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임금에게 진상할 소나무 군락지였던 '비소고미'가 발음하기 쉽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천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1,190m의 해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파로호를 마주하고 있는 곳. 외로움과 고된 생활에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집은 4가구에 불과하다.
거대한 평화의 댐..아래자락에 소박하게 숨겨져 있는 "오직..세 가구만 사는 초미니 마을...
마을 뒷편으로는 산세 험한 고산준봉이 우뚝 솟아 있고.앞으로는 계곡 물이 흘려 강을 만난다.
푸른 파라호의 물이 집 앞 까지 찰랑대기 때문에 ..
비수구미는 험한 산세에 막히고,강물에 반쯤 잠긴 오지 중의 오지이다.
*일제가 강제로 만든 화천댐은 이 일대의 마을을 모조리 수장해 버렸다.
댐이 세워지고 뭍이 물이 잠기자.
농사를 지우며 살아오던 마을사람들은 하나 둘.눈물로 호수를 채우며 고향을 등졌다.
다만 산을 태워 밭을 일구던 "화전민"만이 산등성이에 남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 왔다.
비수구미 마을 들어가는 방법은 .비수구미 계곡 임도길을 따라 6km 걸어가는 방법과,
평화댐에서 비수구미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모터 보트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비수구미 마을 주민이 제공하는 산에서 직접 채취한 산채 비빔밥은 별미중의 별미이다.
↑ 바쁜 걸음보다 느긋한 걸음으로 걷다 보면 숲의 소리와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굽어보다 비수구미 마을과 닿아 있는 파로호는 지금은 잔잔한 물결을 만들며 고요함을 뽐내고 있지만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파로호는 1944년 일제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만든 화천댐 건설로 만들어졌다. 원래 이 지역의 호수는 '대붕호'라 불렸지만 일제가 대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화천호'로 불렸다. 수력발전소로 지어진 만큼 6·25 전쟁 때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군이 중공군 약 3만명을 물리치며 승리를 거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뜻에서 파로호破虜湖란 이름을 붙이면서 명칭이 굳어지게 됐다.
파로호와 맞닿아 있는 또 다른 댐은 바로 '평화의 댐'이다. 80년대 북한 금강산댐에 대응하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국민모금운동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1990년에 완공된 댐은 수많은 논란이 일어 결국 감사원의 감사까지 받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현재의 모습은 2000년대 증축을 거친 모습이다. 그리고 화천군에서 2009년 평화의 댐 주변에 공원을 조성하고 여러 조형물과 비목공원 등을 설치하면서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공원에는 커다란 종이 자리하고 있다. '평화의 종'이 그것인데, 세계 각국의 탄피를 모아 만든 것으로 '전쟁과 분란 없는 세계'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이자 세계에서도 3번째 크기라는데 탄피로 만들었다니 그 크기가 도리어 씁쓸하게 느껴졌다. 종의 윗부분에 있는 날개 한 쪽이 잘린 비둘기 모형은 북으로 갈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날개를 이어 붙일 예정이라고. 1인당 500원을 내면 타종 체험도 할 수 있다. 타종료 500원은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교육사업에 사용되는데 2010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총 3,000만원이 에티오피아에 전해졌다고 한다. 전쟁의 기억과 안보 위협을 오롯이 담고 있는 이곳에서 생각하게 되는 평화는 남다르다. 비목공원에 걸린 낡은 철모도 선전으로 시작한 댐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 1 평화의 종은 그 크기만큼 소리의 울림도 깊다 2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비목공원의 조형물
↑ 3 다사다난한 과거의 흔적들을 상기시키는 평화의 댐
맛으로 느끼는 비수구미 동그랗게 말아 놓은 나물이 식탁에 올라온다. 얼핏 봐도 적은 양이 아니다. 꼭꼭 눌러 뭉쳤으니 자꾸만 옮겨 담아도 여전히 그릇 위에 수북하다. 아주머니는 "남으면 다시 올리지도 못하니까 싸 가요"라며 나물이 남은 테이블마다 비닐 팩을 나눠준다.
고사리, 곰취, 얼레지, 곤드레 등 계절마다 제철에 나오는 나물들로 상이 차려진다. 밥 위에 나물 몇 가지를 올리고 직접 담갔다는 고추장을 넣어 슥슥 비벼 한 입. 자근자근 씹기 시작하자 나물의 향과 고소함이 전해졌다. 질감도 맛도 하나같이 다르다. 상차림에 나오는 7가지 나물 하나하나마다 가장 맛 좋은 방법으로 무쳐내기 때문이다. 손이 많이 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맛있다. 조미료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 쌉싸름한 고추장과 산나물의 조화는 바깥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에 단비와 같았다.
몇달 전, KBS <인간극장>에 나오기도 했던 비수구미 민박은 방송 이후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족히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보이는 식당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원래는 노부부가 하던 일을 지금은 아들 내외와 손자손녀들, 손자손녀들의 친구들까지 찾아와 돕고 있다고 한다.
↑ 비수구미 민박은 산촌의 여느 집들처럼 정감가는 모습이다. 주말이면 식당엔 자리가 없다
↑ 제철 나물로 만들어 먹는 산채비빔밥. 도시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travie info 평화의 댐 평화의 댐 주변에는 물문화관, 비목공원, 세계 평화의 종 공원 등이 있다. 물문화관은 물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모형과 영상 등 시각자료를 활용해 보여 준다.
비목공원은 가곡 <비목>의 탄생지로, 전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매년 6월6일을 전후로 비목문화제가 열리기도 한다. 평화의 댐 뒤편으로 있는 세계 평화의 종 공원은 '염원의 종', '마음의 종' 등 여러 의미를 담은 종들을 전시하고 있다.
가곡 비목[碑木]에 관하여
1964년,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평화의 댐 북방 14km 휴전선 부근)를 순찰하던
한 청년 장교가(한명희. 당시 25세. 소위. 전 서울시립대 교수)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무명 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 '비목'의 작사자 한명희 교수
6.25 때 숨진 어느 무명용사의 무덤인 듯 옆에는 녹슨 철모가 딩굴고 있었고,
무덤 머리의 십자가 비목(碑木)은 썩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습니다.
▲ 비목
녹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 애상에 잠깁니다.
4년 뒤 당시 동양방송(TBC) 에서 일하던 한명희 PD에게
평소 알고 지내던 장일남 작곡가(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2006년 9월 별세)는
가곡에 쓸 가사 하나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비목'의 작곡자 장일남 교수
돌 무덤과 비목의 잔상이 가슴속에 맺혀있던 한명희 PD는 즉시 펜을들고 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한국인의 3대 애창곡으로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가곡 "비목" 의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에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곳저곳에 서려 있습니다. 6.25 당시 화천댐을 놓고 벌인 치열한 공방전으로 붉게 물들었던 파로호는 지금 신록 속에 푸르기 그지 없고, 군사정권 시절 댐 건설의 필요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평화의 댐은 민통선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댐 옆에는 가곡 "비목"을 기념하는 '비목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 평화의 댐
파로호의 원래 이름은 호수모양이 전설의 새 대붕(大鵬) 을 닮았다고 대붕호(大鵬湖)였으나,
6.25 전쟁 직후
이곳을 방문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화천댐 공방전에서
국군이 중공군 3개 사단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것과 관련하여, "적을 격파하고 포로를 많이 잡았다" 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 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산 속의 바다라고도 불리는데,
호수에는 쏘가리, 잉어 등 1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 파로호
파로호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는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460번 지방도 오른쪽에 있습니다. 파로호 휴게소에 차를 대고 5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비목공원은 1998년, 가곡 '비목' 을 기념해서 만들었습니다.
산비탈에 돌로 한반도 모양의 단을 쌓았고 곳곳에 돌무덤과 비목이 세워져 있습니다.
▲ 비목공원
주차장 입구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본다고 합니다. 현재 비목공원에는 기념탑 외에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
이 십여 개 서 있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줍니다.
▲ 비목공원 비목 노래비
화천군에서는 매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내 강변에 들어서 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합니다.
진중가요, 시 낭송 등으로 짜여진 추모제, 비목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 대회, 병영체험,
군악 퍼레이드 등이 나흘동안 펼쳐진다고 합니다.
공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자락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렸고 그 사이로
북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
이곳에서 근래에 호랑이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해서주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비목의 주인공과 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생각하며
'비목'의 가사를 다시 되새겨 봅니다. 가곡 '비목'은 적막에의 두려움과 전쟁의 비참함,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간절한 향수 등이
서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노래입니다.
<바리톤 황병덕>
<테너 엄정행>
비목(碑木)
[ 1 ]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 2 ]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