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은 고향 선배에다 고교 선배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 우리 둘 사이에 놓여 있다. 선배 시인은 1935년 충주 태생이고 나는 그로부터 35년 뒤에 충주 시내의 역전동(지금의 문화동)에서 태어났으니, 그 사이에는 한 세대하고도 5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고3 때 대학 1년 향우회 선배에게 끌려 지현동 성당에 가서 시인의 강연을 듣기도 했고 군 복무를 같이한 후배이자 고참인 이명기 군이 신경림 시인의 첫 시집 '농무'의 1985년판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첫 직장 생활을 하던 때 서울 삼성동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회사 부스를 지키고 있다가 그의 사인회를 먼발치에서 보고는 졸래졸래 달려가 그의 세번째 시집 '달넘세'를 사서 시집 면지 앞쪽에 "김 준섭 님 / 신경림 / 1995. 5. 19"이라는 자필 서명을 받기도 했다.
충주 목행교 옆의 동량면에서 17개월간 출퇴근하면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 퇴근길에 시내의 한 서점에서 백석시 전집을 산 것도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선배의 글 '백석 : 눈을 맞고 선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읽고 나서이다. 지금 돌이키면 그 글은 비평적 안목에서 볼 때 도무지 백석시에 대한 인상 내지 촌평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가 힘든 엉성한 글이었지만 당시 이십대 초반의 나는 대선배의 글을 통해 오랜 세월 감춰진 보물을 만난 듯한 묘한 시읽기의 감흥을 맛보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남한강 길 앙성~충주댐 구간 34킬로미터를 3월 둘째주 토요일에 떠나는 지나 회원님들을 위해 달계가 고른 신경림 시인의 시 두 편은 '가자 새봄엔' 그리고 '골목'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2F2948531DD2EF08)
가자 이웃들 친구들
큰 파도가 되어
골목길 신작로를 메우며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서
들길을 지나 다시 철길을 질러
가자 버려진 우리들 마을을 찾아
거룻배 통통대는 배터로
말강구 설치는 시골 장터로
노래를 찾아 잃어버린 우리들
옛얘기를 찾아
가자 형제들 낯모르는 내 형제들
큰 바람이 되어
땀 밴 내 땅 두 발로 밟으며
피 엉킨 논밭 가슴으로 만지며
모든 숨결 큰 바람이 되어
가자 얻어 입은 누더길랑
벗어던지고
얻어 먹은 음식찌끼 시원히 토해내고
휴전선도 짓밟으며
지뢰밭 총칼밭도 파헤치며
가지 친구들 이웃들 형제들
한덩어리 되어
큰 불길이 되어
뜨거운 노래로 눈보라를 녹이며
반백 년 얼어붙은 하늘과 땅을 녹이며
― '가자 새봄엔', 《가난한 사랑노래》(1988)
이발 최씨는 그래도 서울이 좋단다
자루에 기계 하나만 넣고 나가면
봉지 쌀에 꽁치 한 마리를 들고 오는
그 질척거리는 저녁 골목이 좋단다
통걸상에 앉아 이십원짜리 이발을 하면
나는 시골 변전소 옆 이발소에 온 것 같다
술독이 오른 딸기코와 떨리던 손
늦 어린애를 배어 뒤뚝거리던 그의 아내
최씨는 골목 안 생선 비린내가 좋단다
쉴 새 없는 싸움질과 아귀 다툼이 좋단다
이발소에 묻혀 묵은 신문이나 뒤적이고
빗질을 하고 유행가를 익히고
허구헌날 우리는 너무 심심하고 답답했지만
최씨는 이 가파른 산동네가 좋단다
시골보다도 흐린 전등과 앰프소리가 좋단다
여자들이 얼려 잔돈 뜯을 궁리나 하고 돌아가는
동네에 깔린 가난과 안달이 좋단다
그 딸기코의 병신 아들의 이름은 무엇이던가
사경을 받으러 다니던 딸의 이름은 무엇이던가
어느 남쪽 산골 읍내에서 여관을 했다는
이발 최씨는 그래도 서울이 좋단다
골목에서 모여드는 쪼무래기 손님들과
극성스럽고 억척같은 어머니들이 좋단다
― '골목', 《기원(紀元)》(1973), 시집 《농무》(1975)에 재수록
첫댓글 달계님이 직접 노래해 주시면 좋으련만.....
아쉽지만,,,, 대신 읽어볼께요..... 제가 이렇게 시를 자주 읽게 될줄이야...
나보단 야비님이 한수 운치있게 잘 읽어요. 부탁해도 거절하지 않을 양반 중의 양반!! ^^
가자 얻어 입은 누더길랑 ...
얻어 먹은 음식찌끼 시원히 토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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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꼭 입고가셔유 생생한 연출을 위하여 ~~~ ㅋㅋ
저 밑에 야간비행님이 올려주신 백석 시인의 글과 달계님 올려주신 신경림 시인의 글을 입술을 옴싹거리며 그 소리가 머리 속에서 울리도록 읽어봅니다.
전 참 시낭송엔 소질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 되었군요. ㅋㅋ
그래도 좋아요. 좋은 님들 덕에 우리말도 우리 시인들도 더욱 좋아집니다.
다음엔 무명 시인이 쓴 목행교 시 두 편 올려드릴게요 ^..^
@달계 넵
가자 형제들 길우에 내 형제들^^
"낯모르는 내 형제들"은 요즘 예배님 페북 프로필에 나오는 노 자 숙 자 인 자 아재비 맞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