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전투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전투이기에 여기 올림니다.
韓國(625)戰爭에서 다부동전투의 승리와 의미(2018년 12월 11 수정)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김 충 영
1. 서 론
한국(6․25)전쟁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외부세력에 의한 대리전이라고 생각하고 민족 상쟁(相爭)으로 인한 무모한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미국 등 참전국들은 잊혀진 전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전투에 참여하여 회생을 목격했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의 생각은 사뭇 이러한 생각과 다르다. 한국(6․25)전 참전용사들은2018년 현재 거의 90세를 자나고 있지만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당시 많은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몰랐다. 1970년 이후 한국 국민은 고도성장과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반면에 1990년에 이르러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김정일 체제하에 참담한 생활상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당시는 청년이었지만 현재 노병이 된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6․25)전쟁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일반인들은 생각하고 있는데 본 연구는 다부동전투가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되는 전투이며 한국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얼마나 중요한 전투이며 어떤 의미를 지닌 전투인가를 살피고자 한다.
2. 한국(6∙25)전쟁 전 양상
한국(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간에 한국 분단 직후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북한은 1948년에 소련군 지원 하에 105전차대대를 창설하였고 T-34 전차 60대를 소련군으로부터 인수하여 제115전차연대로 증편했다. 그 외 자주포, 항공기, 차량 등을 지원하였다. 한편 양국 간 군지도자 접촉도 활발했다.
반면에 한국은 북한의 전쟁준비를 간파했으며 미국에 여러 차례 보고했으나 미국 정부의 한국군에 대한 조치는 북한의 전쟁준비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미 고문단 측은 전차는 한국 지형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군원장비 대상에서 제외 시켜버렸다. 이러한 미국의 미미한 군원조치 결과는 남북한 군사력의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고 결과 625전쟁 초기에 한국군과 민간인의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한반도 지역을 떠나면서 한국군에 남겨준 장비는 100,000 소총, 50,000,000발의 소총 탄약, 2,000 로케트 포 40,000차량 경포와 박격포였다. 여기에 전투기, 중전함이나 전차는 일체 없었다. 미국 당국과 맥아더 사령부의 방침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은 지원하지만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어떤 무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군고문단(KMAG, Koean Military Advisory Group)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군 시설은 원시적이고, 심한 악취가 났다. 이는 한국 지역의 농토에 농부들이 퇴비와 인비를 부어서 계속적으로 불쾌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군고문단은 한국군의 발전에는 비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미군 중령 Thomas D. McDonald는 1949년 12월 보고서에 한국군은 1775년 미 육군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고문단장 Roberts 장군은 1949년 3월에 한국군의 궁상스럽고 초라한 상황에 관해 미합참참모 Charles Bolte 중장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9년 6월 미 의회 증언에서 Bolte 중장은 “우리들이 판단하기에 한국군은 북한군 보다 지금 더 좋은 장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군이 개발되고 물자지원을 받는 시점에서 미군을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북한군이 소련제 전차를 들여와 장비의 큰 이점을 얻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한 미고문단 장교가 Roberts 장군에게 물었다. 왜 한국군에게 북한에 대응할 수 있는 전차를 주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느냐? Roberts 장군은 제2차 대전시 유럽에서 전차부대를 이끈 기갑 출신 장군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 지형은 전차전에 적합하지 못하다. 도로망은 적고 그나마 좁다. 들은 물이 있는 논이고 산은 높다. 어떤 육군도 한국에 전차를 들여온다면 수 시간 이내 그 전차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의 수차례 걸친 전차, 대구경화포, 전투기 등의 군사지원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
1950년 초부터 북한 도발에 대한 위기설이 분분했다. 이 때 4월 10일 참모총장에 복귀한 채병덕 소장은 6월 10일에 주요 전방 사단장의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그 와중에 한국군은 메데이 비상(4. 20-5. 2), 5․30선거 비상(5. 27-6. 2),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에 대비한 비상(6. 11- 6. 23)으로 이어지는 비상에 장병들은 식상해 있었다. 그러던 중 23일 비상이 해제되어 24일(토요일)에 외출 및 휴가가 전면 실시되었다. 당시 일부 장교들에 의해 비상 해제 불가함이 거론되었으나 계속 비상대기로 지쳐있는 상태라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육본에서는 장교구락부(현재 육군 회관;현재 제 건설중) 개관식 연회가 열려 육군 지휘관들이 모처럼 심기를 풀 겸해서 장교구락부에 참석했다. 그리고 늦게까지 연회를 즐겼다.
3. 전차 없고 대전차포도 없는 보병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 04시 정각에 38도선 일대에 안개가 끼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한군의 포탄이 한국군 진지 전면에 작열하면서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전면 남침하였다. 북한군 주공은 제3사단, 제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 연대로 철원- 의정부 방향으로 전진했다. 이에 대항하는 한국군은 제7사단이었다. 개성-문산 방향은 북한 제1사단, 제6사단 그리고 제203전차연대가 투입되었다. 이에 한국군 제1사단이 대응하였다. 춘천-원주 방면에는 북한군 제2사단, 제7사단, 제15사단 그리고 독립전차연대가 투입되었다. 이에 한국군 제6사단이 항전했다. 강릉 방면에는 북한군 제5사단과 해상상륙부대, 유격대, 육전대 등이 투입되었고 이에 대해 한국군 제8사단이 방어했다.
한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대령과 제7사단장 유재흥준장은 25일 새벽 서울에서 적과 교전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사단장 없는 부대는 독립적으로 적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적에게 속수무책이었다.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57미리 무반동총과 2.36인치 로켓포는 적 전차에 대해 아무런 쓸모없는 무기였다. 57미리포와 2.36인치 로켓포는 T34 전차의 철갑을 뚫지 못했다. 전차를 앞세운 적의 공격에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는 한국군 보병은 육탄으로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주공지역에서 한국군은 제7사단은 그대로 무너져 단숨에 동두천과 포천을 피탈당했다.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제2사단(사단장 이형근 준장)을 사단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두천을 목표로 역습을 시도했으나 역부족으로 병력 손실만 초래했다.
한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 장애물을 이용하여 어느 정도 지연전에 성공했으나 임진강 철교 파괴에 실패했다. 그러나 27일 봉일천에서 적 전차를 육탄으로 격파하고 일단 적 저지에 성공했다. 장비나 병력면에서 지탱하기 어려웠다.
한국시간으로 1950년 6월 28일 04시에 유엔안보리(安保理)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했고, 이날 서울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다음 날 맥아더 장군은 한강 남쪽 뚝에서 북한군이 날뛰고 주민은 우왕좌왕하는 참담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작전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시간 동안이나 내가 이어받은 파국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다 보았다. 피에 젖은 이 언덕에 서있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작전을 짜내었다. 물론 이것은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은 작전이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대륙 전체를 상실하게되는 패배를 감수하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강 연변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대한민국의 자체방위능력이 이미 소멸되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한국군만으로 적의 전진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적의 남진을 막는 길은 당장 미 지상군을 투입하는 길밖에 없다. …”.
맥아더 장군의 작전 구상은 계속된다.“주일미군을 한반도로 돌릴 경우 소련군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소련군이 일본을 침공할 경우 일본은 방어할 수 있을 것인가? 주일미군을 부산으로 수송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인가? 패배하는 한국군을 다시 집결시켜 재편성하고 사기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하여 북한군을 저지하고 한국군과 미국군이 전투력을 회복하게 되면 북한군의 병참선은 길어져 있으므로 적 병참선을 차단하고 적 주력을 포위 격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는 인천지역이 될 것이다.” 라고 한국전쟁에 대한 작전구상을 마쳤다.
맥아더 장군 생각처럼 한국군은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서부 전선에서 한국군이 완전히 패배했으나 춘천지역의 한국군 제6사단은 김종오 사단장의 지휘하에 북한 인민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에 대해 타격을 주는 한편 소양강변에서 효과적으로 지연전을 폈다. 그리고 27일 홍천 북방 말고개에서 육탄11용사의 전공으로 적 전차 11대를 파괴하고 적의 전진을 지연시켰다. 한국군 제6사단의 질서 있는 지연작전으로 작전계획에 차질을 직면한 북한은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 제7사단장 전우 소장을 김무정 중장, 최현 소장, 최충국 소장으로 교체하고 제7사단 명칭을 제12사단으로 개칭했다. 동해에서 한국군 제8사단도 이성가 사단장의 지휘 하에 철수하면서 적을 괴롭혔다.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대대장 金鐘洙 소령)는 동악리(同樂里)에 북한군 제15사단(사단장 박성철 소장) 제48연대(연대장 김치구 중령)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우수한 장비와 압도적인 수에 밀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7월 4일 스미스 부대가 오산 북방 5km 지점 횡격실 능선을 점령하고 북한 인민군 제4사단 예하 제107전차와 격돌했으나 전차 파괴에 실패하고 무너졌다. 미 제24사단 제34연대가 평택-안성지역에서 방어했으나 역부족이었다. 7월 7일 김석원 준장이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진천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규합하여 적 제2사단(사단장 최현)의 전진을 어느 정도 저지했으나 장비와 병력이 열세한데다 북한의 집요한 공격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8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가 전의-조치원선에서 지연전을 수행했다. 7월 12일 미 제24사단 제19연대가 금강방어선에 투입되고 한국군 제6, 8사단은 소백산선에서 지연전을 폈다. 한편 문산지구에서 철수한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대령)도 시흥-증평으로 철수하면서 낙오병을 모아 병력이 5000명으로 증가하여 음성에서 적 제15사단(사단장 박성철)을 괴롭히면서 지연전을 펴면서 철수했다. 한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단독으로 충주-수안보로 진격해 오는 인민군 제12사단(사단장 최충국 소장)을 맡았다. 제천-단양으로 진격해 오는 인민군은 한국군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이 저지하고 있었고 강능-울진 지역은 인민군 제5사단의 진격을 한국군 제23연대가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열세한 장비와 병력을 가진 한국군은 어렵게 전선을 형성하면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14일 한국군의 작전권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이양되고 7월 17일에 미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이 재 이양되었다. 이에 앞서 7월 13일에 미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구에 지휘소를 개소하고 작전지휘를 시작했다. 그리고 7월 10일경에 도착한 미 제25사단을 상주-의성 지역에서 한국군을 돕도록 했다. 뒤이어 7월 18일에 미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여 영동 방면에 투입되었다. 한국군은 함창 안동 영덕선을 담당했다. 그러나 방어정면이 너무 넓어 7월말에 낙동강까지 철수할 동안 북한군을 저지할 뚜렸한 전투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미군과 한국군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낙동강전선 우측을 담당한 한국군은 제1사단, 제6사단, 제8사단, 수도사단, 그리고 제23연대를 주축으로 한국군 제3사단이 적의 전진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부대에 속했던 병력은 30%미만이었고, 제7사단, 제5사단, 제2사단의 이름이 사라졌다. 한편 미 제1기병사단, 제24사단, 해병 제1여단이 낙동강전선 좌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제25사단은 병력30%와 장비 60%를 손실하고 사단장 딘 소장은 행방불명이 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7월말 미항공모함 박서(Boxer)호가 145대의 무스탕기를 실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도착했고, 8월초 미 극동공군은 F-51전투기 625대와 F-51전투기 264대를 보유하게 되어 일일출격능력이 525대로 증가되었다. 그래서 지상근접지원, 근접차단, 정찰, 전략폭격 및 병참선차단 등 지상작전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제공권을 장악하고 북한 인민군의 지상작전에 큰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4. 워커장군의 방어 개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제1차대전 때 기관총 중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했고 제2차대전 때 제20군단장과 기갑군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해 불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국에는 전차의 애칭에 자국의 명장 이름을 붙였는데 M-4는 셔만, M-26은 퍼싱, M-46은 패튼, 그리고 신형 경전차 M-41에 워커 불독이라고 불렀다.
워커의 작전 목표는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부산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하는 것이 다급한 문제였다. 워커 장군은 낙동강선을 교두보 확보를 위한 방어선으로 선정했다. 낙동강 천연 장애물을 이용하여 기동과 반격이 용이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의 작전개념은 역습만이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낙동강에서 철수할 때도 워커 장군은 “각 지휘관은 항상 적과 접촉하여 적정을 분명히 파악하고 적의 전진을 저지해야 한다. 적의 공격을 격파할 필요가 있을 때는 즉시 적극적인 작전을 펴라. 역습이야말로 방어를 성공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이다”.라고 훈령을 내렸다.
그는 사단장들을 집합 시켜놓고 훈시하기를 “우리는 항상 공세이전에 필요한 여건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세에 필요한 능력과 전기의 파악이다. 그러므로 공세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된 역습으로 적에게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성공하면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호기가 빨리 올 것이며 총반격에 나설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작전개념 하에 워커 장군은 어느 정도 예비대를 확보하고 예비대를 어떤 시기에 어느 장소에 투입하여 역습을 할 것인가를 항시 고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군은 일상 업무는 참모들에게 맡기고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을 찾아다녔다. 역습시기를 놓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장군의 최대 임무는 예비대를 차출하는 일이었고 매일 아침인사가 “오늘 어느 정도 예비대를 확보해 두었나? 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미 제1기갑사단장 Hobert R. Gay 사단장에게 “적이 대구에 침입해 온다면 나는 가도에서 싸울 작정이다. 사단으로 돌아가 힘껏 싸우기 바라네” 라고 격려했다. 미 제8군은 낙동강선으로 하는 부산 교두보 확보를 절대사수의지(Last Ditch Stand)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북한 인민군의 8월 공세는 필사적이었다.
5. 다부동전투
1) 북한군의 총력전
북한 인민군은 국군에게 계속적으로 타격을 가하면서 1950년 7월 말 낙동강을 강행 도하하여 마산, 왜관, 영천, 포항을 있는 경계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동안 북한 인민군도 많이 소진하여 개전 초기에 비해 전투력은 50내지 60%로 격감했다. 그래서 점령지역에서 젊은이들을 강제 동원하여 낙동강 전선을 보내기 급급했다. 더구나 유엔군 참전으로 제공권을 상실하여 주간의 행동은 제한되었다. 또한 병참선도 길어졌고 주간에 유엔군의 공중공격이 작렬하여 전방에 군 보급도 밤에만 이루어졌다.
북한은 점령지역 시민을 강제 동원하여 길어진 병참선을 보수하고 유엔군 공중 공격을 피하여 열차와 차량을 이용한 야간 수송으로 야포, 박격포, 기관총, 포탄과 탄약 등을 일선 전투부대에 수송하여 전투부대의 손실을 어느 정보 보충했으나 초기 전투력의 우세는 많이 꺾여 있었다.
이때 인민군은 제2군단 예하 제15 및 제13사단은 다부동-대구 축선에 투입하고, 제1사단은 군위-대구 축선을 지향토록 하였다. 이에 추가하여 인민군 제1군단 예하 제3사단과 제10사단( 병력 규모 아주 적은 것으로 추정 )을 왜관-대구 축선으로 진출하도록 하여 대구 점령을 주목표로 하여 여타 지역인 포항, 안강, 영산, 마산지역을 압박하는 공격계획을 세웠다. 전차 21대를 청진에서 열차 편으로 수송해 오고 탄약 등도 보충하였다. 부족 병력은 남한 지역 젊은 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어느 정도 전투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8월 15일에 부산점령이란 목표가 불가능해지자 8월 15일을 대구점령의 날로 정하여 북한 인민군을 독려했다. 병력과 장비보충이 초전 전투력 보다 못하였으나 각 전투부대에 독전대(督戰隊)를 증가시켜 한국군 주저항선을 돌파하려고 전선에 압박을 가하면서 특히 대구 북부에 위치한 다부동 전선에 총력을 다했다.
2) 한국군 제1사단 방어
8월 초부터 한국군은 처음으로 신형대전차무기인 3.5인치 로겟포와 57미리 무반동총을 지급받았다. 소화기도 구구식 소총에서 칼빈 또는 M1 소총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충분한 탄약도 지급되었다. 제1사단 제12연대가 처음으로 3.5인치 로케트포를 쏘아 T34전차 4대를 연이어 파괴하자 병사들은 사기가 올랐다. 병사들은 지금까지 전차 굉음만 들도 달아나는 전차공포증에서 해방되게 되어 서로 전차를 파괴하는 특공대로 나서겠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이 생겼다.
병력은 고참병들은 10-20%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학도의용군이나 마을, 피난민, 길에서 통행하던 행인을 반강제로 동원하여 10발 정도의 사격훈련만 받고 전선에 배치되었다. 정부는 피난민과 인근 마을에서 젊은 청년을 모집했다. 말이 모집이지 대부분 반강제 동원되었다. 나이 많은 남자들은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보국대 또는 지게부대로 일반인이 불렀던 노무자들은 전선 후방에서 탄환 및 주먹밥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거나 부상자들을 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개 대대에 50-60명의 노무자들이 활동했다. 그 와중에도 자원한 학도의용군은 대구에서 ‘죽음으로서 나라와 겨레를 지킬 것을 선서한다“ 라고 출전선서를 하고 전선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병들은 그냥 끌려 전선으로 갔다. 이렇게 하여 한국군 사단은 6000명 수준을 확보하게 되었다.
8월 초 한국군 제1사단 좌익에 7월 중순에 한국에 도착한 미 제1기병사단(사단장 Hobart Gay 소장)이 맡았고 우익은 한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이 있었다.
다부동(多富洞)은 마을 이름과 달리 20내지 30채 농가가 있는 빈촌이었다. 적이 낙동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하자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최초 낙동강 방어선으로 설정한 X선이 유명무실하게 되어 대구를 확보할 수 있는 최후저지선을 Y선으로 설정했다. 이 선은 왜관과 포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한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白善燁) 준장은 사단 지경 내 Y선을 구체적으로 선정하기 위해 방어선을 물색하다가 이 다부동 마을에 이르러 가산산성(架山山城)과 다부동을 연결하는 선이 눈길을 끌었다. 이 선은 사단 좌측으로 369고지, 수암산(水岩山, 518미터), 유학산(遊鶴山), 신주막(新酒幕)을 있는 20킬로에 이르는 넓은 정면이나 적을 감제하기 좋고 방어전에 유리한 지역이라 판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상급 군단의 동의를 얻어냈다(실은 워커장군이 유학산을 잇는 좌우 방어선을 선정했다.). 그래도 사단정면은 20km로 사단 전력에 비해 넓은 정면이었다.
백사단장은 예하 지휘관을 불러 놓고 Y선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이 선이 사단의 최후 저지선이다. 우리가 이 선을 지키지 못하면 대구가 떨어지고 그렇게되면 낙동강의 미군방어선도 붕괴된다. 따라서 조국의 운명도 여기에 걸려 있다. 이 선은 내가 정했다. 성패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부디 성공하여 명예와 기쁨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3) 절대 사수해야 했던 전투(Stand or Die; 지탱하던지 아니면 전사하던지)
8월 12일부터 제1사단 병력은 Y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사단 좌측에 있는 328고지 및 369고지는 제13( 뒤 15로 개칭)연대가 점령했다. 사단 중앙에 있는 수암산(水岩山, 519고지)과 유학산(遊鶴山, 839고지)은 제12연대가 맡았다. 그리고 사단 우측 신주막(新酒幕)지역은 제11연대가 담당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12연대가 진지점령하기 전에 이미 인민군 제15사단(사단장 박성철)이 유학산과 수암산을 먼저 점령해버렸다. 제12연대가 구미-다부동 도로를 우회하여 산정을 점령하려 했을 때 이미 인민군은 지름길을 따라 밤새 산정을 점령해 버렸다. 그래서 제12연대는 반격으로 전선을 사수해야 했다. 처음부터 가파른 산으로 공격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때 제13연대는 제15연대로 개칭되었다. 지난 7월 5일 두 연대가 통합하면서 제15연대 병력 수가 2대1로 많았고 15연대 장병들이 13연대 명칭을 쓰는데 불만을 터뜨린 때문에 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명칭을 제15연대로 하고 육본에 건의에 의해 8월 25일 자로 명칭을 제15연대로 바꾸었다.
8월 13일에 인민군 제3사단(사단장 이영호) 일부 병력은 약목 일대를 도하하여 14일 새벽에 328고지로 공격했다. 유학산을 확보한 북한 인민군 주공은 제15연대를 향해 총공세를 폈다. 인민군 제3사단 1개 연대는 화력이 강한 미군 정면을 피해 한국군 정면으로 집요하게 공격했다. 마침내 328고지가 피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단장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제15(13)연대 병사들은 소학산(巢學山)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연대장은 후퇴하는 병사들 정면에 57미리 대전차포를 사격하여 멈추게 하고 반격을 명령했다. 이들과 함께 새로운 대대 규모 병력이 가세하여 공격했다. 예비대가 없었던 사단장은 의아해 하며 저 역습부대는 어느 대대냐고 물었다.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상부에 보고 없이 인사계를 대구에 보내 독자적으로 모집해 온 부대였다. 그는 자기 예하(13연대) 제3대대를 제11연대 지역으로 파견을 보내 예비대대가 없는 연대장은 불안하여 직접 모병하여 예비대를 구성했던 것이다. 사단장(백선엽 준장)은 군율을 위반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15연대는 이틀간에 걸친 반격으로 328고지를 간신히 탈환했다.
인민군 제13사단(사단장 최용진)은 도로를 따라 한국군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제11연대가 점령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했다. 인민군은 상주-다부동에 이르는 도로상에 전차와 중포를 집충시켜 돌파를 시도했다. 새로운 대전차포 3.5인치 로켓트포를 쏘며 대항했으나 병력이 열세한 제11연대는 천평동(泉坪洞) 삼거리에서 진목동(眞木洞)까지 약 3km 밀려나게 되었다. 이틈에 인민군은 도로 양측 남쪽 산마루를 점령하고 한국군은 도로 양측 북쪽 산마루를 점령하여 공수방향이 뒤바뀌어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우익 제11연대 정면에도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제1사단 좌익 미 제1기병시단은 왜관 북쪽 2킬로에 위치한 303고지를 피탈 당하고 우익 제6사단은 Y선에서 4km나 뒤로 후퇴했다. 제1사단만 어렵게 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13일에 북한 인민군 제1사단은 군위에 집결한 후 한국군 제1사단 우측과 제6사단 좌측을 공격하기 위해 남진했다. 대구의 운명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북한 인민군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 정면을 주공으로 하여 처절하게 공격했고 한국군 제1사단은 이에 맞서 처절하게 진지를 고수하거나 역습을 실시하여 방어선을 지탱했다. 8월 15일 위기는 절정에 이르러 사단 정면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삼아 전투가 계속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사단장은 증원군을 요청했다. 미 제8군사령관은 제1사단 지역이 위태함을 알고 미27사단 27연대와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를 투입할 것을 결정했다.
16일 정오경 미국군은 왜관 서부 낙동강 서안에 B-29 98대가 융단 폭격을 실시하기로 했다. 16일 새벽에 Y선중 제1사단 수중에 남은 지역은 수암산 일부와 다부동 정도고 나머지 전선은 붕괴직전에서 혼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융단폭격과 증원부대 소식에 사기가 살아났다. 이날 백선엽 사단장은 역습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가 고통스러우면 적군은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그래도 인원과 탄약의 보급이 계속되고 있고 공중지원도 받고 있다. 모두 돌격에 나서자”.
16일 아침 반격이 시작되어 제15연대는 328고지를 탄환했고 제12연대는 다부동 서쪽 유학산을 8부능선까지 점령하고 고지로 육박해 들어갔다. 제 11연대는 가산(架山)능선에 침투한 적을 격퇴하고 천평동 도로정면을 굳건히 지켰다. 16일 낮 11시 58분 B-29 폭탄투하 굉음이 사단에 들리기 시작했다.
17일 저녁 무렵 미 제27연대(연대장 John Micheles) 일진이 영산(靈山)지역 전투를 치르자마자 대구 방어를 위해 도착한 것이다. 미 제27연대에는 전차 1개중대, 105미리포 18문, 155미리포6문으로 당시 한국군 사단급 이상의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 제1사단은 105미리 1개 대대로 그 나마 전선에 포문별로 할당하여 싸워야 했다. 미 제27연대는 한국군 제1사단 지역에 증원되었으나 사단장 지시에 따르지 않고 미 제8군사령관 지시에 의거 18일 아침에 다부동 지역에 진출하여 한국군 제11연대 방어선 중간지점에 있는 도로와 개활지에 투입되었다. 그래서 한국군은 산악지역에서 적 보병과 싸우고 미 제27사단은 도로상에서 적 전차와 싸우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융단폭격 후 일시 잠잠하던 적은 18일부터 동원 가능한 모든 화력과 병력을 집중하여 한국군 제1사단 정면을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전선은 다시 수류탄과 총검으로 육박전이 벌어지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제공권을 잃은 인민군은 주로 야간전투를 택하였다. 한국군과 인민군이 뒤범벅이 되어 싸우는 야간전투에서는 상대방 머리를 벗기고 머리카락이 짧으면 적으로 판단하여 싸우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포로된 인민군은 나이도 어렸고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 북한 당국은 어린 사람도 전투할 만하면 강제로 동원하여 전선으로 보냈고 술을 먹인 후 공격토록 했다. 18일 아침 인민군은 가산 능선을 따라 대구 외각에 침투하여 대구역, 신천 등지에 박격포 7발을 터뜨려 대구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18일 저녁 제8사단 제10연대 1개 대대(대대장 김순기)병력이 증원부대로 제1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사단작전참모 문형태(文亨泰) 소령이 당시 증원부대를 애타게 기다리는 때라 “부대를 즉시 전방에 투입하겠습니까?” 하고 사단장에게 물었다. 사단장은 증원대대 병사들을 보니 무더운 8월에 영천에서 여기까지 행군하여 모두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잘 먹여 사령부 지역에서 재운 후 새벽에 출발시키도록 했다.
19일 밤에 중대규모의 인민군이 칠곡 동명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사단사령부를 기습했다. 당시 사단장도 자고 있었는데 부관이 깨어 일어났을 때는 다발총, 기관총 및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단 사령부는 혼란에 빠졌다. 미군 통신병 등 수명이 순간에 전사했다. 사단장은 증원대대 대대장(대대장 金淳基)을 급히 찾아 증원대대를 공격케하여 침투한 인민군을 격퇴시켰다. 이날 낮에 미 제2사단 제23연대(연대장 Paul Freedman)도 증원되었다. 제23연대는 다부동 남쪽 학명동(鶴鳴洞) 주변에 사단 예비연대로 투입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한국군 사단에 중첩으로 투입된 것은 다부동전투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한국군 증원부대 제8사단 제10연대(연대장 高根弘 중령)는 제1사단 우익 가산산성에 투입하여 인접 한국군 제6사단의 방어선과 연하는 방어선을 유지하도록 했다.
한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전투 중 매일 평균 600-700명의 손실이 발생하여 고참병은 10%도 되지 못했으며 병력이 날로 감소되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피난민 중에서, 길거리에서 청년을 만나면 전방으로 동원했다. 노무자들도 동원되었다. 다부동전투에서 노무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군적도 없어서 전사하면 알 길이 없었다. 자원한 학도병도 군적이 없었다.
인민군 제1사단 제14연대는 한국군 제6사단 서측과 제1사단 우측 전선을 돌파하여 갈뫼-효령선까지 진출하여 군위-다부동으로 연하는 도로를 점령하고 다부동 동측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육군 본부는 제7사단 제5연대(민부대)와 독립기갑연대를 제6사단에 배속했다. 이들 부대는 효령 남쪽 고지와 가산동 일때에 배치되었다.
20일 한국군 제1사단 좌익 제15연대는 328고지를 간신히 유지했고 중앙의 제12연대는 유학산 정상을 탈취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우익 제11연대는 증원군의 힘을 입어 인접 한국군 제6사단과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날 적의 공격이 둔화되었다. 인민군 제15사단(사단장 박성철;박성철의 아내가 김일성의 사촌누이다. 뒤에 부주석)은 제1사단 정면이 너무나 완강하여 연천 방면으로 공세를 전환했다. 그러므로 한국군 제1사단 정면은 가까스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적의 공세가 약해지자 백선엽 사단장은 미 제27연대장과 협의하고 21일 새벽에 제1사단은 반격에 나서기로 하고 반격을 시작할 즈음에 인민군은 한발 앞서 공격하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한국군이 필사적으로 나가면 인민군도 필사적으로 나와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그야 말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지기 식으로 싸웠다. 인민군은 다량의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터트리며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미 제27연대는 출격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 때 미 제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제11연대 제1대대(대대장 金在命 소령)지역에 적 포탄이 집중되었다. 초동 공격에 적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여 고지를 탈취 당하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 보고는 즉시 사단장에게 보고되었고 미 8군사령부로부터 “한국군은 도대체 무엇하는 거냐? 싸울 의지가 있느냐?” 하는 노한 힐책의 전화가 왔다. 이는 미 제27연대장 John Micheles 대령이 “한국군이 철수하고 있다.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철수해야겠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선엽 사단장에게도 이 같이 보고했다.
사단장은 제27연대 철수를 직접 확인할 때까지 잠시 중지시키고 동명초등학교에서 다부동으로 급히 지프차를 몰았다. 진목동 도로 서쪽에 제11연대 병사들이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하여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며 고지를 점령한 인민군은 산발적으로 미군 포진지를 향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대대장을 불러 “어떻게 된거냐?” 고 물었다. 대대장은 “장병들은 주야로 계속되는 격전에 지친데다가 고립된 고지에서 급식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사단장은 대대원을 앉혀 놓고 말했다. “모두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 동안 여러분들이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후퇴하면 나라는 망한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사단장은 돌격 명령을 내리고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곧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니 골짜기가 진동했다. 대대장 김재명 소령도 앞장서서 부대를 지휘했다.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점령했다. 인민군은 새로운 증원부대가 역습하는 줄 알고 기가 껶여 후퇴했다. 뒤에 John Micheles 대령은 사단장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지금까지 한국군에 대해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 겪은 한․미연합작전에서 미군의 신뢰를 회복했던 것이다. 연합작전의 성패는 상호 신뢰에 있으며 이는 작전의 성패에 달렸다. 산정상이 격퇴되어 골짜기에 미군이 고립되어도 안 되고 골짜기가 무너져 산정상이 고립되어도 안 된다. 이러한 어려운 사항을 다부동전투에서 사단장의 뛰어난 지휘력으로 잘 극복했다.
8월 21일 야간에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계되었다. 인민군은 전차를 동반한 주공을 미 제27연대 정면으로 조공을 한국군 제11연대 정면을 향해 대규모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주간에 동촌 비행장에서 뜨는 무스탕의 근접지원 때문에 기동이 불편해진 인민군이 항공기의 행동이 극히 제한되는 야간 공격을 택했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 전차포를 쏘며 5시간 이상 싸웠다. 전차에서 철갑탄을 쏘면 불덩이가 날라가 상대편 지역에 불꽃을 튀기며 작열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이 불덩이가 계곡을 따라가 메아리치며 날아가 상대 지역에 터지는 것을 보고 마치 볼링공이 통로를 따라가 목표지역에서 핀을 쓰러뜨리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awling Alley)전투라 불렀다. 날이 밝자 인민군 전차 9대, 자주포 4문, 수대의 트럭 그리고 1,300여구의 시체가 확인되었다. 볼링장전투는 다부동전투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인민군이 미군의 화력에 된맛을 본 전투였다.
22일 오전에 인민군 제13사단 포병연대장 정보욱 중좌가 제11연대(연대장 김동빈 대령) 지역에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해왔다. 그의 진술에 따라 122미리 곡사포7문과 76미리 곡사포 13문이 은페되어 있는 포진지를 유엔군 폭격기가 강타했다. 7월부터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제공권을 장악한 한국군은 다부동전투 중에 전차, 포병 및 보병화력에서 인민군에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날 제12연대 제1대대(대대장 韓順華 소령)는 제공권을 잃은 후 인민군이 곧 잘 시도했던 야간공격을 하여 유학산을 탈취했다. 무려 여덟 차례 공격하여 성공했다.
23일에 인민군 제1사단 제1연대는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741고지를 점령하고 또 일부는 가산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제11연대 지휘소를 기습하고 미군 지원포병진지를 공격했다. 이에 제1사단은 볼링장계곡에서 신주막으로 공격하고 제10연대, 미 제23연대 그리고 제6사단 예하 제15연대, 독립기갑연대가 동시에 반격을 전개하였다. 제10연대(연대장 高根弘 중령)는 가산일 때 인민군을 격퇴하고 다시 741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다부동 동측방 위기를 수습하였다.
24일에 Y선을 완전히 회복하여 적을 완전히 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작전 주도권을 한국군이 갖게 되었다. 제1사단 지역이 안정하게 되자 미 제27연대는 마산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26일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제1사단은 담당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할 준비를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했다. 28일에 수암산도 피탈 10일 만에 탈환했다. 사실 한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피를 흘리면서 다부동전투를 치렀다. 유학산을 무모하게 공격하여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 끊임없이 공격함으로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다부동전투는 8월 한 달간의 전투였다. 인민군은 제3, 제15, 제13, 제1사단 등 4개 사단을 다부동 지역에 집중 투입하여 대구를 유린하려 했다. 한국군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 대항하여 최후저지선을 잘 지켰고, 미 제27연대, 미 제23연대,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등이 이 지역에 투입되어 피아 모든 전투력을 동원한 결전이었으나 결국 제1사단의 필사항전으로 북한 인민군의 예기를 꺾는데 성공했다.
8월 말에 미 제23연대를 제2사단으로 미 제27연대를 제25사단으로 복귀시켰다. 미군 병력이 속속 증강됨에 따라 전투지경선도 조종하여 미 제1기병사단이 다부동 일대를, 한국군 제1사단이 팔공산 정면을, 그리고 신녕 정면을 한국군 제6사단이 담당하고 그 우측으로 제8사단, 수도사단, 제3사단이 담당하여 왜관-다부동, 신녕, 영천북방, 안강 북방, 그리고 포항북방으로 연하는 최후저지선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왜관-현풍-창녕-영산-마산으로 하는 낙동강선은 미 제2사단과 미 제25사단이 담당하고 미 제1해병여단을 예비대로 확보하였다. 한국군은 제7사단과 제11사단을 재창설하고 제2, 제5사단을 재창설하기 위해 작업 중이며 제9사단 창설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8월중에 제1, 제3훈련소를 창설하였다.
이후 북한은 보급을 재충전하여 9월 공세를 펴서 안강과 영천 지역에서 일부 돌파구를 형성했으나 후속 부대가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북한 인민군은 다부동전투에서 모든 정예 전투력을 다 소진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제1사단은 장교 56명을 포함하여 2300여명이 전사했다. 여기에 노무자까지 합치면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북한 인민군은 한국군 보다 2배가되는 5690여명의 전사자를 내어 큰 타격을 입었다. 전선에 시체가 너무 많아 제1사단이 미 제1기병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동쪽 팔공산으로 옮길 때 미군은 시체를 치우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받지 못하겠다고 버틸 정도로 전사자가 많았다. 북한은 여기에 더하여 전차 및 화포를 많이 상실하여 이후 전투에서 한국은 병력 및 장비 면에서 북한 인민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6. 결론
북한 김일성이 북한의 전투력만 믿고 8월 15일 대구 점령이란 구호로 인민군을 몰아붙였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낙동강 교두보를 목표로 대구 사수를 결의하여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아 다부동전투는 피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다부동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주요 의미를 지닌 전투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명성에 가려 일부 사람은 이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다부동전투의 의미를 곰곰이 짚어 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첫째, 다부동전투에서 북한 인민군의 주력을 저지함으로서 한국군은 장비만 제대로 갖추면 하시라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군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이후 북한은 9월 공세로 미 제1기병 사단정면을 10km나 물러나므로 해서 더욱 한국군의 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전투에서 지원받는 군대가 지원하는 부대로부터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첫 번째 조건이다. 다부동전투 이후 미군은 한국군을 신뢰하게 되었다.
둘째, 다부동전투 중에서 화력이나 병력면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우세하게 되었다. 8월말에 미 제2사단이 부산에 상륙하고 한국군 제7사단과 제5사단이 창설되어 충분하지는 않지만 긴급시 운용할 수 있는 예비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은 돌파해서 전과확대할 충분한 병력도 화력도 보유하지 못했다. 이는 다부동전투에서 많은 전력은 소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9월 공세 때 영천을 돌파하고도 전과 확대할 전력이 없어서 실패했다.
셋째, 다부동전투는 실제로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였다. 북한 인민군의 주전투력이 이 전투에서 거의 소진하여 9월 공세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다부동전투는 맥아더가 전쟁 초 한강 남쪽 뚝에서 “한국군의 재편성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완전히 해소하고 미군 화기를 보급 받은 한국군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유엔군이나 육군 본부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구체화되었다.
넷째, 비록 미군과 북한 인민군과 전투이기는 하지만 다부동 골짜기에서 전차전이 벌어져 인민군을 압도했다. 그래서 다부동전투 이후 전차에 대한 한국군의 공포증은 살아졌다.
다섯째, 다부동전투는 예비대를 적절히 활용하여 적시에 역습 내지 반격을 가했기 때문에 진지를 고수하며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줄곧 물러섰던 한국군 제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유학산과 수암산을 점령했다. 다시 말하면 워커 장군의 작전개념인 “예비대를 확보하고 돌파당하면 예비대로 역습을 가하여 적의 전력을 파괴하라.”를 모범적으로 수행한 전투였다.
여섯째, 미 제27연대, 미 제23연대가 한국군 제1사단 지역에 투입되어 최초로 한․미협동작전이 잘 이루어진 전투였다. 사실 21일 제11연대 제1대대가 무너져 제27연대 좌 측방이 노출되었을 때 제27연대장 Micheles대령이 제8군사령부에 보고하고 철수할 수도 있었으나 사단장 백선엽 준장에게 동시에 보고하여 사단장이 빠르게 직접 조치하여 전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결과 이후 한․미협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일곱째, 다부동전투는 일부 지원병, 학도병, 대부분 반강제 동원된 신병 및 노무자들이 장교들의 지시를 잘 따르므로 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학도병이나 노무자는 군적 없이 전투에 참여했다. 그래서 전사해도 누가 죽었는지 알 길이 없고 더구나 외출 중에 동원된 노무자들은 부모들이 어떻게 행방불명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행이 최근에 이 지역에 전사자 시체를 발굴하여 DNA검사를 하였다니 조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 하겠다.
여덟째 미 공군에 의해 막대한 근접지원사격이 이루어졌다. B-29 98대로 공중 폭격하여 북한 인민군을 공포로 몰아 넣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후 북한 인민군의 활동은 밤에만 이루어졌다. 낮에 한국군은 공중지원에 의해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있었다.
끝으로 미 제8군사령관 위커 장군이 수암산, 유학산, 가산 그리고 팔공산을 있는 낙동강 방어선, 엄밀히 말하면 대구방어선을 설정한 것은 탁견이었다. 북한군이 이 선을 점령하면 대구 전 지역을 감지할 수 있고 대구를 내려다보고 작전할 수 있어서 아주 유리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군 전투 지휘관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전투에 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멀리서 급히 달려 온 워커 장군은 대구사수를 위해 수암산과 유학산 확보가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유학산 확보를 명령했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은 민족 독립을 갈구했으나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그래서 목숨을 바쳐 지킬 정도로 자유의 절실함을 몰랐다. 다만 군인 장교, 일부 지원병 및 학도병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인식하고 수호에 나섰다. 그래서 장교들이 솔선하여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북한 인민군에게 맞섰다. 그리고 동원된 신병들은 잘 따랐다. 일부 인사는 한국전을 동족끼리 전투라고 의미를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1990년에 이르러서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북한 주민이 공산주의 체제하에 언행이 자유롭지 못하고 생활이 어려운 것을 보고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되었고 한국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참전용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다부동전투는 북한 인민군의 주력을 깨트리고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이며 우리가 가장 자랑해야 할 전투이다.
다부동전투 부대 전계도
1950년 대구에서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