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과거 학생운동에 관한 논문에서 필자는 식민지시기 학생운동의 특성으로 순수성, 진보성, 종합성, 민족지성의 대변 등을 지적한 바 있다. 거기에서 순수성이란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 처럼 자기계급의 권익운동을 본질로 하는 것과 다른 일반 지성을 대변한다는 것인데 때문에 학생운동은 이상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진보성이란 식민지 교육의 피교육자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부과되는 교육 지성과 무관하게 혹은 그에 반발하는 가운데 진보를 탐색하게 되었고 아울러 구세대의 봉건적 잔재를 극복한다는 신세대 지향성을 갖는 것이 특징이라는 말이고, 종합성이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영역별 종합성을 말하는데 계급적 종합성을 나타낼때도 있다. 민족지성을 대변한다는 것은 기성세대가 빼앗긴 나라를 자신들이 광복한다는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광주학생운동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기본적 특성을 고려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의 학생운동상의 의미와 민족운동상의 의미를 추적하면서 역사적 의의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광주학생운동의 이해
광주학생운동이란 1929년 10월부터 이듬해 1930년 3월까지 광주에서 시작하여 전국운동으로 발전한 학생들의 민족해방운동을 말한다.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학생운동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는데 1920년대 학생운동은 주로 동맹휴학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일본경찰의 집계에 의하면 1921-28년간 맹휴투쟁은 404건에 이르고 있었다. 전반(146건)에는 학교의 시설개선이나 일본인 교사배척 등의 요구가 동맹휴학의 주요한 이유였으나 후반(258건)에는 식민지교육의 본질을 공박하고 있었다. 후반기(1925-28) 맹휴투쟁의 대표적 경우로 손꼽는 1927년부터 28년에 걸쳐 전개된 함흥고등보통학교 학생의 격문을 보면, '조선본위교육' '식민지차별교육반대' '군사교육반대' '학생회의 자치제' '한·일공학의 반대' 등이었다. 이의 성격에 대하여는 다른 글을 참고하기 바라지만 거기에서 학생운동이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수 있다. 1928년 6·7·8·9월에 광주지방에서도 맹휴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광주고보와 농업학교를 중심으로 동맹휴학투쟁이 전개되었고, 그때 광주고보에서만 27명이 퇴학, 296명(처음은 281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는 큰 규모의 항쟁이 있었다.
그러한 학생운동의 전통과 배경 위에서 1929년부터는 학원운동에 머물지 않고 민족해방운동, 또는 독립운동, 또는 혁명운동으로서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은 3단계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좋다. 제1단계는 1929년 10월 30일 나주 통학생의 충돌부터 11월 광주를 중심으로 목포 나주 등지에서 전개된 한일 학생의 충돌과 한국 학생의 시위항쟁을 말한다. 제2단계는 그해 12월 서울의 각급 학교 학생이 봉기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던 것을 말하고(혹은 11월 19일 목포의 시위운동부터 제2단계로 분기할 수도 있다. 격문의 성질이 너무 새롭기 때문이다.) 제3단계는 1930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제3학기 동안에 전국에서 전개된 시위항쟁을 말하는데 특히 1월 15일부터는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된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이 3월 1일을 전후하여 3·1운동 11주년운동을 겸해서 전개되었고 전국적으로 보통학교(소학교) 학생의 참여가 많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제1단계의 나주 통학생의 충돌을 이해할 때는 먼저 나주의 민족사적 기초를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통학생이 어떻게 일본인 학생이 더 많고 더 많으면서 일본 여학생은 없느냐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이 지방에 대한 일제의 수탈체제를 이해할 수 있다. 나주 영산포는 구한말 이래 일제의 침략이 집중되어 어떤 마을은 조선 사람의 토지가 한 평도 없을 정도로 일제의 완전지배가 실현되고 있었고, 일본인 여학교가 설립되어 있을 정도로 일본인 도시화가 추진되어 있던 곳이다. 그러니까 나주 통학생간의 충돌은 감정상의 충돌일뿐 아니라 식민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노출한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 11월 3일에 광주역전에서 한일 학생의 충돌을 이해할 때는 당시의 광주가 邑에도 못미친 면소재지였는데 일본인만 다닌 광주중학교가 있었다는 점도 이 지방에 대한 일제 침략의 심각성을 전해 주는 단면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1월 3일의 항쟁에 놀란 일제는 10일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11월 11일 등교가 시작되었으므로 12일에는 조직적인 항쟁이 전개되었다. 광주 학생의 비밀결사였던 성진회와 소녀회, 그를 계승한 독서회 중앙본부가 계획을 주도한 것이다. 그리고 4가지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4가지 격문은 중복된 내용이 많은데 한일학생의 충돌로 말미암아 발생한 현장문제의 항목 외에는 조선본위교육, 식민지 차별교육의 철폐, 학우회의 자치권 등의 요구는 종전의 내용과 다르지 않았으나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등의 요구가 강도를 높히고 있었던 것은 광주학생운동이 학원운동을 넘어서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라 할 것이다.
11월 19일 목포상업학교의 시위에서도 역시 4가지 격문이 살포되었다. 그런데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약적이다. 광주의 격문은 張載性이 작성했다고 하며 목포의 것을 작성할 때도 장재성과 협의했다고 한다. 목포상업학교는 한일학생의 공학으로 조선인 학생 122명, 일본인 학생 130명으로 일본인이 더 많은 불리한 조건에서 봉기하였는데 격문은 광주의 경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과격하다. 한말로 말하면 공산주의운동 격문이다. 시위에 '붉은 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격문을 기준하여 단계를 구분한다면 11월 19일 목포상업학교의 시위부터 제2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시기 문제는 좀더 연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공간과 형태를 고려하여 12월 서울학생의 시위부터 제2단계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제1단계 운동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학생운동의 경우는 식민교육이나 교사문제·시설문제 등, 교육조건의 문제가 대부분인데 광주·나주·목포의 경우는 학생간의 충돌 아니면 광주농업학교나 목포상업학교처럼 한일공학의 누적된 감정이 폭발하듯이 모두 학생간의 모순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학생에게 간접적이거나 식민교육상의 관념적 문제가 아니라 학생 현장의 직접문제이기 때문에 광주·나주·목포의 외침이 다른 지방 학생에게 공감지수가 높을 수 있었다. 그것이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초 이유가 아니었던가 한다. 다음에 11월 12일 운동의 전단은 학원문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거기에도 전술과 같이 학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11월 19일부터는 정치운동이 크게 부상하였다는 점이다.
제2단계의 운동은 12월 2일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실에 '광주검속학생을 탈환하자'라는 다수 전단의 살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에는 서울의 웬만한 고등보통학교(중학교)는 모두 궐기하여 12월 9·10·11일에는 3일 연속하여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일제 당국도 견디지 못하여 13일부터 서울의 각급 학교에 대한 전면 휴교를 조치했는데 11월 12일 광주운동 이후 12월 27일까지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보도가 금지되어 통신이 마비된 가운데 보여 주었던 제2단계의 12월항쟁은 신간회·청년동맹·학생전위동맹 같은 운동조직의 동원으로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운동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울을 중심한 12월항쟁이 있었으므로 이듬해 1월 이후의 전국항쟁이 가능하였다는 말이고, 이때에는 학생운동이 신간회·근우회·청년동맹·학생전위동맹 등의 사회운동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발전하고 있었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3단계의 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만개 발전한 시기를 말한다. 1930년 1·2·3월, 학년도로 치면 1929학년도 제3학기의 운동이었다. 우선 12월 13일 휴교와 그에 이은 겨울방학에 학생들의 귀향과 여행으로 학생운동의 정보를 전국적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 제3학기 개학은 1월 15일(일부학교 8일)이었는데 개학하자마자 시위항쟁이 전개되었다. 혹은 12월에 2학기 시험을 못치른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면 백지동맹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1월 15일 제3학기가 시작되는 첫날 5천여 명의 학생이 궐기하였다. 전국적으로 지방도 개교와 더불어 시위항쟁이 전개되었는데 12월의 투쟁과 다른 점은 독립만세 시위로 이행되었고, 시골 郡의 학교까지 참가하고, 또 보통학교 학생까지 궐기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해외에까지 전파되었다. 재일동포의 궐기에 이어 만주 각처와 중국본토에서도 궐기하였다. 상해에서는 각단체연합회가 결성되어 1월 11일 군중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렇게 1930년 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이 국내외 민족운동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많아졌는가 하면 폭력시위도 나타나고, 격문이나 전단이 학교에 한정하지 않고 마을의 요소와 회사 같은 곳에 살포하거나 벽보로 나붙었고, 신간회, 근우회, 청년동맹, 학생전위동맹, 소년회 같은 사회운동 단체와의 연대도 한층 더 긴밀해졌다. 여기에서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 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붉은 기를 들고 있는 경우도 늘어났는데 그것은 혁명성이 고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제3단계의 운동은 3·1운동 11주년운동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3·1운동 11주년의 구호는 2월 하순부터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때에 이르면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즉, 학생운동이 학원운동에 머물지 않고 정치운동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월까지 194학교(초등학교 54, 중등학교 91, 전문학교 4교)의 시위가 있었던 가운데 5만4천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다. 거기에서 퇴학 533명, 무기정학자 2.330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3단계까지의 운동을 보면, 제1단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주학생운동의 발단부터 학생으로서 공감지수가 높았다는 것, 제2단계에서 보는 사회운동 단체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것, 제3단계에서 크게 부각된 독립운동 성향이 고조된 분위기 등에 의해서 전국운동으로서 '光州學生運動'이 전개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전개된 학생시위운동만을 광주학생운동이라 하고 그의 영향으로 12월에는 주로 서울에서, 그후 이듬해 3월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 3월까지 전개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歷史像을 바로 이해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이해방식은 오늘날의 연구 결과가 아니라 당시에 독립운동계에서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경찰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3·1운동을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서울·평양 등지의 만세시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해 5월까지 전국적으로 봉기한 시위운동을 묶어 3·1운동이라고 말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3. 광주학생운동의 한국학생운동상의 위치
학생운동은 교육문제를 중심한 학원운동과 사회비판·사회개혁·사회혁명적인 사회운동 정치운동으로 내용을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이 학생운동은 영역이 다양하고 종합적이다. 그런데 대개는 학원운동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원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은 1928년의 함흥학생운동을 통해 성숙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함흥학생운동에서 전국운동이 형성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일 정도로 함흥학생운동은 이념이나 조직이나 운동 전개방식에서나 학생운동의 원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광주에서도 함흥과 같은 맹휴투쟁이 전개되었다(전술). 그러므로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을 좁게 보면 1928년의 광주운동의 연장이라고 보겠지만 넓게 보면 1920년대 전국학생운동의 결실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에 11월 11일 밤에 광주에 살포된 격문을 보면 광주학생의 특수문제와 더불어 조선본위교육, 교우회의 자치권문제, 식민지적 차별교육철폐,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등, 전국학생의 일반문제를 대변하면서 1920년대 맹휴투쟁의 주장을 총결산하듯이 종합적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의미는 발전사적 측면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해 12월 서울에서 각급학교의 맹휴투쟁이 전개될때 학생들의 구호에는 한결같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광주학생을 따라가자' 등으로 광주학생운동의 계승의지가 분명했다. 제3학기가 시작된 이듬해 1월에도 서울의 중동학교 학생은 '광주학생 구제'를 맹휴투쟁의 구호로 삼았고, 부여·천안·전주·진주·여수·담양·재령·해주·사리원·편양·회령·경성의 각급 학교에도 '광주학생사건'에 관한 각종 벽보 또는 전단이 나붙었다. 2월에도 '被囚學生萬歲' '獄中學生萬歲'등으로 이어졌고, 2월 8일 함경북도 길주의 덕산보통학교에는 '光州事件檢束學生釋放萬歲'라는 전단 73매가 살포되었고, 함북 청진여고에서는 2월 17일 "全朝鮮에 걸친 광주학생사건의 眞相을 밝히라"는 81매의 전단이 살포될 정도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광주학생운동이라는 하나의 목표와 하나의 방식의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공간적으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과 중국, 하와이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광주학생운동은 국내외에 걸쳐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결산했다는 것을 역사적 의의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운동으로 발전할 때 학원운동이 정치운동 즉 독립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성격상의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 맹휴투쟁이 함흥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나 1929년 11월 12일 광주학생의 시위투쟁까지는 격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좀 진보적이고 과격해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교육문제, 학원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11월 19일의 목포운동부터는 교육문제 학원문제도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적색 로서아를 지지하자' '제국주의전쟁 절대반대' '노동자 농민은 혁명적 조합을 결성하라' '세계무산계급단결만세' 등의 구호에서 1928년까지 또는 11월 12일의 광주운동까지와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사회주의 성격이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아울러 학생운동을 독립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전의 학생운동이 학원운동으로 전개될 때도 물론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간접적인 경우가 많았다. 또 1920년대 운동에서 보듯이 학생이 학원운동과 정치운동을 별개로 추진하고 전개한 경우가 일반 추세였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부터 학생운동을 직접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정치운동과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는 1월 15일 서울운동 이후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학생운동의 중심 구호로 확산되면서 전국화되었다.
그와 같이 광주학생운동은 학원운동을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학원운동과 정치운동을 동시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학생운동은 학원문제 보다 정치문제를 앞세운 독립운동으로 전개한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이 학원운동에서 정치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발전하는 분수령상의 위치에 있다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격도 역시 중요한 역사적 의의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격은 광주학생운동이 신간회, 근우회, 조선학생전위동맹,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원을 받으며 또 사회주의 운동의 지원도 받으며 전개되는 가운데 고조되어 갔다고 이해된다. 그와 같은 성격의 역사적 위치는 1929년 3대 민족운동이라 할수 있는 광주학생운동, 원산노동운동, 용천소작농민운동의 경우가 가지고 있는 공통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즉,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이 1920년대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운동을 중심한 사회경제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1929년의 원산노동파업과 용천소작쟁의 운동을 고비로 사회경제운동이 정치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자 농민운동 조직이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4. 광주학생운동의 민족운동상의 위치
학생은 이상주의에 경도될 연령이고 지식을 탐구하는 집단이므로 학생의 지성은 이상주의와 지식탐구의 욕구가 결합하여 형성된다. 때문에 학생은 자연 진보성을 가지게 되며 동시에 비판 집단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 후진국이나 식민지사회에서 학생운동이 선진국의 경우 보다 더 발달하는 이유도 비판 대상인 현실의 모순이 선진국사회 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이고, 다음에 농민이나 노동자 같은 사회운동 담당자들이 계급적 성장이 미숙하여 지식인이나 학생이 그것을 대신하고 대변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학생운동의 민족운동상의 기본적 위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1920년대 한국학생운동에서도 잘 나타나 있고,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한다는 것도 그러한 성격이 고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의도적으로 추진된 결과이기도 했다. 그것이 광주학생운동의 핵심조직으로 활동했던 독서회의 성격에서 찾아볼수 있다. 讀書會는 醒進會나 少女會의 계승 또는 발전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단순 독서회가 아니라는 것은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 광주학생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려던 시도는 新幹會에서 광주학생운동을 3·1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으로 발전시켜 보려고 했던 계획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것이 12월 13일 안국동 民衆大會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사전 봉쇄로 무산되고 말았다. 신간회의 민중운동 계획 같은 질적변화는 일본 경찰이 특별히 경계하였으므로 실현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학생운동의 질적 변화는 사회운동 단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학생이 주도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질적 변화는 11월 12일의 광주시위운동에서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외치는 구호나, 11월 19일 목포시위운동에서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압박민족해방만세의 구호를 통해 일찍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독립운동의 전단은 12월 서울운동에서 더욱 확산되어 1월부터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 여기에 이르면 학생운동이 주체가 학생이라는 것뿐이고 운동 성격은 학원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 정치운동 그리고 독립운동 또는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는 학생이었다. 그러므로 학생에 의한 정치운동 독립운동이라는 점에서 1929년 11·3운동은 어디까지나 학생운동인 것이다.
다음에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의 논리의 문제이다. 여기서 논리 이전의 민족감정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당시의 언론보도처럼 광주학생운동이 민족감정의 소산으로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학생운동을 과소평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민족감정문제를 외면해서 안된다는 생각이다. 식민지하의 학생은 길거리에서 일본인 학생을 만나기만 해도 경련을 일으켰던 그 정서적 분위기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는 이념상의 문제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념은 당시의 격문을 통해 보아야 하는데 11월 12일 광주운동의 격문을 보면 차별교육의 문제, 조선본위교육, 교우회의 자치권,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등, 진보적이기는 해도 민족주의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전의 학생운동의 학원문제에 한정하던 것을 독립운동으로 발돋움하며 민족운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19일의 목포운동의 구호를 보면 앞에 소개한 바, 사회주의 지향성이 대단히 높았다. 그리하여 서울과 전국운동으로 발전하면서는 민족주의 구호와 사회주의 구호가 혼재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듬해 1월 15일 서울의 5천여 학생의 시위운동에서 이화여고에서 약소민족해방만세, 제국주의타도만세, 피압박민족해방만세, 무산계급혁명만세라고 쓴 전단을 살포하며 시위할 정도로 맑스주의적 성향을 높이고 있었다. 여기에서 식민지시기 한국민족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일반적 추세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끔 민족운동 또는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던 사실에 대하여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우를 보는데 그것은 해방후의 분단 논리 때문이다. 식민지 자본주의에 반발하는 독립운동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사회주의에서 논리를 구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학생들의 소박한 사고로는 자연스러웠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은 팜프레트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이상주의에 불타는 학생이 좋은 말로만 엮어놓은 팜프레트를 읽으며 얼마든지 사회주의의 이상에 도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1929년은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덮쳐 자본주의가 몰락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던 때였다. 한편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사회주의를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었던 때였다. 당시의 한국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사회주의를 국제적 계급주의라고 교조적으로 이해할 때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학생운동에서 사회주의 구호가 부각된 것을 해방 후 또는 오늘날의 좌우 논리로 이해해서 안될 것이다.
그와 같은 광주학생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발전하면서도 끝내 학생운동으로 끝맺게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 이유는 신간회나 근우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조직이 학생운동을 인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12월 13일 민중대회 계획이 무산된 후 그 이상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학생운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해산, 개편 절차를 밟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으로 운명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민족운동사 총체적 측면에서 반성할 문제이다. 특히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결정에 지나치게 예민했던 조선공산당계열의 극좌노선을 반성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변동을 주체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의지했다면 그것은 역사를 후퇴시킨다는 교훈을 반추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신간회 해체작업을 추진하느라고 광주학생운동이 학생운동으로 끝났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동사 측면에서 보면 광주학생운동이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결산했다는 점과 동시에 1920년대 민족운동을 총결산했다는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20년대 운동을 결산한 역사적 사건이 달리 없었던 것이다.
5. 맺음말
광주학생운동을 이해하고 성격을 파악할 때 가장 논쟁점으로 거론되는 것이 광주학생운동을 광주지역으로 한정할 것이냐 아니면 전국운동으로 이해할 것이냐의 시공의 문제와 또 학원운동으로 한정할 것이냐 사회운동 정치운동으로 이해할 것이냐의 성격문제와 세번째로 사회주의운동 성향이 어느 정도 개재됐느냐의 이념문제이다. 먼저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앞에서 누누히 이야기한 것처럼 이듬해 3월까지 전개된 전국운동으로 파악해야 한다. 전국운동으로 발전할수 있었던 이유는 식민구조라는 일반성 외에 일인학생과의 누적된 대립이 폭발한 나주·광주·목포의 운동에서 비롯됨으로써 전국 학생과 짙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점, 사회운동 단체의 전국 조직의 지원 또는 연대, 학생운동을 학원운동에 한정하지 않고 민족해방운동 또는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민족적 일반의지에 호소하고 있었다는 점등에 있었다.
그러므로 광주학생운동을 학원운동에 한정하지 않고 독립운동 또는 정치운동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다만 사회인이 주도한 사회운동 정치운동 즉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학생운동에 머문 것은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가 그것을 계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을 지원할 수는 있어도 학생운동을 인수하여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킬 역량은 없었다고 할까? 그리하여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결산하면서 동시에 1920년대 민족운동을 총결산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이 기회에 말할 것은 학생운동론에 있어 학생운동은 학생운동 독자적 범주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학생이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일으켰더라도 그것은 학생에 의한 정치운동이고 사회운동이지 그것이 정치운동의 준비운동이나 사회운동의 종속운동으로 이해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학생운동을 기성인의 준비운동 또는 훈련 성격으로 판단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이 공산주의 혁명론이라고 해도 논리의 한계로 생각된다. 10대는 20대의 준비이듯이 소년운동은 청년운동의 준비가 되고 청년운동은 장년운동의 준비가 된다고 해도 각기 독립된 특성(주체성)이 확보되어야 각기의 운동을 발전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생활조건의 독립성이 분명한 학생을 타에 종속시키는 운동논리는 학생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지원하고 연대하는 연대투쟁의 경우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점은 학생운동사 연구의 과제일 것이다.
다음에 사회주의운동성의 논의에 대하여는 1989년 60주년을 계기로 김성보·김동춘의 논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거론된 문제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때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라 그전에는 군사정권 속에서 단편적인 언급 외에 거론할 수 없었던 문제이다. 군사정권 말기에 이르러 논의를 제기할 수 있었는데 그때 현지에서 증언을 청취하고 검토한 이재의의 글도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를 종합하여 정리한 박찬승과 이준식 논문이 발표되면서 사회주의운동성을 포함한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광주학생운동은 사회주의운동성을 포함하여 당연히 독립운동의 범주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광주학생운동의 특징과 의의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대 민족운동의 향방 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너나 없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나서고 민족운동을 한다고 혹은 바람까지 피우던 불투명한 분위기는 30년대에는 사라져 갔다. 민족운동의 이론도 한결 정리되는 30년대가 된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민족주의도 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좌파의 길이 선명하게 된다. 개량주의도 친일파로 갈 사람의 행색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1920년대와 다른 30년대의 변화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영향한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입론은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광주학생운동 연구의 남은 과제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