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씹을거리 ‘오요가재’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씹을 거리 시리즈 2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오요가재’라는 ‘씹을 거리’가 있다. 다른 말로는 ‘오요강새이’ 또는 ‘오요가아지’라고도 하는데, 이들 말은 ‘벼과’ ‘강아지풀속’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인 ‘강아지풀’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외동읍(外東邑) 사투리 ‘오요가재’는 표준어(標準語)로 ‘버들개지’ 또는 ‘버들강아지’라고 한다. 복수(複數)의 표준어를 갖고 있는 셈이다.
“봄이 대머 ‘오요가재’ 뿌직어가 ‘호떼기’ 맨드러 불었다(봄이 되면 버들개지 꺽어서 ‘호드기’ 만들어 불었다)”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오요 가재
‘오요가제’를 표준어(標準語)로 ‘버들강아지’ 또는 ‘버들개지’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생김새가 강아지를 닮았다는 데서 연유(緣由)한다. 그리고 ‘강아지풀’의 이삭도 그 생김새가 강아지를 닮았다 해서 ‘강아지풀’이라고 한다. ‘강아지풀’은 뒤에서 다시 소개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요가제’라는 말의 어원(語源)을 잠시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회원님들도 아시겠지만, 옛적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집집마다 거의 한 마리씩의 재래종(在來種) 개(똥개)를 키웠는데, 어미개가 낳은 ‘강아지’를 ‘강새이’라고도 하고, ‘가아지’ 또는 ‘가지’라고도 한다.
“강새이도 닷새머 쥔내로 알어본다 카넌데, 사램이 되가주고 넘으 은덕또 모리머 우야노”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강아지도 닷새면 주인을 알아본다고 하는데, 사람이 되어서 남의 은덕도 모르면 어쩌나”라는 말이다.
가지(강아지)
어쨌든 ‘버들강아지’의 ‘강아지’는 외동읍(外東邑) 사투리로 ‘가아지’ 또는 ‘가지’로 이른다는 것은 확인(確認)이 되었는데, 그러면 ‘버들강아지’는 ‘오요가아지’ 또는 ‘오요가지’라고 해야지, 왜 ‘오요가재’라고 하느냐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전승(傳乘)되지 않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아지’ 또는 ‘가지’가 ‘가재’로 변이(變異)된 것쯤으로 가볍게 이해하면 될 것으로 본다. 그건 그렇다 하고, ‘가재’ 앞에 왜 ‘오요’라는 말이 선행(先行)되어 있고, 그리고 그 ‘오요’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에 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오요’는 강아지를 부르는 명령어(命令語)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개를 부를 때는 ‘워리’라는 말과 ‘오요’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신 강아지나 큰 개를 쫓는 말은 ‘유개’ 또는 ‘유가’라고 한다.
중 개
그리고 ‘워리’는 ‘중개(중간 크기의 개)’ 이상의 개를 부를 때 쓰는 명령어(命令語)에 해당하고, ‘오요’는 ‘강아지’를 부를 때 주로 사용한다.
둘 다 ‘개’와 ‘강아지’를 부르는 명령어(命令語)이자 유도(誘導)하는 용어로 사용하는데, ‘워리’라는 말은 한마디로 쓰기도 하고, 두 마디 이상으로 연호(連呼)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아지’를 부르는 ‘오요’는 반드시 두 마디 이상으로 연호(連呼)한다. 부르는 ‘강아지’가 빨리 오지 않을 경우는 “오요 오요 오요 오요--”라면서 올 때까지 연호를 계속한다.
강아지
그리고 강아지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대개의 경우 개밥그릇에 준 밥을 먹거나, 다른 아이의 변을 먹고 있을 경우) 오지 않고 있을 경우에는 “오요 오요”를 쉴 새 없이 부르는데, 이때는 입이 아파 그냥 “요요요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대로 옛적 우리 고향에서는 아기가 ‘삿자리’ 방바닥이나 ‘멍석’에 대변(大便)을 보면 거의가 ‘물똥’인데, 이때 걸레로 아기의 변을 닦아내면, 아기의 변이 ‘삿자리’와 ‘멍석’의 틈새로 밀려들어가 냄새의 진원지(震源地)가 되는 등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방지(防止)하기 위해서는 걸래를 쓰기 전에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먼저부르는데, 이때 부르는 명령어가 “오요 오요 오요 오요-----”라는 말이다. 강아지가 없을 때는 큰개를 부르는데, 이때는 ‘워리 워리’라고 한다.
가아지
그러면 강아지나 큰 개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방바닥이나 멍석뿐만 아니라 아기의 궁둥이까지 깨끗하게 핥아준다. 이 때 개나 강아지가 서두르다 빠뜨린 곳이 있으면, ‘여기도 한 번 더’라는 뜻으로 손으로 그 곳을 가리키면서 “오요 오요 싹싹”이라고 유도(誘導)하기도 한다. 싹싹 핥아 먹으라는 뜻이다.
그리고 ‘버들개지’를 ‘버들강아지’나 ‘오요가재’라고 하는 것은 그 모양이 강아지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지만, 그 시절에는 어린이들의 ‘장난감 강아지’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요가재
지금과 같은 장난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강아지 같이 생긴 ‘갯버들 꽃’이나 ‘강아지풀’의 이삭을 꺾어 강아지 놀이를 하곤 했었다. ‘버들강아지’는 솜털처럼 보드라운 털이 강아지의 그것을 닮았다고 해서 ‘버들강아지’란 이름이 붙여졌다.
‘버들강아지’와 ‘강아지풀’놀이를 잠시 소개한다. 봄에는 개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버들강아지’를 따서, 여름에는 길가에 지천으로 자라는 ‘강아지풀’의 이삭부분을 잘라 손바닥이나 팔뚝 위에 올려놓고, 꽃이나 이삭 앞쪽에 침을 뱉은 후 “오요오요”하면서 손바닥이나 팔뚝을 조금씩 움직이면, ‘버들강아지’나 ‘강아지풀’의 이삭이 강아지처럼 침이 있는 쪽으로 움직인다.
강새이 풀
팔뚝에 침을 뱉는 것은 강아지가 아기의 ‘변(大便)’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기의 ‘변’ 대신 침을 뱉어 놓고, “오요오요”하면서 강아지를 부르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버들강아지를 ‘오요가재’라고 하고, ‘강아지풀’ 이삭을 ‘오요강새이’라고 하는 것이다.
표준어(標準語) ‘강아지풀’은 외동(外東)사투리로 ‘강새이풀’이라고 하는데, ‘강아지풀’은 앞에서 말한 대로 ‘벼과’ ‘강아지풀속’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이다. 이삭이 강아지 꼬리를 닮았다 해서 ‘강아지풀’이라고 부르는데, 같은 의미에서 ‘개꼬리풀’이라고도 한다.
강아지풀
‘강아지풀’은 9월에 녹색 또는 자주색(紫珠色)의 작은 꽃이 피는데, 소가 좋아하고 이삭은 새의 모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이를 ‘강새이풀’이라고 하는데,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강아지풀’로 통일한다.
‘강아지풀’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 감이 되기도 했고, 민간(民間)에서는 오줌이 잘 나오게 할 때 달여 마셨으며, 상처(傷處)나 버짐 치료(治療)에도 사용하였다.
흉년(凶年)이 들었을 때는 가을에 여문 이삭을 말려 손바닥으로 비벼 떨어지는 작은 씨앗을 쌀이나 보리에 섞어 밥을 짓거나 죽을 쑤어먹기도 했다.
강아지풀
그리고 ‘버들강아지’는 ‘갯버들’ 꽃으로 사람이 먹기도 한다. 3월말에서 4월 초순 ‘버들강아지’는 한참 물이 오르는데, 필자들이 향리(鄕里)에 살 때는 살이 통통한 ‘버들강아지’를 주머니에 잔뜩 따 넣고 다니며 먹기도 했다.
‘껌’ 대용(代用)으로 많이 씹기도 했는데, ‘버들강아지’를 훑어 한 입 가득 입안에 넣고 계속 씹으면, 단맛이 다하고 찌꺼기만 남는데, 이것을 계속 씹으면 껌을 씹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이 오른 ‘버들강아지’ 줄기로는 ‘피리’를 만들기도 했는데, ‘피리’를 길고, 짧게, 그리고 ‘대롱(속이 비고 가느스름한 통대의 토막)’의 크기를 가늘게, 굵게 만드는데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강아지풀’은 그 이름처럼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너무나 친근(親近)한 풀이기도 하다. 때문에 지난 시절 농촌(農村)에서 자란 향우님들이라면, 누구나 ‘강아지풀’에 얽힌 조그마한 추억(追憶) 한 두 가지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버들피리
‘강아지풀’ 줄기를 뽑아 친구(親舊)나, 동생들의 얼굴이나 목에 간지럼을 태우는 장난이 제일 많았다. 잠자는 동생의 콧구멍에 간지럼을 태우면, 동생은 잠결에 코끝을 비벼대면서 뒤척거리기도 했다.
‘강아지풀’ 이삭을 주먹에 쥐고 ‘잼잼 잼잼’하면 ‘강아지풀’이 슬금슬금 손 밖으로 기어 올라오기도 한다. ‘잼잼’놀이에 싫증이 나면, 이삭을 반으로 갈라 수염처럼 입 위에 붙여 산적(山賊) 흉내를 내기도 했다.
잼잼놀이
커다란 이삭을 줄기는 떼어내고 반으로 살살 갈라 부숭부숭한 털을 코와 입 사이에다 끼우고는 산적 두목(頭目)같이 허허허 웃으면, 수염이 톡 떨어져 다시 붙이기도 했었다.
밖에서 ‘강아지풀’ 놀이를 하다 갑자기 ‘속나구(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후다닥 집으로 뛰어들어 와 추녀 밑 평상(平床)에서 ‘강아지풀 이삭 경주’를 하기도 했다. ‘강아지풀’ 이삭을 떼어서 평상위에 놓고, 줄기로 살살 쓸면 꼭 벌레처럼 솔솔 기어 다닌다.
강아지풀 수염놀이
‘강아지풀’ 줄기는 가을철에 메뚜기를 잡을 때는 필수도구(必需道具)가 되기도 했다. 웬만해서는 육류(肉類)를 섭취하지 못하던 그 시절에는 메뚜기 잡기가 어린이들의 일과(日課)가 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잡은 메뚜기를 꿰기 위해 반드시 ‘강아지풀’ 줄기를 몇 개씩 꺾어 휴대(携帶)한다.
급하면 벼이삭 줄기나 ‘수크령’ 줄기를 뽑아 쓸 수도 있지만, 벼이삭 줄기와 ‘수크령’줄기는 굵고 물컹물컹해서 적당치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크령’이란 다년초(多年草)로 길가나 들에 흔하게 자란다.
길가에 흔히 자라는 ‘수크령’
‘강아지풀’을 소재로 하는 시(詩)와 노래도 무수히 씌어져 있다. 먼저 장윤영이 부른 ‘강아지풀’ 노래를 감상해 본다.
강아지풀
작곡 : 이순형
작사 : 이순형
노래 : 장윤영
풀밭의 강아지가 살고 있어요
싱그러운 풀잎 강아지
꼬리가 닮았구나 강아지랑
강아지랑 닮았구나
가냘픈 몸이지만 정이 많아
메뚜기를 업어주다
풀여치를 업어주다
바람이 불어오는 날엔
나풀나풀 춤을 추어요
풀밭에 강아지가 살고 있어요
싱그러운 풀잎 강아지
꼬리가 닮았구나 강아지랑
강아지랑 닮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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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一致)이기도 하겠지만, ‘강아지풀’과 메뚜기는 숙명적 인과응보(因果應報) 관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연한 ‘강아지풀’ 이파리를 먹고 자란 메뚜기들이 그 ‘강아지풀’ 줄기에 굴비 엮이듯이 꿰어서 사람들의 먹이가 되면서 산란(産卵)도 못한 채 생(生)을 마감하는 것이다.
강아지풀
얘기가 나온 김에 메뚜기잡기를 잠시 더 살펴본다. 메뚜기를 잡을 때는 교미(交尾) 중인 메뚜기를 잡으면 쉽고 많이 잡을 수 있다.
한 마리씩 볏 잎에 앉아있는 메뚜기는 극히 예민(銳敏)해서 사람이 접근하면 금방 눈치를 채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튀어버린다.
그러나 교미(交尾) 중인 메뚜기는 암컷의 성기(性器)에 삽입한 수컷의 성기가 잽싸게 분리되지도 않지만, 황홀경(怳惚境)에 빠진 탓인지 사람의 손이 접근해도 거의가 그대로 있거나, 동작이 느려 쉽게 포획(捕獲)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의 손질에 두 마리를 잡을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매력이 있다.
교미중인 메뚜기 한 쌍
어쨌든 이렇게 잡은 메뚜기는 잡는 대로 ‘강아지풀’ 줄기에 줄줄이 꿰어야 한다. 꿰지 않으면 언제든 도망(逃亡)갈 수 있기 때문이다. 메뚜기를 ‘강아지풀’ 줄기에 꿰어서 들고 다니다가 한 줄이 다 차면, 또 새 ‘강아지풀’ 줄기에 다시 꿰어 몇 줄씩 들고 다닌다.
‘강아지풀’ 줄기 끝에 매달려 있는 이삭은 매듭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꿰 놓은 메뚜기가 빠져 나가지 못한다.
미리 잡은 메뚜기를 ‘강아지풀’ 줄기에 굴비 엮듯 꿰어 나뭇가지 같은 것에 걸어두었다가 잡힌 메뚜기들이 기운(氣運)이 다 떨어질 무렵이면, 들판에서 뛰어놀던 꼬마들도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그 메뚜기 꾸러미를 통째로 아궁이 불이나 ‘마당 불(마당에 피운 불)’에 구워 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은 볼 수가 없다.
강아지풀 놀이
독한 농약사용(農藥使用)으로 메뚜기도 거의 사라졌고, 그 메뚜기를 잡을 농촌 아이들도 모두 도회지(都會地)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메뚜기를 많이 잡았을 때는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고운 소금을 솔솔 뿌려 볶아 온가족이 저녁반찬으로 먹기도 했고, 아버지의 ‘탁백이’ 안주로 남겨두기도 했었다.
그래도 남을 때는 바람벽이나 문지방 못걸이에 걸어 말렸다가 오일장(五日場)에 내다 팔곤 했었다.
문지방 못걸이에 걸어 말리고 있는 메뚜기 꿰미
(꿰미는 강아지풀이 아니고 나락 이삭줄기다)
그 당시 메뚜기를 잡을 때는 ‘강아지풀’ 줄기를 주로 사용(使用)했지만, 커다란 ‘됫병(한 되들이 병으로 ‘댓병’이라고도 함)’을 사용하기도 했다.
메뚜기를 잡는 대로 ‘강아지풀’ 줄기에 꿰는 것보다 병에 넣는 것이 그만큼 쉬웠고, 일단 병속에 집어넣은 메뚜기는 웬만해서는 밖으로 튀어 나올 수 없어 안전(安全)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보다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미끄러운 논둑을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뛰어 다니다가 넘어져 그토록 귀했던 ‘됫병’도 깨고 손도 다쳤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다시 어느 무명인(無名人)의 ‘금강아지풀’을 잠시 음미하기로 한다.
금강아지풀
누구도 못하는 일
온 하늘 금칠 입히려고
붓을 빼어 들었나
얄상한 줄기 하나로
허리 한 번 굽히지 않고
공중에 들어올린
꽃덩이
얼마나 무거울까
모깃불 연기로 그을린
세상을 개금하려는가
휘둥그레진 가을하늘
새파래진 얼굴로
파르르 입술만 떨고
바라보던 눈길 빳빳이 굳어져
내 몸도 돌이 되고 말았네
|
어린이들에게 있어 ‘강아지풀’에 얽힌 추억의 백미(白眉)는 무엇보다 그 ‘강아지풀’을 이용하여 개구리를 잡던 일이었다.
‘강아지풀’ 줄기를 길게 잘라 논둑에서 개구리 입 앞에 어른거리면, 개구리가 ‘강아지풀’ 이삭을 덥석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미련한 개구리는 ‘강아지풀’ 이삭을 한번 물번 쉽게 놓지 않는다.
당시에 주로 잡았던 논개구리
이 때 ‘강아지풀’ 이삭을 물고 있는 개구리를 손으로 잡기도 하고, 개구리가 물고 늘어진 풀줄기를 휙 돌려 논두렁에 패대기를 치면 개구리가 쭉 뻗어 기절(氣絶)하게 된다.
당시에는 워낙 배가 고프고 육류(肉類) 구경을 못해 개구리를 잡아 몸뚱이는 닭 모이로 주고, 뒷다리만 떼어 ‘프라이팬’에 튀겨 먹기도 했었다.
‘프라이팬’이 없는 가정에서는 마당 한 구석에 설치한 야외용(野外用) 아궁이에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불을 피워 튀겨 먹기도 했었다. 집에서 키우는 닭 모이로는 개구리가 특히 인기(人氣)가 있었다.
때문에 틈만 나면, 학교에 내야 할 월사금(月謝金)의 원천인 달걀을 많이, 그리고 큰 것으로 낳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개구리를 잡아 닭들에게 먹였다.
‘강아지풀’ 줄기로 개구리를 잡을 때는 풀의 끝부분, 즉 개꼬리 같이 생긴 부분을 조금만 남기고 떼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꼬리 끝에다 침을 뱉어 동그랗게 만들어 개구리가 보기에 한 입에 쏙 들어갈 먹기 좋은 먹잇감으로 보이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개구리가 있는 논두렁이나 개울 위에서 흔들기만 하면 개구리가 폴짝 뛰어 ‘강아지풀’ 이삭을 덥석 물고 늘어진다.
강아지풀 이삭 뽑기
‘강아지풀’은 1935년 김동리(金東里)가 쓴 무녀도(巫女圖)에도 등장한다. 내용을 잠깐 소개한다.
“경주읍(慶州邑)에서 성 밖으로 십 여리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女民村) 혹은 잡성촌(雜姓村)이라 불리어지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 구석에 모화(毛火)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毛火)에서 들어 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중략)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空地)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고이는 대로 1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어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무녀도(巫女圖)의 고장 모화리의 모화역(毛火驛)
지금의 모화역(毛火驛)
(민족의 애환을 담아왔던 정든 모화역이 동해남부선 노선이 이설되면서
이제는 공사 사무실과 복덕방으로 임대되어 옛 정취가 실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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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이 물러가고, 물가에 봄의 전령(傳令)인 ‘버들강아지’가 피어나 새봄을 알리면, 솜털처럼 부드럽게 다가와 봄을 속삭이는 ‘버들강아지’가 피어난다.
이를 ‘버들개지’라고도 부르는데, ‘버들개지’와 ‘버들강아지’ 중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는 말이다. ‘오요가재’의 복수표준어(複數標準語)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중세시대(中世時代)에는 버듨가야지(버들+ㅅ+가야지), 버듨개야지(버들+ㅅ+개야지)(16세기 두시언해)란 표기가 사용된 적도 있다. ‘버듨개야지’는 발음을 편리하게 하다 보니 ‘야’가 탈락(脫落)하면서 더욱 간결한 표현인 ‘버들개지’로 변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버들강아지
‘버들강아지’는 ‘가야지’와 ‘강아지’의 발음이 비슷한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볼 수도 있고, ‘버들개지’의 솜털처럼 보드라운 털이 강아지의 그것을 닮았다고 해서 ‘버들강아지’란 이름이 붙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일부 지방에서 ‘개지’가 ‘강아지’의 사투리로 쓰인다는 점과 연관(聯關)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어찌됐건 ‘버들강아지’, ‘버들개지’ 모두 표준어(標準語)이므로 어느 것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둘의 차이를 굳이 따지자면 ‘버들개지’는 옛날부터 오랫동안 써온 말이고, ‘버들강아지’는 비교적(比較的) 근래에 생겨난 말로 우리들에게 더욱 친숙(親熟)하게 다가온다는 점뿐이다.
최근에는 ‘버들강아지’가 좀 더 많이 쓰이는 추세(趨勢)다. 다시 ‘버들강아지’와 ‘봄 아가씨’를 함께 노래한 무명인(無名人)의 ‘봄 아가씨’를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봄 아가씨
버들강아지 눈 떴다
봄 아가씨 오신다.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봄 아가씨 오신다.
봄 아가씨는 멋쟁이
머리에다 꽃 꽂고
덩실덩실 춤추며
나비 등에 업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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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아가씨
‘얼어붙었던 대동강(大同江)이 풀린다’는 우수(雨水)가 지나고,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잠을 깨고 나온다’는 경칩(驚蟄)도 지나면, 절기상으로는 완연한 봄이된다.
그러나 꽃샘추위가 며칠째 이어져 봄인지, 겨울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개울가에 나가보면, 어느새 고드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갯버들’ 가지에는 ‘버들강아지’가 하얗게 피곤 한다.
버들개지
여기에서 다시 김수일의 ‘봄이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어름 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긴 겨울잠을 깬 ‘버들개지’가 눈을 뜨면 새봄이 온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
김수일
서럽도록 추워도
새봄은 오는 거야
눈 덮인 산야
모진 북서풍에
산짐승 새들도
춥고 배고파 울었지만
그래도 새봄은 오는 거야
귀 기우려 잘 들어봐
어름 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땅 속에서도 바람결에도
여린 봄 내음
저 멀리 봄이 오는 소리
기다리다 보면
버들개지 아프게 눈 터지는
새봄은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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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강아지’ 그림을 보면, 50년대 초 초등학교(初等學校) 저학년 시절의 옛 추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 봄철에는 하교(下校) 길마다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논둑으로 밭둑으로 개울을 건너며, 배고픈 줄도 모르고 꼬불꼬불 10여리 길을 돌아 귀가(歸家)하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 때는 너나없이 배고픈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학교급식(學校給食)은 상상도 못할 때였고, 도시락도 없었다. 저학년의 경우 수업(授業)이 대부분 4교시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하학길
다른 아이들처럼 빨리 집에 가서 점심을 먹으면 되었지만, 멀쩡한 길을 두고 다른 마을을 돌고 돌아 10여리 길을 돌아오는 ‘번지럽은’ 아이들은 언제나 허기에 시달리곤 했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걸음으로는 10여리의 길을 아무리 빨리 가봐야 항상 절반(折半)도 못 간 상태에서 배고픔이 밀려온다.
그리고 이 때 쯤에는 어느 동리가 되었든 ‘버들강아지’가 자욱하게 핀 개울이 나타나게 되어 있고, 그 개울은 개구쟁이들의 허기를 메워주는 식당(食堂)이 되어주기도 했었다.
개울을 건너다 어깨에 멘 책보를 풀러 놓고, 졸졸 소리를 내는 개울물에 얼굴을 처박고 한참을 들이킨다. 배고프고 목마르던 참에 시원하고 달콤한 그 물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일급수(一級水) 중의 일급수인 개울물로 일단 허기를 면한 개구쟁이들은 집에 가는 것도 잊은 채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버들가지 하나씩을 휘어잡고 ‘버들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닥치는 대로 훑어 입속에 밀어 넣는다.
버들강아지
어느 정도 배가 차면, 제법 소리가 잘나는 ‘버들피리’를 하나 만들어 볼이 벌겋게 되도록 불면서 집으로 향한다.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집에 다다르면 해는 서산(西山)에 걸리고,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솔솔 피어오른다. ‘버들피리’ 소리를 듣고 ‘누렁이’가 달려온다.
‘누렁이’를 앞세우고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 고무신 한 짝은 마당에, 나머지 한 짝은 축담에 벗어 던지고 마루에 뛰어 오르면, 어머니께서는 “배고푸재. 쪼매마 참어라. 밥 차래 주꾸마”라며, 다정스레 등을 쓰다듬어 주신다.
그 사이 해는 서산을 넘어가 어둠이 사위(四圍)를 짓누른다.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밥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이 정도가 되면, 선생님께서 내 주신 쓰기 숙제(宿題)는 손에도 못 대고 잠에 나가떨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버들개지’를 노래하고 있는 김기덕의 ‘꽃’을 감상한다. 서두(序頭)에서 맨발로 뛰어가는 개울가에 ‘버들개지’들이 봄 잔치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꽃
김기덕
맨발로 뛰어가는
개울가에
버들개지 봄 잔치를 벌렸나
돌 사이 사랑방 꾸리는
버들치 등에
봄 윤기 반들거리고
봄빛을 집어내며
돌 밑 사랑을 나누는 가재들
긴 수염에
추억속의 봄이 반짝인다.
꽃향기 흐르는 실개천
그 물속을 비추며 웃는 꽃들
시집가는 그날의 기분처럼
여울목을 끌어안고
까르르 소리 내는 봄
까치들 보금자리에
첫날 방을 만드느라
2010년 삭정이를 부지런히
물어 나르는구나
그래서 가는 곳마다
꽃들의 기분이 대경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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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에서 말한 ‘버들피리’는 지금은 사라지다시피한 ‘호드기’를 말하는데,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호떼기’라고 한다. 그리고 ‘호드기’란 물오른 버들가지를 비틀어 뽑은 통껍질이나 밀짚 토막 따위로 만든 ‘피리’를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피리’란 속이 빈 대롱에 구멍을 뚫고 입으로 불어서 소리 내는 악기(樂器)의 통칭으로 ‘필률’이라고도 한다.
호떼기 만들기
‘피리’의 종류(種類)는 봄에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부는 버들피리 등 단순한 것을 비롯하여 어떠한 조(調)나 음률의 곡이라도 연주(演奏)할 수 있는 플루트, 리코더, 팬파이프, 백파이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다시 어느 무명인의 ‘버들강아지’의 노래를 잠시 감상(感想)하기로 한다.
버들강아지의 노래
정월 초하루 차례상 물리고
구순의 어머니와 온천 가는 길
이리 휘고 저리 굽은
가파른 산길 따라 눈에 밟히던
아흔 한 해의 어머니 세월
유황 온천수에 육신을 헹구고 나면
세월의 관절마다
저리고 아픈 통증 다 사라질까
먼저 목욕 마치고
탕 안의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산책길에서 마주친 묏 버들 한 그루
젊은 날의 어머니 얼굴처럼
마냥 눈부신 버들강아지
가지마다 환하게 피어 있었네
겨우내
겹겹의 두터운 외피를 밀어내며 피어난
솜털 보송한 버들강아지처럼
뽀오얀 얼굴로 욕탕문을 밀고 나오시던
어머니
환한 묏버들 한 그루
넌출넌출 내게로 오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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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피리’가 사용된 것은 삼한시대(三韓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삼한시대부터 방울, 북, 거문고, ‘피리’ 등의 네 가지 악기가 주로 종교적(宗敎的) 필요로 존재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피리가 사용되었다.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고구려 악기 가운데 소피리, 도피리, 대피리가 사용(使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도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거문고와 피리가 제천고(祭天庫)에 보관되어 왔다는 기록이 보여 피리가 예부터 신앙적(信仰的)으로 전승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 리
또 《고려사》 악지(樂紙) 당악조(唐樂調)에는 아홉 구멍 피리가 기록되어 있고, 속악조(俗樂調)에는 일곱 구멍 피리의 기록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피리의 종류는 향피리, 세피리, 당피리의 세 가지가 있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이런 고급(高級) ‘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필자들이 향리(鄕里)에 거주할 때 길섶의 미루나무 가지나, 거랑(개울)가 갯버들을 꺾어 즉석(卽席)에서 만들어 불던 ‘버들피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송인관의 ‘버들강아지’를 잠시 감상한다.
버들강아지
송인관
양지쪽애 활짝핀 버들강아지
찬바람에 나부끼며 물가에 서서
봄이여 빨리 오라 손 흔드네.
방긋 웃는 버들강아지
환한 햇빛 입에 물었네
양재천 둑길 달리다 보니
봄의 깃발 펴들고 오가는 사람
환영하는 봄의 전령사 버들강아지
움추리는 꽃샘추위 아랑곳없이
늘어진 가지마다 새순이 터질듯...
봄이 그리운 사람에게 푸르게 웃으며
실바람 따라 휘청이며 춤추니
양재천이 버들강아지 춤을 안고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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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피리’는 물이 잘 오른 버드나무 가지나, 갯버들을 꺾어서 껍질을 살살 비틀면 그 껍질과 속의 나무 부분이 분리(分離)되면서 뱅글뱅글 돌아가는데, 그 껍질을 빼내면 껍질만 쏘옥 빠져나온다.
이때는 껍질을 빼기 전에 미리 칼로 적당한 길이로 양쪽에 구획(區劃)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
호떼기(호드기) 모양
그렇게 빠져나온 껍질을 이번에는 그 한쪽 끝을 칼로 살짝 벗겨내어 피리입술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버들피리’를 불 때는 겉껍질을 벗겨낸 부분, 즉 피리입술을 입에 대고 부는데, 그 길이나 굵기에 따라 음색(音色)이 다르게 된다.
‘버들피리’는 전통적(傳統的)으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이 있기도 하다. 표준말인 ‘호드기’도 그 중의 하나다.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다시 호데기, 호떼기, 회떼기, 호레기 등 비슷비슷하지만 여러가지로 불린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호떼기’라고 한다.
호드기 만들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호드기’라는 이름보다는 ‘버들피리’가 더 익숙한 이름이 되고 있다. ‘버들피리’가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에 간행(刊行)된 ‘우리말 큰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으니까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1956년에 간행된 신기철, 신용철의 표준국어사전(標準國語辭典) 증보판에서도 마찬가지고, 1963년에 간행(刊行)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國語大辭典) 재판에서도 역시 ‘버들피리’는 찾아볼 수 없다.
‘버들피리’는 아마 문학작품(文學作品) 같은 데서 먼저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동요(童謠)를 뒤지다 보면 ‘버들피리’는 더러 보이고 있다. 하나는 최근 세대(世代)에서 널리 불린 ‘봄맞이 가자’의 제2절에서 볼 수 있다.
봄맞이 가자
김태오 요
박태현 곡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 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 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시냇가에 앉아서 다리도 쉬고
버들피리 만들어 불면서 가자.
꾀꼬리도 산에서 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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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오빠생각’이라는 동요(童謠)의 제1절에 역시 ‘버들피리’가 보인다. 제목은 같아도 우리에게 익숙한 “뜸북뜸북 뜸부기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최순애 요/박태준 곡의 ‘오빠생각’과는 다른 동요다.
오빠 생각
박병문 요
이은렬 곡
봄이 오면 오빠가 더욱 그리워
메아리와 둘이서 오빠 불러요.
내가 울면 버들피리 만들어 주던
우리 오빠 생각하며 피리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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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밖 고개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
(하루 종일 동구 밖 신작로에 서울 가신 오빠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설풋 잠이 들어버렸다)
이렇듯 동요(童謠) 등에서 먼저 쓰이기 시작하면서 ‘버들피리’는 쉽게 자리를 잡아 온 것 같다. ‘호드기’보다 쉽게 의미가 떠오르는 장점(長點)도 있고, 또 뭔가 운치(韻致)도 있게 느껴져 쉽게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어떻든 이제는 국어사전(國語辭典)마다 ‘버들피리’를 올릴 만큼 이 말이 일반화되어 있다.
1986년에 간행된 이희승의 국어대사전(國語大辭典) 수정증보판에 ‘버들피리’가 오른 것을 보면 역사의 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標準國語辭典)에도 물론 ‘버들피리’가 올라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느 사전(辭典)에서도 ‘호드기’와 ‘버들피리’의 관계를 제대로 밝혀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경위(經緯)로였든 그 지위(地位)를 인정하여 사전에 올리기는 하면서도 ‘호드기’와의 관계를 제대로 인식(認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에다 ‘버들피리’의 뜻풀이도 대부분 부실(不實)하기 이를 데 없다. 거의가 “버드나무 껍질로 만든” 정도로 소략(疏略)하게 뜻풀이를 하고 말았는데, 이는 “봄철에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고루 비틀어 뽑은” 식으로 친절하게 뜻풀이한 ‘호드기’의 경우와 대조적(對照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호떼기 불기
‘버들피리’가 호적(戶籍)에 이름을 올릴 만큼은 인정을 받았으면서도 아직 정당한 대우(待遇)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는 한편으로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들피리’라는 단어(單語)가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까 하는 우려(憂慮)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버들피리’는 없어질 것이고, 없어진 ‘버들피리’의 뜻이 제대로 됐든 말든 별다른 의미(意味)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잠시 옛적 선비들이 지은 ‘버들개지’와 관련한 노래 ‘春分後雪(춘분 지나 내린 눈)’을 감상하고 넘어간다.
春分後雪
權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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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 내린 눈
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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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入春分自古稀
설입춘분자고희
禁煙時節助寒威
금연시절조한위
欺梅似妬香魂返
기매사투향혼반
着柳先成亂絮飛
착류선성난서비
已覺天時差較晩
이각천시차교만
從敎人事轉相違
종교인사전상위
何當變作催花雨
하당변작최화우
好與東君共發揮
호여동군공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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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춘분 지나
눈 내리는 일 드물거늘
불 금하는 한식 맞기도
전에 추위 더한다네.
매화 속여 꽃피우니
향기돌아오라 시샘하는 듯,
버들에 붙어 벌써부터
어지러이 버들개지 날리듯.
하늘의 절기 뒤틀려 꽤나
늦어졌음을 이미 알았으니
사람의 일 또한 그에 따라
어지러지겠구나.
어찌하면 꽃을 재촉하는
비로 변하여
사이좋게 봄님과 함께
활짝 피어나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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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추위로 집안에만 꽁꽁 숨어 있다가 따스한 봄소식이 들리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봄 내음을 맡는다. 파릇파릇 올라온 봄나물을 캐면서 새잎을 뜯어 ‘풀피리’를 불기도 한다.
호드기
그 시절 총각들은 나무하는 번철 낫으로, 처녀들은 나물 캐는 부엌칼로 ‘호떼기’를 만들어 불기도 했다. ‘호떼기’는 주로 물오른 ‘갯버들(실버들)’로 만들었지만, 장소(場所)에 따라 미루나무나 산오리나무 가지들로도 만들었다. 삼복(三伏) 더위 때 소 먹이러 다닐 때도 ‘호떼기’는 필수품(必需品)이었다.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 때는 ‘갯버들’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이 하나의 절차이기도 했다. 필자들이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닐 때는 5월 달에 아카시아 꽃을 따 먹는 것처럼 4월에는 개울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버들개지’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었다.
풀피리를 만들어 주며 ‘순이’를 꼬드기던 그 때 그 시절
특히 하학길에 많이 따먹게 된다. 도시락도 없이 6교시를 마치고 귀가(歸家)하는 길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학교우물에서 도시락 없이 등교(登校)한 동급생들과 두레박물로 배를 채우기는 했지만, 귀가(歸家) 길에는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현기증(眩氣症)이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도시락을 갖고 다니는 동급생(同級生)들의 눈을 피해 개울가로 슬그머니 숨어들어 토실토실한 ‘갯버들’ 열매를 한 움큼씩 따서 허겁지겁 입속에 밀어 넣던 초라했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走馬燈)으로 스친다.
사람에 따라 다른 맛을 느꼈겠지만, 그런대로 향긋한 맛이 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연두색 꽃술이 돋아나서 전체(全體)의 길이가 새끼손가락 길이만큼 커졌을 때 먹는다.
'호드기' 불기
‘호떼기’의 재료(材料)인 버드나무와 ‘갯버들’을 구분해 보기로 한다. 외동읍(外東邑)에서의 ‘호떼기’는 주로 ‘미루나무’라고 하는 버드나무와 ‘갯버들’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다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박성자의 ‘버들피리’를 감상한다. ‘버들피리’ 불면 아득한 향수(鄕愁)가 밀려오고,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옛 친구들이 생각나며, 무지개 빛 고운 꿈이 떠오르고, 멱 감던 시절이 되살아오며, 어린 시절의 동심(童心)도 꿈도 추억(追憶)도 향수도 모두 서린다는 내용이다.
버들피리
박성자
삘리리
버들피리 불면 아득한
향수가 밀려옵니다.
삘리리
버들피리 불면 어린시절이
떠오릅니다.
삘리리
버들피리 불면 옛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삘리리
버들피리 불면 무지개빛
고운 꿈이 떠오릅니다.
삘리리
버들피리 불면 강가에서
멱 감던 시절이 되살아 옵니다.
버들피리 속엔 어린시절의
동심도 꿈도 추억도 향수도
다 서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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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는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의 7번 국도(國道)와 생울타리를 장식했던 나무 중 ‘포플러’라는 재래종(在來種) 버드나무를 말한다. 6.25 이후 가로수(街路樹)는 거의가 미국에서 들어온 ‘미루나무’였다.
그리고 ‘갯버들’은 하천(河川) 변이나, 산골짜기 등에 자생(自生)하고 있었다. ‘버드나무’로 만든 ‘호떼기’는 대체적(大體的)으로 굵어 저음(低音)이 울렸고, 가느다란 ‘갯버들’로 만든 ‘호떼기’는 고음(高音)이 울렸다.
그 시절 7번 국도변 미루나무(입실리)
그리고 ‘갯버들’에도 두 가지의 ‘갯버들’이 있었다. 얼핏 보면 그게 그 것 같아 구분이 어렵지만, 분명히 종자(種子)가 다른 것으로 ‘갯버들’과 ‘눈갯버들’이 있었다.
비슷하지만 한 가지 특징(特徵)이 있다면 ‘갯버들’ 열매는 사람이 먹지 못하나, ‘눈갯버들’ 열매는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들이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닐 때 즐겨 따 먹은 ‘갯버들’ 열매는 모두 ‘눈갯버들’ 열매였다.
‘버들강아지’와 ‘버들개지’에 대해서도 주석(註釋)을 단다. 우선 두 가지 용어(用語)는 모두 버드나무의 줄기나 가지가 아니고, 버드나무의 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의 ‘버들개지’는 ‘버들강아지’의 축약형(縮約型)이고, 이를 다시 축약(縮約)하여 ‘개지’라고도 한다.
따라서 ‘버들강아지’나 ‘버들개지’로 버들피리 또는 피리를 만든다는 말은 모두 틀린 말이다. 버드나무의 꽃으로 ‘피리’를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눈갯버들’의 버들강아지(버들개지)
(이 상태에서 조금 더 익으면 먹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미루나무’에 대해서도 설명을 추가한다. ‘미루나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버드나무가 아니다. ‘미루나무(cotton wood)’는 미국(美國)이 원산지이며, 미국에서 들어온 버드나무라는 뜻에서 ‘미류(美柳)’라고도 한다.
‘미루나무’는 또 유럽에 건너가서 유럽산 흑양나무와의 사이에 많은 천연잡종(天然雜種)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캐나다 포플러(P. canadensis)라고 한다.
이태리 포플러
또한 이탈리아에서 이 잡종(雜種)을 개량한 것이 ‘이태리 포플러’인데 생장이 빠르다. ‘미루나무’는 또 ‘양버들’과 비슷하지만, 가지가 옆으로 퍼지고 잎의 길이가 폭보다 길다. ‘미루나무’와 ‘양버들’의 잡종(雜種)인 ‘이태리포플러’와는 구별하기 어렵다.
또 ‘양버들’은 가지가 곧게 서서 빗자루 같은 수형(樹型)으로 구주백양(歐州白楊)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가로수종(街路樹種)이다. 우리나라의 고유종(固有種)인 ‘버드나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포플러(poplar)’를 말한다.
버드나무 가로수
끝으로 ‘버들피리’와 ‘풀피리’ 만들기를 간략(簡略)하게 소개한다. 향리(鄕里)에서 ‘버들피리’와 ‘풀피리’를 만들어 본 향우님들은 이해가 쉽겠지만, 그런 경험(經驗)이 없는 향우님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버들피리’는 ① 연한 버드나무 가지나 ‘버들개지’를 자른다. ② 자른 버드나무가지를 10-15cm 정도에 칼집을 낸 후 두 손으로 비틀어 껍질은 남기고 속을 빼 낸다. ③ 빼낸 버드나무 껍질을 3-5cm정도로 자른다. ④ 자른 껍질토막의 한 쪽 겉껍질을 칼로 벗겨내어 피리입술을 만든다.
버들피리 만드는 방법
‘버들피리’는 길이가 길수록 저음(低音)이 나고, 짧을수록 밝고 높은 소리가 난다. 또 굵을수록 저음이 나고, 가늘수록 고음(高音)이 난다. ‘버들피리’가 다 만들어지면, 여럿이 모여 누가 더 오래, 멋지게(흥겹게)소리를 내는지 겨루기도 한다.
다음은 풀잎으로 만드는 ‘풀잎피리’를 만들어 본다. ‘풀잎피리’는 ① 가늘고 얇은 풀잎(벼과 식물)을 준비한다. ② 얇은 풀들을 두 손바닥을 마주하고 양 엄지손가락에 끼운다. ③ 손을 모은 엄지손가락에 입을 대고 불면 소리가 난다. ‘풀피리’는 잎을 팽팽하게 끼워야 소리가 잘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풀잎피리’는 청보리나 밀의 ‘대’로 만드는 ‘풀피리’와는 다른 것이다. ‘풀잎피리’는 문자 그대로 풀 잎사귀로 만드는 것이고, ‘풀피리’는 ‘보릿대’나 ‘밀대’로 ‘호드기’와 같이 만드는 것이다.
피리 만드는 민들레 대
‘나뭇잎피리’는 나뭇잎을 비스듬히 돌돌 말아 구멍이 좁은 쪽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분다. 양쪽 구멍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나면 잘 불어지지 않는다.
이 외에 ‘민들레피리’는 속이 빈 민들레 꽃대를 잘라 한쪽 끝을 납작하게 눌러서 피리를 만들고, 납작하게 누른 쪽을 입으로 분다. 처음에는 잘 불어지지 않지만 요령(要領)이 생기면 잘 불어진다.
‘오요가재’ 얘기가 ‘풀잎피리’와 ‘버들피리’ 얘기로까지 이어졌다. 이제 얘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냇가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잘 비튼 다음 양쪽을 잘 잘라 갈라지지 않게 껍질을 잘 빼내 만드는 ‘버들피리’, 요즘 아이들에게는 신기(神奇)하기만 하겠지만, 그 시절 필자들에겐 평범한 악기(惡器)이자 흔해 빠진 장난감이었다.
호떼기 불기
‘피리’처럼 길게도 만들고, 짧게도 만들어 불었던 그 시절 ‘버들피리’, 여러 개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불곤 했었다. 혹시나 말라버릴까 중간 중간 끄집어내어 보고는 물에 잠시 담가 두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도 했었다.
버드나무 껍질로 ‘피리’를 만들 때는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 진액(津液)도 함께 빨아 먹곤 했었다. 물이 잘 오른 버드나무 가지 속의 진액은 달콤했었고, 덜 오른 가지는 약간 쓴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춘궁기(春窮期)가 다가오는 봄철에는 온 집을 뒤져 봐도 ‘주전부리감’이 없어 나뭇가지 물이라도 빨아 먹어야 했다.
호떼기 만들기
요즘 아이들에게 ‘버들피리’를 만들어 주면 잠시 그 신기(神奇)함에 불어보지만, 어느새 땅바닥에 뒹굴고 만다. 인터넷의 세대(世代)들에게는 낭만이나 정겨움 보다는 자극적(刺戟的)인 게임이 더 실감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겨운 그 시절 그 추억(追憶)을 이제는 정녕 되살려볼 수 없는 것일까. 작자미상(作者未詳)의 ‘이제 봄이 다가오는 것 같아요’를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을까 한다.
*○ㅣㅈㅔ 봄이 ⊂Γ⊃Γ오는 것 같○ΓΩ*
시작이라는 봄은
모든 ○ㅣ 에게 ⊃Γ슴 설레이게 합니다.
∀ㅓ들 강○Γ지 피어 오르고
잎이 모락모락 ㅈㅏ乙Γ날 때
버들피리 만들며
옛 추억에 ㅃΓㅈㅕ 봅니다.
꽃샘추위로 옹그린
몸을 ㅍㅕ고 고¬ㅐ를 약간만 들면
ㆅΓ얀 목련의 뽀송한
꽃망울이 보입∠ㅣ⊂Γ.
발걸음 가볍⊃ㅔ
¬ㅓ닐며 보는 풍경에도
♡ㅣ제 봄이 한껏 묻어납니다.
ㄸΓ뜻한 ㉩Γ한잔과 좋은 음악,
봄 ㆅΓ늘을 올려보는 작은 ○ㅕ유
모두 느ㄲㅕ보시길 ∀Γ乙Γ▣ㅕ
ㄸΓ뜻한 봄날ㅊㅓ럼.......
호Γ창한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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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너무 길어져 여기에서도 회원님들의 지루함을 달래 드릴 배경음악(背景音樂)이 한 곡 게재되어야겠는데, 안성맞춤인 곡은 없는 듯하다.
거울 같은 시냇물
대신 그 시절, 거울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노래하는 갯버들 시냇가 방앗간에서 보리 찧는 처녀를 그린 이치랑의 ‘방앗간 처녀’를 게재하여 듣고자 한다.
지금은 그림에서조차 볼 수 없는 방앗간 처녀, 그리고 그녀들의 가슴에 고이 키워 간직한 순정(純情)의 향기, 보리이삭 주워 바꾼 ‘코티분’ 냄새 물씬 풍기며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 시절 댕기머리처녀들의 보드랍고 고운 자태(姿態)가 눈앞 가득 어린다.
방앗간 처녀
이치랑
거울 같은 시냇물 새들이 노래하는
뻐꾹새 내 고향 자명새 내 고향
오늘도 방앗간에 보리 찧는 처녀는
가슴에 고이 자란 순정을 안고
버들피리 꺾어 불며 님을 부르네.
물레방아 도는 곳 송아지 엄매 우는
감나무 내 고향 수수밭 내 고향
오늘도 방앗간에 보리 찧는 처녀는
남몰래 별을 보고 긴 한숨 지며
달님에게 물어 보며 하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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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고향 물방앗간집 처녀
(지금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후 '방아도 찧지 않은 채' 20년째
서울 집에서 놀고 있다. 사진은 25세 때 찍은 앨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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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아지 풀에 얽힌 추억은 참으로 많을거 같네요...다 잊어 먹은거 같아도...다 기억이 나네요.....정말 대작입니다.
혹시 방언 연구가 김성재선생님의 연락 받으셨는지요..제가 사정 양해 없이 전번을 전해 줬습니다. 들어 보건데...어렵게 하실분은 아닌거 같아서 서슴없이 전해 줬는데..그래도 사전 양해글 구해야 맞는데....무례했다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 선생님 말씀을 빌리면....전국에 걸쳐있는 향우회카페를 거의다 훓어 봤는데...외동향우회가 단연 1등이라고 하데요...특히 선배님의 사투리 얘기가 일품이요 명품이요...역사적 보존이 필요한 중요한 자료라고 하데요..
그래서 한번 뵙고 싶어 했습니다. 통영에 있는 25년째 방언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카페 준회원으로 가입되어있습니다. 운영진들 얘기 들어보고...정회원으로 특별 승급 해 드릴까 생각중입니다.
아드님 혼사준비에 여념이 없을 텐데 이것저것 마음 쓰시느라 더욱 분주하시겠습니다. 방언 연구가 김성재 선생님 연락도 받았고, 제 전번을 알려주신 것도 잘 하셨습니다.
모두가 우리 외동향우회 카페의 위상을 높이려는 충정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분이 제게 너무 큰 기대를 갖는 것 같아 어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앞으로 틈 있는대로 전화를 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홍보와 노력들이 집대성되어 우리 외동카페의 도약과 발전에 기여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드님의 성혼을 특별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옛날에는 혼사가 있으면 묵도 쏴 주고..단술도 해 가고...글도 써가서 축사라고 읽고....즉석에서 시도 한수식 남기고 했지요.. 이런 마당에서 이렇게 말로 주고 받는 축하야말로 그 옛날 축사 이상으로 값어치가 있다고 봐야지요....복잡한 세상에 이런 마당이 대안으로 역할을 하니...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서비스를 잘 활용하는것이 보다 더 현대인 다워 질 것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