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1월의 왈츠]중에서 여자 _ 이충걸 作
왜 장례식 땐 언제나 비가 내리는 걸까? 엄만 화장했어. 그냥 조그만 상자 속 가루로 남으신 거야. 엄만 늙고 병든 모습으로 땅 속에 묻히길 싫어하셨어. 공상 과학 영활 본 기억이 나, 만화 영화, 별나라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 앞에서 죽었는데 공주는 왕자의 손바닥에 한 줌 황금빛 모래로 남은 거야. 아주 반짝반짝거리는……. 죽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도 그렇게 죽고 싶어. 언젠가 엄마 방에서 종소리가 났어. 그 종은 평소 도움이 필요할 때 치라고 엄마 머리맡에 둔 거였어. 그 날 밤 정전이 돼 방 안이 캄캄해졌는데 두려워진 어머니가 종을 흔드셨어. 난 그때 엄마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어. 엄마가 날 찾을 때 난 어디 있었지? 뭘 하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난 울지 않았어. 그 사람 땜에 괴로울 때도 안 울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두, 지금까지 한 번도 나 안 울었어. (눈물을 훔치며 인형에게) 너한테만 얘기하는 건데 난 어디로든 갈 거야!
2. [맹진사액 경사]중에서 이쁜이 _
이거 놓으세요. 자꾸만 이러시면 서방님께서는 몹쓸 욕을 당하세요. 큰 낭패를 보시니까 이러지 마세요. 사실, 전 갑분 아씨가 아니에요. 서방님 전, 저는 천한 몸종이에요. 갑분 아가씨 몸시중을 드는 몸종이에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나쁜 줄 알면서도 이 댁 나리마님께서 하도 조르시길래 제가 갑분 아가씨 노릇을 하던 거예요. 실상은 갑분 아가씨가 서방님을 절뚝발이 신랑이라고 죽어도 싫다고 그래서……. 금방 신랑이 드신다 하는데 신부는 없고 이 천한 몸이 대신 신부로 뽑혔던 거예요. 저는 가짜예요. 그리고 저도 서방님께서 절름발인 줄만 알았어요. 그래서 여태 장가도 못 드시고 아무도 시집와주는 색시도 없는 쓸쓸한 양반이라고, 이렇게만 알았어요. 그렇지만 이젠 왜 서방님께서 절름발이가 못 되었을까 차라리 몹쓸 다리병신으로 세상의 모든 색시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그런 외로운 서방님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그게 도리어 이 몸에게 견딜 수 없이 원망스러워요. 서방님, 서방님을 속인 몹쓸 사람들 중에 하나인 저를 용서하세요.
3. [블루 사이공]중에서 후엔 _
당신은 바보예요. 도망가요. 왜 당신이 우리 전쟁에 죽어야 하죠? 난 당신을 보낼 수 없어요. 당신은 날 보고 당신 고향 주소를 외우라고 하고 난 여기서 당신이 네이팜탄에 화장당하는지, 부비 트랩에 걸려 갈가리 찢겨지는지 상상하고 주소나 외우면 그만이군요. 누구를 위해 기도를 하나요. 내 형제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모두가 적으로 만나는 당신들,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지요? 도망가요, 우리!
4.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중에서 원주 _
(문을 통해 조심 조심 등장하는 원주 스님. 여성적인 모습과 걸음걸이이다. 손에 든 보자기를 탁자에 놓은 다음 다시 조심 조심 나가려 한다. 그때 도법스님이 뒤돌아본다.) (여성적 말투로) 아유, 이 오도방정 눈에 띄면 방해될까봐 몰래 가려 했는데, 죄송해요. 누룽지 좀 싸 왔어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그렇지 개구리 점프하듯 끼니를 건너뛰면 어떡해요. 그럴수록 이 몸조릴 잘 하셔야지요. 아, 그럼 저한테 말씀하셔야지요. 원주라는게 뭐하는 소임입니까. 스님같이 편찮은 분이 있는가, 대중스님들의 영양 상태는 어떤가, 콩나물 두부 참기름은 얼마나 있는가, 뭐 이런 것을 두루두루 살피는 게 원주 아녜요. 뭘 드릴까요? 가스명수? 활명수? 건위정? 원기소? 말씀만 하세요. 제가 즉각……. (도법 빙긋이 웃으면서 원주에게 다가간다. 원주의 빠른 말투와 몸짓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입을 막으며) 아유, 이 오도방정 항상 입조심 몸조심 한다는 게 또 이러니. (계면쩍은 듯) 도법 스님 죄송해요. 전생엔 지가 비구니였나봐요. (불상 구조물을 보며) 아유 이쁘기도 해라. (자기의 불쑥 튀어나온 말에 놀라) 히익, 이 오도방정. (입을 찰싹 때린다.) 부처님께 이쁘다니. 호호호호, 존안유망하시네요. 이제 “색칠만 하면 끝이지요? 다 끝난 건가요?”
5.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중에서 원주 _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의자에 앉으며) 헤헤헤, 저야 뭐 바쁠 게 있나요. 씻고 닦고 치우고. 매냥 그 일이 그 일이지요. 하긴 내일 대전 보살들이 들이닥칠 모양인데 준비해논 건 없고 막막합니다. 김치도 담가야겠고……. 그거야 겉절이로 하면 되겠지만 또 찌개거리, 국거리……. 아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게다가 채공행자가 갓 들어와서 일하는 걸 보면 애간장 태운다구요. 기껏 한다는 게 다꽝 무침이니 어쩌겠어요. 지가 헐레벌떡 설레벌떡 설쳐대는 수밖에. 스님, 전 보살들이 얼마나 깍쟁인지 제각각 비닐봉지 하나씩 가지고 와서 “스님, 된장이 맛있네요. (비비꼬며) 호호호” 흥! 절은 뭐 지네들 된장 치다꺼리하라고 생긴건가.
6. [에비대왕]중에서 바리데기 _
(다가서며) 어디 보자 내 아들! 내가 니 엄니다. 이제 나하고 살자! 지랄 용춤 추고 자빠졌네. 신나 버린 짚세기 벗어던지듯이 내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아들을 낳아달라고. 에라이, 썩어문드러진 세상의 사내놈아. 천하의 여자들이 너희 사내들한테, 맨날 알 낳듯이 아들만 낳아주는 암탉이냐. 아니다. 사람이다. 지 맘에 드는 사내 골라 살면서 아들이든 딸이든 하늘이 주신대로 기르면서 내 맘대로 살아갈 사람이다. 아들! 그 씨도 안 멕히는 소리 하덜 말고 내 아들이나 내놔! 아가야, 이리 온. 이 에미하고 가자! (외친다.) 세상 사람들! 여기 조강지처 버리고 출세한 사내가 있소. 보시오. 내가 낳은 아들이 여기 있소!
7. [에비대왕]중에서 바리데기 _
오늘부터 안 울기로 마음 먹었는디. 그래라, 못 울지라. 나 평생 울지 않는 계집이 될 것인게 (마음 다잡고) 엄니 나 시방 시집가요. 신랑이 땅부자, 쌀부자요. 아들도 많고 손자도 많고, 내가 그것들 에미란게. 쌀, 괴기~ 매년 바리바리로 실어다 준다 했소, 내 신랑이. 엄니, 나 가요. 아버지한텐 말 안 했그만, 불호령이 빤한 게. 먹을 것도 못 불어오면서 호령만 지른다요, 사내들은. 내가 해요, 내가……. (문득 강을 바라본다) 으째 말도 못함시 그렇게 잘났을까.
8. [세 자매 이야기]중에서 명혜 _
밥 생각 없어 정말 안 먹어. 이젠 싸우는 일도 지겨워. 서로 신경질 투성인 데다 알량한 자존심만 뭉쳐 가지고는 늘 티격태격이다. 결혼은 당분간 못하겠대. 사람이 생각밖으로 자잘하고, 대범한 구석이 없어. 좋게 보일 때는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였어. 내가 자기 집에 들어와서 죽자고 고생만 한 걸 생각하면 앞이 깜깜하대. 누가 내 걱정해달랬나. 글쎄, 내가 무슨 공주냔 말이야. 부잣집 외동딸이야? 호강이나 하려고 시집가는 그런 골빈 여자인 줄 아는 모양이지? 나 원, 어이가 없어서. 난 어떡하란 말이야. 대책이 없대. 나보구 알아서 하래. 내가 부잣집 딸년이 안 된 게 잘된 일일지도 몰라. 자기로서는 원통하고 섭섭하겠지. 얼렁뚱땅 얹혀살 궁리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알아서 하라니? 따지고 보면 그쪽만 무책임하다고 나무랄 수도 없지. 임신 말이야. 이런 저런 정도 들고 해서 헤어질 수는 없지 했는데, 내가 이렇게 임신이 됐잖니. 아무래도 쉽게 생각해야겠어.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하고. 괜찮은 남자야. 환경도 서로 비슷하고, 성격도 닮은 점이 많고, 이해해야지. 그럼 선후책이라도 따듯하게 풀어놓을 수 있잖아? 그런데 그걸 못해주는 남자야. 자기가 어떻게 하냐 이거야, 속수무책이다 이거지. 자기도 답답할테지. 하지만 난 어쩌란 말이야. 여자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워야겠어. 책에서 봤는데 임신 중절 수술은 간단하대. 내가 살아야겠어. 내 임신이 무슨 담보물처럼 받아 들여지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어. 이런 것으로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 임신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어. 내가 결혼을 구걸할 수는 없잖니? 좋아한다면 자기가 날 설득시키고 이해시켜야 될 일아냐? 누가 고생하는 것이 두렵대. 한때의 불장난이었다고 말해보라고 대들었어. 내가 노리개 감이었다고 말하라고 그랬어. 그랬더니 머리카락만 쥐어뜯고 있잖아. 가장 치사하고 더럽고 돼먹지 않은 변명이잖니? 그게 도대체 뭐야? 뻔뻔스럽게도 헤어지자는 말을 안 하는 게 무슨 알량한 양심이라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미워 미치겠어. 차라리 깡패들처럼 날 걷어차버리면 속이 후련하겠어. 그렇다고 내가 날 버려달라고 할 수는 없잖니. 그게 말이나 돼? 무슨 신파극 대사도 아니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난 무력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다들 돈에 걸신들린 귀신이 덮어 씌었나? 병신, 병신이야! 망해야 돼, 한국 사내들은 더 망조가 들어봐야 해, 물러터질 대로 물러 터져가지고, 죽을 용기도 없는 작자들이야. 구제불능들이야! 깡그리 잊어버리도록 노력할 거야. 정말 그럴 수 있을 거야. 감기약도 안 먹는 내가 병원에 가야 하는 게 억울할 뿐이지.
9. [절대사절]중에서 주희 _ 선욱현 作
절대사절!도 붙여보고, 절대사절에 ‘사’자를 ‘죽을 사’ 자로도 써서 붙여보고, 끝에 ‘절’자를 가위를 그려서 붙여보는 등 별짓 다했어요.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나중엔 안 되겠다 싶어서 호소문까지 써봤어요. (간절하게 그 문장을 흉내 낸다.) 신문을 배달하시는 지체 높으신 선생님, 엎드려 비옵건대 절대로 신문 넣지 말아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 은혜는 죽어두 잊지 않겠습니다. (어금니를 물고) 알았니? (제 목소리로 돌아와서) 다 소용 없어요. (신문박스를 가리키며) 한 건의 배달 사고도 없이 한 달 분이 고스란히 모아졌죠. 고지서는 승리의 깃발마냥 펄럭이며 날아왔구요. (고지서를 팔랑이며) 정말이지 돈 때문이 아니에요. 그 족속들이 하는 짓을 보세요. 그들은 지금 비웃고 있는 거예요. 오늘 아침 전화가 그걸 증명하죠. 그 총문지 뭔지 하는 놈이 용기백배하게도 전활 했더라구요. (흉내 내어) 신문대가 입금되지 않아서 전화드립니다. 바쁘시면 제가 직접 찾아 뵈어두 될까요? 저희 보급소도 결산을 해야 하거든요. (제 목소리로) 정말 용감하지 않나요? 혹시 그놈, 미친놈이 아닐까요? 아님, 좀 모자란 놈이던가. 제 말이 맞죠? 그놈, 좀 이상한 놈 같죠? (현관쪽으로 시선을 두고) 저기 마침 오네요. 여러분은 제가 어떻게 미친놈을 다루는지 지켜만 보세요.
10. [지하철 1호선]중에서 거지소녀 _
차내에 계신 언니 오빠 아저씨 아줌마, 저희 아버지는 택시기사 하시다가 삼청교육대 끌려가서 다리 하나 부러지시고 냉면 집 앞에서 구두 닦다가 그랜저가 후진할 때 치어서 팔 하나 부러지시고 집에서 봉투 풀 붙이다가 연탄가스 맡고 비명에 돌아가시고, 저희 어머니는 파출부 나가다가 도둑누명 쓰고 쫓겨나 대학로에서 포스터 떼는 일 하다가 연극쟁이들한테 몰매 맞고 집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너희 남매들을 다 죽이고 목매달을 것 같으니 차라리 내가 혼자 나가 뒈지던지 말든지 너희 둘은 내 두 눈으로 안 봐야겠다.”고 휑 집을 나가시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버린 우리 남매는 사글세 방 값 못 내서 달동네에서 쫓겨나고, 동생은 배고프다고 울어대고, 동생을 데리고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이 소녀 가장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여러분으 따뜻한 온정만은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서 저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조용한 차 내에서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11. [지하철 1호선]중에서 걸레 _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가위가 뱃속에 들어가서 싹둑싹둑 자르니까 그 이 개월도 안 된 핏덩어리가 뭘 안다고 막 요리조리 피하는데 좀 안 됐더라. 죽는 거? 그것도 쉽지 않데. 열차가 들어올 때 몸을 날려 봤는데 나 안 죽었어. 이게 딱 내 앞에 서더라구. 여덟 칸만 달았었나봐. 출퇴근 시간에 했어야 하는 건데. 안경 씨가 그랬던가? 죽는 건 용기가 아니래. 그 반대가 용기래. 그럼 또 봐. 선녀아가씨, 안경 씨가 이 차 안 탔나봐. 나 안경 씨 노래 듣는 게 취미거든. (내리려다 말고) 참, 안경 씨가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구? 글쎄……. (웃는다.)
12. [백마강 달밤에]중에서 순단 _
대감을 옥에 가둔 까닭을 아시오. 백성들 목에 유교라는 올가미 씌워 목을 죈 장본인이 대감이오. 유교! 성을 내면 웃음 웃어라. 걱정하면 황송해해라. 더러운 꼴 뵈지 말아라. 창포에 머리 감고 찬찬 의복 곱게 입어라. 헐벗은 이 웃지 마라. 어른 앞에서 웃지 말아라. 남 앞에 기침 삼가거라. 대화중에 박장대소 절대 말고 부모에 끼친 몸 상하게 말고 식은 밥은 아껴 먹고 드러누워 낮잠 자지 말고 어른 말씀 깃 달지 말거라. 하지만 안 된다. 황송해라. 공경해라. 극진해라. 그저 뭐든 되도록 하지 말고 되도록 죽어지내라. 이래 가지고 백성을 모두 빈충이를 만들어버렸어. 인정 많고 패기 등등하던 이 백성들을 죄 비열하고 소심하고 남 눈치나 보는 대도 없고 소견도 없는 하인배, 종의 자식들로 만들어버렸어. (사이) 군신유의! 대감 같은 충신한테는 잘 어울리는 덕목이오. 백성들은 충신이 아니오. 대감한테나 어울리는 충절이 아무나 걸칠 수 있는 옷이오? 할 수 없는 일 하라고 하고 할 만한 일은 하지 말라고 하고! 그래서 백성들은 질식해서 다 헛것들이 돼버렸어. 그래 내 이 모든 질식거리를 마련한 장본인인 대감을 잡아 질식시켜 죽이기로 한 것이오.
13. [허탕]중에서 서화이 _ 장진 作
그 여잔 우리엄마가 아니야. 남편의 엄마지. 화이. 서화이. 바람이 됐어. 불에 타서 바람이 됐어. 우리 아기를 미워했으니까…, 남자아기가 아니라구……. 어머 왜 여름에 양수 검사를 받았잖아. 억지로 끌고 가서 해놓구선…, 난 안 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날 때렸어. 밥에다 약까지 넣었어. (겁을 먹은 얼굴) 늦으셨네요. 제발, 여보, 당신 하라는 거 뭐든지 다 할게요. 아기만은 제발…, 당신…, 어떻게 그걸 작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 아기예요. 오늘…, 당신 어머님이 내 밥에 약을 넣었어요. 고의 유산을 시키려고…, 정말로 미쳐버리겠어요. 여보, 제발 제가 이렇게 빌게요. 아기만은 그냥 내버려둬요. 이혼을 하라면 하겠어요. 그러니 아기만은 죽이지 말아요. (소리친다.) 죽이고 싶었어. 나의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 남편, 시부모, 올케…, 그 집안 모두를. 우리 아기가 너무 불쌍했어. 태어나더라도 온갖 저주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자랄 우리 아기가 불쌍했어. 그래서 죽였어. 모두 잠든 밤에 기름을 부어서 태워 죽였어. 모조리 태워 죽였어. 우리 아기를 위해서야. 우리 사랑하는 아기를 위해서. 그 악마 같은 사람들 모두 죽였어!
14. [이수일과
(소파 앞에 무릎 꿇고) 수일 씨, 사죄하러 왔어요. 전 오랫동안 고통에 고통을 받으며 오늘이 있기를 기다렸어요. 수일 씨, 전 용서를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용서를 받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전 죽을 각오로 왔어요. 전 일전에 저 박 선생님을 만나 뵙고 많은 나무람을 받았어요. 전 그 후로 그 때의 박 선생님 말을 수없이 되새겼어요. 그런 결과 하나의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됐어요. 전 남편의 집을 떠났어요.커다란 저택이지만 제 가슴처럼 텅 빈 그곳에서 더 살 수가 없었어요. 이제 제 몸은 제 것이에요. 죽어서 사죄하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 번 뵙고 충분한 사죄를 직접 하고……. 수일 씨, 저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책망해서 고통을 받아 못해 죽도록 해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흐느껴 운다.)
15. [원술랑]중에서 진달래 _ 유치진 作
바로 사흘 전, 당나라 군사가 산에 숨어 있는 고구려의 유민을 토벌해 주겠다는 구실로 우리 마을 성 밖에다 진을 치고 있다가, 갑자기 창부리를 돌려 우리 성 안으로 쳐들어왔어요.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성 안 사람은 미처 도망가지도 못하고 모조리 몰살을 당했어요. 저의 아버지 어머니까지도! 이런몹쓸 당나라와 동맹국을 맺은 사람은 누구예요? 당나라 군사를 이 땅에 들어오게 한 사람이 누구냐구요? 이러고도 당신네들이 원수가 아니에요? 아버지 아머니를 살려내세요! 살려내요!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아무 죄 없어요. 있다면 우린 나라님을 섬긴 죄밖에 없고,
16. [사랑을 찾아서]중에서 미스 리 _
그렇게 잘난 사람이 왜 자기 앞의 진실은 외면해? 자기 앞의 진실이 안 보여?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난 보여?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 그 진실은 왜 못 봐? 자기 앞에서 이렇게 허덕이고 애원하고 울면서 목이 타게 갈망하고 있어.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야, 따뜻한 말 한 마디.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마디. 그래, 널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도 못 해주면서 진실은 무슨 얼어 죽을 진실이야? 그 사람의 사랑, 그의 약속은 가슴 아프고, 우리 둘 사이의 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솔직히 말해. 이제 내가 싫어졌지? 그럼 내가 좋아? (반응이 없자) 그것 봐. 대답 못하잖아? 내가 자기하고 같은 사무실에 있는 것도 싫고, 자기 일 도와주는 것도 싫고, 자기한테 말도 안 시키고 아는 척도 안 했으면 좋겠지? 나중에 언제? 다 늙어서? 사랑도 정열도 다 쭈그렁 망태기가 된 다음에? 남의 얘기하듯 점잖게? 그래, 혼자 있게 해줄게. 영원히 없어져 줄게.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사이) 자기 사장하고 나하고의 관계 얘기 들었지? (막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나한테 한 번 물어보지도 않아? 자긴 그런 거 물어볼 배짱도 없는 거야? (사이) 바보야. 그거 믿었어?
17. [사랑을 찾아서]중에서 이웃 여자 _
(발딱 일어서며) 정말 밸이 꼴려서 못 듣겠네. 멀쩡한 계집 옆에 두고 우리 마누라, 우리 마누라. 아, 그래, 그렇게 저것 없이 죽고, 못살겠으면 같이 따라가서 살지 그래? 평생 외간 남자 쫓아다니다가 마지막까지 서방질로 죽은 년이 그렇게 좋아? 내가 보기에 저승길 갈 사람은 이 양반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첩년질 하기가 부처님 보기보다 힘들다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야. 나이 사십 먹도록 양놈들 뒤치다꺼리 해가며 모든 돈 몽땅 바쳐, 본마누라 눈치 보면서도 때 맞춰 보약 달여 먹였지, 철마다 옷 해다 입혔지, 짐승 같은 놈들한테 하루 저녁에 몇 차례씩 시달리고 나서도 그 짓 하자고 대들면 나 싫은 내색 한 번도 없었어. 내가 그렇게 임자 모실 때 그년은 뭐 했어? 엉뚱한 놈하고 놀아나지 않았느냔 말이야? 근데 이제 와서 그년 죽어 자빠지니까 뭐, 그 앞에 꼬꾸라져서 살려내라고 통곡을 해? 어이구우 원통해라, 이년의 팔자, 아이고오…….
18. [만선]중에서 슬슬이 _ 천승세 作
(망연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서선) 하나님도 너무하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내려 주실까? (점점 비통하게) 수신님도 너무 하셔! 오빠들만 셋이나 불러 가시고는 뭇이 또 못마땅해서 일마다 트시기만 하실까? (처절하게) 아, 아! (슬슬이 옷고름으로 몇 번 눈두덩을 찍어내고 나선) 시상에 내가 차라리 사내로 태어났드라면……. (주먹을 불끈 쥐고) 물귀신이 되드라도 아부지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디! (갑자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는, 나는 아무도 쓸모없는 하찮은 여자여. (경건하게) 나는 믿어! 나 땜시 속을 태우시고 있는 아부지 맘도, 오빠 맘도, 엄니 맘도 죄다 죄다 나는 알어! (한 동안 얼굴을 감싸곤 깊은 슬픔에 잠기다가, 부스스 고개를 들고) 아아! 내가, 내가 범쇠 영감한테? (몇 걸음 바삐 걸어 나가다간 우뚝 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만약, 만약에 일이 틀리면 나는 범쇠 영감한테?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아!
19. [돌아서서 떠나라]중에서
그래 니가 큰 죄를 짓고 그래서 큰 뉘우침을 얻었다면 그건 분명 은혜겠지. 그 누군가가 너에게 준. (사이) 난 상갓집에 가도 안 울어. 그 날은 슬프지 않아. 서너 달쯤 지나야 진짜 슬픈 거 있지. 혼자 목욕하다가 밥 먹다가 문득문득 생각나. 그럼 밥 먹다가도 숟갈 놓고 엉엉 울어대는 거야. (창가로 가 창문을 연다.) 바람이 없었다면 난 살지 못했을 거야. 내가 바다를 그리워하는 건 거기에 바람이 불기 때문이야. 버스를 타고 비가 들이쳐 얼굴을 적셔도 난 꼭 창문을 열어야 돼. 누군가 문을 닫으면 발작이라도 하고 싶어. (사이) 언제 터질지 몰라. 새총을 눈앞에 들이대고 팽팽하게 당기면서 위협을 하는, 그 긴장감 속에서 너를 만나왔다. 솔직히 어떤 땐 건달이라는 게 매력이었어. 어깨들이 도열해 있고 그 사열대 숲을 지나쳐 식사도 하고 우쭐한 기분으로 파티에도 참석하고. 허나, 그건 일시적인 기분이었어. 왜냐? 너도 언젠가는 그 희생물이 된다는 것, 또 두 소경이 한 막대가 잡고 걸어가다 강물에 그냥 툼벙하듯 나 또한 그리 된다는 것, 또 내가 너를 위해 이토록 가슴 졸이며 기도하고 있는데 너도 언젠가는 변하지 않을까 하는…, 내 정신 좀 봐. 이제 와서 이런 얘길 해서 뭘 어쩌자는 거지.
20. [돌아서서 떠나라]중에서
보고 싶다는 놈이 소식 한 장 없다니? 니놈이 잠적해버린 뒤에 내가 아파트 담벼락에 대고 소리, 소리 질러대며 맹세를 했다. “공상두 너 이 새끼, 널 다시 만나면 내가 개자식이다. 나쁜 자식. 다신 안 만난다. 임마, 치사해서 안 만나. 다 알어, 임마. 한 달 뒤쯤 꽃 사들고 나타나서 배시시 웃으면서 똬리 틀 거지? 용서 안 해. 못해. 싫다, 싫어. 그것도 한두번이다. 임마. 만약 꽃 사가지고 오면 그 꽃 저 쓰레기통에 냅다 쑤셔 박을 테다. 내 분명히 말했어. 이젠 끝이야.
21. [돌아서서 떠나라]중에서
그래. 난 그 말 믿어. 사랑은 단박에 가는 거라는 말. 자꾸 마음이 쏠리는 거야. 니가 퇴원하니까 더더욱. 마음을 다잡을 겸 부산엘 갔다. 영해 언니와 막걸리를 마시다가 내가 사발을 바닥에 떨어뜨렸어. 그게 깨지면서 얇은 사금파리 조각이 언니 발등에 꽂혔어. 피가 줄줄 흘러 그런데도 그 사금파리 조각이 햇빛에 반짝반짝. 내가 뽑으려고 하는데 언니가 “냅두거래 보석 안 같나.” 보름쯤 지났을 꺼야.
22. [남자충동]중에서 박씨 _ 조광화 作
(방백) 내 집이다, 좋아 했었는디……. 끝이여. 이 나이에 새살림 헐 줄이야 알았겄는가. 글고 보믄 참 끔찍한 세월은 참었제. 위찌큼 견뎠나 몰러. (박씨, 방으로 들어선다.) 것부텀 말혀야것다. 지 아부지가 날 월메나 환장허게 허는지 알믄 내 맘도 알 거시여. (박씨, 등기소 서류를 장정 앞에 내민다. 아버지 도박으로 인해 집이 담보 잡힌 것이다. 창피스런 비밀을 털어놓는 시늉으로 말한다.) 나, 참말로, 이혼할란다. 니들 땜시, 니들 크는 거 본다고 여태 살었응게. 니 아버진 희망이 읍당게. 나만 뼈꼴 빠져 불어. 니도, 유정이도, 인자 벌어먹고 살 거이고, 달래가 참 맴이 걸렁만도, 이럳고는 더 못 살겠응게……. (눈물을 훔치며) 나 가게 정리한다. 니 같은 건달이야, 머 혀서? 니 아버지헌티 백 번 속았으믄 됐제. 또 니 헌티 쏙으란 말여? 나, 못 믿겄다! 나 가게 정리한다.
23. [산불]중에서 사월 _
(자포자기한 빛이나 냉소하듯) 내가 화냥년이면 어때요!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오? 상관이! 나는 한번 한다면 해요! 걱정 말아요 누가 어머니더러 여비 대라고 할까봐 걱정이오? 흥! 산 입에 거미줄을 안 쳐오. (최씨, 가라고 한다.) (히스테리컬하게) 그러니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못 하겠어! 난 못해! (최씨, 자식이 있지 않냐고 한다.) 흥! 자식이 무슨 소용이에요! 그게 나를 잘 살게 해줘요? (한숨을 푹 돌리며) 다 귀찮아요! 이것이 사는 것이라면 차라리 부엉이가 되어서……. (최씨, 맘대로 하라며 밖으로 휭 나가버리자, 사월이는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는 허무감에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발 쪽을 향한다. 이때 대밭에서 내려오는 점례를 발견 가까이 다가간다.) 점례! (일부러 점잖게) 재미가 좋아? (점례, 시치미. 사월,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나는 못 속여! (바싹 다가서며) 지금 그 사람이 누구야? 응? 내가 묻고 있는 거야! (달래듯)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할게 어서 대! (점례, 무슨 소린지 모른다고 한다.) 아니. 정말 이렇게 헛소리만 뱉을 텐가? 좋아!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고 올 테니까! (하며 대밭 쪽으로 간다. 몇 발 옮길 때까지 보고 있던 점례의 얼굴에서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다. 점례, 어딜 가냐고 묻는다.) 찾아볼 사람이 있어 그래! (점례, 누구냐고 묻는다.) 젊은 남자! (돌아보며) 누구지? (점례, 사월이가 눈치 챈 걸 알고 당황하자) 알고 있었지! 홋호, (속삭이듯) 어디서 왔지? 서방님은 아닐 테고 응? 말 좀 하라니까! 친척? 점례에게 그런 친척이 있었던가? (하며 딴전을 부린다.) (추궁하듯) 왜 이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지? 응? 누구란 말이야?
24. [산불]중에서 최씨 _
(삿대질을 하며, 씩씩~) 어느 년이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대라니까? 엉? 어느 년이여? 엉? 어느 년? 삿대질, 그래, 삿대질 좀 하면 어떠냐? 엉? 삿대질 좀 하면 어때? 어때? 엉! 하이고오~~ 글쎄, 내 딸년이 새끼 뱄다는 소문을 퍼뜨린 년을 대면 되잖아! 네 년 목 베라구? 모가지 베라구? 하이구~~ 옳지!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엉? 말 한번 잘 했어! 이제 국군이 들어왔다고 보복을 할 셈이구나? 엉? 그래애, 좋다, 좋아 마음대로 해봐라. 마음대루, 엉? 마음대루 해봐아? (악에 받쳐서) 네년들이나 나나 경을 치기는 매일반이지. 매일반! 허이구우~~ 그래, 이 마을에서 산 사람들에게 협력 안 한 년이 있으면 나와 보라지! 나와 봐? 나와 봐? 어차피 망칠 바엔 나두 다 걸고넘어질 테니까! (옆 사람들이 불안하게 동요되자 한층 신바람이 나서) 산 사람들에게 양식을 안 대준 년 있어? 야경을 안 한 년 있어? 있느냐 말이여! 있으면 나와봐? 나와봐? 허이구우~~ 게다가 이장이랍시고 충성을 바친 년은 누구지? 누구여어? 복 도깨비가 복은 못 줘도 화는 준단 말이야! 이년들아! 어서 그년 이름을 대! 대 봐? 내 딸년이 새파란 나이에 과부된 것만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데, 난데없이 새끼를 뱄다니, 생사람 잡을 일이 아니여? 생사람! (분을 이기지 못해 호흡이 거칠다.)
25. [산불]중에서 최씨 _
(유들유들하게) 상관이 있고말고. 자네 시어머니는 자위대에서 억지로 떠맡겼으니까 별수 없이 이장을 지낸다지만 실상은 그 이장 노릇으로 충성을 다 바쳐야만 사람행세를 할 수 있기에 맡았지! 안 그래? 흥! 그러기에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법이야. 내 사위를 빨갱이로 몰아 죽인 놈들은 모두 웬수야! 내 딸 사월이를 청상 과부로 만든 놈을 왜 내가 가만둬! 이젠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우리도 잘살아봐야지! 당신 아들은? 흥!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흉보는 격이군! 무슨 청년단 간부랍시고 낭패만 부린 일은 생각 못하나? (더욱 약이 올라서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잘들 한다, 내 사위가 반동 손에 죽은 것이 애린 이빨 빠진 격이란 말이지? 네 것들은 모두가 반동이지? 쌀례네, 갑돌이네, 성만이네!
26. [산불]중에서 점례 _
지금은 안 돼. 할아버지가 아직 계세요! 할아버지가 마실에 나가시면 갈 테니까 어서 대밭에 가서 기다려요! 이러시면 안 돼요! 어서 돌아가 게세요! 곧 갈 테니까요! 꼭 어린애 같은 소리. 저는 무식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역시 내려가셔야 돼요. 언제까지나 숨어서 살 수는 없잖아요? (자신을 가지며) 어때요? 선생님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끌려다녔을 뿐인데, 그만큼만 벌을 받으시면 되잖아요? 그렇다고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요? 네? 다른 생각일랑 마시고 자수하세요. (자신의 고민을 억제하려고 애쓰며) 그러니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내게 돈이 있수, 권력이 있수, 학식이 있수, (울먹거리며) 내 몸 하나두 갈피를 못 잡고 송장처럼 사는 년더러 어떻게 하라고. 난, 아무것도 없는 몸이에요! 있는 거라곤 상처투성인데……. (하며 흐느껴 운다) (눈물이 흘러 내리는 얼굴을 들여다보이며) 예? 그런 말씀 마세요! (울먹기리며) 싫어하는 남자한테 제 몸 맡기는 여자도 있나요? 예? 남편도 아닌 남자한테…….
27. [산불]중에서 쌀레네 _
작년 겨울에 아범 송장을 찾으러 갔을 때 일이에요. 무네미 산골을 넘어 가려니까 저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그때 문득 까마귀는 송장을 찾아다닌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쪽을 더듬었지요! 그랬더니 토끼바위 바로 아래에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모여서 무엇을 쪼아 먹고 있잖겠어요. 그래 가까이 가봤더니 그게 바로 아범의…, 얼굴이며 손에 붙은 살은 까마귀밥이 되고 뼈만 허옇게 남았는데…, (그때의 참경을 상기했는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옷을 봤어요! 고동색 조끼와 회색 솜바지가, 게다가 재작년 대보름날 산불을 끄다가 태울 불구멍이 바지에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한숨을 내쉰다.) 그것들이 울어대지 않았던들 그 징그러운 꼴을 안 봤을 게 아닌가? 눈알도 없고 코도 없이 허연 이빨과 광대뼈만 앙상하게 남은 꼴이…….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치 못하여 흑흑 느껴 울기 시작한다. 몇 사람이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준다.)
28. [북어대가리]중에서 다링 _ 이강백 作
나도 장난으로 해보자는 건 아니에요. (흐트러진 옷을 바르게 고쳐 입으며) 우리, 장난이 아닌 진실로써 해봐요. 다른 창고지기들은 모두 시험해 봤지만요, 그들은 나한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그들 좀 보세요. 굉장한 걸 느꼈다는 듯이 야단법석이죠. 모두 다 거짓이에요. 누구 하나 나를 진실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들 창고 속에서 아무렇게나 상자를 들여오고 내보내듯이, 나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다룰 뿐이라구요. (살림 도구가 있는 곳에 멈춰선 자앙에게) 이리 가까이 오세요! 제발 도망가지 말고 가까이 와서 나를 시험해 보세요! (멈춘 채 오지 않는 자앙을 향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시험해 보지도, 않는 거예요?
29. [북어대가리]중에서 다링 _ 이강백 作
꽤 무거운데요! (상자를 내려놓고 살펴본다.) 단단히 못을 박았네! 망치나 톱 같은, 무슨 연장 없어요? 아무 걱정 할 것 없어요. 당신은 나에게 맡겨두고 보기만 하세요. (주위를 둘러보더니 살림 도구 있는 곳에서 놋쇠로 만든 국자를 들고 온다.) 이 튼튼한 놋쇠 국자가 좋겠어요. (국자 손잡이를 상자의 본체와 뚜껑 사이에 비집어 넣는다. 그리고 지렛대처럼 힘을 주며 들어 올리자 못이 빠지면서 뚜껑이 열린다.) 자, 됐어요! 이리 가까이 와서 상자 속에 든 것을 보세요! 참 이상하게 생겼네! 쇠로 만든 것이 가운데는 구멍이 뚫리고…, 맞아요. 기계의 부속품이에요! 부속품 한 개가 이 정도 크기라면, 수많은 부속품들이 모여 만든 그 기계는 아주 굉장히 크겠군요! (점점 자신의 생각을 부풀리며 흥분한다.) 물론 그 기계는 특수하겠죠.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고, 바다 밑을 다닐 수도 있을 테죠. 언젠가 영화를 봤는데요, 실제로 그런 기계가 있더라구요. 신나게, 과거에도 가고 미래에도 가요. 어쨌든 사람들은 그 신나는 기계 때문에 행복해요! (침묵하고 있는 자앙에게) 그런데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않죠? 내 생각이 틀려요? (사이) 좋아요, 그럼 다른 생각을 해볼까요? 그러니깐 이건요, 굉장한 폭탄의 부속품이에요. 그 폭탄은 사람들을 죽이죠. 한두 명씩 죽이는 게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을 한꺼번에 죽여요! 실제로 그런 무서운 폭탄이 있다고 잡지에서 읽었거든요. 순식간에, 어찌나 재빠르게 죽여버리는지, 사람들은 죽는 고통을 느낄 수도 없데요! 그래도 당신은 아무 말 안 하시네……. 또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죠?
30. [자명고]중에서 낙랑공주 _ 유치진 作
낙랑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고구려의 남자를 따랐으면 의당 고구려의 여인이옵니다. 이제 저도 고구려의 여인이 되어 왕자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님! 용서하옵소서. 왕자가! 그토록 믿었던 왕자가 고구려를 치려하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씀을 아버님께 할 수도 없는 고구려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왕자를 따를 수도 없고, 아버님을 따를 수도 없으며, 낙랑을 버릴 수도, 또 고구려를 배반할 수도 없사옵니다. 아버님 어찌하오리까? 흐흐흑! 아버님! 이 불효한 여식은 어쩔 수 없는 고구려의 여인인가 보옵니다. 용서하옵소서. 낙랑 땅은 낙랑 백성들의 것이옵니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이 땅의 왕자님이 어진 다스림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이 몸은 고구려의 여인. 자명고를 찢었사옵니다. 자명고 가죽을 보내오니 속히 오셔서 나를 데려가 주옵소서.
31.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희숙 _ 유치진 作
나도 철이의 잘못을 뻔히 알아요. 하지만 나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어. 언니 날 봐서라도 좀 더 널리 생각해주구려, 언니. 계집애로서 할 소린 아니지만 내겐 자나깨나 철이 생각뿐이었소. 내가 낙동강 전선에서 부상당했을 적에도 모두들 날 죽는다 했지만 난 살아 철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하늘에 기도했었수. 그랬더니 기적적으로 살아났어. 철인 내게 일종의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녜요. 죄스런 말이지만 억울하게 납치당한 오빠보다 철이 생각이 간절하고 있었음을 난 느꼈어요. 이래선 안 된다! 이건 의릐가 아니다. 죄다! 해봤지만 어쩐지 그랬어요. 그러니 언니 아무래도 우린 결혼해야겠어. 더구나 죽지 않고 이렇게 다시 만난바에야…, 결혼까지 잡아놨다가 6.25 터져 못한 게 아뇨? 오빠가 택해주신 약혼자였으니 오빠두 용서하실 거예요. 그만, 그만해요! 그만! (격한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고 흐느낀다.)
32.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희숙 _ 유치진 作
언니 철이한테 단호히 한마디 해줘요. 언니로서는 절대로 결혼을 허락 할 수 없다고. 언니가 흐리멍텅한 소릴 해놓으니까 철이는 결혼할 것으루 아주 작정하고 있다우. 나는 괴로워 못 견디겠어. (정애의 결혼 승낙에 대한 반응) (눈이 동그래지며) 결혼을 하라구요? 미쳤구려. 언니. 지금 옷 한 겹으로 내 육체를 가려 있기 망정이지 이것만 벗으면 얼마나 무참한 비극이 숨어 있는가, 언니는 빤히 알고 있잖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그게 언니의 진심이라면 언닌 여자가 아냐 정말이야. (훌쩍거린다.) (부르짖다시피) 아아. 어쩌다가 내가 그 파편을 맞았담! 파편을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나 했다면 아무 일 없을 걸 뭣 땜에 이렇게 살아놨담! (몸부림치며 운다.)
33.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정애 _ 유치진 作
이봐요, 작은 아씨! 용서를 하면 납치된 사람이 살아온데요? 그렇지 않다면 내겐 용서란 생각할 수도 업는 일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요, 안 돼, 밤이면 잠이 들기 전에 난 줄창 성경 말씀을 외웠어.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러나 난 내 분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어. 달래기는커녕 점점 머리를 더 치켜드는 것을 어떻게? 내 가슴속에는 납치당한 이에 대한 애정보다 때로는 납치시킨 자에 대한 증오감이 더욱 불타고 있는걸, 그 불은 정말 아무도 끌 수 없어. 깊이 생각해보우. 설사 주위 환경이 용납된다 해도 작은 아씨의 입장은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우? 첫째, 작은 아씨의 가슴에 받은 상처는 어떻게 해? 여자로서 있을 게 없으니 말이야. (희숙은 정신이 썩 돋아난 듯 자기의 젖가슴에 손을 얹는다. 숨소리가 달라진다.) 지금은 그자가 작은 아씨의 육체의 비밀을 모르니까 그렇지 만일 결혼해 봐. 빨갱이가 닥치면 왼쪽으로 흰둥이가 돌아오면 바른편으로 왔다 갔다 하는 위인이 오죽이나……. 더구나 작은 아씨의 뱃속엔 파편까지…, 아니, 내가 너무 지나친 소릴 했나봐. 작은 아씨. 용서해요. 작은 아씨!
34.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정애 _ 유치진 作
학생! 뻔뻔스럽게 그 따위 소리가 어딨어? 달이 아버지가 제자로서 학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애꼈소? 학생의 장래를 위하는 일이라면 솔선 앞서셨고, 정철이가 아니면 그림 공부하는 학생이 없는 줄로 알고 계시지 않았소? 오죽하면 하나뿐인 여동생인 희숙이와의 결혼을 쾌히 승낙하셨겠소? 헌데 학생은 그 은혜를 짓밟고 자기의 은사를 괴뢰한테 강제로 자수시켜 지금 그 생사조차 모르게 하지 않았소? 그래, 나와 달이를 이런 꼴로 만들었죠. 이래도 학생은 사람이오? 사람이걸랑 양심을 가져요! (하며 자기의 울분을 못 이겨 흑흑 느낀다.) 난 몰라. 몰라요. 결혼이란 본인의 의사 여하에 달린 게 아냐? 그러나 내가 학생이 저지른 죄를 용서했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난 남을 해치는 잔인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오. 그러면 나마저 학생과 똑 같은 인간이 되고 말 테니까.
35.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정애 _ 유치진 作
작은 아씨는 상대편을 너무나 사랑하고 애끼는 마음에서 그에게 환멸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 결혼을 안 하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을 위하는 게 아냐. 만을 작은 아씨가 이대로 뻗쳐 결혼을 아주 거부한다손 쳐봐. 그때 그 사람은 어떻게 돼? 다시 구할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반드시 빠지고 말아요, 이번엔 보니까 그의 성격은 몰라볼 만큼 거칠어지고 광폭해졌어. 6.25 전관 딴 판야. 그건 그에게서만 보는 현상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가 거의 다 그렇게 됐지만 이건 이번 동란에 그들이 너무도 참혹한 꼴을 많이 당했기 때문일 거야. 이런 경우에 또다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봐.클레오파트란지 하는 저 앞집 계집하고 몰려다니 걸 걱정했지? 이번엔 그런 류가 아닐 거야.
36.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클레오파트라 _ 유치진 作
자식? 그런 것 다 소용없어. 나도 해본 장단야. 벌써 십여 년 전 일야. 난 어쩌다가 새낄 뱄어. 이게 참 귀여웠어. 허지만 내 직장 때문에 키울 수가 있어야지. 할 수 있나. 남의 집에 맡겼지. 그리고 삼 년 후에 찾아갔더니 이 에미를 아주 몰라보지 않어? 그동안 얻어먹은 암죽에 팔려 에밀 원통 잊어버린 거야. 그땐 난 생각했지. 인간이란 동물은 혈육이 아니고, 물질에 좌우된다는걸……. 음, 돈을 가져야 사람 구실을 하기 때문야.
37.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클레오파트라 _ 유치진 作
왜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정말 이가 갈려, 날 모욕한 걸 생각하믄……. 그러나 그것 다 물로 씻어버릴 테니 같이 가, 나하고. 자네가 담배 장수 기집애의 뒤를 쫓지만 그 앤 자네한텐 짝이 기울어. 불면 넘어질 듯 한 그 피조리가 어찌 이 육체를 당해? 정말 균형이 잘 잽혔지. (탐스럽게 철의 살을 만진다.) 에구 이 도끼눈! 그눈으루 날 잡아먹을 참야? 그러지 말고 나하고 같이 꺼져. 아무데서나 일평생 아무 걱정 없이 지낼 만한 돈이 내게 있겠다. 벽돌은 나하고 같이 재미나 보면 돼. 난 지난날 세파에 너무 시달려 이렇지, 알고 보문 그다지 나쁜 계집은 아냐. 나도 노력하문 착한 아내가 될 수 있어. 난 여길 떠나야겠끔 됐어. 한시라도 바삐! 같이 가.
38. [한강은 흐른다]중에서 클레오파트라 _ 유치진 作
벽돌 왜 안 데리고 와? 벽돌 어디 있어?! 내가 아주 싫어진 게군! (화투장을 모다 놓고는 옥상에 나와서 희숙을 턱으로 가리키며) 옥상에 나와 있는 저 뚱갈보를 없애버려! 저게 없어져야 그 녀석이 쓸모가 생겨. 미친개가 돼서 우리 밑으로 기어든단 말이야. 발악은 절망에서 생기는 거니까. 빨랑 옥상에 올라가서 같이 포 소리 나는 미아리 쪽을 바라보는 체하고 휙 밀어버려. 그러면 아래로 거꾸로 백힐 게 아냐? 갈 데 있나, 뒈지는 수밖에. 더구나 포 소리는 땅을 빼고 행길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겠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딨어? (미꾸리 아무 대꾸 없이 담배만 빨고 있다.) 아니, 내 소리가 안 들려?
39. [김치국 씨 환장하다]중에서 옆집 여자 _
우리 집은 누런 똥강생이를 키워. 하도 못 무가꼬 털이 까실해. 이 집 똥강생이는 잘 뺏어쳐무서 그란지 황금색이야. 별명이 황금박쥐야, 황금박쥐. 근데 말이야. 우리 개 밥 줄 때만 되면 황금박쥐가 어디에서 실실 기어들어와 가꼬, 우리 새끼 밥을 따 뺏어 쳐무. 아, 이 아들이란 아도 천하의 노랭이라, 지 애비를 똑! 닮아서 벼룩이 간 빼 먹는 재주가 아주 비이상하다니까안! 아, 장사두 지 애비한테 물려받아서 똑같이 김밥집을 하는데, 초등학교 애덜이 오면 김밥을 삼분지 이 줄밖에 안 줘. 라면스프두 반밖에 안 넣어. 애덜이 뭐라고 그러면, 다 넣었다고 우기는 거야. 아, 우기는 데 장사 있나아? 부전자전 개새끼나 아새끼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똑같아, 똑같애애!
40. [눈물의 여왕]중에서 전옥 _ 차갈진 作
내가 살던 세상은 어두웠어. 아비들은 집 밖으로 떠돌고 헐벗은 대지에 집을 세웠던 여자들은 전쟁과 굶주림을 견디면서 늙어 갔지. 나는 집 떠나 세상과 싸움을 건 남정네들에게 묻는다. 희망은 발견했소? 세상은 살 만한가요? 당신들이 찾아 나섰던 사상으로 세상이 건설됐소! 나는 이런 세상이 싫었어. 나는 집을 지키는 개가 아니야. 나는 나야! 그래서 삼팔선을 넘었드랬어. 이게 뭐야? 나 왜 여기 있지. (전옥,
41. [눈물의 여왕]중에서
(신정하의 대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극 중 극 – 마지막 연기) 여기 따뜻한 모닥불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 저희 고난을, 저희 고난을 좀 덜어주시오. 우리의 아비들은 무엇을 찾아 집을 떠났습니까? 그것은 자유? 그것은 평등? 전쟁에 나간 아비들은 죽음도 영예로왔지만 집을 지키는 여자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요? (자리를 지키고 앉은 남자들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사시오? 그동안 집을 지키는 여자들은 속절없이 늙어가고 아비 없이 자라는 아이들은 혼자 세상을 걸어가야 한다오. 제가 살던 세상은 어두웠습니다. (어지러운 호루라기 소리) 조선의 아비들은 집 밖으로 떠돌고 헐벗은 대지에 우물을 파고 집을 세웠던 여자들은 전쟁과 굶주림을 견디면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나는 집 떠나 세상과 싸움을 건 아비들에게 묻습니다. 희망은 발견했소? 당신들이 찾아나섰던 신념대로 세상은 건설되었습니까? 당신의 사상으로 가족들이 살 터를 마련했나요? (사찰형사들, 무대 위로 올라온다. 무대에 선 배우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물러선다.) 이제 새 집을 지어야 해요. 언제 훌쩍 새벽길을 떠날지 모를 남자에게 아침밥을 먹이려고 부엌으로 나가는 여자들의 인생을 아시오? 같은 세상에서 지쳐 돌아올 남자를 위해 쌀을 씻는 여자들, 끓는 밥솥의 진실을……. 내 아들 춘영아…, 춘식아…….
42. [여자의 아침]중에서 여자 _ 선욱현 作
(웃으며) 아,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엄마 마음이란 그렇단 얘기고, 니가 태어날 세상이 그렇게 무섭다는 거야. (이때쯤이면 설거지를 다 끝내고 소파에 잠시 앉는다. 여자는 자신의 배를 사랑스레 쓸어본다.) 하지만 진강아…, 너무 걱정 마라. 이 엄마가, 오늘 티브이에서 봤던 그 들소 엄마처럼 널 꼭 지켜줄 테니까. 참! 진강아, 그 얘기 해줄까? 왜 어젯밤에 아빠 늦게 들어와 가지고 엄마 화가 많이 났잖아. 덕분에 잠까지 설쳤거든. 새벽에 잠도 안 오고 해서 티브이를 켰는데. 그 시간에 웬 동물의 왕국을 하더라. 그 중에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어. (아예 얘기하는 장면을 실연해 보인다.) 글쎄 한 들소 엄마와 새끼가 하이에나들에게 포위를 당해서 공격을 당하는 거야. 하이에나 얘네들은 완전히 깡패야. 몰려다니거든. 아예 걸음걸이까지 어슬렁어슬렁이다. 뿐이냐…, 자기들도 사냥은 하지만, 남이 사냥한 것을 빼앗기도 한다니까. 왜냐…, 걔들은 떼로 몰려다니거든! 완전히 조직이래니까. 아무튼 그런 하이에나 떼가 덤비는데도 그 엄마 들소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는 거야. 이 하이에나들은 치사 빤스여가지구, 엄마는 그래도 뿔이 무서우니까 슬슬 피하면서 엄마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어린 새끼한테만 막 덤비는 거야. 엄마가 한 놈을 쫓아내면 그 사이에 다른 한 놈이 새끼를 물고 달아나고, 그럼 그 엄마는 또 쫓아가서 새끼를 구해내. 그런데 그 틈을 이용해 또 다른 하이에나가 새끼 다리를 물고 저쪽으로 질질 끌고 가는 거야. 하지만 그 엄마 들소는 또 쫓아가서 새끼를 구해내고……. 그러는 사이, 반대편에서 또……. 세상에…, 그러기를 한참 한 거야. 나중에 하이에나들이 포기하더라. 그러면서 그러는 거야. (하이에나들의 교활한 말투를 흉내내어) 에이, 치사해서 안 먹는다. (다른 하이에나가) 아마, 들소 고기는 질길 거야. (또 다른 하이에나도) 아냐, 회충이 득시글거린다잖아. (또 다른 하이에나는) 난 사실 배불러! (제 목소리로 돌아와서) 그쯤 되니까, 들소 엄마는 비로소 다친 새끼를 데리고 자기 무리들 쪽으로 뒤돌아가는 거야. (손바닥을 치며) 아, 그런데, 이 치사 빤스들이 그 틈을 이용해서 또 뒤에서 덤비는 거야. 새끼가 또 끌려가. 어미는 또 받어. 이쪽에서 또 새끼 다리 물어. 어미 사정없이 또 받아. 그러는 사이, 저만치 새끼를 또 끌고 가, 어미 그만치 달려가서 또 사정없이 받어. 말도 마라. 그러기를 또 한참을 했어. 나중엔 하이에나들이 정말 포기하고,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면서 뒷걸음질 치더라.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지들끼리 되게 뭐라고 투덜거리는 거 같애. 그제야 그 들소 엄마는 여기 저기 피를 뚝뚝 흘리는 새끼를 데리고 그 참혹했던 현장을 빠져나가는 거야. 흙먼지 사이로 지친 걸음을 터덜터덜 걸으면서……. 하이에나들은 눈을 (흉내) 요렇게 뜨면서 못내 아쉬워 뒤돌아보고 있었어. 그 포식자들을 뒤로 하고 들소 엄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새끼와 함께 유유히. 그렇게 흙먼지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어. 그 뒷모습! (스스로 감동해서 연신 탄성을 낸다.) 카! 카아아아! 카카카칵……! 그냥 동물들 일이려니, 그렇지가 않더라.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다른 줄 아니? 내가 아까 말해줬지? 더 무서워. 그럼1 진강이 니 앞에도 사자, 하이에나, 악어, 이 딴 것들 많어. 뭐? 우리가 아프리카에 사냐고? 엄마 뿔 보여줄까? 잘 안 보여? 기다려. 일곱 달만 참으면 뿔 달린 엄말 볼 수 있을 거야.
43. [여자의 아침]중에서 여자 _ 선욱현 作
(여자가 빨래를 한 아름 들고 욕실에서 나온다. 그리고 빨래 건조대로 가져와 넌다. 빨래를 털면서 이하 대사들을 한다.) (방금 전 장사꾼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운율을 타고) 술꾼 사가요, 술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제나 오늘이나 아주 연짱으로 마셔대는 순수한 술꾼 있어요. 호랑이도 안 물어가요. 번개도 피해가요. 술꾼 사가요, 술꾼! (제 목소리로) 내가 임신중씨한테 바랠 걸 바래야지. 사랑했소? 익살스레 흉내 낸다) 여보, 황혼 녘을 바라보니 꼭 김치찌개 색깔 같구려. 소주나 한 병 받아오지. (제 목소리로) 안 그러면 다행이다. (문 여는 소리 덜컹 들리고, 문 잠그는 소리 들리더니, 여자 구두소리 계단을 내려간다. 여자는 그 소리에 신경을 쓰고 창문가로가 슬쩍 보기도 한다.) (시계를 보고는) 출근?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말 미스터리하다니까……. (여자는 다시 빨래를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불쑥!) 언제 나기가 우리 신랑 봤다고 수작이야? (창가를 째려본다.) 왜 밤늦게 귀가하는 남의 신랑한테, 말을 거는 거냐고? 아니, 왜 히히덕거려…, 히히덕! 게다가 술도 약간 돼가지고. 아줌마가 자기 처지를 알아야지. 자기가 처녀라면 내가 이해를 해. (사이) 아니, 더 안 되겠구나. 뭐, 요 앞 도로에서 나란히 걷게 된 셈이 되었다, 쳐. 왜 남의 신랑 보고 생글생글 웃어 젖히냐구. (아이) 얘기하다보니까 진자 스팀 오르네. 진강아, 어제 얘기하는 거야. 왜, 우리 아빠가 술 드시고 늦게 들어왔잖아. 아빠가 전화했기에 집 앞으로 마중 나갔거든, 너희 아빠도 웃겨. 우리 집이 산간벽지도 아니고 술만 먹었다 하면 날더러 마중 나오라니. 아무튼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그 여자하구 아빠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지, 뭐야? 세상에! 그리고 또 뭐? 글쎄 엄마를 보더니, 요 앞에 서서 나한테 뭐랜 줄 아니? (흉내내어) “202호 아주머닌 좋겠다. 아저씨가 너무 멋진 거 같아요. 체격도 좋고 분위기도 있으시고. 우리 아저씬 완전 통나무예요. 호호호, 너무 좋겠다. 호호호.” (제 목소리로) 아주머니? 지금 어따대구 아주머니니? 진강아 내가 아주머니로 보이니? 어디가면 스물두 살 처녀지. 그리고 자기가 남의 신랑 체격 좋은 거는 왜 따지니? 돼지고기 한 근을 사 줬어, 쌀 한 될 퍼 줬어? 그리고, 너무 좋겠다? 뭐가~? 그러면서 그냥 들어나 갈 일이지, 뭐? (흉내 내어) “두 분, 안녕히 주무세요. 호호호…….” (제 목소리로) 남이야 잘 자든, 안 자고 달밤에 체조를 하든, 자기가 무슨 참견이야? 그러면서 또! 마지막으로 날 보고 인사해야지, 왜 우리 신랑 쪽을 보고 (그 웃음을 흉내 낸다.) ‘씨익’ 잇몸을 다 드러내고 들어가니? 우리 신랑이 치과의사니? 진강아, 뱃속에 지금 보일러 들어가지? 정말 열 받네. 진강아, 엄마가 괜히 이러는 게 아냐. 그 여자, 정말 (과장되게) 미스터리해. 그 집 남편도 무슨 일을 하는 줄은 모르는데 집에 들어오는 날이 한 달이면 며칠이고, 게다가 그 여자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애는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늘 그렇게 밖으로만 돌잖니. 또 하루는 그 여자를 우연히 동네 목욕탕에서 만났는데, 난 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드만, 자꾸 곁으로 와서 말을 거는 거야. 그러더니 뜬금없이 그런다. 남편을 사랑하냬. 그래서 “사랑하니까 결혼했죠.” 그랬지. 그랬더니 날 요렇게 보더니, 내가 신기하대, 참 나. 또 그런다. 그럼, 지금도 잠자리 하냬. 내 참, 허 참, 별 참, 듣다보니까 나두 괜히 약이 오르더라. 그래서 그랬지. (당시 말투를 흉내 내어) “지금두라뇨? 저희야, 거의 전투에 가깝죠. 호호.” (제 목소리로) 그랬더니, “그럼 행복하시네요.” 그런다. 행복 안 하면, 행복 안 하면 자기가 무슨 도울 일 있니? 도대체 그 같은 결혼은 왜 한 거래? 다 남자 잘못이야. 뭐니 뭐니 해도 가장이 건실해야 집안이 편안하지. 너희 아빠 봐라, 아무리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라도 할 건 다 하구 자잖니. (놀래서) 어머! 엄마가 지금 뭐랬니? 미쳤나봐. 응? 뭘 하냐구? 발 씻고 양치질 한다고. 얘는 뭘 따지고 들어? 너희 아빤 양치질을 안 하면 잠이 안 오시나봐……. 히히. (괜히 웃는다.) (웃는 표정을 지우며) 속도 좋아. 뭐가 좋다고 내가 지금 웃고 있어? 이 남자도 그래. 남자가 좀 근엄한 맛이 있어야지. 남의 집 여편네가 밤늦게 실없는 소릴 하고 있으면, 듣다 말고,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그만 들어가 자라! 그래야지. 그걸 허허 하고 다 들어주고 있냐? (주전자의 물을 한 컵 마시는데, 양이 안 차는지 연거푸 몇 잔을 마신다.) 그래 속 넓은 내가 참아야지. 여자가 너무 밴댕이 소갈머리로 굴면 보기 흉해. 뭐 앞 뒷집 간에 그럴 수도 있다 치자. (사이) 그래선 안 되지! (사이) 이사 오던 때부터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하루는 요 뒷집 아주머니한테 물어 봤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가 그러시는 거야. 사연이 좀 있더라. 글쎄, (아주 재미나게 얘기한다.) 중매로 결혼했대나, 근데 남편이 전에 이미 여자가 있었대나봐. 남자 쪽 부모들이 전에 여자하구 찢어놓으려고 결혼을 시켰대. 그 남자도 그래.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결국 두 여자를 다 불행하게 만들잖아. 옆집 그 여자는 일을 하러다니는 건지,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바깥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디 그 맘이 오죽하겠니? 어디 한 구석은 늘 허전할 거야. 안 그러겠니? 술을 마신다고 풀릴 일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번다고 그게 풀리겠어? 그 여잔 평생을 어떡하니? 그러면서, 애는 왜 낳아. 애가 요물단지라니까. (사이, 아차 싶어서) 요, 방정! (배를 쓸며) 아니, 진강이 넌 말구, 너야 보물단지지! (사이) 그래얘, 알고 보면 불쌍한 여잔데, 수더분한 너희 아빠가 그 여자한테 위로라도 돼주면 그게 다 사람 사는 정이고, 이웃 간에 정이지, 뭐. (사이, 노발대발) 미쳤나봐! 엄마가 지금 뭐라 그러니? 그렇게 다 봐주면 통제가 안 되지. (사이, 수그러져서) 아니, 위로란게 다른 게 아니라, 니네 아빠가 잘 웃잖니? 그냥 인사라도 하다보면 그 여자가 ‘아, 이렇게 따뜻한 이웃도 있구나.’ 그러면서, 답답한 자기 삶이지만 순간적으로라도 그냥 흐뭇할 수 있잖아. 그런 게 다 사람 사는 거고…, (사이) 거기서 끝나면 좋지, 근데 이 여자가 아빠의 선의 가득간 그 웃음을 오해해서…, (귀찮아져서) 아유! 모르겠다. 몰라. 안 되지. 이러다 병 될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아, 평정심…, (심호흡을 하면서도) 아무튼 너희 아빠가 다른 여자 보고 웃으면 싫어. 엄마가 이해가 안되니? 비밀 하나 알려줄까? 엄마는 전생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인이었다. 질투의 화신! (심호흡을 끝낸다, 그리고) 됐지?
44. [밥]중에서 딸 _
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오늘도 눈먼 아비를 앞세우고 가련한 이 소녀 전철을 탔습니다. 뻔번스럽다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지가 멀쩡한 다 큰 계집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구걸하며, 더구나 눈먼 아비를 이용해 동정을 사려한다구요. 그러나 잠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여기있는 저희 부녀, 조상 대대로 한 번도 배가 불러 숟가락 놓은 적이 없으며, 두 끼 이상 연달아 먹어본 적 없으며, 소원이 있다면 한 번 배불리 먹은 후 소화제라는 것을 먹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희 고조할아버지는 밥이나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 하여 동학당들이 양반집 곳간을 터는 데 가세했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가 무너지는 바람에 압사하시고, 저희 증조할아버지는 일제 때 일본 식당에서 버린 음식찌꺼기를 걷어다 먹다가 복어 알을 잘못 먹어 급사하시고, 저희 할아버지는 해방 후 아무것도 모르고 빨치산들 밑에서 밥이나 얻어먹으며 잔심부름 해주다가 부역자로 몰려 옥사하시고, 일찍 아버지를 여읜 저희 아버지는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영양실조로 실명하시고, 우리 큰 오빠는 6.25 구호물자로 나온 우유 가루를 풀어 모처럼 배불리 먹고는 그대로 설사하시고, 우리 언니는 삼 일을 굶더니 집을 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고, 우리 엄마는 잔칫집에 일 거들어주러 가서 몰래 인절미를 한쪽 꿀떡 삼키다가 그만 딱 걸려서 삼켜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고, 우리 작은 오빠는 풀빵 주인이 한눈 파는 새 풀빵을 집어 들고 뛰다가 그만 트럭에 받혀 돌아가셨으니, 이 넓은 세상에 남은 혈육이라고는 애오라지 우리 부녀올시다. 남의 집 더부살이 가던 눈먼 아비가 맨홀에 빠져 이처럼 다리까지 못 쓰게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던져 주시는 한 닢 자비에 부끄러운 목숨 연명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 두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그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이 사회를 위하여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가시는 목적지까지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45. [화가
나는 초상화 속의 여인.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네. 먼 산의 잔설은 언제나 녹을 것인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 아련히 들려올 뿐. 어제 불상을 내어버리고 교회로 갔었지. 주님은 은총을 베풀어 그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하실 거야. 창구멍 셋을 뚤어 오늘도 바다를 내다보네. 해변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 갈매기소리, 그리고 긴 뱃고동 소리 먼 수평선 위로 사라지고, 바다 위에 뽀얀 안개 피어오르면 어둠을 장막처럼 내리고, 또 하루는 지나가네. 나는 나가사키의 해안에서 매일처럼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는 열여덟의 어린 부인.
46. [칠수와 만수]중에서 만수 엄마 _
만수야, 날씨도 추운데 옷 잘 챙겨 입고 객지서 몸조심 혀. 몇 달째 너한테 소식 없응게 엄청 궁금하구먼. 소식은 전해야지 이 에미가 불쌍도 않남? 이 에미 한 입이야 어찌 풀칠이야 하겠지. 하지만 니가 나를 이렇게 대접하면 안 되어. 니를 어찌 키웠는디. 니 애비가 죽었을 땐 넌 겨우 다섯 살이구, 니 동생 은순이 년은 두 살배기였어. 나는 그저 너 하나 잘되고 몸 성하면 원이 없겠다. 보름 전에 은순이 년이 집구석에 내려왔구만. 얼굴빛이 누레 가지고 몸에 큰 병이 든 것 같은디 배가 불렀더구만. 그래두 세상 천지에서 의지할 데라구…. 이 에미한테 찾아서 온 것이 불쌍하기만 혀. 읍내 의원에를 다녔는디 급하게 큰 병원엘 가라는 거여. 돈이 많이 들게 됐구먼. 아무래도 오십만 원 있어야 한다나. 그년도 지딴에는 잘 살아보자고 그라다가 그런 것잉께 너무 책망만 말어.
47. [마의 태자]중에서 낙랑공주 _ 유치진 作
이 나라 태자가 아니시오? (괘씸한 듯이) 자, 죽이시오! 태자님, 태자님은 어이하야 이다지도 비겁하오. 그래도 소녀는 태자님을 사내다운 사나인 줄 알았더니 태자께서 하시는 짓이 고작 이런 일이오? 서라벌의 사나이는 다 이렇소? 제 원수를 죽일 양이면 어이하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옥으로 깨어지지는 못하고 천하에 비겁한 간신배 모양으로 야밤에 비수를 품고 난간에 기어올라 여자의 침방으로 숨어들어…, (태자의 칼을 빼앗아 던지며) 이것으로 약한 여자를 위협하려고? 아아, 비겁하여라! 태자가 이다지도 비겁한 줄을 꿈에도 몰랐어라! 꿈에도 몰랐어라! (악에 받쳐 운다.) (눈물을 거두고) 자, 죽이려거든 이 몸을 죽이시오. 고려 왕건이가 밉거든 왕건의 혈속인 이 몸 먼저 죽이소서. 어이하야 못 죽이오? 자, 죽이오!
48. [마의 태자]중에서 백화 _ 유치진 作
(기가 막혀) 옛날부터 이 세상이란 믿지 못할 세상이라 하더니만 진실로 믿지 못할 건 이 세상 일이로고. 동궁마마 같으신 분까지 그 마음이 되도록 약하실 줄 꿈에도 몰랐어라. (흐느낀다.) 인제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 지금 저 북문을 부수고 산태같이 밀려들어 오려던 고려 군사를 막고 있는지 아시니이까? 낙랑공주 홀로 그 대군을 막고 있다 하나이다. 고려 군사가 일거에 이 부중을 몰아치려는 것을 낙랑공주는 그의 아버지에게 여짜와 그렇게 못하게 하고 있나이다. 그러하니 이 화를 면하고 있음은 전혀…, 원수 낙랑의 힘이오이다. 만일 태자님께오서 낙랑의 사랑을 거절하신다면 이 백만 장안은 오늘 밤이 새기 전에 피바다가 되고 마옵고, 이 나라의 문물은 그 자취조차 남기지 않을 터, 이내 값없는 이 한 몸의 욕심을 고집하여 어찌 억만 창생이 도탄에 빠짐을 수수방관할 수 있으리이까? 이 몸 일신 죽어지면 이 나라의 명운도 위태롭지 아니하옵고 억만 창생도 피를 아니 흘려도 좋삽고, 고려 진중에 잡히어 간 소녀의 부친도 목숨도 구할 수 있삽고, 그리고 동궁마마의 공주에 대한 소원도 성취될 것이 아니오리이까.
49. [돌날]중에서 정숙 _
(분을 삭이며) 그 얘긴 끝났어요. (기가 막힌 듯) 그럼, 형편이 안 되는데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기가 막힌 듯) 허! 돈두 안 나오는 장사질에 집 안 일 하나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위인이 고상한 척하지 마. 고상한 척. 너만 부몬 줄 알어? (아이 생각에 눈물이 흐른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를 죽인 내 심정은 어떻겠어? 집게를 피해서이리 저리 도망치는 애를, 내 몸 안에 들어 있는 애를……. (흥분하여 울부짖는다.) 그래, 그래,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어! 오죽했으면 죽였겠니? 오죽했으면? (울부짖는다.) 전셋값 감당할 생각으로도 눈앞이 막막한데 나더러 갓난쟁이 하나를 더 맡으라고? 둘도 모자라 이제 셋을 키우라고? 그래, 난 짐승만도 못하다. 못해!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대단한 인격을 타고났길래 유산 수술한 지 며칠도 안 지난 사람한테 돌잔치를 시켜, 그게 얼마나 사람 축나게 하는 수술인데 사흘 내내 돌잔치를 시켜놓고도 미안하다 소리 한마디 없어. 지금 이 잔치판에 애가 어딨어? 아인 지 방에서 혼자 자고 있고 어른들을 화투짝이나 치는 게 인간다운 거니! 그래서, 그렇게 인간적이어서, 하혈을 하며 앓고 있는 사람에게 잔치 준비를 시켜? (분을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떨면서) 나가! 나가! 이 위선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도덕주의자……. 결혼한 뒤에 니가 한 일이 뭐가 있어? 나한테, 애들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나가, 나가! 이 집과 아이들, 다 내 거야. 내가 벌어들인 거야. 네 몫은 하나도 없어. 나가. 내 앞에서 꺼져버려. 무능력한 병신, 지 밥벌이 하나도 못하는 주제에. 넌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체면과 거지 같은 학위 하날 제외하면 껍데기야. 나가! (소파의 방석을 집어던지다가 경주를 발견한다.)
50. [돌날]중에서 경주 _
학교 간 날, 함께 잘 가던 곳들을 돌아다녔지. 무덤이 있던 뒷동산, 등나무 그늘 아래……. 미대 건물 옆은 잔디밭, 영합반점, 세기말 주점…, 세기말은 없어졌더라. 기억 나, 세기말? 시큼한 막걸리 냄새, 토한 냄새, 오줌 지린 냄새……. 그래도 틈만 나면 그 냄새나는 소굴로 숨어들었지. 촉수 낮은 전등 불 아래서 깡소주만 마셔대면서, 왜 나는 공장으로 못 들어가나, 내 신체 생리학은 최루탄 하나 못 이겨내고 눈물콧물 다 뿜어내나, 빌어먹을 마티스는 왜 나부다 먼저 태어나서 나를 표절화가로 만들어놓나.
|
첫댓글 돌아서서 떠나라 으.................나도 하고 싶다 모놀로그 으..................
아오.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어둠이었습니다'에서 원주는.. 남자 스님이 여자 같은 느낌(이정섭 삘?) 주는 게 포인트인데.. 왜 여자 모놀로그로 되어 있을고..
음.. 그렇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여자모놀로그편에 들어있어서.. 올리긴 했습니당.. ^^:
ㅋ 왕냥 감사해용. 여기 할것들이 넘쳐나는구나아!~~~~
아,,,,,,,,,,,,,,,하고 싶은 작품이 너무너무 많다. 근데 봤던 작품은 머리속에 이미지가 생각나서 완전하게 내 모놀은 안될거 같다는...ㅎㅎ
이수일과 심순애 모놀에서.............받아 못해 죽도록 해주세요=> 뭔말인지...오타아녀??
완전 수고 고생 짱!! 멋져..우리 주혜..완전 소중한 틈새 자산이 되겠군하~~ 넌 정말 복덩어리야.
아~ 오타인가? 지금 여자모놀로그 책이 없어서 바로는 수정을 못하공.. 집에서 확인하고 수정하겠습니당~ ^0^
아우... 둑은둑은....
이 중에 하나 선택할거에요^^ 좋은 자료 감사함다~
대사만 봐도 두근두근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