碩 士 學 位 論 文
韓國 佛敎의 茶文化에 대한 考察
--僧家의 茶生活을 中心으로--
指導敎授 鄭 承 碩
東國大學校 佛敎大學院
佛 敎 史 學 科
장 성 윤(大惠)
2016
碩 士 學 位 論 文
韓國佛敎의 茶文化에 대한 考察
-僧家의 茶生活을 中心으로-
장 성 윤(大惠)
指導敎授 鄭 承 碩
이 논문을 석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5年 12月 日
장성윤(大惠)의 文學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2016年 1月 日
委員長 (印)
委 員 (印)
位 員 (印)
東國大學校 佛敎大學院
目 次
Ⅰ. 서론 1
1. 연구 목적 1
2. 연구 방법 2
Ⅱ. 불교에서 茶가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背景 4
1. 차를 사용한 기원과 의미 4
2. 불음주계와 차 7
3. 차의 효능에 의한 음다 11
4. 오후不食으로 인한 음다 12
Ⅲ. 鉢盂와 茶具에 대한 比較 15
1. 鉢盂의 起源과 그 意味 15
2. 茶具의 起源과 展開過程 17
1) 茶具의 起源 17
2) 찻그릇의 展開過程 19
(1) 三國時代의 찻그릇 19
(2) 新羅時代의 찻그릇 21
(3) 高麗時代의 찻그릇 24
? 高麗왕조의 特徵 24
끼 高麗靑瓷의 흐름 25
니 高麗靑瓷의 成立時期 28
띠 高麗靑瓷와 佛敎 28
① 高麗初期의 高麗靑瓷와 佛敎 29
② 高麗中期의 高麗靑瓷와 佛敎 30
③ 高麗後記의 高麗靑瓷와 佛敎 31
리 高麗時代 茶 文化의 大衆性 33
미 高麗靑瓷의 優秀性 33
삐 高麗人들의 茶文化에 대한 主體意識 34
씨 高麗時代 찻그릇의 分類 34
(4) 朝鮮時代의 찻그릇 36
? 朝鮮 初期 陶瓷器의 變遷 39
끼 朝鮮 中期의 陶瓷器 變遷 40
니 朝鮮 後記의 陶瓷器 變遷 41
3. 鉢盂와 茶具의 聯關性 42
Ⅳ. 佛敎의 茶禮 45
1. 다례의 발생 45
1) 다례의 근원 45
2) 勅修 百丈淸規의 다례를 인용한 보기 47
3) 梵音集의 茶禮 51
2. 茶禮의 內容 54
1) 忠談禪師의 行茶法 54
2) 寶川·孝明太子의 行茶法 56
3) 元曉聖師의 行茶法 57
4) 地藏法師의 行茶法 58
5) 眞鑑禪師의 行茶法 59
6) 秀澈和尙의 行茶法 59
Ⅴ. 스님들의 茶生活 61
1. 新羅時代 61
1) 元曉聖師 61
2) 忠談師 62
3) 月明師 64
4) 無染國師 65
5) 眞鑑國師 66
2. 高麗時代 67
1) 義天國師 67
2) 眞覺國師 68
3) 三藏 順菴 法師 70
4) 圓鑑國師 71
5) 景瑚禪師 73
6) 懶翁和尙 75
3. 朝鮮時代 76
1) 涵虛得通 76
2) 金時習 77
3) 普雨和尙 79
4) 西山大師 80
5) 浮休스님 83
6) 泗溟大師 84
7) 海印과 靜觀 85
8) 草衣禪師 86
(1) 誕生 86
(2) 出家修行 86
(3) 茶神傳∇茶頌 87
4. 近世 88
1) 應松 89
2) 曉堂 91
Ⅵ. 結 論 93
참고 문헌 96
Abstract 98
Ⅰ. 서론
1. 연구목적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하여 한반도에 전래되고 유지되는 것은 佛敎文化가 生活樣式의 근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불교문화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리와 수행과 관련한 生活樣式과 나아가 僧家와 在家가 생활양식으로 만들고 정착시킨 것이다. 佛敎文化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 전체 文化의 70%를 차지하는 폭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문화가 유지, 보존, 발전되는 것은 그 사회에 충분한 必要 要件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傳統文化는 外來文化의 범람과 산업화와 경제성장 속에서, 그 내용이 변질된 奇形의 문화와 外來種의 유입과 별의미없는 新種文化의 파생 등으로 심각한 傳統文化 斷絶現狀의 상황에 처해 있다.
傳統文化에는 우리 民族 先祖들의 생활의 지혜와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전통문화는 단순한 호기심과 일회성이 아닌 거듭된 실험과 적응을 거쳐서 삶의 모델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느 것보다 더 모범적 양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永劫에 길이 남을 재산이며 未來 韓國文化 發展의 원동력인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불교는 우리의 전통문화로 입증되듯이, 그간 불교를 수용했던 여러 국가들에서도 많은 應用 文化를 발전시켜 왔다. 그 중의 대표적인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茶文化이다.
過去와 現代를 통틀어 비중 있는 傳統文化는 ‘僧家의 茶文化’이다. 僧家의 茶文化는 각 시대에 걸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부처님 전에는 六法 供養物을 올린다. 그 중의 한 가지가 茶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諸般 儀式 중에는 各種 茶禮가 많이 행하여졌다. 특히 한국에서 僧家의 生活環境에 의해서 茶는 스님들에게 가까워졌고, 스님들이 직접 만든 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膳物되어져, 文人들이 쓴 茶詩 중에는 이를 노래한 것도 많이 있다.
茶란 이처럼 佛敎儀禮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의 기본적인 의식이 朝夕禮佛과 巳時 佛典供養이다. 특히 새벽예불에서 다기를 올리고 행하는 “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란 게송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茶를 올리는 것은 의식의 핵심이다. 차는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전시대를 통하여 승가의 일상생활에서 일반화되었다.
茶는 香과 花와 燈처럼 필수적인 공양물이 되었으며, 수행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如法한 威儀를 갖추는 데 활용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文化交流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茶의 歷史와 함께 鉢盂와 茶具의 관계도 닮은 점이 많은 듯하다. 다례의 儀式이 확립되고 茶具의 製作과 技法도 시대를 달리하고 있다. 역대별로 스님들의 차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本 硏究는 ‘僧家의 茶生活’을 고찰하여, 이로써 佛敎 茶文化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茶文化의 定立에 기여하고자 한다.
2. 연구방법
茶文化에 관한 文獻은 一然(고려 중기, 1206~1289)스님의 三國遺事와 더불어 金富軾(고려 인종, 1075~1151)의 三國史記 등이 있으며, 또한 초의선사의 茶神傳과 東茶頌, 草衣集 실록이나 문집 등에서도 茶 관련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또한 근래에는 茶香禪味, 陶瓷史에 관한 硏究 論文들이 많이 발표되어 있다. 특히 경제 개발 이후 웰빙과 힐링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 文化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茶文化에 대한 刊行本도 많이 출간되었다.
본론은 이상과 같은 문헌을 섭렵하면서 연구 목적에 일차적으로 부합한 문헌들을 참조 또는 인용하였다. 이것들 중 勅修百丈淸規에 관해서는 許正洙의 「勅修百丈淸規에 관한 硏究」, 高麗靑瓷의 찻그릇에 관해서는 尹龍二의 韓國陶瓷史硏究, 스님들의 茶詩에 관해서는 金雲鶴의 韓國의 茶文化, 釋性愚의 茶道, 李政의 韓國佛敎 人名辭典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상의 자료에 의존하여 본론에서는 먼저 “불교에서 茶가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背景”을 고찰한 후, 佛敎 茶文化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鉢盂와 茶具에 대한 比較를 진행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茶文化 발전의 주역을 담당하게 된 스님들의 行茶法을 중심으로 佛敎의 茶禮를 고찰한다. 끝으로 스님들의 茶生活을 신라시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소개한다.
Ⅱ. 佛敎에서 茶가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 背景
茶는 僧家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과거에 발전된 僧家의 茶생활은 현재에도 여러 곳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結制와 解制때 大衆들의 소임을 분담하는 榜에는 반드시 茶를 담당하는 茶角이라는 소임이 있다. 그리고 불교 의식집에는 의식을 행하는 처음이나 중간에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茶 偈頌이 반드시 있다. 또한 참선을 하는 스님들은 조주(趙州, 778∼897)스님의 喫茶去라는 禪問答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가 깊은 사찰의 주변에 많은 野生茶가 분포하고 있으며, 그것을 따서 茶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茶는 불교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1. 차를 사용한 起源과 意味
佛敎에서의 茶 生活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브라만들의 생활 속에서 싹이 텄었다. 석선혜스님의 자료 「차례와 점다법에 관하여」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대인도 리그 베다(Ṛig-Veda : BC 1500~1200년경)시대에서 차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리그 베다 시대에 베다교에서 여러 天神과 부처님(깨달은 聖者)께 올리는 음료수를 ‘알가’(argha=arghya: 阿伽, 謁伽)라고 한다. 알가는 ‘시작하는 根原’ 또는 ‘처음 근원(源初)’이라고 해석하며, ‘공덕을 짓는 물(功德水)’이라고도 한다.
브라만들은 알가를 ‘정기적으로 제물을 올리고 위대한 신의 축복을 비는 것’으로 해석했다.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 중에서도 더 큰 정성을 드려야 할 제물은 ‘알가(謁伽)’, 즉 ‘茶’ 였다. 바라문(brahman)들과 불교교단의 관점 차이로 ‘알가’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석선혜스님은 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불교 교단이 세워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일반 재가 불자들은 ‘알가(謁伽)’를 미묘한 근원(妙原)이라고 달리 해석했다. 미묘한 근원(微妙根源), 미묘를 산스크리트어로 살(Sal=薩)이라고 한다. 살(Sal)은 ‘생각할 수 없는 자리(不可思議)’, ‘비교할 수 없음(無比)‘을 뜻하고 있다. 곧 삶(生)과 죽음(死), 存在와 虛無의 상대성을 초월한 상태, 즉 無我의 경지를 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알가(謁伽)를 불교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해석하고 사용하였다. 이상세계의 실현은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衣, 食, 住가 如法하게 具足하여야 하는 것이다. 초의선사시고(艸衣禪師詩藁)에 ‘알가는 妙源이며, 묘원은 무착바라밀(無着波羅密)이다’라고 했다. 無着은 ‘집착하는 마음이 없음’이라는 말이며, 산스크리트어로 아상가(asaṅga)라고 한다. 아산가는 욕심이 없음(無慾心), 일체의 소유가 없는 행위(無所有)의 뜻으로도 해석된다. 波羅密은 산스크리트어로 파라미타(pāramitā)라고 하며 ‘저 언덕으로 건너가다(度彼岸)’의 뜻이다.
알가는 ‘욕심 없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일체 소유하지 않은 행위로 중생의 세계(此岸)에서, 저언덕(깨달은 성인의 세계)으로 건너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알가는 또한 禪宗의 이상적인 수행 指針인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의미와도 서로 통한다고 보여진다. 이것에 대하여 석선혜스님은 깨달은 마음(覺性), 진공묘유(眞空妙有), 공적영지(空寂靈知)한 참 마음으로 해석하였다.
알가수(閼伽水)는 보통의 물과 다르기 때문에 알가의 물이라 하며, 부처님이나 보살에게 공양하는 물로써 功德水라고도 한다. 이와 더불어 알가배(閼伽杯)는 알가수를 담아서 부처님에게 바치는 금속잔을 말한다.
부처님 在世時에 알가는 부처님과 聲聞의 聖者 緣覺 등 沙門들에게 供養하였다. 공양물은 아래와 같다.
당시의 공양물은 閼伽인 茶와 꽃과 香, 등불(燃燈)을 중심으로 하여 음식, 과일, 옷, 침구와 座具, 의약품 등 여러 가지 생필품을 供養하였다.
인도는 기후적으로 매우 덥기 때문에 갈증을 식혀줄 물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공양되었을 것이다. 아쇼카왕은 전인도를 통일하고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여러 가지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거리에 우물을 파서 人畜의 음료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茶祖라 할 수 있는 陸羽가 쓴 茶經에서도 飮茶의 源流를 알 수 있다. 육우는 古代에 쓰여진 神農氏의 食經에서 인용하여 밝히기를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솟고 마음이 즐거워 진다’고 하였다. 전한시대 촉나라의 문인인 왕포가 지은 동약(기원전 59년)에는 차생활의 일면을 밝히고 있는데 ‘차를 삶는다’, ‘차를 산다’는 말인 茶事가 보인다.
2. 불음주계(不飮酒戒)와 茶
계(戒)는 三學(戒·定·慧)의 하나이고, 六婆羅密의 하나이며, 三藏(經·律·論) 중 律藏에서 말하고 있는 불교도덕의 총칭이다. 戒의 原語는 梵語 śila(尸羅)의 譯語이며 禁止. 禁制의 뜻이다. 소극적인 의미는 잘못을 막고 악을 그치게 하는 것(防非止惡)이며, 적극적인 의미는 萬善發生의 근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리한 것 중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율은 부처님의 행(禪是佛心 敎是佛語 律是佛行)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지극히 평등하고 자비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부처님의 행위가 계율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며, 그 계율을 온전히 행할 때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戒律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부처님 최후의 당부’에서 알 수 있다.
후분열반경(後分涅般經)에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심을 슬퍼하여 쓰러져서 흐느끼고 있을 때 부루나 존자는 그를 달래며 아난이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 하는데 슬피 울고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을 여쭈어야 하지 않겠느냐?했습니다. 아난이 부처님에게 묻기를, 이제까지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부처님 열반에 드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단호히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爲戒而師)고 하셨다.
유교경(遺敎經)에는 더욱 간절한 말씀이 수록되어 있다.
너희 비구들이여, 내가 열반에 든 뒤 반드시 바라제 목차를 존중하고 보배로이 공경하되, 마치 어두운 곳에서 밝은 빛을 만난 것 같이 하고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만난 것 같이 할지니라. 마땅히 알라. 이것은 곧 너희들의 큰 스승이 될 것이니, 만약 내가 세상에 더 머물러 있다고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계율의 중요성은 불교교단의 僧家 생활에 ‘물(水)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不可分의 관계에 있다. 이제 在家戒와 出家戒를 중심으로 不飮酒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在家大衆인 우바새(優波塞)와 우바이(優波夷)는 五戒를 받아 지켜야 하는데, 五戒 안에 十善이 포함되어 있고 十善은 身·口·意 三業이 주재하게 된다. 신도 오계 중의 다섯 번째가 不飮酒戒다. 음주를 함으로 해서 貪欲과 嗔恚, 邪見이 생기므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팔관재계(八關齋戒)는 在家五戒를 受持하는 信者가 三長齋月(正月,5월,9월)과 六齋日(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에 非時食戒를 바탕으로 하고 八戒를 지녀 하룻밤 하루 낮만이라도 阿羅漢과 같이 번뇌가 없는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念佛, 參禪, 誦經, 呪力 등에 힘쓰고 또 三寶에게 공양하며 信心을 기르는 불교 의식이다.
이 팔관재계는 불교 신도로서 “술을 멀리하고 茶를 가까이 할”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팔관재회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성행했다. 南齊의 무제 영명 원년(483), 화림원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資治通鑑 권135). 한국에서는 신라 진흥왕 12년(551)에 처음 시작되었고, 572년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천도하기 위해서 7일간을 지냈으며, 중국의 계회로서 열렸던 팔관재회가 신라에서는 변하여 호국을 위한 국가적 규모의 행사가 된 것이다. 팔관재회가 열리게 된 근본적인 背景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팔관재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것은 미륵신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미륵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八戒齋를 수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미륵경전에 설하고 있기 때문에, 신라를 미륵이 하생하는 이상국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내용에 따라 호국의 영령들을 축복하는 법회가 열렸던 것이다.
고려 최초의 팔관회는 태조 원년(918)에 시행되었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행했던 팔관회는 전적으로 불교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불교를 모체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를 국교로 한 신라와 고려에서는 僧家뿐만 아니라 國民 전체적으로 茶생활이 유행하고 발전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沙彌와 沙彌尼 十戒에도 다섯 번째 항목에 不飮酒戒를 명시하고 있다.
식차마나는 學戒女, 또는 正學女 등으로 번역된다. 사미니가 나이 18살이 되면 다시 계를 배워 비구니의 자질을 갖춘다는 뜻에서 학계녀라고 한다. 이때 六法戒를 지켜야 하는데, 이 계의 여섯 번째 항목이 不飮酒戒다.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8계가 있다. 비구 250계는 九十바일제 五一번째 명목에 ‘술을 먹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비구니 348계율 178 바일제법 三六번째 명목에 ‘술 먹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在家大衆과 出家大衆이 함께 지켜야 할 계율이 있다. 재가대중(在家大衆.優婆塞·優婆夷)은 信徒五戒 등을 受持해야하고 출가대중(沙彌·沙彌尼 十戒, 式叉摩那 六法戒, 比丘 250戒, 比丘尼 348戒)은 일정의 계를 수지해야 한다. 재가대중과 출가대중은 共同으로 菩薩戒라는 10重大戒와 48輕戒를 수지해야 한다. 이들 계율에서 하나같이 ‘술 마시지 말라’는 계를 밝히고 있다. 범망경 「보살심지품」의 십중대계(十重大戒)에는, 다섯 번째에 ‘고주계(沽酒戒)’라는 명목으로 술을 팔지 말라 하였다. 지금까지의 계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였는데 본질적으로 ‘술을 팔지 말라’하였다.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술을 팔거나 남을 시켜서 술을 팔거나 술 파는 인과 술 파는 연과, 술 파는 법과, 술 파는 업을 짓지 말지며, 일체의 술을 팔지 말지니, 술은 죄를 일으키는 인연이 되느니라.
이처럼 飮酒로 인하여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지혜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술이니, 술은 禍根의 우물이다. 술을 마심에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지혜를 혼미하게 하고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게 하여 시비한다. 菩提의 싹을 태워서 正覺의 果를 무너뜨리니, 반드시 막고 끊어야 한다 하였다.
大薩遮尼乾子經 게송에,
술을 마시면 다분히 방탕하고 함부로 해서, 현세에서는 항상 어리석어 못나고, 일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항상 지혜 있는 이의 꾸지람을 들으며 ···.
라고 하여 술이 많은 허물을 일으킨다고 설명하며, 善惡所起經에는 36가지의 많은 허물을 말하고 있다. 48輕戒에는 두 번째 항목에 술을 마시지 말라는 不飮酒戒가 있다.
이와같이 小乘戒와 大乘戒, 그리고 出家戒와 在家戒를 막론하고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항목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불교가 茶 文化를 일으키고 발전시키는 충분한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보며, 또한 불교 文化에 있어서 茶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당연한 이유가 된다.
3. 茶의 效能에 의한 飮茶
스님들의 修行 生活에서 잠(수면시간 이외의 졸음)이 큰 방해가 된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 잠만 잔다면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初發心 自警文에서 사람들에게 깨우쳐 이르기를,
아득한 옛부터 道에 방해되는 일은 ‘졸음의 魔’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하루 열두 시간 중에 또렷하게 의심을 일으켜서 흐리지 말며, 앉거나 눕거나 서거나 다니거나 끊임없이 광명을 돌이켜 스스로 마음을 살피라. 일생을 헛되이 보내면 만겁을 두고 한이 될 것이다. 덧없는 세월이 刹那니 나날이 놀랍고 두려워 할 일이며 사람의 목숨은 잠깐이니 실로 때때로 보전할 수 없나니라. 만일 祖師의 關門을 터득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편하게 잠잘 수 있으랴.
라고 하여, 生死一大事의 절대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조금치라도 머뭇거릴 수 없으며, 더군다나 과도하게 수면을 취하는 것은 ‘살아 있으되 썩은 송장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 10大제자 중의 한분인 아니루타(Aniruddha,天眼第一)존자는 부처님 앞에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는 여러 날을 자지 않고 수도에만 정진하다가 눈이 멀었다. 그 뒤 天眼通을 얻어서 天眼第一이 되었다.
茶는 스님들의 수행에 많은 도움을 준다. 초의(艸衣)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茶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있고 정신이 맑으며, 술을 깨게 하고 잠을 적게 한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잠을 적게’한다 하며, 탕액본초(湯液本草)에 ‘茶는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어지러움과 잠이 많고 잘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本草飮食譜에서 ‘茶는 약간 쓰고, 달며, 심신을 청신하게 하고, 졸음을 깨게 하며 ···’라고 茶의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茶의 효능이 覺醒作用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로움이 많기 때문에 僧家에 茶가 많이 이용된 것이다.
開元中에 泰山 靈岩寺의 항마사(降魔師)는 禪과 敎를 대흥시켰는데 잠도 자지 않고 일하며 오후불식하며 차만 마셔 이로 인해 사람들이 도처에서 차를 끊여 마시게 되었다하였다.
사람들이 대부분 처음부터 차를 좋아 하지는 않지만 맛을 알게 되면 많이 마시게 되었다. 사찰 근처에서 차의 생산이 가능하고 역사가 오래된 차밭이 존재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4. 午後不食으로 인한 飮茶
부처님 在世時에 수행자들은 하루 한끼만 먹었다. 오후에는 茶 등 물 종류는 먹도록 허락했다. 사미, 사미니 十戒에는 여덟번째 항목에 때아닌 때 먹지마라(不非時食) 했고, 식차마나는 다섯 번째에 不非時食의 항목이 있다. 때 아닌 때라는 것은 정오를 지나면 스님들이 밥 먹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諸天은 공양을 새벽에 받으며, 축생은 오후에 먹음이요, 귀신은 밤에 먹음이라, 부처님은 정오 전에 먹는다. 스님들은 부처님을 배우기 때문에 부처님을 따라 먹는다. 舍利佛問經에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비시식자(非時食者)는 계를 파한 사람이요, 이는 도적의 죄를 범한 사람이라.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나의 법리(法理)를 훔치고, 이름을 훔치고, 밥을 훔치니, 죽어서 초장 지옥에 떨어지리라.
비시식계를 어긴 자를 계를 파한 사람, 도적이며, 제자가 아니라고 질책하였다. 食堂作法에는 밥을 먹는 이유에 대해서 “몸이 말라 병드는 것을 막고, 道業을 성취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 하였다. 밥은 맛을 탐해서 먹는 것이 아니며, 또한 힘을 키우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위해서 먹으므로 하루 한 끼로 만족한 것이며 그 이외에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毘羅三昧經에서는 때 아닌 때에 먹지 않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 하였다. 그 다섯 가지란 다음과 같다.
소음(小淫)이니, 모든 탐욕을 여윔이다. 소수(小睡)니, 능히 잠을 쫓음이요, 신안(身安)이니, 정신이 맑고 상쾌함이요, 무병(無病)이니, 복과 수명이 늘어감이요, 득일심(得一心)이니, 도업(道業)을 쉽게 판단함이라.
이와같이 여러 가지로 小食을 함이 좋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김운학스님은 韓國 禪茶의 硏究에서 喫茶養生記에서 발취한 차의 효능을 인용하면서 차의 三德이라하여 설명해 놓고 있다. 삼덕이란,
첫째, 坐禪시 除夜해도 잠이 오지 않고,
둘째, 滿腹時에는 消化가 잘 되어 神氣를 가볍게 하며,
셋째, 性慾을 억제하는 藥이다.
이것이 다시 十德으로 나누어 졌는데, 1. 諸神加護 2. 五臟調和 3. 睡眠消除 4. 煩惱自滅 5. 孝養父母 6. 息災安隱 7. 壽命長遠 8. 諸人愛敬 9. 天魔遠離 10. 臨終不亂이다.
僧家의 茶 생활이 발전하게 된 배경은 위에서 열거하고 고찰한 바와 같이 다양하다. 이와 같이 茶는 藥理的이며 精神的인 修行力을 갖고 있기 때문에 精神文化가 高調되어 온 佛敎의 時代에는 많이 보급되면서 우리의 생활문화를 形成해 왔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내적 요인이 茶文化를 발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茶 자체의 效用性과 特性上 僧家의 생활에 필요한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Ⅲ. 鉢盂와 茶具에 대한 比較
1. 발우의 기원과 그 의미
발우(鉢盂)는 부처님 在世時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중요한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즉 食器인 것이다. 식기란 과거나 현재나 중요하듯이 불교는 수행상 더욱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십송율(十誦律)|에 “발(鉢)은 항상 사문과 모든 부처님의 표식(標識)이다. 사당의 그릇이 아니니 잡스런 물건을 담지 않으며, 나쁜데 쓰거나 손을 씻지 아니하고 공경하기를 눈과 같이 한다”하였다. 발우가 단순한 그릇의 의미를 떠나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격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승지율(僧祇律)에 이르되 “여래께서 모든 비구로 하여금 발우로써 밥을 받아 먹게한 것은 외도와 다름이 있는 까닭이니, 외도는 봉엽을 손에 얹어 놓고 먹음이라, 이는 중의 모양이 아니요, 복전(福田)의 상(狀)이 아니라.” 하였다. 외도(外道)는 발우가 아닌 봉엽이란 나뭇잎을 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견율(善見律)에 이르기를 “삼승성인(三乘聖人)이 와발(瓦鉢)을 가져 걸식(乞食)하시고 생활하는 물건에는 남음이 없게 한다 하고 이로 인하여 사해(四海)를 집을 짓고 살며, 그런 까닭에 비구라.” 부른다.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수행자는 발우만을 소유하도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우는 부처님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며, 수행자는 그것을 가지고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중국 선종의 五祖인 홍인대사는 그의 법을 잇는 증표로 발우를 육조 혜능대사에게 전해준 일은 아주 유명하다.
사분율(四分律)에 의하면, 부처님이 소마국(蘇摩國)에서, 이 나라 가운데에 진흙이 부드럽고 윤이나고 도라면수(塗羅綿手)처럼 고운 흙을 보시고 이 진흙으로 스스로 발우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는 사람에게 주자, 그는 이것을 본으로 삼아 발우를 구우니 부처님이 보시고 가지셨다. 이것이 瓦鉢이 시작된 緣起이다.
鐵鉢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때인가 세존께서 모든 비구의 방사를 살피시다가, 어떤 늙은 비구가 팔을 괴고 누워서 즐겁지 아니함을 보았다, 여래께서 그것을 아시고 까닭을 물으셨다. 너는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노비구가 대답하되 세존이시여 내가 늙어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하여서 손이 떨려 발우를 떨어트려 깨져 잃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즐겁지 아니한 바이다.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지금부터 늙고 병든 비구는 철발우를 갖도록 하라.고 허락하셨다. 이중에 와발(瓦鉢)을 상발(上鉢)로 사용 하였다.
사분율(四分律)에 이르되 ‘木鉢의 사용은 외도의 法’이라 하였다. 石鉢이 여래의 法이라 하였으며 금·은·동·납과 그 나머지 가지가지 雜寶들의 발우는 속인의 法이므로 받지 말라 하였다. 만약 받으면 여법하게 다스린다 하였다. 善見律에는 三乘聖人이 모두 瓦鉢을 사용한다고 하셨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부터 소승불교 권역에서는 一鉢로 사용하였지만 大乘佛敎에서는 小乘佛敎와는 양식을 달리 하였다. 百丈懷海禪師는 어느정도 일상화 되어있던 승려의 노동을 명확히 받아들여 寺院經濟를 자급자족 하도록 하였다. 禪院淸規로 인한 대중들의 공동체 생활과 사원경제의 자급자족은 발우공양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게 했고 一鉢의 사용에서 四鉢의 사용이 불가피 하였을 것이며 또한 목발우를 사용하게 하였을 것이다. 현재 韓國 僧家에서는 나무로 된 발우, 즉 木鉢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一種食을 하는 東南亞 僧家에서는 흙으로 만든 발우 즉 瓦鉢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우의 기원과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흙으로 빚은 瓦鉢만이 僧家 발우의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발우와 찻그릇의 연관성을 서로 비교하여 고찰할 것이다.
2. 茶具의 起源과 展開過程
1) 茶具의 起源
茶具의 起源은 차 마시기의 起源과 不可分의 관계에 있다. 초기불교 시대에 부처님 전에 올리는 알가수(閼伽水)가 있었고 이것을 담는 알가배(閼伽杯)가 있었다.
고구려 시대 무용총의 행다(行茶)벽화에는 귀족이 자기 집으로 고승을 초청해서 법문을 듣고 차와 음식을 대접하는데, 신도가 스님에게 차와 음식을 대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등장하는 찻잔은 土器로 추정되며 각각의 사람 앞에 큰 잔 두 개와 작은 잔 세 개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높이의 상위에 차려져 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차나무 재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백제는 차 산업 및 문화가 가장 발달된 나라였다. 그러나 백제의 차에 대한 문헌과 기록이 말살되어 있다. 백제 무녕왕릉에서 찻잔이 여러개 발굴되었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도 찻잔이 출토되어 차 생활을 짐작 할 수 있다.
三國遺事 권2에서 충담사(忠談師)는 경덕왕(景德王, 742∼765) 24년(765) 삼월 삼짇날에 경주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 때 유행하던 헌다의식의 일종인것이다. 승려가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헌다의식은 충담사에 대한 기록이 효시이다. 경덕왕은 같은 날 반월성 歸正門 루(樓)에서 충담스님과 차를 마시게 되는데, 이때 충담스님은 앵통(櫻筒)에서 찻그릇을 내놓는다. 茶道의 저자인 성우스님은 앵통(櫻筒, 혹은 삼태기)은 발우를 넣는 도구라 하며, 여기에서 꺼낸 茶具인 구(甌)는 스님들의 鉢盂로 간주된다. 큰 발우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며, 작은 발우에는 茶器로써 茶를 올리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석용운스님의 韓國茶藝에서는 찻잔을 토기(土器)로 밝히고 있다.
鉢盂에 차가 담겨 마셔진 것은 중국 서진의 제2대 황제인 “혜제가 몽진하고 낙양에 돌아왔을 때 황문(스님)이 질바리(흙으로 구은 발우)에 차를 담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육우의 다경에는 찻그릇에 대하여 완(盌)이라는 명칭으로 모양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일본의 天目다완은 중국 절강성 천목산 스님들이 쓰던 밥그릇이나 혹은 茶器(부처님 전에 올리는 찻그릇)가 원형이다. 일본의 이도차완(井戶)은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쓰던 막사발(밥그릇)이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것이 이도차완 최고의 자랑거리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부터 차가 있었고 그것에 맞추어 차 마시는 그릇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茶道초기의 찻그릇은 일정한 모양 없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영선은 韓國 茶文化에서,
물을 마시는 그릇의 원시적인 것이 바가지이며 가벼워 지니고 다니기에 편하고 쉽게 구할 수 있으므로 신라와 고대국가에서는 서민층이나 야외용 찻그릇으로 나무로 된 찻그릇을 흔히 썼을 것이다. 경남 의창군 다호리 고분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의 칠기(漆器)류는 매우 정교하고 완벽하여 당시의 발달된 칠기술을 알 수 있다.
라 하였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양을 갖춘 찻그릇은 茶 文化가 발전하면서 생겨났을 것이다. 차(茶) 그릇은 차 마시기의 시작과 더불어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다음에서는 각 시대의 발전되고 변천된 찻그릇의 모양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찻그릇의 展開過程
茶 生活의 기원에 대하여 다양한 설이있다. 飮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茶를 담아 마시는 그릇이다. 茶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해온 석성우스님은 그의 저서 茶道에서, “오늘날 차 생활이 발우공양에 근원을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문화라면 독자적으로 발생하기보다는 相依相關에 의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으뜸되는 것을 發展과 變化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주장은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1) 三國時代
삼국시대부터 이미 茶는 사용되었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는 錢茶가 발견되었으며,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긴메이 천황(欽明天皇(在位 539~571) 13년에 백제의 聖王(在位 523~533)이 담혜(曇惠)화상 등 16명의 스님에게 불구(佛具)와 茶, 香 등 육법공양물(六法供養物)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三國史記 興德王(新羅本紀 第10)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唐에서 돌아오는 사신, 大廉이 茶의 종자를 가지고 오니 王이 (그것을) 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茶는 善德王(제27대왕)때 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
이 기록으로 보면, 선덕여왕(서기 632~647년)때부터 신라에는 茶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 일찍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의 茶 역사는 신라보다 빠를 것이라 추정된다. 伽倻의 茶에 관하여서는 三國遺事 「駕洛國記」에 그 일부가 전한다. 신라 제31대 법민왕(法敏王=문무왕)은 용삭(龍朔)원년 신유(661) 3월 어느 날에 조서를 내려서 가야 왕들의 제례(祭禮)를 신라의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수로왕은 문무왕의 외가 15대 시조이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賡世級干)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그 제전(祭典)을 주관하여 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과 차와 과자 따위 많은 제물(祭物)로써 매년 제사를 지냈으며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제일(祭日)도 거등왕이 정했던 연중 다섯 날을 바꾸지 않았다.
祭典에 茶를 사용하였는데 어떤 용기로써 차를 올렸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백제의 고분군에서는 다관과 찻종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茶 生活이 일찍이 있었음이 밝혀졌듯이 고대에도 茶 文化는 그 기본이 형성되어 있었고, 茶가 상당히 중요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의 사용은 儀式用과 一般用으로써 이루어져 있다. 고대의 의식용 및 그에 준하는 용도로 쓰였던 그릇은 현재에도 그 모양이 같거나 비슷하다. 寺刹의 법당에서 쓰는 甘露水를 올리는 茶器나 일반 가정집에서 祭祀를 모실 때 쓰는 잔과 잔대가 그러하다. 3천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토기의 잔과 잔대는 의식용 茶具의 원형과 같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飮茶用 찻그릇으로는 1975년부터 경주 안압지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찻그릇을 꼽을 수 있겠다. 넓은 대접과 같은 모양이며 그릇의 벽 바깥 면에 ‘言貞榮’이라는 글 구가 쓰여 있으며, 그리고 한 포기의 꽃나무와 구름이 그려져 있다. ‘貞’과 ‘榮’자 사이에는 작게 ‘茶’라는 글 구가 쓰여 져 있다. 석용운스님은 ‘신라때는 떡차를 맷돌에 갈아서 그 가루차를 돌솥의 끊는 물속에 넣고 다시 끓여서 표주박으로 떠내 다완이나 찻잔에 따라서 마시는 팽다법(烹茶法)이 유행하였다’ 하였으므로 팽다법에 의한 음다용 찻잔으로 쓰였을 것이다. 이 찻그릇의 제조연대는 육우는 茶經에서 ‘당나라 위포가 지은 開元文字音義에서 차(茶)자가 735년에 반포 되었다,고 한 자료를 참고할 때 제작연대는 735년 이후가 될 것이다. 全完吉선생은 ‘貞言茶’라는 명문이 뚜렷한 이 찻잔을 700〜800년대 당시 신라의 상류층에서 사용한 찻잔인 동시에, 상하 계층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한 찻잔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三國時代의 茶生活은 수로왕의 재례나 백제의 고분벽화 충담사의 헌차에서 보듯이 차생활에 대한 다양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팽다법에 의한 음다(飮茶)나 토기잔 등을 살펴보면 차생활이 중시되었으며 기물들도 투박하나마 차생활의 틀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2) 新羅時代의 찻그릇
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茶가 “제27대 선덕여왕 즉위(634 갑오년) 때부터 있었으며, 제42대 흥덕왕 즉위(826 병오)년)때에 성하였다”는 것이다. 성우스님은 茶道에서 신라시대 찻그릇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당(唐)나라로 부터 抹茶(떡차)가 수입 되었다. 신라나 고구려, 백제에서는 부득이 토기(土器)가 아니면 목기(木器)를 이용한 것 같다.(이 당시 중국에서는 나무 바릿대(木鉢)을 많이 사용하였던 시대이다.
이와 같이 토기는 의례에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며, 목기는 스님들이 바릿때를 찻그릇으로 많이 이용하였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여러 사찰에서는 찻그릇과 관계되는 많은 石彫가 보여지고 있다. 화엄(華嚴) 도량인 지리산 華嚴寺(진흥왕5년 544년 창건)에 국보 35호로 지정된 四獅子 三層石塔의 釋尊舍利塔이 있는데, 이 사리탑 앞에 석물로 만든 작은 석조지붕속에 연기조사가 우슬착지한 상태로 왼손에 찻잔을 받들고 사리탑을 향하여 있다. 이것은 연기조사 沒後 약 100년 뒤에 慈藏律師가 만든 것인데, 연기조사가 인도에 있는 그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신라시대 최고의 찻그릇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경주 石窟庵(創建, 경덕왕10년)에는 본존불이 모셔져 있고 우측벽의 두 번째에 문수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오른손에 찻잔을 들고 있다. 文殊菩薩은 智慧를 제일로 상징하는 보살이다.
鄕歌作家 충담사는 삼짇날(3월3일)과 重九날(9월9일)마다 경주 南山의 三花領 미륵세존께 茶를 供養올리고 오다가 景德王(764)왕을 만나 茶를 대접하고 <安民歌>를 지어준 일이 있고, 月明師는 경덕왕의 청에 의하여 <도솔가>를 불러 日怪를 없애고 수정염주와 品茶 一襲을 하사받은 일이 있다.
이 일화를 통하여 764년 이전에 신라사회에서 부처님에게 헌차(獻茶)한 사실이 확인된다. 또 차를 내는 다구를 앵통에 담고 다닌 점으로 보아 차생활이 일상화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구의 구비는 이미 그 이전부터 갖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品茶一襲’은 다른 해석이 있긴 하지만 ‘좋은 차와 다구 한 벌’을 말한다. 왕이 차와 다구를 스님에게 선물한 것은 차생활이 활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와 불교에 비추어 보아도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경덕왕과 충담, 월명사와의 일화로 볼 때 신라시대에 다구가 갖추어져 사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경덕왕과 충담의 일화는 찻잔이 구(甌)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데, 구는 작은 분(盆), 즉 바리 모양이다. 구는 공(球)을 반 자른 모양일 것이다.
신라시대는 토기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왕족을 비롯한 귀족층과 일부 고승(高僧), 화랑(花郞) 등은 특별히 귀중한 금·은·금동(金銅)·유리 및 옥잔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대형 고분에서 왕족과 귀족의 능이라고 추측되는 곳에서 이러한 잔이 적잖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잔의 형태는 (甌)이다. 대부분 공의 반쪽 모양이다.
신라시대에 사용된 茶具 중에서 재질이 다른 잔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南行月日記에 따르면, 이규보는 원효(元曉, 617〜6890)가 살던 원효방(元曉房)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이규보는 다자(茶瓷)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즉 일반적으로 사용된 토기만이 아니고 자기그릇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瓷는 넓은 의미로 토기, 도기, 자기 따위의 질그릇 전체를 가리키지만, 일반적으로는 자기만을 지칭한다.
토기와 더불어 금, 은, 유리, 동잔이 사용되고 자기잔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은 차맛을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준거이기도 하다.
경남 합천 淸凉寺의 통일신라시대 석조 약사여래 좌상(국보 제409호)은 부처님 좌대의 각 면에 두 명의 보살상이 조각되었는데 각 면의 한 보살상 손에는 잔이 들려있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모습을하고 있다. 이 보살들은 편안한 자세로 잔 굽을 잡고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다.
속리산 法住寺 경내에는 신라중기에 조성된 머리 위에 판석을 대고 그 위에 커다란 돌 찻잔을 얹은 모습의 喜見보살 像이 있다. 네 개의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고 버틴 굽이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등장하는 희견 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희견 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한편으로는 머리에 이고있는 것이 향로라고도 하며 미륵신앙과 관련하여 가섭이 발우와 가사를 이고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신라와 고대국가의 서민층에서는 야외용 찻그릇으로 나무로 된 찻잔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런데 전하여지지 않는 이유는 깨지거나 썩기 쉽기 때문에 웬만하여서는 보존하여지기 어려웠다고 보고 있다.
신라시대의 찻잔은 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이며, 寺刹의 茶器(佛器)는 茶具의 원형이 되었으며, 반대로 寺刹의 불전 헌다용 茶器는 茶具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에의해 신라인들이 석상 조각들을 통해서보듯이 신앙적으로 차공양을 올리는 양식을 많이 남기고 있으며 토기와 보석류의 잔과 자기 등 다양한 재질로 여러 형태의 잔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다. 잔의 형태가 다양한 것도 신라인이 음용(飮用)한 차의 종류가 다양하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3) 高麗時代의 찻그릇
? 고려 왕조의 특징
태조 왕건(877∼943)은 후삼국을 통일하였으며 불교와 매우 인연이 깊었으며 불사를 많이 일으킨 고려 개국 왕이다. 그는 開城에서 대대로 佛敎를 신봉하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을 전후해서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는 고승이었던 道詵(809∼898)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訓要十條에서 첫 번째로 밝히기를 국가를 건국한 일이 부처님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은 것이니 불교에 신경 써라는 것이다. 여섯 번째 항목에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소홀히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태조의 불교에 대한 태도와 신념이 결국은 고려 전체의 佛敎文化를 왕성하게 하고 또 國家佛敎的인 성격을 결정지었던 것이다.
팔관회, 연등회에서 차는 부처님과 토지신에 올려졌고 조정의 의례때나 국제간의 행사때나 왕의 하사품으로 茶가 쓰였다. 국가적인 예식에서 왕은 맨 먼저 차를 마신 후 술을 마셨고 이어서 왕과 신하들이 다같이 다식을 먹고 차를 마셨다.
고려시대의 연등회라든가 팔관회, 공덕 재(齊) 같은 의식에는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茶가 함께 하였다. 여복지(輿服志) <의위(儀衛)>조의 연등위장(燃燈衛仗), 팔관위장(八關衛杖) 안에는 “행로(行爐), 다담(茶擔), 각 일군사(一軍士) 네 사람”이라는 내용의 차를 다루는 사람을 따로이 두었고, 성대한 행열 사이에 다구(茶具)가 식장에 운반되고, 또 의식 때에는 신하들이 하례를 받들고, 태자(太子) 이하 여러 신하에게 차를 내리는 의식이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고려의 귀족정치는 12세기 전반의 예종, 인종 연간에 이르러 완성되고 문화는 황금기를 맞는다. 또한 이를 통하여 당시의 차생활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끼 고려 청자의 흐름
석성우스님은 茶道에서 고려시대의 도자기 발전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土器의 수준에 머물렀던 삼국시대 茶의 전래는 더불어 요업(窯業) 발전에 영향을 주면서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왕조 시대의 백자로 이어지는데 청백자의 출현이 당시의 飮茶風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
청자와 백자의 출현은 반드시 茶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韓國의 茶具에 대한 考察에서 고려시대는 3개의 茶磨의 예가 抹茶製造에 사용되는 用具인 점으로 미루어 또한 茶具가 조사된것 중에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말차용구의 제작이 많았을것이며 당시 유행하는 抹茶性品에 맞는 靑磁를 위주로 한 色磁의 茶具의 製作使用이 活發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淺川伯敎氏의 「朝鮮의 古陶磁器의 硏究에 대하여」라는 論文에서 고려 중기(숙종∼고종 : 1096년∼1259년)의 한국다완은 支那北宋의 影響을 받아 “口緣部는 內反하여 鉢形의 靑磁로써 高坮가 낮고 全南 康津郡 대구면에서 燔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 중기 도자기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고려시대 다완과 관련하여 석용운스님은 고려시대의 茶法에 대하여, ‘요즘 유행하는 말차법은 고려 중기 이후에 유행하기 시작하여서 임진왜란 때까지 지속된 行茶法’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는 떡차시대에서 말차시대로 변화하는 시기로서 茶椀은 청자나 天目을 사용하다가 분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다음은 청자의 發展과 變遷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고려때는 귀족 세력이 된 선승들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머문 곳이 주로 양자강 이남인 抗州지역이다. 이곳에는 文宗이 중건한 高麗寺가 있었다(대각국사가 머물던 곳으로 南宋의 도읍지 이기도하다). 고려의 선승들이 항주의 고려사에 가서 머물면서 그곳에서 말차를 마시고 또 멀지않은 곳에 월주요(越州窯)가 있는데 이곳에서 구운 청자다완(해무리굽)이 고스란히 전라남도 康津땅에 전해져서 똑같은 해무리굽 청자다완들이 사원용으로 대량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말차시대가 열리고, 대량의 다완이 사원과 왕실에서 사용되었으며, 그 후 청자 시대가 끝이 나고, 고려말기에 분청시대가 개막된다. 분청다완은 계룡산 갑사와 동학사 스님들이 주로 생산하였는데, 無와 空의 정신을 불어 넣어 禪적 요소가 풍부하다. 中國 월주요에서 나온 해무리굽 茶椀은 순청자 시대의 작품으로, 이것은 중국적 요소가 풍부하지만, 상감청자시대(12세기 이후)에는 한국적 요소가 풍부해지기 시작하여 드디어 청자문화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후 다시 상감청자 시대가 저물고 분청사기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한국적 이미지를 개척한 사람들이 고려의 禪僧 세력이다. 이때 僧侶들은 귀족계급에서 밀려나 차차 몰락해 가는 寺院經濟와 精神文化의 계승이라는 큰 명제 아래 분청다완의 제작에 헌신하게 된다. 이때 다완을 만들던 스님들은 三百餘年동안 꾸준히 분청시대를 주도해 가는데 계룡산에서 출발하여 錦江을 타고 내려가 황해를 끼고 돌아 전남 무안의 몽탄(영산강 하구)지역까지 내려가서 끝을 맺게 된다. 분청시대는 역사적 수난기에서 태어나서 청자가 백자로 바뀌는 틈 바구니에서 환한 빛을 발하다 사라진다. 이와같은 시대에 꽃핀 청화백자도 마찬가지지만 분청은 서민층으로 흘러 내리고 청화백자는 관인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분청은 禪僧이나 風流人의 사랑을 받는가 하면, 청화백자는 사대부의 사치품이 되었다.
이것으로 봤을때 고려시대 茶椀의 발달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순청자 시대로서 中國 월주요에서 만들어진 청자(해무리굽)다완이 고스란히 전남 康津땅에서 寺院用으로 대량으로 만들어 졌으며. 둘째, 상감청자 시대의 작품으로 寺院과 王室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중국풍이 없어지고 한국적 요소가 풍부한 작품이다. 셋째, 禪僧이나 風流人의 사랑을 받는 분청사기 시대로서 계룡산 갑사와 동학사 스님들이 주로 생산하였다. 이들은 고려의 禪僧세력이다. 충청도 계룡산에서 출발하여 전남 무안의 몽탄 지역까지 내려가서 끝을 맺는다. 鄭英善은 고려 茶具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려 다구의 특징으로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 연등회, 공덕재, 기우제 및 왕과 신하의 회의, 연회, 사신맞이, 책봉의식을 포함한 왕실의 행사 등의 중대한 국가 행사때에 의례로서 茶를 올리거나 마시었으므로 그에 따르는 제반 다구는 어떤 그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다구는 최고의 품질과 멋을 지녔고 귀족적이며 몹시 아름다웠다. 중국의 모방도 없지 않았으나 다구의 생김새와 만드는 기법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니 고려청자의 성립시기
고려청자의 성립에 관한 많은 주장이 있는데 윤용이 선생은 차의 세계에서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청자가 시작된 것은 통일 신라 시대로부터 보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토기들이 유행하였다. 청자는 차를 마시기 유용하고 특히 色의 면에서 그렇다.
음다의 영향으로 초기 청자 제작이 10세기 중반에 시작된 것이며 많이 생산된 자기는 주로 차를 마시는 완이다. 강진을 중심으로 가마를 만들고 도자기들이 제작되었으며 11세기에 고려청자의 맑은 비취색을 띠게 되었다.
띠 高麗靑瓷와 佛敎
고려청자는 고려시대 문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귀족문화와 佛敎文化 소산물의 하나이다. 특히 고려시대 불교가 靑瓷의 釉色·器形·문양 등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는데 현존하는 청자의 기형·문양 등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불교적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① 高麗初期의 高麗靑瓷와 佛敎
고려 초기는 고려가 성립된 918년부터 약 1100년경까지인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용되던 陶器와 綠釉陶器의 제작과 함께 고려청자를 비롯한 白瓷·黑瓷의 제작도 시작되고, 점차 기술의 숙련이 이루어지던 성립기였다.
太祖(918〜944) 왕건을 중심으로 한 이들 새로운 지배세력은 중국에 다녀 온 渡唐留學生·禪僧들과 서해안을 통해 중국문물에 익숙해 있는 豪族들로 唐·五代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10세기 전반의 혼란을 통일로 이끌었다.
高麗靑瓷의 제작은 10세기 후반부터로 보고 있으며, 고려의 새로운 지배세력은 중국문물에 익숙해 있으며 禪僧들 역시 중국문물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의 유적인 경주 皇龍寺址·雁鴨池유적, 益山 彌勒寺址에서 출토된 越州窯山 靑瓷盌, 邢州窯産 白瓷盌, 長沙窯産 황유호(黃釉壺) 등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10세기 후반 고려의 신지배층은 점차 확대되고 개경에 왕궁·관청·사원·저택 등을 세우며 새로운 문물로 치장하게 된다. 禪宗의 넓은 전파와 좌선에 필요한 다기를 중국 五代에서 수입한 陶瓷로 충족했다. 자기공급의 부족 등으로 때마침 秘色靑瓷의 제작으로 유명한 吳越국과의 교류로 동남지방의 오월국으로부터 중국자기장인들이 도래하게 되었다. 이들로부터 배운 고려도기장인들에 의해 고려청자의 제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원종대사(元宗大師)가 950년 국사가 되어 958년에 입멸한 <惠眞塔碑>에서 광종(950〜958년경)이 국사에게 내린 ‘金釦瓷鉢’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950년대에 중국 월주요산 청자발이 고려에 수입되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金石文資料이다.
경기도 용인군 西里窯址의 퇴적층 層位조사에서 가장 오랜 청자 제작층(先했무리굽층. 최하층)이 발견되었는데, 內底에 圓刻이 없는 鉢·盌片 등이 출토되었다.
11세기 전반경에 이르면 청자를 비롯한 白瓷·黑瓷가 함께 제작되었다, 이때의 대표적인 도자는 햇무리굽 盌들로 禪宗의 전파에 따른 茶盌의 제작이란 점에서 불교적 영향을 알아볼 수 있다. 11세기 후반은 고려에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가 확립되는 시기이다. 北宋과의 문물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대각국사 의천 등에 의한 불교의 발전과 국가기반의 안정속에서 고려도자의 발전에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康津과 扶安窯産의 良質靑瓷와 南海·仁川窯産의 粗質靑瓷들이 함께 만들어져 공존하고 있었고, 중앙의 왕실귀족의 요구에 따라 제작된 것이 良質靑瓷였다면, 지방의 土豪·寺刹등의 요구에 따라 제작된 것이 租質청자였음이 완도해저 출토의 도자들의 향로·용도·제작지 등을 분석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의 하나였다.
② 高麗中期의 高麗靑瓷와 佛敎
고려 중기는 1100〜1250년경까지의 약 150년간이다. 高麗靑瓷를 비롯하여 白瓷·黑瓷《器 등의 제작이 활발해지고 기술이 원숙해지는 고려도자의 전성기로서 翡色靑瓷·純靑瓷·象嵌靑瓷·鐵畵靑瓷 등의 다양한 기형·문양·釉色의 도자들이 제작된 시기였다.
器形과 문양에서 佛敎的 영향이 깊었음은 供花用의 花甁, 供茶의 茶盌·注子, 供香의 각종 향로·향완·정병의 발전과 연화문·연화절기문·연화당초문·蓮瓣紋 등이 다양하게 시문된 도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세기 전반의 睿宗·仁宗 연간은 고려귀족 정치의 완성과 몰락에 따른 고려문화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의 청자기형과 문양에 보이는 화병·정병·다완·주전자·향완과 음·양각의 蓮瓣紋 등이 계속나타나고 있어 그 전시기와 같이 불교적인 영향이 지속되며, 釉色에서 비색청자의 제작과 기형의 정제된 모습이 이 시기 청자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12세기 후반의 睿宗·明宗 연간은 1170년에 일어난 武臣의 난으로 문신귀족 중심에서 무신귀족 중심으로 바뀌면서 고려사회 전체에 동요를 가져온다.
12세기 후반은 象嵌靑瓷외에도 음·양각의 純靑瓷가 계속 만들어졌고, 13세기에 들어서야 상감청자가 순청자보다 더 많이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12세기 청자의 기형 중에 供香에 쓰일 각종 象形의 향로 제작, 瓜形花甁·茶盌·주전자의 다양한 모습, 蓮花紋·蓮唐草紋 등의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보아, 고려청자에 불교적인 영향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13세기 전반은 熙宗·高宗 연간으로 南宋과의 국교단절로 인해 문화의 자극이 없어지고 그로 인해 고려청자 특유의 기형과 문양이 발전되는 양상을 보여주었으며, 12세기 후반에 이은 상감청자의 발전은 이러한 외부의 문화적인 자극이 없고 따라서 고려자체 내의 요청에 따른 발전의 양상으로 풀이되는 高麗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③ 高麗後期의 高麗靑瓷와 佛敎
高麗 후기는 1250〜1392년까지의 142년간이다. 고려의 정치·사회의 혼란, 원의 간섭,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도자의 쇠퇴의 모습이 기형·문양·유색에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 시기의 高麗佛畵·寫經 등에 보이는 장식화의 경향이 靑瓷에도 반영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13세기 후반의 元宗·忠烈王 시기는 100여년 간의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元과의 화의가 성립된다. 1257년경의 靑瓷注子는 瓢形의 몸체에 외면은 연꽃잎을 重辦으로 양각하고 童子와 연줄기를 중간에 부착시켰으며, 연꽃잎의 붉은 銅彩를 設彩한 주전자이다.
13세기 운학문은 靑瓷의 기면위에 구름과 학을 나타낸 것으로, 청자의 기면을 무한한 하늘로 생각하고, 그 공간 위에 길게 꼬리를 뻗어 여운을 남기면서 떠 있는 구름 사이사이로 하늘을 날고 있는 학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고려인들이 희구해 마지않던 세계로서 무한한 창공 너머의 세계, 즉 내세를 동경해마지 않았던 표현으로, 잠시 한순간이 현세보다는 영원한 시간속의 내세에 마음을 두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불교적 세계의 동경의 표현이었다. 蒲柳水禽紋도 작은 연못 주위에 수양버들이 늘어지고, 그 연못 위로 오리가 한가로이 떠 있으며, 하늘에는 기러기가 날고 있는 문양으로 고려인들이 추구해 마지않던 고요함·정적의 세계였으며, 野菊紋과 마찬가지로 청자의 성격인 것이다. 이는 禪宗이 더욱 고려인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면서 禪을 통하여 부처님의 세계를 보려하고 내세에는 그곳에 태어나기를 희구한 마음의 발로로서 그들이 아끼던 象嵌靑瓷의 主紋樣으로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象嵌靑瓷의 문양은 佛器로 사용되었을 수많은 향로·꽃병·주전자·탁잔·매병 등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 조계종이 발달하는 13세기 고려사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전반은 元에 세력의 배경을 둔 權門勢族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기이다. 원으로부터 성리학이 수용되고 새로운 불교(라마교)가 받아들여졌다. 귀족불교로서 이 시기에 유행했던 뛰어난 高麗佛畵의 제작과 高麗寫經의 제작으로 오늘날 일본과 국내에 많이 남아 있다.
14세기 후반은 恭愍王·禑王의 연간으로 新興士大夫 층이 등장하여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地方鄕吏 출신이 많았다. 고려시대 청자제작의 중심지였던 康津·扶安의 가마들이 파괴되고, 생활용의 실용적인 도자를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려말의 새로운 지배세력의 견해에 따라 전국 내륙지방 곳곳에 가마가 설치되는 전환의 모습을 보였다.
리 고려시대 茶文化의 大衆性
고려대에는 왕실과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부처님전에 공덕재(功德齋)를 올렸는데, 임금이 직접 맷돌에 차를 갈아 올렸다. 茶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고 쓰였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에 서 밝히기를, 목종(穆宗) 5년(1002) 7월에 임금은 서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지시한 기록이 있다.
茶酒와 食味 등의 諸店鋪에서는 교역(交易)에 전과 같이 전폐(錢幣)를 사용하는 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서로 교역함에는 임의로 토산물(土産物)을 쓰도록 하라.
왕의 이러한 지시는, 물물교역을 함으로 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므로 茶의 사용과 생활이 원활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王室과 貴族, 寺院을 중심으로 茶文化가 발달을 했지만 일반인들도 茶를 즐겼다. 茶店은 오늘의 찻집으로 서민들이 누구나 드나들며 茶를 즐겨 사마셨다. 이처럼 전국민적으로 茶를 즐겼으므로, 아울러 찻그릇을 만드는 기술이 고려의 다양한 도자기 발달에 촉매 역할을 하였다.
미 고려 청자의 우수성
청자에 관해서는 송나라의 유명한 태평(太平)노인도 당시의 宋 청자를 제쳐두고 고려청자의 신비스런 색(秘色)은 天下 제일이라고 했다. 일본의 어떤 학자는 고려 도기를 극찬하였다.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생산된 청자의 아름다움과 특색에 대해 鄭良謨는 아래와 같이 밝혔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翡色), 彫刻刀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詩的인 운치가 있는 象嵌文樣, 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한두 점 액센트로 강한색〔辰砂發色〕을 쓰는 이외에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여기서는 고려 靑磁의 아름다움의 특색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삐 고려인들의 茶文化에 대한 主體意識
고려인들은 茶文化에 대한 주체의식이 강하였다. 그 예로 ‘盌’이나 ‘碗’이 아닌 ‘椀’으로 표기하였다. 또한 앞에서 서긍이 언급했던 ‘잔(盞: 찻잔)’도 전혀 쓰지 않았으나, 술잔은 ‘酒盞’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술그릇과 찻그릇을 엄격히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 「禮志」의 기록으로 보아 연등회와 팔관회는 국가적인 행사로, 여기서는 큰 규모와 차를 준비하고 올렸는데, 이 행사에서의 차 예식은 궁중다례의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高麗史 권 제7, 세가 제7, 문종의 기록을 보면 茶房 관료의 소임이 중요하여 잘 수행하므로 더 복무할 것을 임금이 명한 내용이 있다. 다방과 같은 茶文化는 다담(茶擔)과 행로(行爐)를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茶軍士’라는 직책도 두게되었다.
씨 고려시대 찻그릇의 분류
고려의 찻그릇은 의식용 및 귀족용 찻그릇과 일반적으로 쓰던 찻그릇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가장 많이 쓰인 찻그릇은 정영선의 조사에 의하면 甌와 椀이다. 고려때의 차와 관련된 시와 문장 170여 편 중 ‘甌’라고 쓰여진 것이 19회이며, ‘椀’이라고 쓰여진 것은 14회이다. 차구에는 茶乳를 마셨고 차완에는 차탕을 마셨다. 李衍宗의 박치암이 햇차를 준 것에 대한 사례의 글에는 ‘甌 와 椀’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 후기에는 혼동하여 쓰인 경우도 있었으며 의례가 아닌 일상생활에서는 구별 없이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全完吉 선생은 완(椀)은 완(盌)과 동의어로서 사발, 주발 따위를 가리키는 오목한 사발형 그릇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구(甌)․완(椀)․완(盌)은 모두 오목한 사발형인데 잎차잔으로 설명하고 있다. 완(碗)의 자의(字義)는 완(椀)․완(盌)과 같으므로, 결국 구(甌)․완(盌)․완(椀)․완(碗)은 거의 유사한 크기였거나 잔 크기에 따라 다른 차를 음용한게 아니라 혼용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檜岩寺의 銘文 靑銅茶器는 회암사의 오백 나한께 차를 올렸던 고려시대의 청동다기이다. 잔 밑 부분에 “회암오백성전(檜岩五百聖殿) 다기양오십(茶器羕五十)”이라 쓰여 있다. 茶器는 寺院에서 巳時에 부처님께 공양 올릴때나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때 茶를 올리는 그릇이다. 儀式集에는 淸淨水로써 甘露茶를 만들어 올린다고 되어있다. 다기의 재질은 금, 은, 청동, 자기 등 다양하다.
고려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으로서 광범위한 불교 행사는 불교문화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茶文化는 빼놓을 수 없는 僧家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茶文化의 발달에 의한 찻그릇의 생산은 도자기 생산의 밑거름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12세기 상감청자시대 부터는 한국적 요소가 풍부해지고 고려말의 분청사기 시대에는 고려의 禪僧들에 의해서 새로운 한국적 이미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일련의 발전 과정에서 찻그릇은 독특한 특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4) 朝鮮時代의 찻그릇
조선시대는 국가를 장악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고려시대와는 모든 체제를 달리하려는 일부 왕들의 정치형태가 있었다. 세조와 명종때에 문정왕후에 의해서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정책이 있었다. 그러나 태종이나 성종, 중종은 불교를 쇠퇴화 시키기 위하여 사림파를 앞세우고 불교와 훈구파를 배척하기 위하여 정책을 노골적으로 바꾸고 상층민의 의식을 개혁하였다. 급기야는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승과제도를 폐지하고 사찰을 서원으로 바꾸었다. 몇 개의 명찰들은 왕실의 만수무강과 복을 비는 원찰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사찰은 왕실과 사대부들의 원찰로 철저히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력의 입장에서이며, 평민이라 불리는 서민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불교는 시대의 흐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바로 사대부들의 생활형태와는 달리 민중들은 시대의 새로운 변화에 변형된 그들의 사고를 갖게 되었고, 이와함께 불교는 그들에 맞는 변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대부들은 지배계급이 되었고 서민들은 피탈계급으로 전락되었다. 점차 이것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불교를 중심으로 한 민중불교 세력이 형성되었다. 당시에 불교는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불교는 국가적 불교에서 멀어져서 불교와 서민이라는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고 민중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미륵불교의 사상이 급속히 확산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배계급을 부정하려는 피지배계층들의 해방을 위한 몸부림이 조선 초기 정치체제의 개혁과 반대로 중기 이후에 잘못된 정치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반체제 투쟁이 본격적으로 나타났었다. 조선시대 불교의 특징은 서민의 불교였다. 왕이나 귀족들이 신앙하는 귀족 불교가 아니었다. 미륵 부처님은 동네 앞이나 뒤에 모셔져서 다기와 공양물을 올리고 조석(朝夕)으로 예불(禮佛)을 올릴 수 있었고, 마을이 곧 불국토라는 표시로 어귀에는 연지(蓮池)가 있었다. 동네 입시에는 단군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정치를 시작했던 곳인 신단수(神檀樹)의 상징이며 동(洞)의 수호목(守護木)인 동목(洞木)이 있어서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이면 동제(洞祭)를 올리고 여름이면 쉼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마을 가까운 곳에 큰 절이 있는 경우 ‘칠성계’나 ‘나한계’ 등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정월에는 합동으로 절에서 불공(佛供)을 올리고 마을이나 가족 개인의 발고여락(拔苦與樂)을 기원하였다.
조선시대의 다풍(茶風)에 대하여 전완길씨는 ‘좋은 차 중심의 다풍’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문인 중심의 다풍(茶風)이 융성해짐으로써 선가(禪家)의 다풍과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중략···, 신라에서 고려에 전승된 다풍, 즉 차 마시는 법도를 중시하기보다는 차 마시는 행위(차를 달이는 분위기)를 더 좋아하고, 야외 차풍류를 계승시켰다. 따라서 다구(茶具)나 다기(茶器) 보다는 좋은 차를 더 중시하였다.
불교가 중앙에서 왜곡과 핍박을 당하여 거세되는 조선이라는 역사의 특징 속에서 조선자기(瓷器)의 특성이 형성되었다. 방병선씨는 조선시대 백자(白磁)문화가 시대의 대표적인 자리를 차지한 배경에 대하여 백자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여러 제례와 실생활에서 고려와는 다른 그릇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화려한 장식과 색상을 자랑하는 청자보다는 사대부들의 검소함을 드러낼 새로운 그릇이 필요 했던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발원(發願)하여 불전(佛前)에 공양(供養) 올리고 불교 수행자(修行者)가 사용하는 발우(鉢盂) 등 백자 일괄품이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됐다. 이를 두고 볼 때 수행처(修行處)에서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고 권문세가에서 특별히 제작하여 불전헌다(佛前獻茶) 용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靑磁 陶瓷器 文化가 조선시대에 白磁 陶瓷器 文化로 바뀐 것은 음다풍의 변화 등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陶瓷는 靑瓷․분청자(粉靑瓷)․白瓷․黑瓷․陶器․甕器 등 다양하며, 이런 조선도자 중에서 조선시대 전기간 동안 가장 많이 만들고 조선시대의 특색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粉靑瓷와 白瓷이다.
윤용이씨는 朝鮮陶瓷의 핵심은 분청자와 백자임을 밝히고 있다. 시대적으로 분청자는 15세기 전반에 성립되어 발전을 거듭하다 16세기 후반에 白瓷化 되어 사라지고, 白瓷는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16세기 후반에는 분청자를 대신하여 조선도자의 중심이 되었다.
백자는 태토가 흰색으로 15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발달되어 생산되었다.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도 간간이 생산되었다. 궁중용이거나 고급 그릇으로 쓰였는데, 官營 도자기 가마에서 구운 分院제품이 그 특징이다.
분청사기는 서민층으로 흘러내리고 청화백자는 관인의 전유물이 되었고, 분청은 선승이나 풍류인이 애용하는 것이 되고, 청화백자는 사대부의 사치품이 되었다.
성우스님의 茶道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白磁는 임진왜란이라는 李朝 역사의 분수령으로 하여 그 넘어 있어온 분청이 자취를 감추었고, 임진왜란 이후 백자(白磁)의 나타남은 시대적인 운명이라고 지적한다.
조선도자의 변천은 초기(1392〜1550)와 중기(1550〜1700), 후기(1700〜1910)로 구분한다. 조선도자의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는 각 시기별 도자발전(陶瓷發展)의 구체적인 양상을 시대적인 배경과 도자의 편년자료(編年資料)의 분석, 그리고 각 시기의 器形과 紋樣·釉色·燔造方法·굽의 처리·요지 등을 알아봄으로써 가능해진다.
? 朝鮮 初期 陶瓷器의 變遷
태종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요동 정벌대신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다. 그는 고려의 체제를 개혁하여 朝鮮的인 체제로 바꾸어 정치·사회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정치체제를 정비하여 문화를 꽃 피우고,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여,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하였으며 고려적인 문화를 조선적인 문화로 바꾸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대표적인 瓷器로는 粉靑瓷와 象嵌白瓷가 있다. 현존하는 초기의 編年資料로는 1404년에 작고한 崔雲海墓에서 출토된 「粉靑瓷象嵌波紋鉢」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중에서 전기로 분류되는 몇몇 그릇들은 고려 후기의 상감청자를 계승하면서 그 바탕 위에 조선적인 새로운 器形과 紋樣으로 전환되어가고 있다.
15世紀 後半에은 조선분청자의 특징이 유감없이 잘 나타난 시기이다. 다탕과 가루차를 마식 위한 찻사발로 선각분청자와 철화분청자의 다완이 만들어 졋다. 世祖의 佛敎文化 정책과 성종의 유교문화 발전이 대조를 이룬다. 도자에 있어서는 粉靑瓷와 白瓷의 발달을 가져왔다.
16世紀 前半은 1501년에서 1550년 까지의 연산군에서 中宗 연간의 시기로써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조선 성리학의 발달에 따른 유교문화가 사회전반에 깊이 영향을 주어 鄕約의 발전과 書院의 성립 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 분청자는 상감·印花粉靑瓷 중심에서 귀얄·분장분청자 중심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호남의 선각·박지분청자와 충청남도의 철화분청자가 지방적인 특색을 보이면서 상감·인화분청자의 뒤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점차 백자화되어감을 전국의 분청자요지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器形의 변화를 보아서도 인화분청자에서 귀얄분, 덤벙분청자로, 다시 백자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끼 朝鮮 中期의 陶瓷器의 變遷
조선 中期는 1550〜1600년 까지의 明宗·宣祖의 시기로, 粉靑瓷器는 자취를 감추고 청화백자가 조선백자를 특징짓는 자기의 대표가 되었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性理學의 발달에 따른 書院의 설립과 鄕約의 보급은 전국적인 시행을 이루어 士林들에 의한 세력의 확대로 이어진다. 이로 인하여 백자의 실생활화를 가져왔으며, 백자만이 여러 가지로 발전되었고 분청자가 임진왜란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7世紀 前半은 1601〜1650년간의 光海君․仁祖에 의해서 다스려지던 시기로 임진왜란의 막대한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백자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특히 靑畵顔料를 구하지 못해 제작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로 인하여 鐵畵白瓷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정지리요지(亭支里窯址)에서 구워지고 1609년에 발견된 「白瓷舍利盒」이 있고, 같은 요지에서 발견된 발편(鉢片)이 있다.
17世紀 後半 1651〜1700년까지는 孝宗·顯宗·肅宗 연간으로 壬亂·胡亂의 상처가 아물며 조선적인 성리학의 발전으로 실학이 성립되고 조선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백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백자의 색깔도 회색(灰色)에서 유백색(乳白色)을 변모해 갔으며, 둥근 달항아리가 제작되었다. 제작과 철화기법으로는 운룡문·초문·매죽문 등이 자유롭게 시문된 鐵畵白瓷가 발전하였으며, 초화문의 간결한 靑畵白瓷도 등장했다.
1690년대의 백자요지는 확실히 않으나 灰白瓷에서 乳白瓷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로 추정한다.
니 朝鮮 後期 陶瓷器의 變遷
1700년경〜1910년까지는 조선도자의 후기로 회백색의 철화백자 대신 乳白色과 靑白色의 靑畵白瓷와 백자가 대표하는 시기다.
정조년간(1777〜1800)부터 항아리의 경우 어깨부분과 목 부분에 여의두문대(如意頭紋帶)나 연판문대(蓮瓣紋帶) 등이 장식되기 시작하고, 19世紀 前半에는 문양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연화·잉어·모란문 등의 간결하고 활달한 불교적이고 禪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문헌 400여편 중에 椀이 32회나 되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초엽까지 ‘椀’으로만 기록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는 간혹 ‘碗’ ㅡ ‘盌’, ‘琬’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용어의 쓰임은 외국의 차문화를 인식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洪淳寬에 의하여 조사된 문헌에서, 茶生活에 사용된 茶具는 삼국시대 4개, 고려시대 21개, 조선시대 13개로 나타나 있다. 그 역사적 특성으로 인하여 朝鮮時代는 지적되는 바와같이 다구수의 감소와 함께 白磁위주의 煎茶具가 특징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정호차사발과 웅천차사발 등 다도를 즐기는 찻그릇들도 많이 나왔다. 이것의 생김새는 발우에 비해서 작지만 닮은 점이 많다.
이 시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적어도 도자기에 미치는 영향은 앞시대의 영향보다 더욱 컸고 변화도 많았으리라 본다. 대표적인 崇儒抑佛이 그렇고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는 壬辰倭亂이 그렇다. 이 시기에 다도의 속성과 기타 많은 것들이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3. 鉢盂와 茶具의 연관성
四分律에 ‘木鉢은 外道의 법이요, 石鉢은 여래의 법’이다. 그리고 금·은·동·납과 그 나머지 가지가지 잡보들의 발우는 속인들의 발우니 받지 말라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출가사문이 소유한 유일한 물건은 흙으로 만든 발우이다. 나이든 비구들을 위하여 鐵鉢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는데, 그것은 떨어뜨려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부처님 在世時부터 쓰인 ‘瓦鉢’과 ‘鐵鉢’은 지금까지 쓰이는데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瓦鉢’로 쓰이고 한국에서는 ‘木鉢’이 쓰인다. 목발은 五合이라고 해서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큰 발우는 御施발우라고 하여 큰대접 크기로 안이 거의 타원형이다. 가장 작은 발우는 반찬 발우인데 작은 종재기 크기이다. 발우의 크기와 모양은 모두가 대동소이하다.
발우의 용도는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나눈다. 가장 큰 발우는 어시(御施)발우로서 밥만담는 것이다. 두 번째 발우는 국을 담는 국발우이다. 세 번째는 밥을 다 먹고 난 뒤 발우를 씻는 물을 담는다. 네 번째는 반찬을 담는 찬발우이다. 이와같은 용도로 쓰이는 것이 발우인데 스님들이 생활의 거처를 옮길 때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밥먹을 때 대중방의 앉은 자리에서 발우를 펴고 접으며 대중방(大衆房)을 벗어나지 앉는 것이 발우공양의 특성이다.
다구(茶具)의 용도는 茶를 마시는 것이다. 발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잡스런 물건을 담지 않고, 나쁜데 쓰거나 손을 씻지 않는 등 차마시는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의 수행자와 茶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경덕왕(景德王․742~765)은 충담스님에게서 차를 마시게 되는데 앵통(櫻筒)에서 찻그릇을 내어 대접한다. 중국 서진의 황제인 혜제가 몽진하고 낙양에 돌아왔을때 황문(스님)이 질바리에 차를 담아 바쳤다. 天目다완은 천목산의 스님들이 발우로 차를 마신 것이 그 기원이다. 이와같이 발우가 茶湯을 마시는데 아주 적합한 것이다. 현재는 찻그릇이 다양하게 발전을 하였지만 茶生活의 초기에는 발우가 차를 마시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茶를 茶灌에 넣고 잔을 씻을때 까지의 과정이 발우공양과는 많은 부분에서 같음을 알 수 있다. 찬상과 찻상이 같은 성격이며, 앉는 방식과 차를 돌리는 방법, 물로써 잔을 씻는것도 거의 흡사하다. 공양중에는 절대 침묵하지만 공양후에는 큰스님의 법문이 있다. 다도의 분위기는 혼자 차를 마실때 제대로 차를 음미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전통문화원 원장 선혜스님에 의해서 ‘차례법’과 사원전통 의식인 ‘법공양법’을 분석한 것이 있다.
공양(밥 먹는 것)을 마치고 법공양 자리에서 차를 마시려고 할 때는 발우를 걷기 전 절수상념게(折水想念偈)를 하고나서 어시발우에 차를 받아 마셨다고 전한다.
식당작법의 법공양법은 북방불교권에서 행하여진다.
점다예법을 행할 때 왼쪽 무릎을 세우고 세운 무릎위에 두 손을 모으고 잠시 선정(禪定)에 들거나 그 날 차의 행다법을 구상하거나 은혜에 보은하는 생각을 한다.
계속하여 선혜스님의 글을 인용하여 본다면, 입정(入定)하는 예법은 법공양의 불은상기게(佛恩想起偈)를 적용하였다.
차구를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가 차를 점다할 때 바로 사용하지 않고 손님과 인사절이 끝나고 자리를 배정하여 앉고 팽객이 보는 앞에서 차포(茶佈)를 펴고 그 위에 다기를 순서대로 배열하는 예법은 법공양의 전발(展鉢:발우를 펴는 것)을 적용함.
법공양의 진지(進旨)를 하기 전에 천수물로 어시 발우로부터 마지막 발우 순서로 헹군다. 이것은 점다(點茶)할 때 달인 물로 차관을 덮히고 1번 찻잔(體)에서 5번 찻잔(用)순서로 물을 나누어 협잔(脅盞)하는 예법으로 적용함.
차를 달여서 팽객에게 내고, 팽주가 팽객을 향해 ‘차 드십시오’라고 하며, 차를 권하는 말을 대신해서 죽비소리로 대신하기도 한다. 팽주와 팽객이 똑같이 차를 마신다. 이 예법은 점차(點茶) 평등공양에서 적용함.
법공양의 절차(공양할 때 조심할 일)에 대하여 서로 비교하였다.
수저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는, 차기를 다룰 때 소리가 나지 않게 함.
음식먹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차를 마실 때 소리가 나지 않게 함.
어시발우에 비벼먹거나 국을 부어 먹지 않는다는 것은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바꾸거나 차기에 다른 음식을 담아먹지 않음.
이리저리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팽객은 팽주가 점다할 때나 차를 마실 때에 이리저리 돌아보거나 말을 하지 않음.
큰 발우부터 씻는 것과 천수 물을 걷는다는 것은, 찻잔을 행굴 물을 부을 때는 1번잔(體)에서 5번(用)으로 행하고 행군 물을 퇴수기에 붓고 거둘 때 5번 잔에서 1번 잔 순서로 행함.
발우수건으로 천천히 돌려가며 닦는다는 것은 찻잔을 닦을 몸통과 입굽을 천천히 돌려가면서 닦는 예법으로 적용하였다.
절차 공양을 마치고 생각하는 게송은, 차를 마시고 나서 답례로 팽객이 팽주에게 찬사하면 팽주가 팽객에게 겸사(겸손하게 답례하는 말)를 하는 예법으로 적용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발우와 찻그릇은 정신적인 면과 사용적인 면 등 많은 부분에서 그 특성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례와 발우법은 한 가지의 정신에서 출발하였다고 본다.
Ⅳ. 佛敎의 茶禮
1. 茶禮의 發生
1) 茶禮의 根源
다례(茶禮)는 차예절(茶禮節)의 줄인 말이다. 차예절은 차를 만들고, 차로써 불공·제사를 올리는 절차 있는 풍속을 말한다.
불교의 다례는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인다. 그 당시에는 사대공양물이 있었다. 차(茶), 화(花), 향(香), 연등(燃燈)이다. 북방불교권에서는 쌀(米)과 과일(果實)이 추가되어 육대공양물이 삼보에 공양되었다. 쌀은 신도들에 의해서 부처님과 승가의 양식으로 시주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차공양(茶供養)은 주로 사원생활(寺院生活)을 하는 스님들에 의해서 불보살(佛菩薩)님들께 공양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가정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것과 더불어 茶供養을 올렸을 것이다.
經典上의 다례는 華嚴經에서 내용이 잘 나타나고 있다.
널리 광명을 놓고 향으로 장엄하니 종종의 묘향이 가득해 시방국토의 모든 대덕존께 공양한다.
다시 광명을 놓고 茶로 莊嚴하니 종종의 妙茶가 가득해 시방국토의 모든 영가에게 공양한다.
또 광명을 놓고 쌀로 장엄하니 종종의 妙米가 가득해 시방국토의 모든 孤魂들께 공양한다.
이상과 같이 일찍이 茶를 사용한 것을 경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百丈淸規 卷2의 佛降誕條에는 주지가 올리는 佛壇儀式의 茶事를 잘 설명하고 있다.
住持가 다시 上壇에 처음 香을 올리고 坐具를 걷지 않고 三拜하고, 再上香하고 獻茶한 뒤, 다시 三拜하고 坐具를 걷고,
한반도에 차가 전래된 시기는 이론이 많지만 공식적으로 茶種子는 AD828년 신라 흥덕왕(AD 826∼836) 3년 12월 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사신 大廉에 의해서 傳來되었으며, 茶生活 자체는 善德女王(AD 632∼647) 때부터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典據가 있다. 茶의 傳來나 飮茶는 차종의 전래와는 달리 이보다 훨씬 앞서는 것으로 忠談師나 善德女王의 記錄 외에도 삼국유사에 AD 760년(景德王 19년) 王이 月明師에게 茶 一襲을 下賜한 기록이나 華嚴寺 創建主인 緣起祖師의 母親에게 獻茶供養한 AD 544년(華嚴寺 創建年代)의 寺傳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洪淳寬氏는 「韓國茶具에 대한 考察」에서,
우리나라에 茶가 전래된 것은 AD 544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성행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불교문화와 함께 수입되어 獻茶供養의 寺院茶로 출발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한반도에서 茶禮의 발생은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發生하였고, 그리고 積極的으로 發展하였음을 文獻을 통하여 一連의 過程을 확인할 수 있다.
2)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의 다례를 인용한 보기
청규 이전에 晋의 도안법사(道眼法師)는 불교의 수행대중들이 ‘계율이 완전하지 못하고, 위의(威儀)가 결여’된 것이 많음을 가슴 아파하여, 승단(僧團)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삼예(三例)를 제정하였다.
삼예(三例)란 첫째, 行香하고 定座하여 上講할 것이며. 둘째, 二六時에 禮懺할 것이며, 셋째, 布薩法 등을 행하여야 한다 등이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僧制이다. 교단의 승제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승제도 있었다.
儀潤의 百丈叢林淸規證義記에서 청규의 연원을 칙명에 의해 창제된 승제에서 찾고 있다.
淸規는 梁나라 승려 法雲이 光宅寺에 거주하면서 조칙으로 제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양의 승제는 감추어지고 唐의 청규가 드러난 것은 梁나라 때에는 아직 禪敎가 번성하지 않았고 唐에 이르러서야 법이 완비되고 승단도 번성하였다. 이런 때에 百丈선사가 청규를 重集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백장청규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것이다.
청규 제정의 배경과 과정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즉 청규는 승단의 규범과 관리를 불교의 발전에 따라서 제정된 것이다. 청규에서의 茶生活은 儀式用 茶로서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다.
칙수백장청규는 총림에서의 직책에 따른 소임과 대중생활의 규율을 제정하여 제시한다. 칙수백장청규의 後五章 중에 住持章의 <請新住持> 발전사(發專使)조에 의하면, 다른 절로 자리를 옮기려 결정된 住持는 예전에 있던 절의 대중을 하직할 때 그들을 위해 上堂說法하고 다탕(茶湯)을 베푼다. 즉, 주지의 이동에서 법상에 올라 설법하고 다탕을 베풀었다. 지금은 행하지 않는 의식이지만 주지 이취임식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入院> 산문특위신명다탕(山門特為新命茶湯)조에 의하면, 신임 주지가 도착하면 주지가 쉬고 있는 安下處가 가까우면 湯果를 준비한다. 그리고 산문 대중 전체가 새로 임명된 주지를 축하하기 위해 茶湯을 준비한다.
상사(喪司)에 수반된 여러가지 불사에 대한 순서중에 茶를 올리는 것이 세 번 있다. 처음 입감(入龕)은 주지의 침상에서 행하며, 이감(移龕), 쇄감(鎖龕), 법당괘진(法堂掛眞), 거애(擧哀), “전다탕(奠茶湯)”, 대령소참(大靈小參), “전다탕(奠茶湯)”, 기감(起龕)까지는 법당에서 행한다. 산문수진정괘진(山門首眞亭掛眞) 전다탕(奠茶湯)은 산문(山門)에서 행한다.
<列職雜務>는 실제 일선에서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서서두수 이외에 중요한 직책을 列職雜務라 한다. 茶에 관한 내용만 본다면 다음과 같다.
유나료에서는 당사가, 도사료에서는 고사가, 당사와 고사가 함께 신구 양서의 소임자들을 위해 특별히 茶湯과 藥石을 베푼다. 그리고 주지가 방장에서 새로 임명된 신수좌를 위해 茶를 베풀기도 하고, 새로 임명된 前堂의 新首座가 後堂의 대중들을 위해 특별히 차를 베풀기도 하며, 주지가 西序의 여러 頭首寮를 방문하여 차를 마시고 환담하고, 東西 兩序의 소임자가 임무를 교체할때도 차를 마시며 환담하고, 各寮에 소임자가 바뀔 때 入寮하는 자와 出寮하는 자들도 차를 마시며 환담하는 자리를 가진다.
이상과 같이 승가의 생활에서 소임자들이 인사하고, 확인하고, 교대할 때도 茶禮가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大衆章의 遊方參請에도 차를 마시는 풍습을 서술하고 있다. 즉 遊方이란 결제나 공부를 마치고 참배와 선지식 친견을 위하여 雲水行脚하는 것을 뜻하며, 參請이란 학인이나 선객들이 고승대덕들이 주석하고 있는 거처를 찾아 그곳에 방부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知客이 답하기를(이렇게 먼길을 와 주시니 저희 산문에서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揖坐하고 香을 올리고 茶를 마시면서, 이 사찰에 온 來歷을 간단히 묻는다. 곧 일어나서 茶대접에 대해 감사인사를 하고 ···.
주지는 방부드린 首座를 위해서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대중들이 선원(禪院) 생활을 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 ‘茶湯에 나아가는 법(赴茶湯)을 기록하고 있다. 다탕에 나아감에 있어서 매우 엄숙하게 실행됨을 볼 수 있다.
무릇 주지양서 특위가 茶湯의 禮를 행함에 있어서는 매우 조심하고 重하게 하며, 마땅히 거만하고 가벼이 하지 아니한다. 이미 청을 받음에는 시간을 맞춰서 나아가고 먼저 牌를 보고 기록한 位次를 보아, 시간을 임해서 허둥거리지 말아야 한다. 병환이 있는 사람은 안에 머물게 하여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고 나아가는 사람에 부탁해서 사뢰어 알리도록 하고 오직 주지의 茶湯에 免할 수가 없으니 거만하여 나아가지 아니하는 자는 가히 함께 머무를 수 없다.
청규에서 茶湯의식에 임하는 자세가 아주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절납장(節臘章)에서는 한 해 동안의 살림살이를 행사별로 나누어 기록한다.
그것을 위하여 ‘夏中行茶湯甁盞圖’가 있는데, 요원은 合寮의 尊衆을 청하여 특별히 湯을 대접한다. 그리고 미리 湯을 끊여 요원은 친히 方丈에게 보내고 茶頭로 하여금 제료(諸寮)에 나누어 보내게 한다.
이처럼 결제 중에도 여러 차례의 특별한 다례가 있다. 결하(結夏)와 관련된 행사로 능엄회가 있다. 대중들이 결제법회를 하면서 대중들이 안거를 잘 마칠 수 있도록 축원하는 의식이다. 이 행사와 관련하여 주지가 행하는 의식을 “주지는 불전에 이르러 香을 사르고 茶湯을 올리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라고 규정한다.
초하루와 보름에 주지가 상당하여 설법을 마치면 대중과 함께 堂을 돌고 차를 마시는 법식이 있다. 선원에서 초하루 보름에 당을 돌고 차를 마시는 일은 불교의 평등과 무차의 정신을 잘 살리는것이고 또한 대중을 잘 살피는 것이다.
月分須知는 월별행사표이다. 三月에는 방을 내어 茶 등을 따지 못하게 금하고 단속한다고 한다. 너무 어린잎을 따서 차나무를 상하게 하거나 貪하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어린 차잎을 땀으로 생기는 탐욕을 막고 좀 더 많은 양을 따기위한 차나무 관리가 특이하며 생각을 가진 것이 자세하다.
오월 단오날에는 아침일찍 知事가 僧堂내에 燒香하고 菖蒲茶를 끓인다. 그리고 방장은 諸寮와 諸庵塔에 나아가 각기 하루를 茶 대접도 하고 근황도 묻고 한다. 단오날을 맞아 선원에서도 방장스님이 각각의 방사를 방문하여 차를 대접하며 얘기도 나누는 등 특별한 시간을 가지며 차 빠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칙수백장청규의 다양한 다탕의례는 청규 이전의 다례를 종합하여 禪寺에 맞는 새로운 다례를 정립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 다탕의식은 ‘茶禪一味’로 불릴 정도로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왔고 僧家의 생활 깊숙이 자리 하였다.
3) 梵音集의 다례
梵音集은 1723(조선 경종3년)에 지리산의 지환(智還)이 소례(小禮), 대례(大禮), 예수(預修), 지반(地盤), 자기(仔夔) 등 다섯 가지를 절충(折沖) 산보(刪補)한 것으로 곡성 도림사에서 개간한 것이다. 우리나라 제2의 재의작법집대성(齋儀作法集大成)이다. 梵音集에는 茶供養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 향공양, 화공양, 미공양 등 경우에 따른 다양한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범음(梵音)이란 여래의 범음은 시방(十方)에 두루 들리고, 그 음성을 듣는 이는 모두 도과(道果)를 얻는다고 하므로 법회할 때는 이 범음으로써 불·보살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다. 범패(梵唄)의 起源에 대하여서는 佛敎大學院論叢, 3집에 법현스님의 논문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범음집의 다게(茶偈)에 대하여 김운학의 朝鮮의 茶와 禪에서는 의식에 사용되는 茶偈 몇 가지를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49齋나 遷度齋의 施食에서 영가에게 올리는 茶偈가 있다. 이 茶는 百草와 樹林 중에서 맛이 가장 뛰어나고, 조주는 항상 수많은 사람(修行者)들에게 권하였던 것이고, 좋은 물로 차를 다려 올리오니 원컨대 선령은 이 차를 드시고 고통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이다.
齋를 집전하는 스님이 위패를 영단에 나아가 잘 모신 후에 법주가 受位安座眞言을 하고 제자들이 茶를 올리고 집전스님이 茶偈를 읋는다.
백가지 초목 가운데 가장 뛰어난 차 맛을(百草林中一味新)
조주스님 얼마나 권하였던가(趙州常勸幾千人)
돌솟에 최고의 물을 다려 올리니(烹將石鼎江心水)
원컨대 영가들께서는 드시고서 윤회고를 벗어나소서(願使亡(仙)靈歇苦輪)
고승의 사리를 모셔 옮기는 의식의 다게(高僧舍利運儀)
영롱하고 묘한 탑 아래 이르러서 (行到玲瓏妙塔下)
보배롭게 치장한 상 위에 올라 마주하여(寶嚴床上可登臨)
몇 잔의 차를 아손(兒孫)의 예로 올리오니(數杯茶了兒孫禮)
그런 뒤 편히 머무옵소서(然後安棲率堵心)
주해에 이르기를, ‘더러 제자가 다례를 하고자 하면, 제수를 올려 차려 놓은 뒤, 초헌 다음에 제문 읽기를 마친다. 재배(再拜) 뒤에 아헌(亞獻), 다음에 종헌(終獻)하고 각 삼배(三拜)한다’ 라고 하였다.
절하며 감로차 바치기(拜獻甘露茶)
백초 속에서 찻잎을 따서 차꽃술을 만들고(百草茶葉採取成)
양자강 강심수를 달여 옥사발에 내며(烹出玉甌揚子江心水)
어둠을 깨고 장자가 나비에 놀라 꿈에서 돌아오고(破暗莊周胡蝶驚夢廻)
혼미는 씻겨 제거되니 조주는 자미를 안다네(滌去昏迷趙州知滋味)
茶偈란 부처님과 보살님께 올리는 茶 呪文이다. 육법공양의 하나이며 오늘날도 의식에 반드시 사용된다.
茶偈
저는 이제 이 한 주발 차를(我今持茶一椀茶)
다함없는 감로차로 바꾸어(變成無盡甘露茶)
시방의 삼보님전에 차를 바치오니(茶獻十方三寶前)
원컨대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받아들여 주옵소서(願受慈悲哀納受)
청정하고 이름난 차약은(淸靜名茶藥)
능히 병과 혼침을 제거하니(能除病昏沈)
오직 천신과 선신에게 바라오니(惟冀天仙神)
원컨대 슬피여기사 받아주시옵소서(願受哀納受)
육색장축원의(六色掌祝願儀)에서 육색장은 절에서 큰 행사가 거행될 때 음식을 분담해서 만드는 소임이며, 축원의식이다.
용궁의 만세는 설산의 향유요(龍宮萬歲雪山香乳)
수많은 풀 숲 속에서 제일 좋은 맛이 청신하여(百草林中一味淸新)
옥사발 은솥에 훌륭한 사람이 차를 달여(玉甌銀鼎大家煎点)
조주는 늘 기천만인에게 권하였으니(趙州常勸幾千人)
제호 감로를 가려뽑아 맛을 보태어 이루었네(醍醐甘露攬滋味)
李朝末의 亘璇 白波스님(1767~1852)이 쓴 龜鑑書가 있는데 우리가 佛典儀式에 ‘淸淨水’가 일상적으로 귀하게 쓰는 獻茶偈다.
제가이제 청정수를 받치오니 我今淸淨水
감로차가 되어서 變爲甘露茶
삼보님전에 받들어 바치오니 奉獻三寶前
원컨대 어여삐여겨 받아주소서 願垂哀納受
이 때에는 청정수가 감로차의 의미를 담고 있다. 김운학스님은 이것이 범음집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작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2. 다례의 내용
茶禮는 차의 시작과 더불어 발전을 거듭하여 현대까지 茶文化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례에는 불전의식에서 승가의 생활, 포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다례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정신적이면서 실용적인 면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일찍이 충담선사가 불·보살님께 차 공양을 올린 것이나, 오대산 보천·효명 태자가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오만진신에게 차공양을 올린 것이나, 갱세급간이 수로왕에게 차를 올린 재례는 이때부터 시작된 다례의 초기양식이 된다.
1) 충담선사의 행다법
야외에서 진행하는 헌다인 만큼 미리 준비해야 하며 또한 현장에서 준비해야 할 것 등이 있다.
준비물 :
차, 잔, 잔대, 솥 걸이, 불 붙일 도구, 물 끊일 솥, 공양물, 표 주박 등,. 현장에서 물과 나뭇가지 등은 해결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산은 반월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수많은 부처님과 탑이 모셔진 곳이다. 삼화령 미륵 부처님께 올린 차는 최고의 헌다례였을 것이다.
헌다순서(獻茶順序) :
-. 먼저 적당한 장소에 다구를 펼쳐놓고 차를 끓일 준비를 한다.
-. 미륵세존 앞에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인사를 올리고 준비한 간단한 공양물을 차려 올린다.
-. 돌솥을 한편에 설치하고 삼발이 사이로 불을 피워서 물을 끓인다.
-. 연료는 마른 나뭇가지를 산에서 주워서 쓰거나 숯을 미리 준비한다.
-. 차끓일 물은 깨끗한 물로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간다. 근처에 좋은 물이 있으면 그곳에서 길어온다.
-. 돌솥에 물이 다 끓으면 한 사발을 먼저 떠내서 찻잔에 부어 잔을 데운다.
-. 미리 준비한 떡차를 갈은 가루차를 차통에 담아가지고 와서 사용한다.
-. 차통을 왼손으로 가져와 뚜껑을 열고 오른손으로 차 숟가락을 들고 적당량의 차를 떠내서 돌솥에 넣는다.
-. 차의 양과 물의 양이 알맞아야 하며, 차가 우러나도록 돌솥의 뚜껑을 덮어 잠시 끓인다.
-. 미륵세존께 올린 찻잔의 물을 버리고 물기를 차 수건으로 닦아 제자리에 놓는다.
-. 차가 맛있게 끓여지면 돌솥 뚜껑을 열고 표주박으로 한 잔을 떠내서 찻잔에 따른다.
-. 찻잔을 찻상에 옮겨 놓아 미륵세존께 가지고 가서 그 앞에 올린다.
-. 두어 발 뒤로 물러나 축원이나 기도를 드리며 절을 한다.
-. 절과 기도를 마치고 잠시 기다렸다가 차를 내려 헌식하고 차도구를 챙긴다.
-.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 차 도구를 챙겨 짊어지고 하산한다.
충담선사가 경덕왕 24년(765) 삼월 삼짇날에 경주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는데, 이것은 신라 때 유행하던 헌다의식의 일종으로 충담선사는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구날에 미륵세존께 차를 올렸다. 특히 화랑출신 승려들은 옛 수련장에 모셔진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 이는 내세를 기원하고 또 먼저 산화한 화랑들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다.
2) 보천 · 효명태자(寶川 孝明太子) 행다법
보천 효명 태자는 오대산의 오만 진신에게 골짜기의 물을 길어 매일 차공양을 올렸다.
준비물 :
다관(茶罐), 차 솥, 차(잎차), 찻 잔(茶 盞), 잔 받침(茶盞托), 표주 박(茶 瓢), 물, 돗자리, 땔나무, 차 숟가락(茶 匙), 차 수건(茶 巾), 불 붙이는 도구, 등 이외의 것은 현장에서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불필요하다.
헌다순서 :
-. 다구를 펼쳐 놓고 차를 달일 준비를 하는데 보천태자는 다구를 챙겨놓고, 효명태자는 차 끊일 물을 길어 온다.
두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서 하였으므로 신속하게 준비하여 공양을 올린 것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 보천태자는 다기 배열을 하고 정리하며 효명태자는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와 돌솥에 끊인다. 오대산의 물은 그 자체가 감로수라서 차를 만나면 더욱 훌륭한 것이된다.
-. 불을 지펴 물을 끊이는 동안 보천태자는 차 올릴 단(壇)을 정리한다.
-. 돌솥에 물이 끊으면 먼저 한 바가지 떠내서 다관과 찻잔에 부어서 데운다.
-. 다관이 데워지면 다관에 물을 버리고 다관에 차를 넣는다.
-. 다관에 차가 우러나는 동안 찻잔의 물을 버리고 물기를 닦는다.
-. 다관의 차가 알맞게 우러나면 찻잔에 따른다. 찻잔은 문수보살께 올리는 잔 한 개만 사용한다.
-. 찻잔을 시자상에 옮겨 놓으면 효명태자가 받들고 가서 헌공단 위에 올려 놓는다.
-. 보천태자와 효명태자가 나란히 허공의 문수보살을 향해서 예경을 올린다.
-. 문헌상에 전다(煎茶)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잎차를 달이는 것으로 풀이하지만 신라 왕실에서 행하는 헌다의식이 행해졌을 것이다.
보천 효명 두 태자는 오대산 진신인 문수보살님을 친견하기 위해 푸른 연꽃이 핀 곳에 형이 보천암을 짓고 동생은 북대의 남쪽 기슭에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어서 암자를 짓고 형제가 수도를 하였다.
오만진신의 불 보살님들을 친견하고 매일 물을 길러 차를 끊여 공양하였다. 보천·효명 두 태자는 날마다 진여원(眞如院)에 와서 36종의 모양으로 화현하는 문수보살님께 차공양을 올려 성불(成佛)하기를 기원했다.
3) 원효성사(元曉聖師)의 행다법
준비물 :
차 솥, 차(떡차), 찻 잔, 잔 받침, 다 연, 다 저, 찻 술, 차 수건, 찻 상, 다식.
헌다순서 :
-. 먼저 다실 밖에서 탕관에 물을 끓일 준비를 한다.
-. 샘에서 물을 길어 온다.
-. 화로에 차솥을 올려놓고 물을 끓인다. 물 끓이는 일은 밖에서 한다.
-. 차 달일 다구를 챙겨서 다실로 가지고 들어가 배열을 마친다.
-. 밖에서 물이 다 끓으면 삼발이나 화로를 준비해서 차솥을 가지고 들어와 다실에 놓는다.
-. 떡차를 다연에 넣고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놓는다. 가루차는 거친 가루이다.
-. 차솥의 탕수를 한 바가지 떠서 잔을 데운다. 그리고 가루차를 차솥에 넣는다.
-. 차솥에 넣은 차는 잘 끓여진 후에 찻잔에 떠내서 따라 마시지만,
-. 찻잔에 가루차를 넣고 그 위에 탕수를 부어서 만든 차는 다선으로 저어서 거품을 낸다.
-. 찻상에 받들어 가지고 가서 원효대사께 드린다.
원효성사와 사포성인의 일화는 유명하다. 사포는 뱀 잡이였는데 법문을 듣고는 평생을 원효스님을 모셨다. 원효성사는 토굴에서 정진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원효성사가 전부 부안의 굴에서 수행을 할 때 함께 모시며 시봉을 햇다. 매일 차를 끊여서 올렸다.
두 칸의 방에서 각기 따로 썻는데 공간에서 다례가 행해졋기 때문에 찻자리의 원형으로 여기고 있다.
스승께 시자가 차를 공양을 하는 이런 행다법은 현재까지 사찰에서 행해져오는 행다법이다.
4) 지장법사(地藏法師)의 행다법
준비물 :
풍로, 차 솥, 탕 관, 찻 물, 떡 차, 찻 잔, 다 연, 찻 자리, 다 선, 다 저, 찻 상, 불 붙일 도구. 다식.
헌다순서 :
-. 먼저 차 끓일 도구를 준비하고 샘에서 찻물을 길어온다.
-. 밖에서 풍로와 차솥에 불을 피워서 찻물을 끓일 준비를 한다.
-. 차솥에 찻물을 적당량 넣고 불을 피워 물을 끓인다.
-. 찻물이 다 끓기를 기다려서 방안에 다구를 펼쳐 놓고 차 달일 준비를 한다.
-. 차솥을 방안으로 옮겨와 자리에 놓고 떡차를 가루낸 차를 찻잔에 넣는다.
-. 찻잔에 가루차를 넣고 그 위에 탕수를 부어서 다선으로 젓는다.
-. 찻잔에 거품이 일고 찻가루가 잘 풀리면 잔을 들어서 찻상에 옮긴다.
-. 찻상에 찻잔을 받쳐 들고 가지고 가서 지장법사께 올린다.
신라의 지장법사(진덕여왕 696∼794)는 중국 구화산 신광령 석굴에서 수행을 하였다. 시자가 매일 차를 달여 차 공양을 올렸다.
중국 안휘성 청양헌 구화산에는 신라 聖德王(702∼737)의 넷째 아들인 지장법사가 수도를 해서 등신불이 된 도량이다. 이곳에는 지장법사가 신라에서 가지고 갔다는 삽살개와 금지차(金地茶)와 쌀이 전한 곳이다.
5) 진감선사(眞鑑禪師)의 행다법
준비물 :
풍로, 차 솥, 탕 관, 찻 물, 떡 차, 찻 잔, 걸름 망, 찻 자리, 다 선, 찻 상, 불 붙일 도구. 다식.
헌다순서 :
-. 먼저 거실 밖에다 차 끓일 준비를 한다.
-. 풍로(삼발이)를 준비하고 섶 나무와 돌 솥을 옮겨다 놓는다.
-. 찻상에 찻잔과 차통, 표주박, 차수건 등을 갖추어 가져다 놓는다.
-. 차 끓일 샘물을 길어 와 돌솥에 붓고 불을 일궈 끓이기 시작한다.
-. 찻물이 잘 끓었으면 불 때던 일을 멈추고 돌솥 뚜껑을 열고 떡차를 덩어리채 넣는다.
-. 잠깐 기다렸다가 차가 잘 알맞게 우러나면 돌솥에서 차를 떠내 찻잔에 따른다.
-. 차를 다 마신 뒤에는 다구를 챙겨서 들고 가 깨끗이 닦아서 보관한다.
-. 격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해야만 한다.
진감혜소 선사(현덕왕~흥덕왕(810~830)는 옥천사 팔영루에서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차 씨를 들여와 지리산 일대에서 차 나무를 재배한 스님이다.
옥천사는 지금의 쌍계사다. 떡차를 가루내지 않고 덩어리 채 돌솥 속에 넣어서 차를 끓인다. 진감선사는 차를 떡차 덩어리인 채로 끓여 마셨다 한다.
6) 수철화상(秀澈和尙)의 재례의 행다법
준비물 :
풍로, 차 솥, 탕 관, 찻 물, 떡 차, 찻 잔, 다 연, 찻 자리, 다 선, 다 저, 찻 상, 불 붙일 도구. 다식. 재 단, 재 물, 퇴수기.
헌다순서 :
-. 먼저 다각(茶角)이 다실서 차 끓일 준비를 한다.
-. 풍로에 숯불을 일구고 돌솥에 찻물을 담아서 풍로 위에 올려 놓는다.
풍로가 아니더라도 숯불에 물을 끊이면 되며 쇠 솥에 찻물을 끊이는 것도 용이할 것이다.
-. 영단 위에 올릴 다구를 갖추어 청결하게 닦아서 준비하고, 제단에 제물을 준비해서 올린다.
-. 영단에 제수를 모두 올리고 제 지낼 준비를 마치면 찻물을 끓인다.
-. 찻물이 다 끓으면 다기를 깨끗하게 씻고 찻잔을 데운다.
-. 떡차를 다연에 갈아서 가루로 만든다.
-. 찻물이 알맞게 끓으면 돌솥 뚜껑을 열고 차를 넣는다.
-. 잠시 기다렸다가 차가 알맞게 우러났을 때 표주박으로 차를 떠내서 찻잔에 따른다.
수철화상의 영가단에 차를 달여 올리고 다례를 지내는 헌다의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문헌상 최초로 스님의 영단에 차를 올린 기록이다. 차는 왕이 예물로 보낸 것이다. 이 차를 제단에 끓여 올리고 다례를 지낸 의식이다. 스님의 영가 다례에 차가 등장한 첫 사례로 보고 있다.
도식으로 보는 수철화상의 영가다례 진열도
Ⅴ. 스님들의 茶生活
佛敎의 歷史에서 茶는 三國時代때 부터 現在에 이르기까지 많이 활용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 무용총의 내용부터 차의 중흥조로 불리우는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스님에게 이르기까지 불교의 생활에서 차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차는 현재에도 스님들에게는 뗄 수 없는 하나의 필수품이다.
1. 新羅時代
1) 元曉聖師
元曉는 그 시대와 우리시대에 가장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 23권 「南行月日記」에는 원효의 차생활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규보는 庚申年(1200) 8월 20일 扶寧縣宰(부령현은 지금의 扶安, 재는 현령을 말한다) 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데,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해하던 중, 이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道貌가 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內室과 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佛像과 원효의 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원효스님이 차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김운학스님의 몇가지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화랑 출신으로 茶事를 겪었으리라는 것이다. 한송정에 있는 四花郞의 차의 유적이나 忠談·月明과 같은 國仙 茶僧들의 경우와 그 아들 설총이 차인으로 차를 논하고 있는 것들을 들고 있다.
소요산 자재암은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처음 원효스님은 소요산 계곡 옆에 초막을 치고 수행하였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암을 지었다. 나한전 동굴에서 흐르는 물맛은 훌륭하였다. 그래서 고려때 서사시인 이규보는 원효샘의 물맛을 보고 “원효가 차를 끊이던 물이 젖같이 맛있네”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정상구의 한국다문화학에서는 원효가 해동보살일 뿐 아니라 다도정신의 화합과 和諍 사상이 결합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百家의 서로 다른 다툼을 회통시켜서 드디어 요란한 四生의 중생들로 하여금 둘도 없는 참다운 본성에 들어가게 하여 꿈꾸는 생사의 긴 잠을 깨워서 큰 깨달음의 지극한 과에 이르게 한다. ⋯
2) 忠談師
충담사는 前身이 國仙之徒였으나 후에 승려가 되었고,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승려가 된 뒤에도 사회참여를 활발하게 한 憂國시인이라는 것이다. 안민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왕이 권위적인 면을 벗어낫고 형색은 깨끗하지 못하지만 안광이 빛나는 수행자를 통해서 거침없는 소통의 정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수행자는 조촐하게 차를 대접하고 거침없이 왕을 대한 것은 보편적인 가치와 가식이 없는 면을 보여준다. 왕 또한 조촐한 차 도구를 선물함으로 청빈한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신라 경덕왕이 즉위 23년(764) 삼월 삼일(삼짇날) 歸正門의 樓上에 나와 좌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누가 길에 나가 위의 있는 승려를 데려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마침 깨끗하게 차려입은 고승이 길을 돌아가므로 좌우가 보고 데리고 와서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스님이 아니다.”
라고 돌려보냈다. 다시 승려 한 사람이 누더기 옷을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니 왕이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아 들였다. 그 통속을 보니 茶具만 담겨 있었다.
“그대는 누구요?”
“忠談입니다.”
“어디서 오시오?”
“내가 매양 삼월 삼일(삼짇날)과 구월 구일(중구일)에 차를 달여서 南山의 三花嶺 미륵세존님께 차를 올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이에 왕이,
“나에게도 차 한 잔 주시오.”
하니 스님이 차를 달여 드렸다. 차맛이 특이하고 잔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다시,
“내가 들으니 스님의 기파랑(耆波朗)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오?”
충담스님은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나를 위하여 安民歌를 지어 주시오.”
충담사는 그 자리에서 명을 받들어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군(君)은 아비요
신(臣)은 사랑하는 어미요
민(民)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진대 민이 사랑을 알리라.
대중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할진대 나라 보전할 것을 알리라.
아아, 군답게 신답게 민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을 지속하느니라.
충담사가 즉시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감격하여 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충담사는 고결한 인격과 詩才를 갖춘 훌륭한 茶僧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화령의 석미륵은 선덕여왕 때 도중사의 생의라는 스님이 꿈을 꾸고 남산 골짜기 흙속에서 캐내어 삼화령에 모신 것이다. 경덕왕 24년은 서기 765년이니 金大廉에 의해서 차가 지리산 화개동에 심어진 흥덕왕 3년(828)보다는 63년이나 앞섰다.
3) 月明師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이나 출생과 입적 연도를 알 수 없다. 향가 <제망매가 祭亡妹歌>, <도솔가>를 지었다. 능준대사(能俊大師)의 문인으로 화랑이었다. 미륵이 화랑으로 태어난다는 미륵하생 신앙을 믿었다.
<제망매가>는 죽은 누이를 위해서 재(齋)를 올릴 때 지어 부른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자 광풍이 일더니 재단에 놓인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죽은 동생을 위해서 제를 지내는데 시를 지어서 영혼을 위로하고 종이돈이 바람에 서쪽으로 날려 갔다는 것은 그 시대의 큰 정서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陀刹)에 만나볼 나는
도(道)를 닦아 기다리련다.
景德王 즉위 19년(760)에 해가 둘이 나타나 10일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을 때 이 일과 인연있는 스님으로 뽑힌 월명사에게 의뢰한바,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부르자 곧 변괴가 사라지고 나라는 평안을 찾았다고 한다. 이에 왕이 품차일습(品茶一襲)을 주어 사례한 일이 있다. 달밤에 피리를 불면 달이 운행을 멈추었을 정도로 피리를 잘 분 예능인이었다.
4) 無染國師
무염의 속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범청(範淸),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으로서 무열왕 9세손이며 달마조사의 10대 법손이다.
어머니 화(華)씨가 꿈에 하늘에서 드리워져 연꽃을 건네주는 것을 보고 임신, 무염을 낳았다. 9세에 불교에 귀의하고 부석산 석징(釋澄)스님에게서 화엄경을 공부했다.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이다. 진성여왕 2년(888) 무신 11월 17일 열반에 드니 세납 89세, 법랍 65년 이었다. 시호를 대낭혜(大郎慧), 탑호를 백월보광(白月普光)이라 했다.
최치원 찬의 무염국사 비명에, 헌안왕(憲安王)은 매달 국사에게 茶香을 헌사(獻謝)하였다.
5) 眞鑑國師
진감국사(774∼850)은 중국 구법승이다. 성은 최씨다. 헌강왕(憲康王)대에 이르러 시호(諡號)를 진감(眞鑑)이라 하고, 탑호를 대공영탑이라 하여 비를 세웠다. 어머니의 꿈에 어느 인도 스님이 찾아와 ‘당신의 자식이 되겠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고 갔는데, 그 후 그를 잉태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나 너무 가난해서 시장 모퉁이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부모에게 봉양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도를 구하려는 뜻이 간절했다.
당나라에 들어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창주 신감(滄洲神鑑)에게 득도한 후 거기서 법을 이어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동방성인(東方聖人)’ 또는 얼굴이 검었으므로 ‘黑頭陀’라 불렀다. 의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850년(문성왕 12) 1월 9일 나이 77세, 법랍 46년으로 입적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범패(梵唄)를 전하였다. 비문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다.
누가 胡香을 보내오면 그것을 기와에 담아 잿불에 올려놓고 丸을 만들지 않고 태웠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모른다. 마음이 경건할 따름이다.” 했다. 그리고 누가 한명(漢茗)을 공급해 오는 자가 있으면 돌 가마솥에 넣어 섶으로 삶아 가루를 만들지 않고 달였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른다. 그저 배가 느긋할 뿐이다.” 했다.
840년 진감국사가 옥천사를 중창하고 나서 중국에서 가져온 차종자를 심었다고 하는 내용이 쌍계사지(雙磎寺紙)에 전하고 있다.
진감국사는 頭陀行을 하는 철저한 禪修行者이면서도 의술을 배우고, 범패를 들여와 선에 접목시켜 대중화하고, 차나무를 재배하는 등 수행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문화예술을 통하여 불교를 시대에 심으려는 노력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2. 高麗時代
1) 義天國師
의천(1055∼1101)은 고려 중기의 스님이며, 천태종의 개조이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선종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이다. 1055년(문종 9) 9월 28일 태어났다.
1065년(문종 19) 11세에 왕사 난원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1085년(선종 2) 몰래 제자 수개(壽介) 등 2인을 데리고 정주(경기도 개풍군)에서 미복(微服)으로 송나라 상선을 타고 밀주(密州)의 접경인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하여 송나라 철종의 환대를 받았다. 여러 스승에게서 송나라의 제반 학문을 섭렵했다. 그러나 본국 선왕이 송나라 왕에게 자신과 태후의 간절한 정을 전하며 환국을 청원해 오자 오래 머물지 못하고 14개월 만인 1086년(선종 3) 6월 본국의 사신을 따라 장소(章疏) 3천여 권을 갖고 귀국했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고, 그 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집했다.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해 모두 1,010부 4,740권의 장소를 간행했는데, 이것을 고려속장경이라 한다.
1101년(숙종 6) 나이 47세, 법랍 36년으로 입적했다. 시호를 대각국사(大覺國師)라 했다. 문집에서 차에 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흥왕사에 세워졌던 대각국사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묘지명에 차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가 재차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어 국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는다”. 재차란 두 번째 보냈다는 것이며, 그 이상일수 있다. 의천이 송에 갔을때 황실에서는 대단한 관심을 보여 음식이나 의복 등을 보내어 생활에 불편이 없게하였다. 의천은 송나라 생활중 차를 받고 쓴 시가 있다. 「스님에게 차를 준것에 대한 화답의 시(和人以茶贈僧)」이다.
북원에서 새로 떡은 차를 北苑移新焙
동림에 계신 스님에게 선물했네 東林贈進僧
한가로운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預知閑煮日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泉脈冷敲氷
의천이 入宋 중 황제와 황태후로부터 좋은 차를 선물 받고, 화답한 것이다. 의천이 쓴 세편의 차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차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보여진다.
2) 眞覺國師
혜심(慧諶 : 1178∼1234)은 고려 중기의 스님이다. 조계산 수선사(송광사)의 제2세 법주다. 어머니를 위해 재(齋)를 올린 다음 삭발하고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修禪社에서 머루르니 많은 수행자들이 운집하였다한다. 1212년 강종이 가람을 대폭 확장하였다. 왕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각스님에게도 왕이 만수가사와 마납(磨衲 : 법복의 하나) 각 한 벌과 香·茶·寶甁을 보냇다고 한다.
혜심스님은 1234년(고종 21) 6월 26일 나이 57세에 법랍 32년으로 입적했다. 왕은 그가 입적하자 진각국사(眞覺國師)라 시호했다.
저술로는 《선문염송집》30권, 《선문강요》1권, 《어록》2권, 《시집》2권 등이 있다. 다음의 시는 스님이 27세 시 億寶山의 白雲精舍에서 머무르고 있는 보조국사를 뵈러 오다가 산기슭에서 쉴때 보조국사가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지은 것이다.
아이를 부르는 소리 松蘿의 안개에 떨어지고 呼兒響落松蘿霧
차를 내는 향기는 石徑의 바람에 전해지네. 煮茗香傳石徑風
내 이제 白雲山에 들어가 才入白雲山下路己
老師를 뵈올 것이다. 參庵內老師翁
그 후 진각국사는 당시의 전권자 최충헌이 그를 개성으로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그의 두 아들을 보내 일용품과 함께 茶 · 香 · 藥 등을 보낸 일도 있었다. 다음의 시는 六根인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六箴’이라 題한 箴言 중 鼻箴 중에 있는 것으로 역시 綠茶를 달여 마시며 안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향기통을 망령되이 열지 마라 香處勿妄開
냄새나는 곳 강하게 막아 두고 臭中休强塞
향기는 天佛이 만듦이 아닌데 不作香千佛
하물며 죽음으로 나라에 머무를이야. 況爲屍注國
鐺中에 綠茶를 달여 화로에 安息을 태우니 鐺中煎綠茗
咄! 이 깊은 곳에서 지식을 구하라. 咄咄咄 甚處求知識
<무의자의 시집> 중에 있는 차시이다.
오래 앉아 피곤한 긴긴 밤 久坐成勞永夜中
차 달이고 무궁한 은혜 느끼네 煮茶備感惠無窮
한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 一盃卷却昏雲盡
뼈에 사무치는 청한(淸寒) 모든 시름 스러지네 徹骨淸寒萬慮空
3) 三藏 順菴 法師
의선(義旋)은 생몰연대가 미상이며, 중국 구법승이며, 천태종을 중흥시켰다. 호는 순암(順菴)이다. 충렬왕 때(1274∼1308) 이름있던 신하인 평양군 조인규(趙仁規)의 아들로 일찍이 출가하여 국통 무외(無畏)의 법을 이었다.
원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원제(元帝)로부터 정혜원통 지견무초 삼장법사(定慧圓通 知見無礎 三藏法師)의 호를 받고 천원 연성사 주지가 되었으며, 고려에서도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대사 삼대광자은군(福國佑世 靜明普照 玄悟大師 三大匡慈恩君)에 봉해져 영원사의 주지를 겸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년) 순종제(順宗帝)의 명을 받고 귀국, 금강산에 가서 개경(開京)의 천태종 묘련사(妙蓮寺)를 크게 중건했다. 충숙왕의 존경을 받으며 15년 동안 크게 교세를 떨친 그는 원혜(員慧)의 직계 제자이며, 무외의 조카라고도 한다.
삼장 순암 법사가 한송정에 들렀다가 우연히 ‘석지조’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어릴적에 묘련사 풀 숲에서 본 것과 흡사하여 사람들에게 물어 본 바 차를 마시는 돌 부뚜막이라고 해서 그것을 절에 옮겨다 사람들과 차를 나누며 담소를 나누는 내용이다. 다음과 같았다.
쌍명이 있던 시대가 지금 거의 2백 년이나 되는데, 비로소 나를 위해 한 번 나타나 앞에 두고 보람 있게 쓰이니, 바라건데 기를 지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고, 나의 구득을 축하해 주오. ···하략···.
묘련사 석지조기의 내용이다. 발견에서부터 사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 茶會가 다양하게 행해 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궁중에서, 사찰에서, 개인이나 단체에 이르기까지 내용이 다양하다. 한 개의 차 돌 부뚜막을 매개로 하여 차 생활이 깊이 있게 진행되었음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4) 圓鑑國師
원감국사 충지(冲止 : 1226∼1292)는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 송광사)의 제6세 國師이며, 호는 밀암(密菴)이며, 이름은 원개(元凱), 성은 위(魏)이다. 처음 법명이 법환(法桓)이었는데 나중에 충지로 고쳤으며, 스스로 호를 밀암이라 지었다. 1226년(고종 13) 11월 17일 충북 정안(定安)에서 호부 원외랑(戶部 員外郞) 위소(魏紹)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에 공부 시작하고, 1244년(고종 31) 19세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다.
원오국사 충경 천영(冲鏡 天英 : 조계산 제5세)이 개경 선원사에 주석해 있었으므로, 그곳에 가서 득도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강사(講師)로 다니다가 김해 감로사(甘露社)에 머물면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286년(충렬왕 12) 천영이 입적하자, 그를 이어 수선사에 들어가 개당(開堂)하여 조계산 제6세가 되어 법맥을이었다. 원나라 세조의 청으로 연경(북경)에 가서 세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금란가사 · 벽수(碧繡)장삼 · 백불(白拂) 등을 선사받아 돌아오기도 했다.
1292년(충렬왕 18) 1월 10일 나이 67세로 입적했다. 시호를 원감국사, 탑호를 普明이라 했다. 저술로는 《조계 원감국사 어록》1권의 서문과 《해동조계 제6세 원감국사가송》1권, 《해동조계 밀암화상 잡저》1권이 현존하며, 《원감국사집》1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감국사가 쓴 여러 편의 차에 대한 시가 있다. 최이(崔怡)가 차를 보내준데 대한 감사의 시(謝崔怡茶香韻)를 부쳐서 茶가 상당히 높은 가치의 선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척한 학이 소나무 위에서 날개를 고요히 내리고 瘦鶴靜翹松頂上
멎은 구름을 嶺 머리의 바람이 가볍게 쫓는다. 閉雲輕逐嶺頭風
이 중에 面目이 山넘어 천리니 箇中面目岡千里
어찌 다시 편지 한 통을 보낼까. 何更新飜語一通
차를 받들어 날로 보내며 나의 갈증을 적시고 擎茶日遺滋吾渴
밥 때가 지나면 주림을 치료한다. 過飯時敎療我飢
만일 山僧이 指示가 없으면 若謂山僧無指示
그대는 노파의 자비로움을 알라. 知君辜負老婆慈
병을 앓으면서 차를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 소중함을 느낀 시도 있다(病中言志).
세상의 어지러움을 떠나 任他世難離
방은 고요해 일이 없다. 一室靜無事
늙고 게으르고 年衰便懶散
병은 오래되고 遊嬉는 멀어졌으니 病久謝遊嬉
시차(釃茶)로 차를 끓여 釃茗聊澆湯
향기와 채소로 주림을 치료한다. 香蔬足療飢
이 가운데 깊은 맛이 있고 箇中深有味
기쁨이 있음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네. 且喜沒人知
산중(山中) 생활의 즐거움과 아름다움, 소박함을 예찬한(山中樂) 詩도 茶와 더불어 생활의 일부분임을 알 수 있다. 물 한 병과 차 한 통이 가져다 주는 것이 인간의 정신적인 행복은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깊은 숲 속의 굉굉(宏宏)한 마을 석경(石逕)은 가늘다. 林深洞宏石逕細
소나무 밑의 개울과 바위 밑의 샘 松下溪兮岩下泉
봄은 오고 가을은 가 人跡은 끊어져 春來秋去人跡絶
홍진(紅塵) 한 점도 緣이 없다. 紅塵一點無緣
밥 한 그릇에 반찬 한 가지 飮一盂蔬一盤
주리면 먹고 곤하면 잔다. 飢則食兮困則眠
물 한 병, 차 한 통 水一甁茶一銚
목 마르면 茶具를 차려 스스로 달이네. 湯則提來手自煎
한 손에 竹杖이요 한 손에 포단(蒲團)이니 一竹杖一蒲團
行함도 禪이요, 앉음도 禪이다. 行亦禪兮坐亦禪
산중의 이 기쁨 참 맛이 있어 山中此樂眞有味
是非와 哀樂을 다 잊으며 是非哀樂盡忘筌
산중의 이 기쁨 無價여서 山中此樂諒無價
수레의 학이나 돈 가짐도 원치 않는다. 不願駕鶴又腰錢
自適해 管束이 없이 평생 放曠해 適自適無管束
天年을 마치기를 원한다. 但願一生放曠終千年
詩와 禪, 茶가 하나 되는 생활을 보여주는 茶詩다.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선과 차의 완전 일치를 보여주는 차시도 있다.
경치가 아름다울 때면 서둘러 물 끊이고 친구 부르세,
차 마시는 일도 선(禪) 아닐 것 없으니,
선에 있어 격식은 초월하는 법, ···
5) 景瑚禪師
松廣山의 경호선사는 이제현(李齊賢(1287∼1367)과 동시대 사람으로, 스님은 이제현에게 좋은 차를 보내주었는데 스님의 작설차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시에 담아서 표현했다.
조계산 송광사는 고려후기부터 松廣山 定慧寺로 불렸는데, 당시 송광산에서는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정혜사의 제10세인 慧鑑國師 萬恒(1249∼1319)은 해마다 좋은 차를 東菴 李瑱(1244∼1321)에게 차를 보내면서 안부를 물었고, 그때마다 동암은 시로써 이를 화답했다. 이러한 인연은 대를 이어서 동암의 아들 李齊賢(?∼1321)과 惠鑑의 제자 景瑚 사이에도 茶와 詩가 오고가며 교류가 있었다. 중국을 다녀온 그가 왕의 명을 받아 정혜사의 법주로 부임할 때 개경의 많은 선비들은 전송하는 시를 지었고, 이제현은 그 시의 서문을 썼다. 이제현은 경호의 스승 혜감국사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이 시로 당시의 대를 이은 돈돈한 정을 알 수 있고, 또한 부처님을 모시고 배우고 있지만 세상에 매여 출가하지 못하였음을 아쉬워하고 있는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술이 오름에 마른 창자 연기나려 하고 枯腹止酒欲生烟
책을 보는 늙은 눈 안개서린 듯하네 老眼看書如隔霧
뉘라서 이 두 가지 병 감쪽같이 낫게 하리 誰敎二病去無蹤
나는 참으로 좋은약 얻어올데 있다네 我得一藥來有素
동암(東菴)은 옛적에 녹야에 은거하였고 東菴昔爲綠野遊
혜감(慧鑑)은 조계에 법주(法主)가 되어 갔네 慧鑑去作曹溪主
좋은 차 보내면서 안부를 물을 때면 寄來佳茗致芳訊
긴 시로 보답하여 깊이 흠모함을 표했네 報以長篇表深慕
두 분 풍류는 유불(儒彿)에서 뛰어났건만 二老風流冠儒釋
백년의 생사가 아침저녁 같구나 百年存設猶晨暮
의발(衣鉢)을 받은 스님 이 산에 사니 師傳衣鉢住此山
사람들은 스님의 법도 뛰어났다고 하네 人道規繩超乃視
내 평생 부족한 학문 후회하지 않지만 生平我不悔彫蟲
아버님의 일 계승함은 참으로 부끄럽네 事業今宣慚幹蟲
향화(香火)의 인연은 대를 이어 전하지만 傳家有約結香火
세속의 매인 몸 스님을 모실 수 없네 牽俗無由陪杖履
어찌 외로운 처지 물어 주기 뜻했으랴만 豈意寒暄問索居
가는 길 다르다고 싫어하지 않네 不將出處嫌異趣
서리 내린 수풀의 규모 일찌기 붙여 주고 霜林虯卵寄曾先
봄에 구운 작설차 여러번 보내왔네 春焙雀舌分亦屢
스님은 비록 옛생각 못잊는 걸 보이려 하지만 師雖念舊示不忘
공도 없는 나는 많이 받기 부끄럽네 我自無功愧多取
낡고 조그마한 집 마당엔 풀이 자라고 數間老居草生庭
유월의 궂은 장마에 길은 진흙투성이네 六月愁霜泥滿路
갑자기 문 두드려 놀라 보니 대바구니 보내와 忽驚剝啄送箱籠
향기롭고 신선하기 옥과(玉胯)보다 좋은 차 얻었네 又獲芳禪逾玉胯
향기 맑으니 한식전에 딴 것이요 香淸會摘火前春
빛 고우니 아직도 숲 아래의 이슬 머금은 듯 色嫩尙舍林下露
돌 솥에서 끓는 물 솔바람 소리 내고 颼飅石䂪松籟鳴
자기 찻잔에 도는 무늬 꽃방울을 토한다 眩轉瓷甌乳花吐
산곡(山谷)이 운룡(雲龍)을 자랑할 수 있으랴 肯客山谷託雲龍
설당(雪堂)의 월토(月兎) 차가 부끄러움 깨닫노라 便覺雪堂羞月兎
서로의 교분에는 혜감의 풍류 남았지만 相投眞有慧鑑風
사례하려 해도 동암의 싯귀가 없구료 欲謝只欠東菴句
붓 솜씨 노동을 본받기 어려운데 未堪走筆效盧同
하물며, 육우를 좇아 다경(茶經)쓰기를 흉내내랴 況擬著經追陸羽
원중(院中)의 화두(話頭)랑은 찾지마오 阮中公案勿重尋
내 또한 이제부터 시에 전념해야겠소. 我亦從今詩入務
6) 懶翁和尙
나옹 혜근(惠勤 : 1320∼1376)은 고려 후기의 스님이다. 호는 나옹, 자호는 강월헌(江月軒), 성은 아(牙). 영해부(寧海府 : 경북 영덕)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서구이며, 어머니는 鄭씨이다.
지공에게서 법을 들은 그는 다시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임제 18대손인 평산 처림(平山 處林)의 법을 얻고 불자(拂子)를 전수받았다. 공민왕 20년(1371)에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 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中興祖風 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고 수선사 주지로 가 있었다.
스님은 가송(歌頌)을 많이 남겨 우리나라 가사문학(歌辭文學)의 효시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시를 사랑한 다인이기도 하다. 懶翁王師는 1376년(우왕 2) 5월 15일 나이 57세, 법랍 37년으로 입적했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라 했다. 저술로는 나옹화상 어록 1권과 나옹화상 가송 1권이 현존한다.
懶翁王師에게는 趙州風으로 보는 茶詩를 남겼는데, 이 속에는 자신과 자연은 조작하여 될 수 없으니 부질없이 헛수고 하지 말라는 귀한 가르침이 있다.
本自와 天然은 조작함이 아니니 本自天然非造作
어찌 밖을 향해 힘써 玄旨를 구할 것인가. 何勞向外別求玄
다만 일념으로 마음에 일이 없고 但能一念心無事
목마르면 차 달이고 곤하면 잔다. 渴則煎茶困則眠
목마르면 차마시고 피곤하면 잔다는 평범함 속에 깨친 자의 慧眼이 번뜩이는 것이다. 억지로 번뇌를 쌓지 않고 本自와 天然을 존중함이 차를 달이는 마음이다.
3. 朝鮮時代
1) 涵虛得通
함허(涵虛己和 : 1376∼1433)스님은 1376년(우왕 2) 11월 17일 충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말 조선초의 스님이다. 호는 득통(得通) · 무준(無準), 실호는 함허당(涵虛堂), 옛이름은 수이(守伊), 성은 유(劉)다.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했으나 1396년(태조 5) 21세에 친구의 죽음을 본 뒤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서 출가했다. 이듬해 회암사에 가서 무학자초를 만나 법요를 들은 뒤 여러 곳으로 다니다가 다시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용맹정진하여 크게 깨쳤다. 1412년(태종 12) 평산 자모산 연봉사(煙峰寺)의 작은 방을 함허당이라고 이름하고 3년간 수행했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으로 가서 머물며여러 성인에게 공양하였다. 영감암(靈鑑菴)에서 이상한 꿈을 꾸고 월정사에 머물고 있을때 왕이 그의 소문을 듣고는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주석하게 해 4년 동안 머물다가 사양하고 나왔다.
희양산 봉암사에서 1433년(세종 15) 4월 1일 나이 58세, 법랍 37년으로 입적했다. 탑비는 봉암사에 있고, 부도는 경기도 가평군 현등사에 있다.
저술로는 원각경소 3권 1책, 금강경오가해 설의 2권 1책, 현정론 1권, 반야참문 1권, 윤관(綸貫), 함허화상어록, 영가집 설의(永嘉集 設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이 있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나니 一椀茶出一片心
한조각 마음에 한 잔 차 있나니 一片心在一椀茶
마땅히 한 잔 차 맛보고 當用一椀茶一嘗
한 맛에 무량한 즐거움 나나니. 一嘗應生無量樂
이외에도 山中의 한가함을 노래하며 차를 달이며 禪悅을 즐기는 노래를 잘 표현한 시도 있다. 함허스님은 시대의 은둔자이며, 시대를 맞서기 보다는 수행과 사상을 통하여 佛法의 正法眼藏을 기원한 대표적 인물이다.
2) 金時習
梅月堂((雪岑 : 1435~1493)은 이름이 김시습, 자는 悅卿, 호는 東峰이다. 고려의 시중 金台鉉의 후손이며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3세에 이미 시에 능했고, 5세에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다.
1455년(세조 1)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통곡했다. 1465년 경주 남산에서 금오신화라는 소설을 지은 사실은 유명하다. 1468년(세조 14) 금오산에서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고, 1476년(성종 7) 산거백영후지를 지었다. 이외의 저술로는 매월당사유록(四遊錄), 매월당집, 화엄일승법계도주, 십현담요해(十玄譚要解), 법화경별찬 등이 있다.
설잠상인은 많은 저서와 詩文을 남겨 업적을 기리거니와 아울러 茶道에도 깊은 조예가 있음을 자신의 茶詩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설잠상인의 茶詩, 「雀舌」이라 題한 詩다.
南國의 春風 이 가볍게 일고 南國春風軟欲起
茶나무 잎 밑에 뾰족한 부리가 깃들었다. 茶林葉底含尖觜
가려 딴 嫩芽는 靈氣에 통하고 揀出嫩芽極通靈
맛과 品格은 일찍 陸羽의 茶經에 실렸다. 味品曾收鴻漸經
좋은 찻잎은 잎(旗)과 눈(芽, 槍) 사이에서 따고 柴芛抽出旗槍間
鳳紋의 餠茶와 龍紋의 團茶는 가장 좋은 모양이다. 鳳餠龍團徒範形
碧玉의 甌中에 活火로 끓이면 碧玉甌中活火烹
게 눈이 처음 생기고 다음 松風聲이 난다. 蟹眼初生松風鳴
山堂의 고요한 밤에 손과 둘러앉아 山堂夜靜客圍坐
雲膄茶를 한 번 마시니 두 눈이 밝아지네. 一啜雲膄雙眼明
堂家에서 잔을 비우는 사람은 멋없는 사람 堂家淺斟彼粗人
어찌 勝雪茶의 淸許함을 알 수 있으랴. 那識雪茶如許淸
이 시에서 茶生活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서거정이 작설차를 보내 준 설잠상인에게 감사하면서 쓴 시에서 차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이 시에서 볼 때, 산중에서 스님의 유일한 즐거움은 봄 우뢰 울지 않고 동물잠 깨기도 전에 차를 따는 것이며, 혜산천을 길어다 알맞게 피는 불에 손수 차를 달이는 것이다. 그리고 속세의 사람들을 위해서 茶를 계림의 설색지로 곱게곱게 싸서 선물도하는 여유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산방은 맑고 고요한데 밤은 어찌 긴가? 山房淸悄夜何長
한가로이 등불 돋우며 땅바닥에 눕는다. 閑剔燈火臥土床
때론 땅화로에 의지하니 배불러 좋고 賴有地爐偏饒我
손님 올 땐 다시 일어나 찻물 달이네. 客來時復煮茶湯
梅月堂輯 권12, ‘양다(養茶)’라는 시에서는 그가 직접 차나무를 가꿨음을 보여주고 있다. 차나무가 자라는 모습과 가꾸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3) 普雨和尙
호가 虛應堂인 보우(1515∼1565)스님은 승과를 재설치하게 한 殉敎者이다. 1530년(중종 25) 16세에 금강산 마하연에 입산하여 참선과 경학연구에 몰두하다가 1536년 하산했으나, 1538년 관리들의 횡포로 사찰이 불타고 주지 등이 투옥되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1550년(명종 5)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켜 봉은사를 선종, 봉선사를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로 정했다. 저술로는 허응당집 3권 1책과 나암잡저 1권, 수월도량 공화불사 여환빈주 몽중문답(水月道場 空花佛事 如幻賓主 夢中問答) 1권, 권념요록(勸念要錄) 1권 등이 있다. 허응당집은 시와 게송을 모은 것이며, 나암잡저에는 어록 · 발문 · 잡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1573년(선조 6) 문인인 태균(太均)이 편찬하고, 직지사 주지 사명 유정(四溟 惟政)이 발문을 짓고 교정을 한 것이다. 저서도 남기고 생활속에 茶詩도 남겼다.
작은 암자의 높고 넓은 찬 방에 小菴高並廣寒鄰
백발의 선승이 홀로 누워 잔다. 白髮高僧獨坐眠
안개와 구름에 취해 甲乙이 迷했으니 醉霧酣雲迷甲乙
꽃이 피고 잎이 짐이 몇 해런가. 開花脫葉紀時年
한 쌍의 학이 茶煙 밖에서 늙고 一雙鶴老茶煙外
첩첩 봉우리에 약 찧는 절구가 빠르다 萬疊峯回藥杵迅
이 가운데 仙境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聞說此中仙境在
내 스승이 바로 仙人이런가. 吾師無乃永卽仙
깊은 산중에서 한가하게 세상의 是非를 떠나서 자연의 오묘함을 玩嘗하고 세상을 떠나 茶를 벗하여 생활하니 한 쌍의 학이 다연(茶煙) 밖에서 늙는다고 표현하였다.
이 시는 명(明)과 웅(雄)이라는 두 벗에게 쓴 시로써 허송세월과 세상의 명예는 마물(魔物)로 표현하였고, 차로서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아득히 생각나는 태백산의 여러 선방의 벗들 緬惟太白諸禪友
요사이 얼마나 많이 도(道)에 참심(參尋)했는가 近歲參尋道幾多
흐르는 물과 같은 세월은 늙음이 찾아오는 재앙이며 流水光陰侵老崇
뜬구름 감은 명예는 선정(禪定)을 방해하는 마물(魔物)이라네
浮雲名譽損禪魔
다로(茶爐)에 차(茶) 끓으면 함께 마시고 싶고 茶爐茗熟懷同飮
글씨 쓰는 휘장에 시 쓰면 함께 읊조리고 書幌詩成憶共
그들과 나 정(情) 얕지 않나니 君旣與吾情不淺
가을바람 불거들랑 소매 이어 함께 찾아옴이 어떤가 秋風連매訪如何
4) 西山大師
휴정(休靜 : 1520∼1604)은 조선 중기의 스님이며 호는 청허(淸虛) · 서산(西山), 자는 현응(玄應), 별호는 백화도인(白幻人) · 풍악산인(楓岳山人) · 묘향산인(妙香山人) · 두류산인(頭流山人)이라 불렸으며, 성은 최(崔), 본관은 완산, 어릴적 이름은 최여신(崔汝信)이다. 아버지는 최세창(崔世昌), 어머니는 한남 김씨로 안주(安州 : 평남 안주군) 출신이다. 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0세에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안주 목사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입적된 후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1534년(중종 29) 15세에 진사과에 낙방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숭인(崇仁)에게 공부했고, 부용 영관(芙蓉靈觀)을 전법사로 모셨다. 1552년(명종 7) 부활된 승과에 급제했다. 뒤에 대선(大選) · 중덕(中德)을 거쳐서 양종판사(兩宗判事)를 겸하고, 그는 곧 판사직이 출가의 본 뜻이 아닌 것을 깨닫고 1557년(명종 12) 겨울에 물러나 다시 운수의 길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신을 했으나 승병장 기허 영규(騎虛 靈圭) 등이 청주성을 탈환하자, 왕은 감격해서 묘향산에 있던 그를 불러 팔도십육종 도총섭(八道十六宗 都摠攝)이 되어 국난을 타개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1604년(선조 37) 1월 23일 나이 85세, 법랍 70년으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했다.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1권, 三家龜鑑 1책, 선교석(禪敎釋) 1권, 선교결(禪敎訣) 1권, 운수단(雲水壇) 1권, 설선의(說禪儀) 1권, 청허당집 2권, 벽송행략(碧松行略 1권, 심법요(心法要) 1권, 회심곡(回心曲) 1편, 서산대사 비결 1장 등이 있다.
수행과 보살행 중에도 차로써 벗을 삼아 생활하였고, 茶詩로서 茶生活을 짐작 할 수 있다. 스님의 차시(茶詩) 8편이 서산대사문집에 있다.
만국(萬國)의 서울은 개미집 같고 萬國都城如蟻塚
千家의 호걸은 초벌레 같다. 天家豪傑若醯鷄
달 밝은 밤에 淸虛의 베개를 베고 누었으니 一窓明月淸虛枕
차 끓이는 소리만이 하염없이 들린다. 無限松風韻不齋
젊은 날의 불 같은 수행과 나라가 存亡의 위기에 처했을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왜적을 물리친 그러한 모습은 볼 수 없다. 단지 그것을 비껴선 여유로움이 茶生活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낮에는 차 한 잔 晝來一椀茶
밤에는 잠 한숨 夜來一場睡
푸른 산과 흰 구름 靑山與白雲
함께 무생사를 말하네. 共說無生事
흰구름은 옛 벗 白雲爲故舊
밝은 달이 생애(生涯)로세. 明月是生涯
깊은 산 속에서 萬壑千峰裏
사람 만나면 차를 드리지. 逢人卽勸茶
솔탑(松榻)은 산비에 울리는데 松榻鳴山雨
옆사람은 매화 떨어짐을 읊조린다. 傍人詠落梅
한바탕 봄 꿈이 끝나니 一場春夢羆
시자(侍者)가 차(茶)를 달여 오누나. 侍者點茶來
스님의 일생 하는 일 衲子一生業
차 달여 조주(趙州)에게 드림이라. 烹煎獻趙州
마음은 재 되고 머리칼 이미 희었으니 心灰髮己雪
어찌 다시 남주를 생각하랴. 安得念南州
스님 몇 몇 有僧五六輩
내 암자 앞에 집을 지었네 築室吾庵前
새벽 종에 함께 일어나고 晨鐘卽同起
저녁 북소리에 함께 잔다. 暮鼓卽同眠
시내의 달 길어(汲) 共汲一澗月
차(茶) 다릴제 푸른 연기난다. 煮茶分靑烟
날마다 무슨 일 의논하는가. 日月論何事
염불과 참선이네. 念佛及參禪
걷고 걷고 또 걸어서 步步又步步
층층한 벼랑 몇 겹이더냐 層崖幾重重
구렁에 흰 구름 일어나 白雲生洞壑
향로봉을 문득 잃었구나. 忽失香爐峰
시냇물 길러 낙엽 태워 汲潤燃秋葉
차 달여 한 번 마셨다. 烹茶一納胸
밤 되어 바위 밑에 자니 夜來巖下睡
혼(魂)은 나르는 용(龍)을 탓다네. 魂也御飛龍
내일 아침 천하를 굽어보면 明朝俯天下
온갖 나라가 벌(蜂)처럼 벌려 있으리. 萬國列如蜂
茶詩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청빈과 무욕, 自然을 노래한 裏面과 外面의 精製된 모습을 보여준다. “茶에만 가치를 둔 것이 아니고 푸른연기”에도 함께 가치를 둔 것이 인상적이다. “밤 되어 바위 밑에 잤다”는 것은 자연과의 절대적인 同和를 말한 것이어서 聖스럽게 보인다. ‘스님의 일생 하는 일이 차달여 조주스님에게 드리는 일’이라는 구절에서 차생활이 곧 휴정스님의 수행과 생활의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알게 한다.
5) 浮休스님
선수(善修 : 1543∼1615)스님은 조선 중기스님이며, 호는 부휴(浮休), 성은 김(金). 전북 오수(獒樹)에서 1543년(중종 38) 2월 3일 태어났다. 1562년(명종 17) 20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신명(信明)에게 출가하고, 뒤에 부용 영관(芙蓉 靈觀)의 법을 이어받았다.
독서를 많이 했고, 글씨에도 뛰어나 사명 유정과 함께 명성을 떨쳐서 당시에는 이난(二難)이라 했다. 구천동(九天洞)에서 圓覺經을 읽었는데, 한 마리의 큰 구렁이가 와서 듣고서 환생했다고 한다. 평생토록 신도들로부터 받은 모든 시물은 남김없이 모두 그 자리에서 나누어 주고 자신이 가지는 일이 없었다. 그의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도를 묻는 무리가 항상 7백여 명에 달했다.
송광사에서 칠불암(七佛菴)으로 들어가 1615년(광해군 7) 11월 1일 각성에게 법을 부촉하고 나이 73세, 법랍 54년으로 입적했다. 나라에서 시호를 홍각등계(弘覺登階)라고 추증했다. 저술로는 부휴당집 5권 1책이 있는데, 시(詩) · 소(疏) · 기(記) · 서(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봄 지나자 산란한 시흥(詩興) 詩恩經春亂
밤 들수록 짙은 이별의 정 離情入暮饒
밝는 날 아침 차 한잔에 明朝茶一椀
전송하는 호계의 다리. 相送虎溪橋
6) 四溟大師
유정(惟政 : 1544∼1610)은 조선중기의 스님이다. 승병장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사명당(四溟堂), 이름은 임응규(任應奎), 본관은 풍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삼강동(고라리)에서 1544년(중종 39) 10월 17일 태어났다.
사명대사가 태어난 밀양은 훌륭한 차인들이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며 또한 고려시대부터 밀양의 명물인 영남루에서는 차 겨루기가 유명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작설차가 밀양의 명산품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후 왕명에 의하여 일본에 사절단을 갔다 왔는데, 일본에서는 ‘사명’이라는 이름의 차와 사명다도를 남길 정도였다.
어린시절 친구들과 함께 알밤을 주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부가 잡은 자라가 불쌍해 친구들이 주은 밤까지 어부에게 주고 자라를 사서 물속으로 돌려보냈다. 할아버지에게 역사를 배우고 보다 우월한 학문을 하고자 1556년(명종 11) 13세에 황여헌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5세 때 “그까짓 천한 속학은 배워서 어디에 쓰겠느냐”며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黙)에게 출가했다. 여기서 불교를 깊이 공부하고 1561년(명종 16) 선과에 합격했다. 그 후 선비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1573년(선조 6)을 전후하여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왕은 여러 공로를 치하하며 선교양종판사직을 제수했으며, 전공을 치하해 당상관(堂上官)에 오르도록 했다. 나중에 왕이 그를 궐내로 불러 “지금 국세를 생각하여 환속한다면 백리(百里)의 책임을 맡기고, 3군을 통솔하게 하겠다.” 했으나 사양했다. 명나라 장수 유정과 순천에서 전공을 세워 1602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왕의 요청으로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가서 화친을 맺고 3천 5백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왕은 그에게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3대를 추증했다.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나이 67세, 법랍 54년으로 입적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탑호는 종봉(鍾峰)이다. 저술로는 四溟大師輯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조계(曹溪)를 이은 백대의 손자 係出曹溪百代孫
행장(行裝)이 가는 곳마다 사슴과 벗한다. 行裝隨處庶爲群
옆에 사람들아, 헛되이 날을 보낸다 이르지 말라. 傍人莫道虛消日
차(茶)를 달이는 여가에 흰 구름을 본다. 煮茶餘閑看白雲
모이고 흩어짐이 속세의 인연 聚散皆因宿有緣
바다 동쪽 하자에 만날 줄 뉘 알리 海東那料此同筵
봄 정자에서 선다(仙茶)를 다려 마시니 春亭烹進仙茶飮
푸른 풀과 내 끼인 꽃이 눈 앞에 가득하구나 靑草烟花滿眼前
황정(黃庭)을 손에 들고 신결(神訣)을 묻고자 欲把黃庭問神訣
멀리 바다 건너 신선의 문 두드렸더니 遠勞乘海款仙局
사미(沙彌)를 불러 차 석잔 내오니 喚沙彌進茶三琬
동원(東院)의 종풍(宗風) 예와 같구나. 東院宗風古典形
7) 海印과 靜觀
해인(海印 : 1691~1770)의 차생활에서 잔을 세 번 권하는 것이 이채롭다.
마루에 가득한 고승들 모두가 각처에서 왔는데 滿堂高友盡東南
천리의 험한 길 걸어 모두 여기 모였구나 千里問關此處參
우리 모두 나그네라 위로할 것 없나니 俱足客中無所慰
다만 찻잔 들고 그대에게 세 번 권하네 只將茶椀勤君三
정관(靜觀 : 1533~1608)이 쓴 시에서는 스님들은 불공(佛供) 뒤에 차 한 잔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간결하고 운치있는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솔바람 소리는 사람의 귀를 맑게 해 주고 松韻淸人耳
산골 물 소리는 꿈을 이끌어 간다 溪聲惹夢魂
불공이 끝난 뒤의 한 잔 차에 齋餘茶一椀
아침 저녁의 풍월이 더불어 있네. 風月共朝昏
8) 草衣禪師
(1) 誕生
의순(意恂 : 1786∼1866)은 조선 후기의 스님이다. 다도(茶道)를 중흥시켰다. 호는 草衣 · 일지암(一枝庵), 자는 중부(中孚), 성은 장(張). 1786년(정조 10) 4월 5일 전남 나주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2) 出家修行
초의는 5살 때 뚝을 헛디뎌 거친 물결에 떠내려가는 위험을 당했을때, 지나던 어느 스님에 의해 구조되어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살게 되었다. 이에 초의는 부처님에게 보은하고 사는 발심이 나게 된다. 15세에 마침내 출가의 서원(誓願)을 세운 것이다. 15세(1800년) 되던 해 남평(南平)의 운흥사(雲興寺)에서 벽봉 민성(碧峰 敏性)에게 삭발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19세 시에 스님은 월출산에 올라, 해가 떨어지고 달이 뜨는 밤에 달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우연히 마음이 열리는 큰 체험을 하게 된다. 그 후 대둔사(대흥사)의 완호 윤우(玩虎 倫佑)에게 구족계를 받고 법맥을 이었으며 草衣라는 법호를 받았다.
해남의 두륜산 일지암에 은거하여 40여 년을 참선하다 1866년(고종 3) 7월 2일 나이 81세, 법랍 65년으로 입적했다.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 草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4세 때(1809년)의 일이다.
선사는 수행과 실천에서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내외로 교류가 넓어서 세상일에 깊어지자 39세(1824) 모든 것을 정리하여 두륜산 대흥사 계곡에 은거하였으며, 일지암(一枝庵)인 초막을 짓고 여생을 마첫다.
초의스님은 중국의 茶祖로 불리는 육우나 일본의 茶聖 센노리큐에 뒤지지 않는 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연구하였다.
(3) 茶神傳 · 東茶頌
茶神傳은 초의스님이 1828년(순조 28)에 시자인 수홍(修洪)의 청에 의해 增補萬寶全書를 근거하여 「다경채요(茶經採要)」에서 <다신전>을 초록(抄錄)한 것이다. 지리산 七佛禪院에서 찬 한 것이다.
초의스님은 茶神傳은 차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역할을 하는 내용들인데, 누구던지 읽어보면 쉽게 이해되도록 정리된 내용들이다.
茶神傳에 이어서 약 10년 뒤에 초의선사는 東茶頌을 저술하였다. 이는 진도(珍島) 부사(府使)인 변지화(卞持和)에게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가 초의선사에게 다도(茶道)에 관해서 물어 오므로 청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스스로 “고인소전지의근술(古人所傳之意謹述)”이라고 말했듯이 당시 유행했던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송(頌)마다 고인(故人)들의 여러 문헌과 사구(四句)를 한 송(頌)으로 보면 초의선사가 술(述)한 것은 총 17송이고 백파거사(白波居士) 신헌구(申獻求)의 제(題)를 합하면 동다송은 총 18송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東茶頌은 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효능, 이름과 품질, 차 만드는 일, 물에 대한 품평, 끊이는 법, 마시는 법에 대하여 실체적인 내용들이 있다.
초의선사는 법도에 어긋난 차에 대해 “천하에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그르친다”고 한탄하였으며, 채다 시기를 다경(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전후의 시기는 토산 차에는 적합하지 않고 입하(立夏) 전후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차를 딸 때 그 묘(妙)를 다하고, 차를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좋은 물을 얻어서 중정(中正)을 잃지 않을 때 정성을 다하고, 좋은 물을 얻어서 중정(中正)을 잃지 않을 때 체(體)와 신(神)이 조화를 이루어 비로소 다도(茶道)가 완성된다고 하였다. 마지막 송(頌)에서는 초의 자신의 다선삼매(茶禪三昧)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운학스님은 저서에서 “육우의 茶經이 육우를 중국의 다조(茶祖)로 만든 것처럼 초의를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봄에 충분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 茶의 傳統이 조선조 말에 草衣 意恂에게서 결실을 맺고 오늘에 전해오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4. 近世
큰 물줄기가 드러난 것은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수많은 물줄기가 있다. 차 생활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기록에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현대에서 茶의 전승과 교육은 크게 양대산맥으로 나뉜다. 그것은 초의선사의 유적지인 海南 大興寺를 중심한 大屯學會와 晋州의 曉堂을 중심한 頭倫文化硏究會, 그리고 각지의 중요 寺刹과 다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근세 차인의 중심은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應松 朴暎熙스님과 晋州를 중심한 孝堂 崔凡述스님으로 축소될 수 있다.
1) 應松
應松(1892∼1990)스님은 의병이며 獨立運動家다. 이름은 박영희(朴英熙)이며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16세부터 의병활동을 벌였으나, 1909년 18세에 의병대장 황준성(黃俊聖) 대령이 전사하자, 해남 대흥사의 취은에게 출가했다. 중앙학림을 다니다가 1919년 용운 봉완(龍雲 奉玩 : 卍海의 호)의 권유로 3〮〮〮〮〮·1 독립운동에 참여, 봉완의 밀명을 민족대표들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고, 탑골공원의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일경을 피해 만주로 가서 봉천성 유하현 고산자(奉川省 柳河懸 孤山子)에 있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 장교가 되어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1920년 4월 몰래 귀국, 금강산에 머물며 3년여 동안 스님들의 반일 독립정신 고취에 헌신했다. 이어 완도의 소학교, 대흥사의 장춘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8년 중앙불교전수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봉완의 만당(卍黨)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흥사 주지를 지내며, 만당의 활동자금 조달에 주력했다. 1938년 만당 당원들이 검거되자, 일경에 잡혀 40여 일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광주시 서구 쌍촌동 극락암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90년 2월 6일 나이 99세 법랍 81년으로 입적했다.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8세 출가 후 대흥사의 산 역사로 草衣가 이곳에 남겨온 茶風을 그대로 간직해온 스님이다. 이에 대하여 운학스님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오늘날 우리가 초의를 이야기하고 우리 차의 전통을 이야기하게 된 것도 거의 이 응송노장의 공로다. 응송스님은 평생 차와 함께 살기도 했지만 그는 초의선사의 유품을 오늘에 전해주어 오늘날 우리의 다전(茶典)들을 말하게 된 것이다.
우리차의 전통과 전통이 되는 유품을 응송스님이 지키고 전해주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우리차의 운동을 불러일으킨 분이란 것을 설명하고 있다.
東茶頌 등을 알고 우리의 茶典으로 자랑하는 것도 응송이 筆寫本을 보존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기타 중요한 초의자료는 응송스님에게서 전해진 것이다. 근래 우리 차의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도 응송스님에게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응송은 草衣의 사상을 가장 많이 받고, 우리 차의 원형을 가장 순수하게 간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응송스님에게서는 차의 형식같은 것은 전혀 볼 수 없고, 이론과 사상이 앞섰음을 엿볼 수 있다.
응송과 효당 두 분은 우리차의 원류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에게서 강조된 이야기들은 茶器와 茶禮 그리고 白山茶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長白山 중에 있었던 白山茶를 曉堂은 생강나무일 것이라 했는데, 응송은 석남과에 속하는 철쭉꽃일 것이라 했다. 또한 이것은 檀君國祖께서 처음 마신 차인 것이라 전제하고, 현재의 백두산의 원래 거주인들이 끓여 마시는 차가 아닌가 했다.
淸 건륭연간(乾隆年間)에 중국의 安春香이 吉林에서 白山茶를 보내달라는 청이 있었고, 삼한정벌론(三韓征伐論)을 주장했다는 일본의 전설상의 인물 무내숙녜(武內宿禰)의 기사에도 우리 나라 白山茶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우리 나라 재래의 白山茶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응송은 茶에 대해서는 龍鳳團茶 이상으로 勝雪茶의 上品을 이야기하며 大院君도 고려 때의 한 古塔을 헐어 勝雪茶 세 개를 구했다는 기록을 들고 秋史도 중국의 대학자 예운대의 초청을 받고 勝雪茶를 마신 것을 가장 인상 깊어 했다는 말을 했다. 勝雪茶는 말탈 때의 발거리 모양으로 표면에는 銙字 모양으로 새겨 놓은 것이다.
응송스님이 茶文化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을 운학스님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응송스님은 그 시기에 모두가 외면한 초의선사의 유품을 지키고 정신을 연구했으며 오늘날 까지 전해오게 되었다. 이로 볼 때 현대에서 茶문화 발전의 시조로 봄이 충분하다고 본다.
2) 曉堂
曉堂스님은 응송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차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주로 慶南 泗川 多率寺를 중심으로 한 晋州를 무대로 하여 차의 보급과 茶會 조직을 통하여 차의 부흥운동을 하였다. 효당의 차문화 부흥은 불교 정신을 근간으로 한 민족적 기질확립과 정체성 확립의 의지가 뚜렷하다.
김운학스님은 韓國의 茶文化에서, “오늘날 한국에 차의 관심이 이만큼 고조되고 요즘 그 붐마저 일게 되게끔 된 뒤에는 이 효당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흥사 응송을 중심으로한 우리 차의 것들을 효당이 소개하고 강연하고 또 <讀書新聞>이나 지상에 발표함을 계기로 우리는 우리 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효당은 1904년 다솔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4년 절 마을에 문명퇴치를 위한 야학 광명학원을 설립하였다. 김동리는 이곳의 야학교사 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차 심부름을 하였으며, 효당이 14세에 多率寺에 입사하여 생활하였으므로 그가 우리 차에 대한 정서가 깊이 인식되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효당의 다솔사에는 절 앞뒤로 茶木이 산재해 있었고, 이곳에는 예로부터 차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용하여 전해 내려오는 부엌에 차생활 장식이 있다. 효당에게는 韓國의 茶道란 저술이 있어 그의 茶道와 사상을 알 수 있다. 다솔사에서 萬餘坪의 産地에서 ‘般若露’란 좋은 차를 생산하였다.
응송은 차의 傳受者로, 효당은 차의 전개자로 현대 茶史의 큰 역할을 하였다. 어려운 시기에 차를 연구하고 보급했다는 것은 가히 순교자적인 사명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의 문화가 과거와 단절된 문화 일변도 상황에서 전통문화의 유지, 전승, 발전의 고리는 매우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Ⅵ. 결론
佛敎文化의 發生은 修行과 敎理에 대한 理解와 實踐으로 불교와 관계되어 독특한 문화가 생겨나고 발전하였다. 불교의 應用文化인 茶文化는 대단한 關係性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 불교의 본질이 아닌 派生된 應用 文化이면서도 修行 生活의 중요한 영역을 지키고 있다. 나아가 大衆에게 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茶文化는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비중있는 영역으로 維持 · 發展되고 있다. 향후 다양한 문화의 발생과 접촉에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매우 소중한 것임을 차문화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과거와 현대를 통틀어 비중있는 전통문화는 ‘僧家의 茶文化’이다. 승가의 차문화는 각 시대에 걸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불교의 諸般 儀式중에는 각종 다례가 많이 행하여졌다. 茶香禪味에서는 의식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폭넓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급변하는 현대 생활중에도 사찰에서는 전통적으로 과거와 연결된 차와 관계된 내용이 많다.
사찰에서 차가 중요하게 쓰이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째가 차의 근원으로 확인되는 ‘알가(공덕수.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물)’는 불교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해석하고 사용하였다. 둘째는 불교의 계율이 철저한 불음주(不飮酒)를 실천하기 때문에 그 원인이 있다. 셋째, 채식(菜食)을 하는 수행생활에서 차의 다양한 효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차는 음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우(鉢盂)와 다구(茶具)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발우와 다기의 재질이 흙으로 구운 것이 같으며, 발우와 다완은 모양이 흡사하며, 발우공양법과 다례의 절차 또한 흡사하다.
佛敎의 茶禮는 역사만큼이나 다양하다. 부처님 수행시절 수자타 소녀의 유미죽 공양과 초기불교 시대에 사용된 알가수와 알가배의 역사가 있다. ‘알가’는 묘원(妙原)이며, 묘원은 무착바라밀(無着婆羅密)이다. 화엄경에는 妙茶로써 시방국토의 모든 영가들께 공양한다고 하였다. 茶는 불교문화와 함께 수입되어 獻茶供養의 寺院茶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된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는 승가 대중들의 생활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조칙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이 청규는 전 4장과 후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4장은 축리장, 보은장, 보본장, 존조장이다. 후 5장은 주지장, 양서장, 대중장, 절랍장, 법기장이다. 梁나라 光宅寺 法雲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禪院생활의 樣式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儀禮나 일상생활에서 茶는 빠져서는 안되는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국에서부터 신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규의 기본 원형은 지켜지고 있다.
梵音集의 다례는 우리나라 제2의 재의작법집대성(齋儀作法集大成)이다. 齋儀 쪽으로 만들어진 다례이다. 영가전에 올리는 다게, 고승사리운의 다게, 새벽마다 올리는 다게, 육색장 축원의 등이 있다. 다례에는 여러 다례의 유형이 있다. 충담선사, 보천 효명태자, 원효성사, 지장법사, 수철화상등의 행다법이 있다.
스님들의 차생활은 개인 영역에서부터 국가, 단체, 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차 생활이 영위되었다. 차 생활은 필연적으로 차 도구 제작과 차 나무 재배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통도사에는 다소촌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절 밑에 차를 재배하는 마을이 있었다. 다른 여러 사찰들도 차 재배와 연관이 있다. 다기의 제작도 차의 부흥과 더불어 사찰에서 가마를 만들어 제작하였다. 신라시대의 元曉聖師와 忠談師 등의 차인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과 진각국사, 삼장 순암 법사 등의 뛰어난 차인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함허득통과 김시습, 보우화상, 서산대사 등의 훌륭한 차인들이 있다. 후기에는 茶神傳과 東茶頌을 편저한 초의라는 뛰어난 인물로 인해 쇠잔해 가던 차를 부흥 시키는 계기도 있었다.
近世에는 應松과 曉堂이라는 두 걸출한 茶人이 있어서 차문화가 재차 발전하는 동력이 되었다. 응송스님은 해남 대둔사 등에 거주하였다. 초의 선사의 유품을 오늘에 전해주어 우리 차의 전통을 알 수 있게 하였고, 다전(茶典)들을 말하게 된 것이다. 효당스님은 경남 사천 다솔사를 중심으로 진주를 무대로 飮茶의 보급과 차 운동을 전개하였다. 효당은 운동가적이고 사상가적이다. 오늘날 차문화가 발전된 것은 효당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평가한다.
많은 문화 중에서 이 茶文化는 불교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동양의 종교인 불교와 훌륭하게 접목된 茶文化는 有形無形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본다. 檀君朝鮮의 나라인 大韓民國의 傳統文化인 불교문화를 지키고 가꿀 때 국가 미래의 보장과 으뜸 문화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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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요지
佛敎文化의 發生은 修行과 敎理에 대한 理解와 實踐으로 불교와 관계되어 독특한 문화가 생겨나고 발전하였다. 불교의 應用文化인 차문화는 대단한 關係性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다. 불교의 본질이 아닌 派生된 응용 문화이면서도 수행 생활의 중요한 영역을 지키고 있다. 나아가 大衆에게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茶文化는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비중있는 영역으로 維持․發展되고 있다. 향후 다양한 문화의 발생과 접촉에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매우 소중한 것임을 차 문화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과거와 현대를 통틀어 비중있는 전통문화는 ‘僧家의 茶文化’이다. 승가의 차문화는 각 시대에 걸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불교의 諸般 儀式중에는 각종 다례가 많이 행하여졌다. 『茶香禪味』 에서는 의식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폭넓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급변하는 현대 생활중에도 사찰에서는 전통적으로 과거와 연결된 차와 관계된 내용이 많다.
사찰에서 차가 중요하게 쓰이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째가 차의 근원으로 확인되는 ‘알가謁伽(공덕수)’는 불교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매개체로 해석하고 사용하였다. 둘째는 불교의 계율이 철저한 불음주(不飮酒)를 실천하기 때문에 그 원인이 있다. 셋째, 채식(菜食)을 하는 수행생활에서 차의 다양한 효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차는 음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우(鉢盂)와 다구(茶具)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발우와 다기의 재질이 흙으로 구운 것이 같으며, 발우와 다완은 모양이 흡사하며, 발우공양법과 다례의 절차 또한 흡사하다.
佛敎의 茶禮는 역사만큼이나 다양하다. 부처님 수행시절 수자타 소녀의 유미죽 공양과 초기불교 시대에 사용된 알가수와 알가배의 역사가 있다. ‘알가’는 묘원(妙原)이며, 묘원은 무착바라밀(無着婆羅密)이다. 『화엄경』에는 妙茶로써 시방국토의 모든 영가들께 공양한다고 하였다. 茶는 불교문화와 함께 수입되어 獻茶供養의 寺院茶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는 승가 대중들의 생활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조칙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이 청규는 전 4장과 후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4장은 축리장, 보은장, 보본장, 존조장이다. 후 5장은 주지장, 양서장, 대중장, 절랍장, 법기장이다. 梁나라 光宅寺 法雲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禪院생활의 樣式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儀禮나 일상생활에서 茶는 빠져서는 안되는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국에서부터 신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청규의 기본 원형은 지켜지고 있다.
『梵音集』의 다례는 우리나라 제2의 재의작법집대성(齋儀作法集大成)이다. 齋儀 쪽으로 만들어진 다례이다. 영가전에 올리는 다게, 고승사리운의 다게, 새벽마다 올리는 다게, 육색장 축원의 등이 있다. 다례에는 여러 다례의 유형이 있다. 충담선사, 보천 효명태자, 원효성사, 지장법사, 수철화상 등의 행다법이 있다.
스님들의 차생활은 개인 영역에서부터 국가, 단체, 지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차 생활이 영위되었다. 차 생활은 필연적으로 차 도구 제작과 차나무 재배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통도사에는 다소촌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절 밑에 차를 재배하는 마을이 있었다. 다른 여러 사찰들도 차 재배와 연관이 있다. 다기의 제작도 차의 부흥과 더불어 사찰에서 가마를 만들어 제작하였다. 신라시대의 원효성사와 충담사 등의 차인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과 진각국사, 삼장순암 법사 등의 뛰어난 차인들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함허득통과 김시습, 보우화상, 서산대사 등의 훌륭한 차인들이 있다. 후기에는 「茶神傳」과 東茶頌을 편저한 초의라는 뛰어난 인물로 인해 쇠잔해 가던 차를 부흥 시키는 계기도 있었다.
근세에는 응송과 효당이라는 두 걸출한 茶人이 있어서 차문화가 재차 발전하는 동력이 되었다. 응송 스님은 해남 대둔사 등에 거주하였다. 초의 선사의 유품을 오늘에 전해주어 우리 차의 전통을 알 수 있게 하였고, 다전(茶典)들을 말하게 된 것이다. 효당 스님은 경남 사천 다솔사를 중심으로 진주를 무대로 飮茶의 보급과 차 운동을 전개하였다. 효당은 운동가적이고 사상가적이다. 오늘날 차 문화가 발전된 것은 효당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평가한다.
많은 문화 중에서 이 차 문화는 불교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동양의 종교인 불교와 훌륭하게 접목된 차 문화는 유형무형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본다. 단군조선의 나라인 대한민국 차 문화만은 더욱더 뿌리를 굳건히 하고 자존심을 지키는 대표 문화가 되고, 자랑이 될 것이다.
Abstract
The Buddhist culture has been created and evolved as a unique culture with respect to the understanding and practice of the religious philosophies and principles. The tea culture has been sustained for a long time as one of the cultural practices of Buddhism. Although it is only a cultural practice, not the core, derived from Buddhism, the tea culture remains as an important part of the ascetic practices. It even gives a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public as well. The tea culture has been evolving as an important part of our culture from the Thee-Kingdom Era until today. We can recognize from the history that the tea culture should be cherished as one of our most precious traditional cultures among many other cultures that came into being and exposed to the people later.
Throughout our history, one of the important traditional cultures is the "tea culture in the Buddhist temple," which was an important cultural practice throughout the historic eras. Among a variety of Buddhist ceremonies and rites, tea ceremonies were conducted in varied forms. The Tea Flavor and Zen-Buddhist Meditation (茶香禪味) shows that a tea ceremony was not just a ceremony or rite, but was conducted for a number of different purposes or applications. In the midst of busy modern life, today's Buddhist temples still maintain the traditional tea culture coming down from the past. There are several reasons tea is highly valued in the Buddhist temples. First, the ritual water has been interpreted and used as a media to the Land of Happiness in Buddhism. Second, alcoholic drinks are prohibited by Buddhism as a matter of religious principle. Third, the Buddhist monks can expect health benefits from tea drinking as one of their ascetic life requires vegetarian diet. Fourth, tea is excluded from the principle of fast in the afternoon.
The ritual dishes and tea wares have a lot of things in common; During the Buddha's era, the ritual dishes and tea wares were both made of earth, and their shape were similar, and the ritual ceremony using the ritual dishes were similar to tea ceremony.
The Buddhist tea ceremony is as varied as its history. When Buddha set out to practice asceticism, he accepted a little milk and rice pudding from a village girl name Sujata. There is a historic record about the ritual water and ritual grail used during the early days of Buddhism. The ritual water is the source of magic, which is asanga paramita. The Avatamska Sutra explains that the magic tea is offered to all spirits of all directions, indicating that tea was introduced together with the Buddhism culture and the Buddhist monks incorporated tea ceremonies into votive offerings. Monk Baekjang's Rules of Discipline was formulated to effectively control the life the people in the temples. These Rules consist of front four chapters and back five chapters. The front five chapters are prayers for blessing, gratitude, repayment of gratitude, and modesty, and the back five chapters are preaching, double-prefaces, public, sacrificial rites. It was formulated by Beobwoon (法雲) of Gwangtaek Temple (光宅寺) during the Liang Dynasty, and kept a detailed record of the ceremonies in Zen temples. Tea is an indispensible part of the daily life as well as ceremonies. The Rules of Discipline has been strictly observed from China to Shilla, Goryeo, Chosun and modern days.
The tea ceremony described in Upavasatha Book has compiled all the Buddhist ceremonies in Korea. The tea ceremony constitutes a part of Buddhist ceremonies;
teas offered to the spiritual sanctuary, teas offered to the old monks' sarira, and tea offered every dawn, and blessings for the six lives and longevity. There are many different ways of drinking tea including that of Great Monk Chungdam, Crown Prince Bocheon Hyomyung, Saint Monk Wonhyo, Great Monk Jijang, Great Monk Jijang, Great Monk Soocheol, etc.
Korea's tea culture flourished, first evolving around Buddhist temples, aristocrats, and scholars, but soon quickly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in a variety of forms. The tea culture is essentially varied from the manufacturing of tea equipment to cultivation of tea plants. There was a village named Tea Growing Village around Tongdo Temple. As the name of the village indicates, people grew tea around the temples. Many other temples were involved in tea cultivation too. As tea became popular, some temples even built kilns inside the temple premises to make tea wares. Among the most famous tea-masters were Saint Monks Wonhyo (圓曉聖師))and Chungdam (忠談師) during the Shilla Dynasty. There were great tea-masters in Goryeo Dynasty, including Great Monks Jingak and Samjangsoonam. Among the great tea-masters in Chosun Dynasty were Hamhudeuktong (涵虛得通), Kim Siseup (金時習), Great Monk Bowoo(普愚和尙), and Great Monk Seosan (西山大師 ). At the later part of Chosun Dynasty, a great monk called Choi (草衣).
In modern times, there were two great tea-masters called Eungsong (應松)and Hyodang (曉堂) who undertook the arduous task of rebuilding the waning tea culture and reintroducing traditional practices. The Venerable Eungsong lived in Daedun Temple in Haenam. He was the first to give ordinary readers an awareness of the significance of the life of Choui (草衣) through a series of articles published in a popular newspaper, and published "The Korean Way of Tea" a work that continues to inspire readers interested in Korean tea culture. The Venerable Hyodang launched the tea-drinking campaigns in Daesol Temple in Sacheon, Gyeonsangnam-do and Jinju. Hyodang is a campaigner and a great thinker. He truly laid the groundwork for today's "Tea Renaissance."
Korea's tea culture, among many different cultures, is so closely identified with Buddhism. It best represents and expresses the spirit of Korea. Our distinct tea culture, characterized by a unique philosophy and traditional practices of Buddhism, an Oriental religion, retains a great value, whether visible or invisible. The reinvigorated tea culture will not only have an important and dynamic impact on Koreas' modern-day tea drinking but also on the nation's overall cultural landscape as well as our cultural pr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