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9일 여성회관에서 열린 얼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하철 씨의 '조선후기 정읍현지도(1872년)를 통해서 본 내 고장의 모습'을 전재한다. 내용은 다소 길지만 비교적 쉬운 문체로 목차를 따라 읽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돼 전문을 소개한다. 원문 파일은 문서자료실을 올려놓았다.
Ⅰ. 머리말
우리가 특정지역에 대한 답사를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준비하는 자료 중 하나가 지도라 할 것이다. 지도에는 그 지역의 위치와 지형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어 거시적인 안목에서 자연적 인문적인 환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인 현장과 전통적인 문화요소들이 많이 산재한 지역을 고찰함에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과거와 오늘날 변화의 흐름을 비교하는 데 있어 기록된 문헌자료를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으나, 도형화 된 고지도(古地圖)를 통하여 지방의 변천사를 읽어보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 볼 수 있다. 고지도에는 지도라는 공간 속에 영원히 정지된 시간의 모습으로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한 지역의 자연 지리적 내용, 행정ㆍ군사적 내용, 문화ㆍ경제적 내용 등 향토의 전반적인 자연적ㆍ인문적 모습을 보여준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향토 삶이 어떤 과거에 의해 이어져 왔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향토의 옛 모습을 시각적이고 공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고지도를 통하여 고찰함이 매우 유용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고지도의 역사는 암각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보다 뚜렷한 지도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평안남도 순안군의 '요동성총'의 성곽도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지도는 기록만이 전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고지도는 조선시대 이후에 제작된 지도만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1872년에 제작된 군현지도 중 정읍현지도를 통하여 그 당시 내 고장 정읍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정읍현지도의 지명 및 명칭분석
1. 지도상 고지명과 현지명의 비교
이 지도를 통해서 당시 정읍현이 7개면에 61개리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1872년에 제작한 정읍현지도에 나타난 리(里) 지명이 2001년 10월에 정읍시에서 제작한 「정읍시행정지도(8만분의 1 축척)」와 2003년 10월 정읍시에서 제작한 「정읍시관내도(5만분의 1 축척)」에서는 어떻게 지명이 나타나고 있는 지 비교하여 보았다. 지도에 동일하게 나타난 명칭은 61개리 지명 중 38개 지명이며, 비슷한 위치에 음운변화로 유추되는 지명은 13개 지명으로 나타났다. 오늘 날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지명은 10개 지명으로 파악되었다.
1) 동일한 지명 ⇒ 상리(上里), 중사(中舍), 장명(長明), 입석(立石), 수성(水成), 시기(市基), 용하(龍下), 회룡(回龍), 귀암(歸岩), 용암(龍岩), 행정(杏亭), 종산(宗山), 송령(松嶺), 송학(松鶴), 월영(月永), 신정(新井), 구암(九岩), 진산(辰山), 구량(九良), 장구(長九), 신평(新平), 양천(良川), 박동(朴洞), 전지(田之), 금구(金九), 송정(松丁), 등천(登川), 장재(長才), 군령(軍令), 천원역(川元驛), 신기(新基), 양지(良之), 단곡(丹谷), 내동(內東), 산우(山右), 하평(下平), 효죽(孝竹), 농소(農所)
2) 비슷한 위치에 변화된 지명 ⇒죽지(竹之)는 죽림(竹林), 말마(抹馬)는 마곡(馬谷), 상붕(上朋)과 하붕(下朋)은 붕래(朋來), 내지(內之)는 내조회, 월성(月星)은 동월(東月)과 서월(西月), 복용(伏用)은 복흥(伏興), 서촌(書村)은 서당촌(書堂村), 부구(夫九)는 부귀(富貴), 모천(茅川)은 모촌(茅村), 송정(松亭)은 송죽(松竹), 매태(埋台)는 마태(馬台), 운월(云月)은 연월(蓮月)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 됨
3) 사라진 지명 ⇒서내(西內), 서외(西外), 상구(上九), 하구(下九), 장흥(長興), 와룡(臥龍), 상마(上馬), 하마(下馬), 삼정(三丁), 월치(月峙)
2. 사회경제적인 의미와 관련된 명칭
북사창(北社倉), 남사창(南社倉), 장시(場市), 군령점(軍令店), 부여점(夫余店), 조곡점(棗谷店), 연지점(蓮芝店), 천원점(川元店), 용하점(龍下店), 요도제(蓼島堤), 천원역(川元驛)
사창(社倉)은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사(社:촌락공동체)에 설치된 곡물대여기관으로 일종의 농민에 대한 가난 구제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재정의 대부분을 환곡에 의지하고 있는 지방 관리들이 환곡(還穀)을 빙자하여 횡령과·수탈이 이루어졌다. 이는 국가재정의 빈약과 함께 백성들이 각종 부담에 시달리게 되어, 흥선대원군은 양반과 상민(常民)을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세제(稅制)개혁조치를 취하였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사창(社倉)을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제작된 군현지도의 특징은 다른 시기에 제작된 지도에 비하여 국가적인 필요성에 따라 지도에 사창(社倉), 장시(場市), 도로(道路) 등 사회경제적 측면과 관련되는 내용들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창(社倉)은 대원군 정권의 개혁정치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점(店)과 장시(場市)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인 의미의 강조로 백성들의 민생안정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음을 지도에서 보여주고 있다. 역(驛)은 나라의 공문을 중계하고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에게 마필(馬匹)의 편의를 제공하던 곳으로 주요 도로에 대개 30리마다 하나의 역을 두었으나, 정읍현 지도에서는 천원역(川元驛) 하나만 표시되어 있다.
3. 행정적인 의미와 관련된 명칭
관사(官舍), 객사(客舍), 이청(吏廳), 현사(縣司), 권상루(勸相樓)
관사(官舍)는 관리가 사는 집으로 고을 수령인 현감이 사는 집이라 생각된다. 객사(客舍)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현을 방문한 외부 손님들을 모셨던 집을 의미한다. 객사는 전주(全州)객사처럼 도성의 중앙부에 두거나, 밀양(密陽)객사처럼 경치 좋은 강변에 두기도 한다. 이와 같이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 잡은 객사는 주변의 수려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도록 누(樓)를 짓기도 하였다. 지도에 나오는 권상루(勸相樓)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정읍현지도에는 건물 중 객사의 지붕색깔이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이는 외부 손님들이 식별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지방행정기관은 중앙관제와 같이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방(房)으로 나누어, 지방행정업무를 그 지방의 이속(吏屬)들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이청(吏廳)은 이속(吏屬)들이 근무하는 곳으로, 오늘날 시청(市廳)과 같은 곳이라 할 것이다. 현사(縣司)는 조선시대 지방 군현(郡縣)의 수령을 보좌하던 지방자치기관인 향청(鄕廳) 또는 향소(鄕所)와 같은 의미로 보여 진다. 현사의 향임(鄕任)에는 그 지방의 토착 세력자인 향반(鄕班)이 임용되었다. 따라서 향임은 중앙정부에 소속된 관리가 아니라, 지방 유지로서의 지식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여 지방행정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현사는 수령에 다음가는 관아라 하여 이아(貳衙)라고도 하였다. 임원을 향임, 혹은 감관(監官)· 향정(鄕正)이라 했는데, 주· 부에는 4인 내지 5인, 군에는 3인, 현에는 2인을 두는 것이 통례였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은 크게 도(道)→주(州) 부(府) 군(郡) 현(縣)→면(面)→리(里)로 편성되어 있었다. 편성된 구역의 상하관계로 보면 크게 3단계로 형성하여 목민관(牧民官)인 고을 현감이 관할하는 군현을 중심으로 위로는 상급행정구역인 8개의 도(道)로 편성되어 있고 아래로는 군현의 관내에 하부행정구역으로 면(방(坊) 사(社)) 또는 그 밑에 리(동(洞) 촌(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방관은 군현까지만 중앙에서 파견하였기 때문에, 면 이하는 지방자치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군현의 밑에 있었던 면· 사· 방의 장(長)은 풍헌(風憲)· 약정(約正)· 집강(執綱)· 면임(面任)· 방수(坊首)· 방장(坊長)· 사장(社長)· 검독(檢督)· 도평(都平)· 리정장(里正長)· 관령(管領) 등 그 명칭이 많았고, 또 그 아래의 동· 리의 장도 존위(尊位)· 약수(約首)· 동수(洞首)· 동장(洞長)· 리정(里正)· 두민(頭民)· 좌상(座上)· 영좌(領座)· 통수(統首) 등 호칭이 여러 가지였다. 이들이 하던 일은 군현의 행정적인 일을 고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특히 세금의 납부를 관여하는 등 주로 군현기관의 심부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향소의 향임의 천거에 의해 수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행정 계통상으로는 수령보다는 향소의 관할 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호칭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의 덕망 있는 사람이 추대되어 백성들을 교화하면서 자치(自治)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4. 학문 교육적인 의미와 관련된 명칭
고암서원훼기(考巖書院毁基),유허비각(遺墟碑閣),향교(鄕校),명륜당(明倫堂),육영재(育英齋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개혁적인 차원에서 면세 면역의 특권이 부여되어 국가 재정에 많은 손실을 주고 있는 서원의 철폐를 과감하게 단행하였다. 정읍현지도에서 ‘고암서원훼기’표현을 한 것은 당시 대원군이 시행한 서원 철폐의 중앙 정책이 지방에서도 제대로 시행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도 안에 강조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지도상에 표시된 유허비각(遺墟碑閣)은 우암 송시열의 죽음과 관련된 유적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은 조선조 숙종 15년(1689) 2월에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같은 해 5월 28일 조정(朝廷)의 명령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6월 7일 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客館)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뒤 6년이 지나서 우암(尤庵)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져 숙종 21년(1695) 5월에 지금의 정읍시 하모리 모촌에 고암서원(考庵書院)이 세워졌고, 영조 7년(1731)에 이곳에 수명 유허비(受命 遺墟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 비각은 영조(英祖) 44년(1768)과 순조(純祖) 11년(1811)에 중수(重修)하고, 지금의 비각은 여섯 번째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수성동 구 소방서의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는 조선의 전통적인 유학(儒學)을 기리는 지방의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대개 향교의 문묘(文廟)의 앞뜰에 교육을 시키는 도장(道場)인 명륜당(明倫堂) 이 있는데, 정읍향교의 명륜당은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뒤편에 있는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5. 제사 및 사찰과 관련된 명칭
영은사(靈隱寺), 금선암(金仙庵), 백련암(白蓮庵), 불출암(佛出庵), 월조암(月照庵), 원적(圓寂), 정재(淨齋), 성황사(城隍祠), 사단(社壇), 누근리(樓近里)
내장산 안에 있는 사찰 배치가 상당히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황사가 표현되어 있으며, 임금을 대신하여 현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사단 등 각기 성격이 다른 토착 신앙처들이 표시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백성들의 신앙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도가 그려진 시기의 집권자는 흥선대원군이었다. 이 당시 흥선대원군은 중국이 위태롭게 된 것은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라고 믿어, 조선을 수호하는 방법은 외부의 영향을 막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왕권강화와 가톨릭 교도탄압을 내세워 쇄국양이 정책을 강행하게 되어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인식 아래 강조하는 의미에서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재(淨齋)는 사찰에서 밥을 짓는 곳을 말하며, 누근리(樓近里)라는 지명은 사찰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공식적인 행정단위로 포함되지 않는 곳으로 해석된다.
6. 지리적인 의미와 관련된 명칭
초산(楚山), 두승산(斗升山), 칠보산(七寶山), 애구(隘口), 피현(皮峴), 노령(蘆嶺), 소노령(小蘆嶺), 안현(鞍峴), 갈치(葛峙), 율치(栗峙), 읍고기(邑古基)
지도에는 초산, 두승산, 칠보산 3곳의 산이 표현되고 있다. 애구(隘口)는 좁고 험한 계곡 길을 의미 하는 것으로 2곳의 애구 표시가 나타난다. 하나는 지금의 추령재로 순창을 넘어가는 길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장성을 넘어가는 노령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가 있다. 안현(鞍峴)은 지금의 내장상동 금북마을의 뒤편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볼 수 있으며, 피현(皮峴)은 지금의 상교동 서신초등학교를 지나 소성면 쪽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갯길로 보인다. 율치(栗峙)는 지금의 입암면 봉양리에서 고창 쪽으로 넘어가는 일명‘밤고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읍고기(邑古基)란 명칭은 고을의 오래된 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흔적만 남아있는 지금의 초산성(楚山城)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 진다. 지도상에 초산을 넘어가는 도로는 호남고등학교 뒤편의 싸리재로 생각된다.
7. 군사적인 의미와 관련된 명칭
장성입암산성(長城笠巖山城),북문(北門)
전남 장성군 북하면(北下面) 신성리(新城里)에 있는 입암산성(笠巖山城)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1236년 몽골의 제3차 침입 때 송군비(宋君斐) 장군이 수축하였다고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이후 여러 차례 개축된 고려· 조선시대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다른 성에 비하여 특이한 점은 현존하는 옹성식(甕城式) 남문의 문도(門道)와 주변의 배수구시설, 성벽 하단에 종출초석(縱出礎石)을 둔 성벽축조 방식이다. 특히 성내에 크고 작은 방축(防築)을 두어 수원(水源)을 확보하여 장기간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배려한 점 등이 조선 후기 관방(關方)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읍현 지도에는 입암산성과 북문의 표현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산성복원사업에 참고로 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읍현과는 삼십리나 떨어져 있어 현을 수호하는 직접적인 의미의 군사시설이라 볼 수 없다. 다만 위급 시 백성들이 피난처로서 이용될 수 있다고 본다.
Ⅲ. 지도에 나타난 내 고장의 모습
1. 오방색으로 그려진 행정구역
정읍현지도는 전체적인 형식에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개념을 도입하여 행정구역을 오방색(五方色)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도에서 동쪽은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되는 동면(東面)이 청색계열로 표현되고 있으며, 서쪽은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는 서일면(西一面)이 하얀 색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쪽은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남이면(南二面)이 빨간색계열로 표현되고 있고, 북쪽은 현무(玄武)에 해당되는 북면(北面)이 검정에 가까운 짙은 청색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리(里)명칭의 검정 글씨를 나타내고자하는 고육지책이라 판단된다. 중앙에 해당되는 읍치의 중심지역인 현내면(縣內面)은 빨간색으로 표시되고 있는데, 원칙적인 오방색의 개념에선 왕과 중앙을 상징하는 황색(黃色)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지도를 그린 화공이 중앙을 더욱 강조하는 의미에서 빨간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확한 오방색의 표현이라고는 약간은 무리라 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형식에 있어 지도의 색채표현은 오방색의 개념을 이 지도에서도 적용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노란색의 서이면(西二面),청색의 남일면(南一面)은 각기 다른 면지역과 색채로 구분하고자 표현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오방색(五方色)을 통해 음양오행의 조화를 표현하는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운 지혜를 지도 속에서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지도의 회화적 특징은 산맥과 산형의 뛰어난 표현 방식의 독창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산맥 묘사에서 이어진 산맥을 산의 크기에 따라 굵은 선으로 그리면서 윗부분을 톱니 모양으로 굴곡지게 표현하는 김 정호의 목판본 「대동여지도」방식의 유형과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채색 필사본의 산맥 묘사방식의 유형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872년 정읍현지도의 표현방식은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표현방식에 따라 산맥을 산들의 흐름에 따라 '^'형 먹선을 단선 혹은 이중이나 삼중으로 중복시키면서 연결하고, 그 위에 연녹색 담채를 가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또한 도로와 하천의 흐름을 사람의 혈관과 같이 표현하였으며, 이어진 산들을 사람의 뼈들이 이어진 것과 같이 그려졌다. 이와 같이 지도는 산천을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인식하여 인간과 땅을 동일시한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선조들의 땅에 대한 풍수사상의 영향을 살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산들이 서로 어깨를 걸고 꿈틀꿈틀 흘러내린 표현, 읍치의 관청건물배치와 그 형태, 점(店)이 있는 곳의 초가형태의 마을 표현, 하천 위의 다리, 연못의 형태 등의 표현은 오늘 날의 지도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는 입체성과 우아한 예술성을 지닌 고지도임을 느낄 수가 있다.
1) 빨간 색 ⇒ 현내면(縣內面): 상리(上里), 중사(中舍), 장명(長明), 입석(立石), 수성(水成), 시기(市基), 죽지(竹之), 서내(西內), 서외(西外), 상구(上九), 하구(下九), 말마(抹馬). 2) 옅은 청색 ⇒동면(東面): 용하(龍下), 회룡(回龍), 귀암(歸岩), 용암(龍岩), 상붕(上朋), 하붕(下朋), 행정(杏亭), 종산(宗山), 송령(松嶺), 송학(松鶴), 송정(松亭), 월영(月永). 3) 옅은 빨간 색⇒남이면(南二面): 삼정(三丁), 전지(田之), 금구(金九), 월치(月峙), 서촌(書村), 부구(夫九), 송정(松丁), 등천(登川), 장재(長才) 4) 청색 ⇒남일면(南一面): 신정(新井), 내지(內之), 구암(九岩), 진산(辰山), 월성(月星), 장흥(長興) 5) 하얀 색 ⇒서일면(西一面): 군령(軍令), 천원역(川元驛), 신기(新基), 운월(云月), 양지(良之), 단곡(丹谷). 6) 노랑색 ⇒서이면(西二面): 내동(內東), 산우(山右), 모천(茅川), 하평(下平), 효죽(孝竹), 농소(農所) 7) 짙은 청색 ⇒ 북면(北面): 복용(伏用), 와룡(臥龍), 구량(九良), 매태(埋台), 장구(長九), 신평(新平), 양천(良川), 상마(上馬), 하마(下馬), 박동(朴洞).
2.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입지여건
읍치의 중심지인 관청이 배치된 현내면 일대의 지도를 살펴보면 전형적인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여건을 적용했음을 볼 수 있다. 풍수지리 사상에 의한 전통적인 마을의 입지를 보면 마을은 주산(主山⇒玄武)에 기대어 남향을 바라보며 위치하고, 좌우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감싸주고 있으며 앞으로는 안산(案山⇒朱雀)과 조산(朝山)이 막고 있고, 그 사이에 하천이 흐르고 있는 배산임수의 형태를 갖춘 지역이다. 즉 지도상에서도 주산인 성황사가 그려진 성황산과 좌청룡 우백호의 칠보산과 구미산 줄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관아 앞의 남쪽에 있는 안산은 초산(楚山)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가 있으며, 그 앞으로 천(川)이 흐르고 있는 표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선조들의 풍수지리 사상은 정읍현 지도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취락 입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3. 지도의 방위표시와 축척 그리고 거리
정읍현지도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오늘날의 지도와는 반대로 방위표시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지도의 위쪽이 남쪽으로 되어 있고, 아래쪽은 북쪽으로 하여 지도가 그려졌다. 이는 당시의 지역을 바라보는 사고가 왕(王)이 있는 서울중심의 사고, 현감이 있는 읍치(邑治) 중심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읍 중심부의 상세한 표현과 주변을 비대칭적으로 표현 한 것, 글씨들이 여러 방향으로 누워 있는 등의 표현도 동일한 사고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울중심의 사고는 당시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집권층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되고 있었음을 정읍현 지도에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제주 지도인 「탐라도(耽羅圖)」와 서울 지도인 「도성도(都城圖)」등에서도 볼 수 있어 당시 군현지도의 방위표시의 거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동일한 축척으로 그리지 않고 행정의 중심지인 읍치(邑治)는 크게 확대해서 표현하였으나, 나머지 주변지역은 압축하여 그려져 있어 축척의 개념은 고려되지 않았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지도에서는 경위선(經緯線)이 나타나는 지도를 발견할 수 없으며, 또한 지형의 표현으로 등고선(等高線)이나 산의 높이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지도를 볼 수가 없다고 고지도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다만 지도상에 나타난 어떤 지점을 말할 때 주위 상황과 관련시켜 나타나는데, 정읍현 지도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예를 들면 ‘내장사 자관삼십리(內藏寺 自官三十里)’라고 표현하여 관청에서 몇 리(里)라고 말하게 된다. 이와 같이 거리의 개념은 명확하지만, 이것과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 면적(面積)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고지도에서는 불확실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4. 지도여백에 표시된 기록의 의미
1) 井村縣百濟新羅改今名爲太山郡領縣高麗屬古阜郡後置監務本朝改爲縣監 2) 京都距五百八十里(北距) 3) 監營距一百里(北距) 4) 兵營距二百四十里(南距) 5) 左水營距二百七十里(東距) 6) 右水營距三百里(南距) 7) 統營距五百六十里(東距) 8) 川元驛在縣南自官二十里 9) 笠巖山城在長城地而在縣南自官三十里 10)邑倉在於官門外 11)南社倉在縣南自官十里 12)北社倉在縣北自官十里 13)隘 爲蘆嶺而在縣南自官三十里長城接界 14)隘 爲葛峙而在縣東自官三十里淳昌接界 15)寺刹在於內藏山在縣東南自官三十里 16)烽臺, 關防(無乎事)
위 기록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정촌현 명칭은 백제시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감을 둘 수 없을 만큼 작은 고을인 정읍에 현감이 비로소 배치된 것은 조선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2)의 경도는 서울을 의미하며 북쪽으로 오백 팔십리 라고 표현하였다. 3)의 감영(監營)은 조선시대 각 도의 감사가 거처하며 집무를 보던 관청으로 전라도는 전주에 두었으며 북쪽으로 백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4)의 병영(兵營)은 오늘날 전남 강진에 두었으며, 5)의 좌수영(左水營)은 전남 순천, 6)의 우수영은(右水營)은 전남 해남에 두었음을 거리 표시로서 살펴 볼 수 있다. 11)과 12)의 사창은 현청으로부터 남, 북쪽 공히 십리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고, 16)의 국방시설인 봉대와 관방은 없다고 기록 된 것으로 보아 우리 정읍은 군사적인 지역으로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정읍현의 위치를 당시 주위의 여건과 연계하여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순창으로 넘어가는 추령(秋嶺)고개는 14)의 갈치(葛峙)의 명칭이 변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Ⅳ. 맺음말
이제까지 살펴 본대로 고종9년(1872년) 정읍현 군현지도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군현지도와 마찬가지로 제작 목적이 왕조의 통치와 지방행정의 기본적인 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서 장시와 사창이 파악되고 있고, 서원의 철폐의 표시, 자세한 사찰 배치와 사단표시 등은 대원군의 개혁정치라는 내부적 요인과 양요(洋擾)라는 외부적 요인이 맞물려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군현의 중심지인 읍치(邑治)와 기타 지역은 다른 축척을 적용하여 읍치를 강조한 표현, 오늘날의 지도와 반대로 그려진 방위표현, 경제적 대상(社倉, 場市, 蓼島堤), 행정적 대상(客舍, 吏廳, 縣舍), 백성들에 대한 학문 ․ 교육적 대상(書院, 鄕校, 樓亭), 토착적 신앙 대상(사단, 성황사, 내장사), 군사적 대상(山城), 교통 및 통신에 관한 대상(도로· 다리· 驛)을 통하여 조선 후기 왕조의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히 하는 다양한 장치 등을 지도는 보여주고 있어 ‘역사와 문화가 투영된 지도’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이 그려진 산천은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그 당시 시대적 사회문화가 반영되고 있어, 행정적· 사회경제적· 학문적으로 상징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만이 함축적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 표현된 대상들은 당시 지방통치의 중요한 사항들로 우선적으로 그려졌고, 그렇지 않은 사항들은 표현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도 내의 각 특정 지점이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고, 사창(社倉)이 파악되어 있으며, 적색실선의 도로표시가 매우 자세하게 표시된 것, 읍치의 내부구조에 대한 자세한 묘사 등은 이 지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오방색을 통하여 음양오행의 조화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 산들이 서로 어깨를 걸고 꿈틀꿈틀 흘러내린 표현, 읍치의 관청 건물배치와 그 형태, 점(店)이 있는 곳의 초가형태의 마을 표현, 하천 위의 다리, 연못의 형태 등으로 그려진 것을 보면 오늘 날의 지도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는 입체성과 우아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읍현 지도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만큼 ‘표현이 정제된 예술적인 지도’라고 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 정읍은 읍치(邑治)의 입지여건을 풍수적인 관점에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적용하고 있음을 지도에서 살펴 볼 수 있었다. 풍수이론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나오는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풍수적 제 요건에 맞는 지리, 아름다운 산천, 빼어난 자리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지역 내에서 살고 있는 지역민들의 인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서로가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 인정이 넉넉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오히려 지형적인 위치가 좋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따뜻한 정(情)에 의하여 나쁜 기(氣)가 억눌려 살기 좋은 곳으로 되리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1872년의 정읍현지도는 내 고장을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져 있으며, 맑고 깨끗한 하천이 흐르는 아담한 고을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130년 전 그 속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자연관과 슬기로운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급격하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의 이 시기에 어떠한 마음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지도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
첫댓글 물이 깨끗하더라구요. 그래서 '井'자를 쓰나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