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여자를 동경해서이긴 하지만
(사교춤을 하게 되면 온 세상의 여자를 내 걸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춤을 추면서 아직 흑심을 품어본 적도, 그런 걸 느껴본 적도 없다.
아마도 아직 춤맛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춤맛=그 맛?)
그런데 그저께 수원 아는 형님(이 분이 오래 춤을 하신 분이다)에게 놀러갔다가 그 분 따라 텍을 들렀는데
거기서 잡은 여자 분이 특이했다.
춤은 초보인지 거의 나와 맞지 않는데 죽어라고 안겨오는 것이었다.
그곳을 메운 여성치고는 좀 젊은 편인데 그만하면 간지나는 스타일였다.
이때 춤장을 드나들고 난생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난감했다.
은근슬쩍 떼어도 보았지만 어느 새 알품기 모드로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잠깐 사이였지만 나는 왜 내가 반응을 보이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맹세코 흑심은 없었는데....아니, 춤도 못 추는데 젯밥에 한눈을 팔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상대 여성의 의도를 짐작하고 그 때문에 조건반사식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슬픈 짐승이여 남자이느니.....
단순히 몸을 맡겨온다고 해서 지레짐작하는 것도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로서는 아늑함을 느껴보고 싶다든가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소파가 된 사나이'라는 일본 추리소설이 생각난다.
아마 '에드가와 란뽀'라는, 에드가 앨런 포우를 흉내낸 일본 추리작가의 소설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여성의 몸을 동경하여 소파 안으로 들어간(?) 사나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소파 안으로 들어가 숱한 여자들의 풍만한 몸을 받아안는 쿠션 노릇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따지고 보면 남자가 남자로서 존재하는 시간은 기껏해야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남자란 동물은 대부분의 시간을 '어린애로' 보내는 것이다.
'성교 후 모든 짐승은 슬프다.
Omne animal post coitum triste'
ㅡ고대 희랍의 격언.
간혹 몸을 맡겨오는 나이 든 여자 분들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강하게 밀착해 오는 체취에서 뭔가 애틋한 야욕 같은 것이 느껴지면
차라리 숙연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소파 안에 들어간 사내가 된다.
그 안에 들어간 사내가 느껴보았음직한 정서를 알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공감' '연민' '인간으로서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2015.
https://youtu.be/exB7FXdVAoE?si=F_5tYkpz7pRNiDdI
첫댓글
슬프고도 짜릿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Nihil humanitarian's a me alien puto(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솔직한 글 같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솔직한 글도 올려 드리지요.
수원에 놀러 가셨군요.
즐거운 시간 보냈으리라 생각됩니다...~^^
ㅎㅎ 오라 전에요.
성교후에도 만족했던 모든 짐승에서 예외였던 스테어는 성교를 못해 슬픈데 쇼파속이라도 들어가봐야 하나요? ㅋ
춤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춤은 남자가 여자의 소파가 되는 형태라고 할 수 있거든요.
'남자는 액자, 여자는 액자에 담기는 그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춤은 침대로 가기 위한 가교라는 설이 있는데 침대로 안 가도 똑같은 효과를 거둡니다.
실제로 춤을 추고부터는 정작 성적 본능으로 '껄떡이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춤은 성적 본능의 멋진 승화입니다!
@지솔 실제로 많은 '카타르시스'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