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미화 시키기 위해 변질되었고 아직까지 그 목적이 유지되고 있는 곳으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피해국가들의 어그로를 모으고 있다.
원래는 메이지 유신 이후 막부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병사들을 위령하고자 1869년에 세운 시설이다. 본디 이름은 '쇼콘사(招魂社)' 즉, 혼을 불러[1] 진정케 하는 절이다. 신불분리령 이후 1879년 6월, 국가신토의 상징답게 신사로 개편하면서 이름도 야스쿠니(靖國), 즉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야스쿠니(靖國)는 춘추 좌씨전에서 유래한 단어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같은 뜻의 야스쿠니(安國)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安國이 사찰 이름으로 자주 쓰이는 등 불교적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靖國을 사용한 것이다.
일단은 대한민국의 현충원 비슷한 시설로, 전몰자의 이름 등을 모셔놓는 곳이다. 이것만 본다면 일본 정치인이 이 신사에 참배를 하는 것이 다른 나라에까지 시끄러울 정도인 것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일단 대한민국 국민이나 정치인에게 현충원 참배를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면 '이건 뭐...' 따위의 반응이 나올 테니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군국주의 성향을 거세하기 위해서, 국가신토의 상징적인 조직인 만큼 폐지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종교법인이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 기형적인 형태가 되어, 종교의 자유를 방패로 삼아 살아남게 된다. 마치 한국에서 맥아더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이 있다고 해서 그 것 자체로 처벌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따라서 지금의 야스쿠니 신사는 그냥 사설 종교법인이다. 이 신사는 일본이라는 국가와는 법률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므로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는 사이비 종교야스쿠니 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추도를 하는 것도 딱히 일본에 그런 법이나 조례가 있어서 하는게 아니며, 일본 정부에서도 딱히 제어할 권한이 없다. 그냥 자기들이 멋대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눈가리고 아웅 수준인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사적으로 참배하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 후생성에서는 자위대 대원 같은 사람들의 명부를 넘겨주는 일을 하면서 대놓고 야스쿠니 신사의 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야스쿠니 신사는 현충원이나 알링턴 묘지와 같이 종교 중립적이고 공적인 추모 시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법률상으로는' 일본에는 제대로 된 추모 시설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국가에 몸바친 사람을 위한 추도 시설이 없으니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시설을 건설하자."는 주장은 "이미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는 이유로 묵살되고 있다.
일본에는 온갖 신이 있는데, 이중 인귀人鬼[2] 를 신사에서 모실 때는 주로 원한을 품어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영을 진정시키는 목적이었다.[3] 바꾸어 말하면 세상에 재앙을 끼칠 수 없는 인귀에겐 신사를 세우지 않았다. 뭐가 아쉽다고 돈 들여가며 신사를 세우겠나?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신도 전통을 깨트렸다. 자신이 죽거든 신사를 세워, 승리한 권력자로서 죽는 자신을 신으로 모시라 하였다. 이때부터 인귀를 모시고자 신사를 세우는 데에는 민중 전통과 권력자 전통으로 나누어졌다. 민중 전통은 전통적인 목적대로 세상에 재앙을 끼치는 혼령을 진정시키고자 하였고, 권력자 전통은 권력자들이 죽어서도 자신과 자신의 후예들을 높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어느쪽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인의 종교관에서는 적대한 세력이나 심지어 반역세력조차 죽게 되면 은혜와 원한과는 상관없이 영혼을 구제하고 위로하는 제례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으나, 도쿄 쇼콘샤는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한 측의 전몰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유신 지지측 전사자의 영혼만을 위로하는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물론 쇼콘사 시절이야 이름이 보여주듯 '영혼을 위로함'이 제일 목적이었다[4]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제일 목적이 바뀌어 충혼, 즉 덴노에게 충성을 다한 군인을 높이 받들어 그 명예를 빛나게 함이 된다.
즉, 원한을 품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목적에서 충성스런 군인의 영혼을 높이 받들어 공을 기억하고 명예를 빛나게 한다 - 하는 목적으로 바뀐 것이다.
후자의 목적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는 원한을 풀게 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림을 죽은 혼령이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에 충성하라는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고 덴노를 우러르라는 프로파간다를 위한 장소로 재건축된 것이다. 때문에 메이지 유신에 큰 공로를 세운 에토 신페이와 사이고 다카모리조차 사가의 난과 서남전쟁에서 천황을 적대하였다는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않았다.
이러한 목적은 명백하게 의도한 것이다. 도쿄 쇼콘샤 시절부터 1880년대까지 야스쿠니 신사 주변은 시장거리였던 까닭에 항상 소란스러웠으나, 대대적인 주변정리를 통해서 경건한 분위기를 지니도록 신사 주변을 조성하였고, 1898년 9월 이전에는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병으로 죽은 군인은 설령 전쟁터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생각하기에 가히 명예롭게 죽은 군인들만 받아들였다.[5]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는 청일전쟁 전사자들 대부분이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갈 수 없기로, 덴노의 특별한 허가와 배려로 말미암아 그러한 구분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된 신위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6]
또한 메이지, 다이쇼, 쇼와 덴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적에 육군 대원수 군복을 입은 데서도 야스쿠니 신사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황군(일본 천황의 군대)을 미화하는 장소였다. 실제 사망 원인에 대한 평가가 없이 전사자면 무조건 야스쿠니에 모시는데[7] , 극악한 전범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재도 도조 히데키를 포함하여 여러 전범 또한 위령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본질은 '전쟁의 희생자들을 통해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로 미화하는 것인 셈. 특히나 도조 히데키 같은 경우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했을 경우에도 사형을 면키 어려웠으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군인 겸 수상으로서 막장으로 정부를 운영했다. 순수하게 일본인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도조 히데키는 욕을 먹으면 먹었지 칭송받을 인물이 아니다. 자기 나라를 말아먹은 이런 인물마저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함은 문제가 심각하다.
거기다가 야스쿠니 신사 내에 있는 개드립 전쟁박물관인 유슈칸(遊就館)이라는 박물관은 더욱 가관. 가이텐 따위의 군수품을 전시하거나 대동아 전쟁은 '아시아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따위의 전시물들을 대놓고 전시하고 있다.[8] 심지어는 조선인이나 대만인들도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따로 전시물이 있을 정도.
일본 신사에서 도리이를 높게 세우는 것도 야스쿠니 신사에서 시작한 유행이다. 다른 신사와는 달리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 전까지 해군과 육군이 공동으로 관할했는데, 이들 일본 군부는 야스쿠니 신사에 청동으로 당시 일본에는 없던 큼지막한 도리이를 세웠다. 이후 일본 각지에서 경쟁적으로 도리이를[9] 크게 세우기 시작했다. '도키노 사쿠라'라는 전쟁 시절 노래에도 노래 가사 중에 '전쟁 중에 각지에서 흩어져 죽은 전우들이 야스쿠니 신사 앞마당 벚꽃으로 다시 만나자' 하는 가사가 있을 정도로 군국주의와 국가신토의 상징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이런 상징물이 되지는 못해서, 한동안은 일본 정부가 유족들을 상대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게 유도하느라 꽤나 애를 썼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지 않는 현실을 비춰주는 좋은 본보기.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때에는 여기서 장교용 일본도도 만들었다. 성능은 고철보다 좀 나은 수준이었다고....
상당히 널리 알려진 잘못된 상식으로, 야스쿠니 신사가 전사자들의 '위패'를 모셔두고 있다는 것이 있지만, 위패를 모심은 유교 전통으로 동북 아시아 불교가 그 영향을 받았다. 위패를 모시는 방식은 신토에는 없다.
야스쿠니 신사 관련 뜨거운 감자 중 하나는 대만, 오키나와, 한국 출신자 합사[10] 문제이다.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서 사망한 외국인 신위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셨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징집되어 전사한 부친이나 다른 가족들이 야스쿠니신사에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많은 유족들이 합사취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가 전사자들을 모시는 방식은 영새부(靈璽簿)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 이곳에서 이름을 제거해 달라는 소송이 많았지만, 야스쿠니 신사 내에서는 종교적 해석을 이유로(아무리 생각해도 끼워맞추기지만) 거부하고 있다.(쉽게 말하자면, 야스쿠니 신사의 신의 몸체는, 모셔져 있는 신위들이 각각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분의 신위만 뺄 수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합체 로봇도 아니고.....)[11]
이 때문에 유족들이 "누구 맘대로 아버지를 이 따위 시설에 놓느냐, 당장 치워라."라면서 항의하고, 야스쿠니 신사 합사취하 소송을 하고 있지만 신사측은 여전히 요지부동. 정말 답이 없다.
사실 이런 강제 합사 문제는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종교나 유족 의항도 무시하고 막 집어넣어서 일본 내 기독교 유족들이 소송을 낸 적이 있고, 해결을 위해 일본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아스쿠니 신사 문제위원회를 만들어 법정투쟁까지 나섰지만 친절하신 일본 사법부는 '종교적 인격권은 법적 보호 대상외' 라면서 기꺼이 무시해 주셨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민당 총리들이 A급 전범 신위까지 같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주변국과 외교문제를 빚었다.
자민당 창당 이후 최초로 선거로 정권 교체를 이룬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햐토야마 정권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들을 모두 분리하는 방안혹은 국립추도시설 건립을 검토하였으나 실현시키진 못했다. 근 몇년동안 총리 자리가 바늘방석인지라 총리 재임기간이 짧았던 탓.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한국에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사람은 역시 고이즈미 전 총리. 그는 주변국인 한국과 중국의 반대의식도 무시하고 결국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였다.[12] 그러나 2006년 8월 15일에는 총리 퇴임을 앞두고 결국 기어이 야스쿠니 신사를 직접 방문하여 참배하였고 주변국의 반대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반대세력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노골적인 불쾌감까지 드러냈다.
일본 우익하면 생각나는 검은 트럭에 '천황폐하 만세' 따위의 문구를 새기고 욱일승천기를 꼽고 달리는 사람들이 입구에 많이 있다.
2010년 12월 '가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의 유물 특별 전시회를 통해 야스쿠니신사 내 유물 전시관인 유슈칸(遊就館) 1층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갑옷과 투구를 전시했다. 조선시대 갑옷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져 있고 투구에는 군최고통수권자인 '元帥(원수)'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 갑옷에는 용, 기린 등이 새겨져 있어 왕의 갑옷으로 추정된다[13]. 이들 옆에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글헛소리을 내걸어 도발을 시전하고 있다.
2012년 1월 8일 주한 일본 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진 중국인이 검거되었다. 그는 자신의 외할머니가 일본 때문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 위안부였으며,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이 중국인은 재판을 받고, 징역 10월을 살게 되었다.
2012년 8월 15일 한 한국인이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일제 강점기와 위안부 문제 및 독도 관련 내용으로 한 1인 시위를 했다. 당연히 거기에 있던 우익들과 야쿠자들에게 린치를 당하다가 경찰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
[1] 국어에도 혼을 부른다는 의미로 똑같이 초혼(招魂)이란 말을 사용하며, 김소월의 시 '초혼'이 잘 알려져 있다. 비슷한 단어로 청신(請神)등이 있다. [2] 사람이 죽어서 된 영. 중국 전통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중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분류하여 천신天神은 하늘과 관련된 신, 즉 상제나 별의 신, 기후의 신 등을 가리키고 지기地祇는 땅과 관련된 신, 즉 땅이나 곡식과 관련된 신이며, 인귀人鬼는 사람이 죽어서 된 영이라 하였다. [3] 이런 일본의 종교관을 기본적인 세계관으로 반영한 만화가 바로 블리치이다. [4] 쇼콘사 시절에 모신 신위 중 어느 누가 세상에 재앙을 끼쳤다는 이야기는 없다. 막부측 군인을 모시지 않았으니, 이미 쇼콘사 시절에도 전통적인 경우와 비교하면 이미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5] 이는 세계 각국의 국립묘지라면 당연한 일이다. 간혹 국립묘지에 안치 되었으나 후에 문제가 드러나 취소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 [6] 야스쿠니 신사측에서는 일본을 위해 죽은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배향된 명단을 보면 오직 군인-남자인 경우에만 받아들였다. 민간인이거나 여자일 경우는 명백히 배척했다. [7] 이러한 행동은 모든 전몰장병들이 기꺼이 덴노와 국가를 위해 기쁘게 충심으로 죽었으리란 이미지를 준다. 청일전쟁 때, 기존 기준으로는 명예롭지 못하게 죽은 군인들도 야스쿠니에 모시도록 함은 유족들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지만, 모든 장병들이 일심단결로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이미지 조성이 더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8] 그리고 그 안에서 우익들이 자발적으로 그네들 시각의 '불순분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9] 일본 전통의 문. 문이라고 해서 여닫는 개념은 없다. 만화에서 간혹 절의 입구가 나올때 나오는 큰 문. 바로 그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도리이 [10] 合祀: 망자 둘 이상의 혼령을 한데 모아 제사함. [11] 국가 신도자체가 일본 자생적인 신도와 달리 메이지 유신이후 군국주의를 강화하기위해 억지로 만든 종교다. [12] 본래는 8월 15일에 참배하기로 했지만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하여 2일 앞당겨 참배하였다고 한다. [13] 고려 갑옷으로 보는 것에 이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밑의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