은 시커먼 연탄가루가 날리는 동네였다
보건의료단체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1988년 3월부터 상봉동 일대 주민들에 대한 조사 결과 2명의 진폐증 환자와 3명의 의사 진폐증 환자를 가려내는 등 이 사건을 사회문 제로 제기하는 데 기여했다
이에 대하여 서울시는 시내 17개 연탄공장 주변의 500m 이내 에서 5년 이상 살아온 주민 1,842명을 대상으로 검진을 실시해 8명의 진폐증 환자와 13명의 의사 진폐증 환자를 추가로 밝혀냈다
진폐증 확인자 8명 가운데 3명은 연탄공장이나 광산 에서 일한 적이 없는 순수한 공해병 환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⑧ 녹색병원 (서울시 중랑구 사가정로49길 53, 면목동 568-1)
2003.9.20
이곳은 원진레이온 직업병 노동자들과 시민사회가 함께 일궈낸 전문의료기관이다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의 합성섬유 공장의 노후된 기기에서 발생한 불순물인 이황화탄소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직원 대부분이 가스에 중독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작업병으로 인한 사망자 8명에 장애판정 637명이 발생했다
이들은 언어장애, 반신/전신 마비, 정신 이상 등의 증세를 보였다
사회적으로 직업병 문제가 대두되던 1980년대 후반, 노동계와 학생들이 나서서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이 운동 덕분에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보상을 받게 되는데, 이 보상금으로 세워진 병원이 이곳 녹색병원이다
태생부터 남달랐던 녹색병원은 직업병에 시달리거나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 치료에 헌신적이고 전문적인 병원으로 잘 알려져 있어 노동운동가들이 목숨을 건 단식농성 후에 찾는 병원이 녹색병원인 이유다
‘YH무역’ 사건 당시의 본사 건물은 현재 서울시 중랑구 사가정로49길 53(면목동 568-1)에 ‘원진재단 부설 녹색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골조는 그대로 둔채 외장과 내장을 리모델링해서 사용중이다
실제로 병원을 이용해보면 전에 가발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깔끔한 건물 외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천장과 병원답지 않은 동선(많은 문턱 및 미로같은 구조)을 가짐을 알 수 있다
⑨ 중앙정보부 터 (서울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석관동 409)
1962~1995
독재시대에 권부 위의 권부로 군림해온 '중정' 본청 자리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군사정부의 이른바 '혁명과업 수행'에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국가 안전과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관련 범죄를 수사하며, 군을 포함한 국가 각 기관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는 특수기관으로,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행정부·입법부·사법부, 그리고 정부 여당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일제에 부역했다가 반공투사로 변신한 일본 경찰 출신과 고문기술자들이 초기부터 여기에 참가했다)
중앙정보부는 남산과 이문동 청사가 있는데, 1962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에 의해 의릉지역에 세워진 이문동 청사 자리이다
중앙정보부는 지금의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능 한켠에 축구장과 테니스장을 조성하는 등 의릉을 심하게 훼손하였다
1996년 중앙정보부가 지금의 내곡동으로 이전하고나서 10여 년간 연못을 없애고 금천교를 만드는 등 복원을 하고서야 일반에게 공개하였으나 중앙정보부 청사 자리는 오롯이 의릉에 돌려 주지 못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일부 속하여 있다
중앙정보부는 1980년 안전기획부(안기부)로 다시 1999년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나, 아직도 중정이나 안기부라는 명칭은 공포의 의미가 더 강하다
서울시 인권현장 바닥동판(표지석) 투어를 마치며
1. 동판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곳(8)
- 덕수궁 대한문 앞(공사 중)
- 전태일 분신 현장(기념사업회에서 떼어가고 다른 조형물을 설치 함)
- 여의도 농민시위 현장(보도블럭 공사로 유실 추정)
- 협성계공 터(협성 측에서 떼어 감)
- 남영동 대공분실 터(공사 중)
- 청계천 판자촌 철거 현장(보도블럭 공사로 유실 추정)
- 상계동 철거민 투쟁 현장(공사 중?)
- 중앙정보부 터(보도블럭 공사로 유실 추정)
2. 내용 미흡
궁정파출소 터와 새한버스 기숙사 터에 대해서는 동판에 새겨져 있는 문구로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으나 그 어디에서도 추가 자료(실체적 사실)를 확인 할 수 없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인권현장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며 많은 교훈을 얻었다
아울러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강자연 서울시 인권담당관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