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명 유래 1)공산 신라 때부터 불렀다. 1450년 전후에 기록된 ‘고려사’까지 그냥 ‘공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명칭을 기록하더라도 꼭 “일명 공산”이라고 부기할 정도로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곰산’(민족의 토템이 곰인 것으로 미루어)이 '공산'으로 변한 것(예:공주 곰나루). ‘꿩산’을 한자표기로 적다보니 변한 것. ‘꿩’을 이 지역에서는 ‘꽁’으로 읽혀 이두로는 ‘공’이 될 가능성이 많다. 신라 경덕왕 때 ‘해안현’으로 개칭되기 전 대구 공산면과 동촌 일대의 행정구역 명칭이 ‘치수화(雉水火)’였다. ‘雉’는 꿩이고 ‘水火’는 수풀의 이두식 표기. 또, 동화사 너머의 치산리(雉山里)는 꿩산의 마을이 된다. 치산리에 대해 <경북 지명 유래 총람(경북교육청, 1984년)>에는 주위 지형이 쪼그리고 앉은 꿩의 모습이라고 적고 있다. 2)중악 통일신라이후(서기 700년 전후)에 영토가 넓어진 뒤 하늘이나 산신에 제사를 모셨던 다섯 산을 새로 정하면서 가운데 장소로 팔공산을 정한다. 「삼국사기」권32. <제사지(祭祀志)>에 기록된 삼산(三山)과 오악(五岳)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산악을 신격화하여 호국신군으로 받드는 산악숭배사상으로서 삼산 오악을 두었는데, 이를 대사와 중사로 표현하여 국가 최상의 제전으로 삼았다. 곧 신라의 대사삼산(大祀三山)과 중사오악(中祀五岳)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확장되는 신라세력을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호국성신(護國聖神)이었던 것이다. 신라 오악이라는 것은 동쪽 토함산(동악), 서쪽 계룡산(서악), 남쪽 지리산(남악), 북쪽 태백산(북악) 그리고 중앙의 공산(중악)을 지칭한다. 이는 곧 팔공산이 통일신라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 호국성신인 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의 상징적인 존재로 국가차원에서 숭배되어 온 영산(靈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부악(父岳) 삼국사기(1145년)에 신라 때의 명칭을 그렇게 적고 있다. ‘公岳’을 잘못 읽어다고 추론하는 견해와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본거지인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에 비유하여 미륵신앙의 개화지인 동화사가 있는 팔공산이 ‘부악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 4)팔공산 <신증 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나타난다. 전북의 진안-장수-임실의 경계에도 팔공산이 있는데 높이가 1151m로 팔공산 삼성봉(서봉)의 높이가 비슷하고 지명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그 설들을 모아보면 대충 아래와 같다. 1.여덟 분의 장군이 순절해서라는 설--동수대전에서 대장 신숭겸(申崇謙), 좌장 김락(金洛) 두 장군 외에 다른 장군들의 순절에 대한 기록 등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진위를 가리기가 어렵다. 2.여덟 간자(八簡子--불골간자)를 봉안해서라는 설--신라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속리산에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8간자를 받아와서 공산의 동사[동寺]라는 절에 봉안하였다는 설. 3.여덟 고을에 걸쳐 있어서라는 설--조선시대 현을 기준으로 해서 신녕(新寧), 해안(解顔;지금의 달성군), 하양(河陽), 팔거(八居;칠곡), 부계(缶溪) 등 대구를 포함한다해도(지금의 대구에 속한 지역은 당시에는 달성군에 속함) 다섯 현에 불과하므로 신빙성이 모호하다. 4.여덟 성인이 득도해서 라는 설--원효의 여덟 제자가 천성산에서 공산으로 들어와 세 스님은 삼성암에서, 다섯 스님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는 설. 5.중국의 지명에서 따왔다는 설 --예로부터 지명이나 산 이름 등을 중국에서 따온 예들이 간혹 있는 일이므로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중국 안휘성(安徽省) 봉대현 동남, 비수(肥水)의 북쪽, 회수(淮水)의 남쪽에 위치하는 팔공산에서 북조의 전진왕 부견과 남조의 동진왕 효무제 사이에 팔공산 비수에서 대전이 벌어져, 부견왕이 참패한 고사[古史]와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과의 동수대전이 유사성이 있다하여, 고사에서 따다가 팔공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는 설이다. 신라 때 팔공산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도 그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2.팔공산의 형성과 역사 1)팔공산의 형성과 특징 팔공산은 화산의 폭발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6천만~7천만년 전 화강암의 치솟았다. 그렇게 해서 암석 구성이 달라진 뒤 4천만~5천만년 전 융기작용으로 호수바닥이 육지가 되고 산이 되었다. 팔공산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산이 희고 밝다. 화강암은 쉽게 닳고 풍화되어 외모가 부드럽고 사람들이 만들기 어려운 형상을 연출한다. 또 조각이 행해져 많은 마애불을 남기기도 했다. 화강암이 닳아 가루가 된 것이 마사이다. 치산계곡 공산폭포가는 길, 은해사골 중암암에서 묘봉암 가는 길은 마사가 산을 뚫고 나왔다. 마사는 쉽게 쓰려 내려가 모래밭을 만들고 또 모래땅에 적합한 사과나무가 널리 심겨졌다. 2)역사적 인물과 사건들 ①김유신(595~673)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15세에 화랑이 된 그는 17세 때 ‘중악’의 석굴에서 기도를 올리고 선인들로부터 비법을 얻어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적고 있다. 1969년 한 학술팀--삼국통일전의 중악인 단석산을 수련장으로 지목. 대구권 연구자--고려시대에 삼국사기가 씌어졌음을 중시해 통일 후의 중악(팔공산)이라한다. *은해사골 중암암 위 장군굴: 암산 절벽에 암자가 있고, 같은 절벽의 더 상단 즉 암자의 지붕 같은 위치에 또 석굴이 있어 김유신 수행의 전설이 서렸다. 인접한 곳에서 나는 물은 김유신이 마시던 장군수라 하고 건들바위, 삼인암(三印岩), 만년송(바위에 선 소나무) 등의 전설도 있다. 중암암은 당시에 없었고 200여년 뒤에 창건 된것이다. *환성산군의 불굴사 석굴:사다리에 의해 4층 구조로 분화돼 있을 정도의 거대한 바위더미 사이에 석굴이 있고 석간수가 흐른다. 누운 소나무도 있다. 석굴사는 김유신 수행 80년 뒤 창건되었다. *정상부 산성봉의 서편 절벽(청운대)아래 길이 2.5m의 장군수 석굴 등이 관련이 있다. 팔공산은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많고 산신으로까지 승화되었다. 명마능선에 장군바위, 군위군 효령면 장군3리와 그 마을 뒤 봉우리가 장군봉, 거기에 김유신을 모신 장군당(김유신, 소정방, 당나라에서 귀화하여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된 이무를 모신 사당) 등이 있고 군위 등에는 김유신 장군 신(神)이라는 신앙이 확립되어 있다. 대부분의 무속인들도 김유신을 팔공산 신령으로 받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②장군신 대신 부처님이 좌정하다. 가장 빠른 시기의 사람들이 자장율사와 김유신(595~673):620~660년대. 다음이 20, 30년 늦은 원효(617~686)와 의상이다. 29세에 원효가 출가할 때 김유신은 51세, 자장은 57세 정도다. 의상은 원효보다 8살 아래이다. 원효는 34세 이후에 팔공산과 인연을 맺었다. 그 해에 당나라로 가다가 붙잡혀 다시 유학하러 떠나던 44세 사이의 상당 기간을 팔공산에서 수행. “불굴사 석굴에서 수도한 뒤 오도굴에서 득도했다” 불굴사 석굴은 원효의 고향인 경산과 가깝다. ‘청운대 절벽에 있다는 오도굴’은 지금은 찾을 수 없다. 1. 극달화상은 481년 선본사와 493년(신라 소지왕 15년) 유가사라는 이름으로 동화사를 창건했다. :신라 불교는 527년에야 공인되었다. 신빙성이 약하다. 유가종이라는 법상종은 중국에서도 7세기 후반에나 등장한다. *송림사--신라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믿기 어렵고 544년(진흥왕 5년)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스님이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절을 창건하고 탑도 세웠다고 알려진다. 2. 원효-의상시대에 창건 된 절은 1)640년 전후--부인사와 군위 삼존석굴 2)원효가 세운 절 *삼성암(정상부 삼성봉(서봉) 남사면)--빈터만 남아 등산객의 휴식처로 사용. *오도암(산성봉 서사면)--암자의 맥을 잇고 있으나 1968년 독가촌 처리방침에 철거된 뒤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원효암(와촌 갓바위골 솔뫼기마을 부근) *불굴사--690년에 창건됐다고 하나 원효는 이미 4년 전에 열반했다. *650년쯤에 수도사(치산계곡)를 자장율사와 함께 지었다. 3)의상은 *운부암(은해사골)--651년 혹은 711년에 창건 되었다고 하나 그 당시 의상은 불과 26세이다. *미리사(미리현--해안현)--사라져 위치조차 모른다. 의상이 세운 화엄 10종찰 중 하나였다. 3. 8세기경에 조성된 유적들 거조암 750년 경, 갓바위 불상은 그 이후 ※약사신앙의 1번지 팔공산 미륵신앙의 중심지였던 동화사는 물론 팔공산 전체에서도 지금은 미륵불의 흔적은 많지 않다. 송정동에 있는 미륵불상 등이 몇 안 되는 미륵신앙의 흔적이다. 마애불등 옛 불상들은 거의가 약사불로 인식되고 있다. 미륵불이 개혁과 내세 평화를 바라는 민중의 심리에 호응하는 부처라면 약사불은 생에서 복락의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라 할 수 있다. 이는 팔공산의 이미지가 또 한번 달라지는 것이다. <팔공산의 약사불> •동화사 일주문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243호)--심지왕사가 직접 만들었다. •동봉(주능선 장군목) 석조여래입상 •옛 삼성암터 마애약사여래입상 •비로봉(정상 남사면) 마애약사여래좌상 •불굴사 석조약사여래입상 •동화사 삼존불(석가모니-아미타불-약사여래) •동화사 통일약사대불(1992년 완성) •관봉(850m) '갓바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팔공산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상징 638년(선덕여왕 7년) 원광법사의 제자인 의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조성했다고 밝히지만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8~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 높이 4.15m, 좌대를 포함한 전체 높이 5.6m. 은해사의 말사인 선본사가 관리한다. 음력 매월 초에는 50~60대의 관광버스가 오고(특히 입시철), 매일 부산 3대, 울산 1대의 관광버스가 요금 1만원에 정기 운행한다. ‘정성스레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 준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 특히 갓바위 부처는 부산, 울산 방향으로 좌정해 있어 그 지방이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다. 4. 9세기에 조성된 절--많은 절이 창건 되고 마애불상이 집중되어 불교성지로 변하는 시기 *기기암(은해사골)--그 시기의 절중 창건연대가 빠르다. 기록이 남아있다. 은해사골의 가장 남쪽에 있다. *백흥암(869년-신라 경문왕9년, 은해사골) *이시기에 심지스님에 의해 동화사와 파계사 등도 창건 된 듯하며 묘봉암(834년, 은해사골), 중암암(834년, 은해사골), 환성사(835년)도 지었다. ※팔공산의 난야들 :산스크리트어로 ‘아란야’의 줄인 말로 원래의 뜻은 조용한 곳--선원으로 대표되는 수행처 *염불암--염불난야 928년에 창건. 고려시대의 청석탑, 아미타불과 문수보살을 새긴 염불바위 등의 문화재, 왕건과 관련이 있는 ‘일인석’, 지눌의 수행처로 사용해 눌암이라는 바위굴 등이 있다. *금강선원--동화사의 가장 상징적인 난야, 동화사 대웅전을 등지고 있다. 수많은 조사들이 거쳐 갔다. 1995년 다시 열었다. 동화사에 딸린 암자인 내원암(1626년 창건), 부도암(1658년 창건), 양진암(1743년 창건)--조선 중기 이후에 창건된 비구니들의 선방이다. *중암암(은혜사골)과 성전암(파계사골)--천태난야 *운부암(은혜사 북쪽)--운부난야, 651년(신라 진덕여왕5년) 의상 또는 실상산문을 연 흥척국사가 초창했다는 말이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 원통전에 모셔진 청동 관음보살좌상(보물 제514호)이 있다. “북의 마하연선원(금강산), 남의 운부선원”이란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전국에 유명한 난야였다. 도리사 선방과 더불어 남의 2대 선방으로 꼽혔다. 근세 선불교의 재건자라는 경허스님이 거쳐갔고, 만공, 용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 등도 그쳐 갔다. 1998년 선방문이 다시 열렸다. 누각의 이름이 은혜사, 백홍암, 운부암 모두 보화루다. ‘화엄경을 보배로 여긴다’로 풀 수 있으니 <화엄경>을 사상의 중심을 둔 것이거나 영.정조시대 화엄교학으로 이름을 떨치던 영파 성규(1728~1812)스님이 이 산중에 머무른 영향 일 수도 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글씨가 두 점 있다. 원통전의 편액과 심검당에 걸린 ‘운부난야’이다. ‘癸亥仲冬(계해년 한겨울)’라고 적었으니 1863년(철종13년) 임술농민항쟁 때 안핵사로 경상도를 오르내리던 무렵에 쓴 듯하다. *상용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일대를 대표하던 사찰이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중암암보다 높은 곳에 있었던 절인 것 같다. 810년 홍진스님이 창건하고 주석했다는 암자. 현재 은혜사를 가리키며 “저 터에 절을 세우면 골 안의 본사가 될 것이다.”이라고 예언했다. ③고려 태조 왕건 신라의 패망기의 상징이던 심지에 이어 나타난 인물이다. 왕건의 통일 이후 정권이 개성의 토호 귀족들에게 장악됨으로써 영남은 변방이 되었다. 계속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왕건 편을 들어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 한 사람,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의 후손들, 새 정권에 동참한 신라의 육두품 귀족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광종이 과거제를 시행하고 성종이 향교(향학)을 세워 지방 진작책을 섰으나 최충으로 상징되는 사학에 의해 무력화됐다. 문종 이후 폐쇄성을 지닌 문벌 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지방 출신들은 과거 합격률조차도 격감했다. •해안--죽을 고비를 넘기고 얼굴을 편 곳(이미 신라 경덕왕 때 우리말을 한자식으로 바뀌었다. 동수대전 170년 전의 일이다.) •염불암 ‘일인석’--도망가던 왕건이 앉아 쉬다가 도인을 만난 곳(전쟁은 염불암 창건 1년 전이다.) •안심, 파군재, 반야월... 등도 왕건과 관련이 있다. ※동수대전(공산전투) 왕건이 고려를 세운(918년) 후 삼국 통일(936년)하는데 걸린 18년의 딱 절반인 927년에 일어난 고려와 후백제가 처음으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팔공산자락에서 싸운 전투이다. 동수대전은 왕건 생애 최대의 패전이고 후삼국 통일전쟁의 3대 전투중 하나이다. 이때의 손실을 3년 뒤 안동 병산에서 벌어진 ‘고창전투’에서 만회하였다. 기록에 “공산 동수 해안현 미리사 앞에서”전투가 벌어졌다고 남아있다. 920년 10월 견훤은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넘어오는 관문인 합천을 뺏어 동진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고령을 거쳐 의성까지 세력을 넓혔다. 팔공산권이 견훤으로 편입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뒤 왕건과의 충돌이 잦았다. 927년 7월 왕건은 합천을 공략해 뺏자 팔공산 이북의 지배세력(장군들)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스스로 귀속한다. 경상도 입지에 위기를 느낀 927년 9월 견훤은 (문경-상주의 왕건 측 성을 격파하고 의성, 군위를 거쳐 위천을 따라 동남진하다가 신녕(영천)을 거쳐)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세운 뒤 회군하고 있었다. 신라의 구원을 요청받은 왕건은 먼저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자신도(예천, 군위를 거쳐 은해사 쪽으로) 5천명의 군사를 이끌었다. 먼저 은해사 입구에서 맞닥뜨려 패한 왕건이 인근의 작은 봉우리로 물러났다.(이 봉우리가 훗날 태조지로 불린다) 왕건은 더 후퇴하여 공산 동수 해안현 미리사 앞에서 동수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러다 참패하여 1만여 명에 이르는 군대는 전멸하고 본인의 목숨만 부지하여 도망갔다. 이 때 왕건으로 변장한 고려 대장 신숭겸과 좌장 김락이 전사했다 . 1120년 팔관회를 참관하던 고려 예종은 도이장가를 읊어 이들을 기렸고 신숭겸을 기린 사당인 지묘사(현재 지묘동의 표충사)가 있다. ※동수는 어딘가? 1)표충사가 자리한 지묘동(거저산군)일대--표충사의 상징적인 대표성 때문에... 일제 시대 발간된 ‘조선의 임수(1938년)’에서 동수를 일반명사로 판단하고 표충사에다 오동나무 숲까지 있는 지묘동 일대라 못 받았다. :그곳이 동수고 미리사가 있다면 뭐 하러 지묘사를 추가로 지었을까? 2)‘동화사’설 *신라 민애왕과 관련된 동화사 비로암 석탑 기록에서--‘동수 원당’이라 지칭. *동화사 상가지구 일대에서 발견된 고려말 조선초 기와터 기와조각의 명문에서-- ‘동수 미륵당’ *‘수(藪)’와 ‘사(寺)’가 섞바꿔 사용된 증가가 있다. :“공산 동화사 미리사 앞에서...”같이 말이 이상하게 된다. 3)‘동수’는 일반명사 ‘오동나무 숲’이라는 본래의 뜻대로 읽자는 설. 부인사 일대와 신무동 지역 또는 팔공산의 남사면 거의 전부를 일컫는다. 4)대구의 ‘미대동’ 미리사 터에 세운 마을에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어떤 지명 연구가는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은 금시초문이라 한다. 5)해안현 소재지 *옛 기록들은 ‘현 남 오리’ ‘현 북 십리’하는 식으로 자세히 표기하는 데 반해 그냥 ‘해안현 미리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해안현은 당시 미리현이라 불렀다.) *불로동-도동 일대가 현의 중심지다.(불로동고분과 봉무토성으로 인해) :봉무토성은 큰 집한채 들어설 정도 밖에 안되어 큰 마을 터로 보기 어렵다. 둔산동 남쪽 명당 마을에도 큰 고분군이 있다. 금호강 강둑이 만들어 지기 전에는 늪지이다. *대구비행장 안 검사동에 있던 ‘유광리’ 마을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직조공장이 있을 정도로 번화한 마을이다. 인근 벌판은 온통 샛강이었고 홍수가 나면 물에 잠겼으나 이곳만은 그렇지 않았다. 해안동이라는 동명도 그대로 유지하고 동촌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해안초등학교도 여기에 있다 이전하였다. ④지눌(1158~1210)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28세부터 예천 보문사에서 수행하다 30세에 팔공산 거조암으로 옮겨왔다. 여기에서 정혜사를 만들어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 매달릴게 아니라, 참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지향하는 선불교를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동참 희망자들에게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어 돌렸다. 그런 인연으로 거조암은 조계종의 발원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 후 염불암에 머물면서 동화사 중창을 돕기도 해 중창주의 한 명으로 기록됐으며 염불암에 그의 영정이 모셔지고 눌암이라는 수행굴이 인근에 있다. 지리산의 상무주암을 거쳐 43세에 조계산 송광사에 들어가 정혜사를 옮기고 53세 열반 할 때까지 머물렀다. ※거조암 738년(신라 효성왕2년)에 세웠다는 설과 경덕왕(750년경) 때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나한 신앙의 성지’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 말로 깨달은 실존 성인들로, 기도객의 소원을 속성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 해서 예부터 신앙이 되었다. 국보 제14호인 거조암 영산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16성 및 오백나한 등 526명의 상이 모셔져 있어 예부터 ‘오백나한절’이라 했다. 영산전은 1375년(홍무 7년)에 건립된 수덕사 대웅전의 뒤를 잇는 백제계 고려시대 건축물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한 구성과 짜임새는 필요미의 극치이며 ‘단순 소박하고 큰 맛을’을 지니고 있다. 경판을 보관하는 판고로 지어진 건물이 법당으로 사용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전 북편 요사채 뒤에서 발굴이 진행되어 여러 건물터가 확인되고 ‘거조사’라는 명문이 나왔다. ⑤일연(1206~1289) 원효의 고향 경산에서 출생하여 9세에 해양(김해)의 무량사로 출가하여 22살에 승과에 급제하고 비슬산 보당암, 포항 오어사 등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수행했다. 회갑 즈음에 비슬산 인흥사(남평 문씨 세거지인 화원읍 본리리 근처)를 중창해 오래 주석했다. 그때 청도 용천사도 중창했다. 팔공산권역의 중요한 위상을 갖는 스님들과도 여러 가지 인연이 얽혀있다. 자신에 이어 1292년 국존이 됐던 홍진국사 혜영은 동시에 동화사 주지로 임명돼 중창주로 기록됐고 그 500여년 뒤 동화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던 인악(1746~1796)은 일연이 중창했던 인흥사가 있던 마을 태생이다. 일연은 그의 나이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몽고의 침략과 민란을 겪어야했다. 이런 참상은 1231년 시작해 30년간 계속되었다. 1232년에는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던 1087년에 완성한 6천여 권의 (초조)대장경이, 1238년에는 황룡사 9층탑이 몽고의 소부대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부인사 경판 소실 5년 후이던 1237년 이규보의 원문으로써 대장경판의 재조를 발원하여 1251년 6천여 권(목판 8만1천여 매)의 새 경판이 완성되어 강화도에 보관되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1398년 해인사로 옮겨졌다. ※팔공산 권역의 사찰과 왕실의 관계 원당은 돈 많은 개인들이 집안의 복을 빌기 위해짓고 운영하던 개인 사찰이다. 태조 왕건은 원당이 너무 많았던 것을 신라 패망의 하나로 판단해 훈요십조 두 번째 항목으로 “도선이 정한 곳 외에는 절을 짓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나라의 운을 돕기 위해 명처 명산에 절을 지어야 한다”는 도참설이 지명한 3천여 곳에 지어진 절을 ‘비보사찰’이라 했다.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 동화사는 하대 신라 왕실의 원당, 조선조에서는 파계사는 영조조, 은해사 혹은 백홍암은 인종의 원당 역할을 했다. 은해사는 태실 수봉사찰로 왕실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아 토지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이던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건봉사에 이어 전국 두 번째 부찰이었다. 파계사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탄 것을 1600년대 계관스님의 노력으로 중건되고 1700년대 기도를 통해 숙종임금에게 영조가 태어나도록 해주고 대구로 돌아온 현응스님에게 숙종은 내탕금을 줘 여러 전각을 짓고 왕자를 위해 기도케 했다. 영조는 왕이 되기 전부터 ‘자응전’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전답을 하사하고, 왕이 된 후에는 정과 스님의 보호를 지시했다. 왕비는 임금의 옷을 보내 장수를 기도케하고 우의정을 보내 축원당인 ‘기영각’까지 짓게하여 왕가의 위패를 모셨으니 후대 왕들도 각별히 대우 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도 ‘천향각’이라는 어필을 보냈다. 철종, 고종도 많은 지원을 했다. 파계사 본 절 공간 남동쪽 산기슭에는 스님들이 수탈당하던 시절에도 ‘하마비’가 버젓히 서 있었다. ⑥성리학의 등장, 지역의 부활 1170년 발생한 무신정변이 영남 부활의 계기가 되었다. 무신의 집권으로 타도된 문벌귀족과 문인들은 황무지가 많아 개간 정착의 여지가 많은 경상도로 압도적으로 많이 낙향했다. 노비만 있으면 논밭은 쉽게 만들 수 있었으므로 경북 북부 산간지에 명문거족이 많이 탄생했다. 이시기에 각 지방에 처음으로 중앙관리가 파견되어 지방 교육 활성화에 기여도 했다. 죽림칠현의 하나인 오세제와 임춘은 경주, 예천으로 이승장은 상주로 내려 왔다. 이러한 인사들이 육성한 ‘경상도 제자’는 최우 등 무신정권의 새 계층 발탁에 힘입어 점차 중앙에 진출하고 경상도의 호장층이 사대부로 성장하고 경상도를 본관으로 하는 명문거족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1209년 성리학을 국내에 가장 먼저 도입한 영주 순흥 출신인 안향은 상주, 경주 등의 지방관을 역임함으로써 경상도가 성리학의 중심지가 될 소지를 마련했다. 안향에 이어 더 실제적 성리학 지식을 도입한 백이정은 비록 지역 인사는 아니지만, 그의 학문을 경주의 이제현, 안동의 권부, 영해의 우탁에게 전수해 영남에 뿌리 깊게 했다. 특히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을 운영하던 충선왕은 이제현을 불러다 10여 년간 현지 학자들과 교류케 함으로써 성리학을 제대로 소화 흡수한 최초의 국내 인사로 육성시켰다. 이제현의 학문은 외가인 영해에 깊은 연고를 두고 있던 목은 이색에게 이어졌고 이색은 10여살 아래의 포은 정몽주와 20여살 아래의 도은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목은의 학맥은 권근, 변계량 등으로 이어져 조선 개국에 동참했던 ‘관학파’를 형성한다. 관학파의 영향을 팔공산권에 유포한 인물은 태제 유방선(1388~1443)이다. 목은의 손녀를 어머니로 해서 개성에 태어났던 그는 목은 제자이던 변계량과 권근에게 학문을 배웠다. 관찰사이던 아버지가 옥사에 연루되어 주살된 뒤 22세에 팔공산 자락인 영천시 청통면으로 귀향 와서 ‘태제’라는 정사를 지어 제자를 양성했다. 순흥 군수로 재직 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에 연루 되어 처형된 영천 사람 이보흠, 사가 서거정, 한명회, 김수온 등이 그의 제자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림파들이 팔공산권의 학문을 주도했다. 퇴계 문하생들 가르침이 이곳 까지 확산된 것이다. 이 지역의 적잖은 젊은이들이 한강 정구(1543~1620)에게서 많이 배웠다. 숫자상 퇴계의 문하생 못잖다는 한강의 제자들은 ‘한강학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강은 김굉필의 외증손자이자 퇴계-남명의 문인 이었다. 퇴계의 또 다른 문하생인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인 이숙량(1519~1592)은 동화천변 화암에 서당을 지었다. 이 서당은 1563년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승격된다.(백운동보다 불과 20년 뒤지는 시기다.) ⑦임진왜란시기의 의병 활동 *권응수장군(1546~1608) :신녕의병대를 이끌고 임진년 5월 6일 한천전투에 승리함. 조선 측이 이긴 첫 육전, 왜군 10명 이상을 처단. 수군의 옥포해전 바로 전 날. 영천성 수복전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도 공산성 수복에 공을 세움. *학봉 김성일(1538~1593) :초유사로 의병을 모으고 항전을 독려함. 뒤에 경상우도 감사가 되어 활약하다 종군 1년 만에 장티부스로 숨졌다. *송강 홍천뢰장군(1564~1614) :영천성수복 때 선봉장으로 활약. *사명대사(1544~1610)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총사령부를 동화사에 두고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⑧한티의 참변 유교의 박해를 받은 것은 불교만이 아니라 천주교의 박해도 심각했다. 희생자가 1만 명에 이른다는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에 이은 탄압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험한 산간지역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형성했다. 이때 경상도 지역으로 천주교세가 확장되었다. 1815년 ‘을해박해’ 때에 청송, 봉화 등에서 100명 이상이 체포돼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26명이 옥사하고 7명은 다음해에 참수 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 상주, 안동 등에서 6명이 체포되어 대구로 옮겨진 후 3명은 옥사하고 3명은 13년간 옥살이 하다 1839년 참수되었다. 두 번의 박해를 거치면서 옥바라지를 위해 그 가족들이 칠곡 신나무골에 모여듦으로써 그곳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팔공산 한티에도 그때 신자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의 등극으로 권력을 쥔 대원군이 1866년부터 6년간 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병인박해’를 시작해 1868년 한티도 초토화 되어버린다. 대원군 정권은 ‘죽이기를 먼저하고 보고는 나중에 하라’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학살 규모가 한정 없이 커져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칠곡도호부의 포졸들은 재판이고 뭐고 없이 수십 명을 집단 학살했다. 신앙의 자유가 20여 년 늦게 도달하는 바람에 그 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이다. 한티는 지금 천주교 대구교구의 성지로 만들어져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방문때 1명의 신자가 성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