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문학기행, 그 향수(鄕愁)를 찾아서
-「메밀꽃 필 무렵」孝石의 고향, 봉평에서 -
혜송 김순희
봉평IC를 나와서 봉평을 찾아가는 길엔 산자락에서 하얗게 흘러내린 메밀꽃이 연신 눈길을 끌었다. 오른 쪽에도 왼 쪽에도 산비탈을 일구어 낸 넓디넓은 메밀밭을 만나니 흡사 효석을 곧 만날 듯한 기분에 젖어 난 흥분되고 있었다. 5,6년 전부터‘메밀꽃 피는 봉평에 가보리라.’마음 먹었지만, 2학기가 막 시작되는 9월초에 봉평까지 다녀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물거품처럼 스러지던 나의 작은 꿈이 정년퇴직을 하고 1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루어지다니! 그만큼 효석의 고향은 ‘메밀꽃 필 무렵’작품 속 하아얀 메밀밭으로 남아 향수처럼 나의 마음에 박혀 시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작된 나의 문학기행은 이제 출발을 한 셈이었다.
봉평은 작고 아늑한 시골 마을이지만, 메밀꽃 축제라 외지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마도 옛날 시골 장이 섰을 법한 강변에서 요란한 음악이 울리고 공연에 심취한 객들이 만족한 미소를 띠며 비잉 둘러앉은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올망졸망 조롱박을 이고 앉은 원두막들이 두어 채 강변을 지키고 있다.
다리 아래로 징검다리를 건너 드넓은 메밀밭 입구에 이르렀다. 멀리 메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원두막도 보이고, 허생원이 나귀를 몰고 늦은 밤에도 발걸음을 재촉 했을 법한 메밀밭이 끝없이 늘어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호라! 메밀밭 입구에 막 들어서려니 이런 곳에 어울리는‘거리의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남편에게‘우리 초상화 한 번 그립시다.’라며 팔을 끌었더니, 흔쾌히 동참해 주는 것이다. 넓은 메밀밭을 뒤에 두고 불어오는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그렇게 한 시간 가량 젊은 화가의 모델이 되었는데, 오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도 기분을 좋게 했다. 그래, 이런 곳이 아니면 어디서 노년의 부부가 예술가의 모델이 되어보겠는가! 왠지 전국을 돌며 그림을 그린다는 화가의 자유로움과 우수어린 눈빛에 매료되어 나란히 모델 의자에 앉았다. 평생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우리 부부 두 사람의 초상화는 그렇게 완성되었고, 지금도 가끔씩 봉평의 메밀밭을 떠올리는 추억의 그림이 되었다. 서로 자기가 더 잘 생겼노라고 우기면서 한 바탕 웃기도 하는, 작은 행복의 정표인 셈이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메밀밭에 들어섰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효석의 표현력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그는 달빛에 비친 메밀밭을 보고 ‘소금을 뿌린 듯 하다’고 표현했을까? 꽃송이가 크지도 않고 별로 아름답진 않지만, 하아얀 작은 알갱이가 마치 소금을 골고루 뿌려놓은 듯하다는 표현은 그의 사실적 감각이었으리라. 참으로 강원도 산골 청년의 표현답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여 본다.
다시 메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노라니 산자락과 맞닿은 곳에 ’메밀꽃 필 무렵‘소설 속의 장면을 만들어 놓은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삐이걱 삐이걱' 소리를 내며 물레방아는 연신 돌아가고 마당가를 휘돌아 냇물이 되어 흘러가는 작은 실개천이랑 허름한 울타리, 작은 연못, 아담한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물레방앗간이 오가는 이의 마음을 당겨 누구나 사진을 찍으려고 대기하는 곳이다. 물레방앗간 속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가 보인다. 여기서 사람들은 얼굴을 내밀어 소설속의 남녀가 되어 사진을 찍고 간다. 나무판에 그림을 그려서 얼굴만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누구나 밀회를 즐기는 소설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묘미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아, 이런 곳이었겠구나!’어두운 밤 가느다란 달빛이 물레방앗간을 비추면 그들만의 만남을 위한 장소가 되는 곳! 아마도 물레방앗간의 추억이 있던 세대가 더 웃음 짓게 되는 곳이 아닐까!
효석의 작품에 나타난 봉평은 확실히 밤풍경이 압도적일 것이다.
칡넝쿨 엉크러진 산길을 걷노라면 이름 모를 꽃향기, 풀향기에 흙냄새, 그리고 나귀등에서 나는 냄새까지 어느 것 한 가지도 낯선 것 없는 허생원 삶의 배경이지 않은 게 없다. 더구나 달빛마저 고요하게 천지를 비춘다면 얼마나 오묘하겠는가!
이렇게 「 메밀꽃 필 무렵」은 한 폭 수채화 같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영상, 굳이 말하지 않아도 허생원의 헛기침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아들에 대한 사랑, 단 한 번 스쳐간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까지 흡사 복사본처럼 독자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잊히질 않는 것이다.
점심때를 훨씬 넘긴 오후 늦은 시간, 살짝 허기가 몰려왔다.
마침 봉평 일대를 한 눈에 보고 오겠다며 동네 뒷산에 올랐던 남편이 합류하여 봉평의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저 멀리 메밀밭을 가로질러 낮은 산기슭 가까이 초가집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걸음을 옮겨 막국수와 메밀전, 막걸리를 파는 초가집에 들렀다. 담백하고 시원한 막국수로 갈증을 해소하고, 고소한 메밀전으로 맛을 더했더니 세상 행복한 것이다. 술맛을 평가할 줄 몰라 메밀 꽃 술에 살짝 입만 대고는 서로 눈만 마주한 채 웃음으로 평가를 대신했다. 아마 작품 속의 허생원이 온다면, 먼 길 다녀 온 피곤한 몸을 눕혀 막걸리 한 잔에 배를 채우고 곰방대로 담배 한 모금 빨아들였으려나? 아무튼 담백하고 시원한 메밀 막국수와 짧은 휴식으로 기운을 되찾았다.
사실 오늘 저녁에 메밀밭에는 군청에서 설치한 백색 등들이 메밀밭을 하아얀 소금밭으로 만들 것이다. 효석 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메밀 꽃을 늦은 밤에 메밀밭에서 직접 감상한다면 그야말로 작품 속 인물(허생원)이 되어 볼 수 있을 텐데......!
오늘 밤 메밀밭 개장 프로그램을 미처 모르고 왔던 까닭에 발길을 돌려 돌아오는 내내 아쉬움이 컸다. 그래, 다음엔 하루 쯤 묵으면서 메밀밭의 정취를 한껏 즐기기라.
-2016년 9월 6일 이효석 문학제에서-
<p.s>
이렇게 시작한 나의 문학 기행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김유정 문학관을 들러 유정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았다. 며칠 후 옥천의 정지용 문학관에서는 가슴을 파고드는 지용의 ‘향수(鄕愁)’가곡을 들으며 詩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었다.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겨울엔 윤동주 문학관에서, 김수영 문학관에서 민족시인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가슴에 새겼다. 벚꽃 피는 올 사월에는 400km를 달려 진해의 벚꽃과 남해 푸른 바다와 거대한 경남 문학의 발자취를 마주했다. 경남문학관에 전시된 수많은 작가들의 육필 원고를 만났을 땐 잠시 숨이 멎을 듯 갚은 감동에 휘말렸다. 만년필로 썼다가 지운 글귀절마다 작가들의 고뇌가 스며 그대로 가슴에 전해지는 게 아닌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내 삶이 팍팍할 때, 가슴이 텅 빌 때, 다시 남으로 차를 달려 아직 다 읽지 못한 육필 원고 속에서, 작가들의 살아있는 숨결을 만나리라. 은퇴 후에 시작된 문학기행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기운이며, 내가 살아가는 분명한 지표가 되어 가슴을 뛰게 만들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