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문왕과 미다스 왕
남북국시대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Midas)의 이야기처럼 당나귀 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임금이다. 우리는 여기서 동서고금을 뛰어넘어 보편적으로 전해 내려온 설화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먼저 {삼국유사}에서 경문왕이 당나귀 귀가 된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이러하다.
경문대왕 김응렴(金膺廉)은 18세에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이 그의 어짊을 보고 맏사위로 맞았는데, 헌안대왕은 아들이 없었다. 헌안대왕이 몇 개월 뒤 병환이 악화되어 죽게 되자 왕의 유조를 받들어 장녀의 남편으로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임금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으나,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알지 못하고 오직 임금의 모자를 만드는 복두장이 한 사람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곧 죽게 되자 도림사 대나무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치기를,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고 하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에서 소리가 나기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고 하였다. 임금님이 그걸 싫어하여 이에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다만 소리가 나기를,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고만 했다.(… 乃登位 王耳忽長如驢耳 王后及宮人皆未知 唯 頭匠一人知之 然生平不向人說 其人將死 入道林寺竹林中無人處 向竹唱云 吾君耳如馬盧耳 其後風吹 則竹聲云 吾君耳如驢耳 王惡之 乃伐竹而植山茱萸 風吹則但聲云 吾君耳長)((주석-{삼국유사} 권 제2 [기이] 제2, 경문대왕(景文大王)조))
사람의 마음에 담긴 절실한 체험과 욕구가 언어로써 표출되지 않을 수 없다는 필연성의 인식이 위 {삼국유사} 경문대왕조의 복두장이 이야기와 같은 상징적 설화를 낳았을 것이다.((주석-정출헌, [시대와 작가와 작품, 그 얽힘과 풀림](부산대 대학원 한문학과 <한문학작가론> 2001년 3월 6일 강의노트) 1면 참조.))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마이더스) 왕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미다스는 프리기아의 왕이었다. 어느 날,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의 스승인 실레노스를 잘 대접해 준 보답으로 디오니소스로부터 자기 손에 닿는 것은 모두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음식마저 손에 닿자마자 황금으로 변해버려 곤욕을 치른 다음, 미다스는 다시 디오니소스에게 부탁하여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그후로 미다스는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시골에 살면서 들의 신인 판의 숭배자가 되었다. 어느 날, 판은 무모하게도 리라의 신인 아폴론과 음악으로 겨뤄보기로 마음먹고 과감하게 도전을 했다. 아폴론은 이 도전을 받아들였으며, 심판관으로 산의 신 트몰로스가 선정되었다.
늙은 산의 신은 심판석에 앉아 더 잘 듣기 위해 귀에서 수목을 깨끗이 제거하였다. 신호가 떨어지자 먼저 판이 피리를 불었다. 그 꾸밈없는 멜로디는 판 자신과, 마침 그 자리에 와 있던 그의 충실한 신자 미다스에게 크나큰 만족감을 주었다.
판의 연주가 끝나자 트몰로스는 머리를 태양신 아폴론에게로 돌렸다. 그러자 산의 수목들도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폴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에는 파르나소스산의 월계수로 만든 관을 쓰고, 몸에는 티로스 지방에서 나는 자줏빛 염료로 물들인 옷을 대지에 끌리도록 걸친 채 왼손에 리라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 현을 탔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름다운 리라소리에 반한 트몰로스는 즉석에서 리라의 신의 승리를 선언했다. 미다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판정에 만족했다. 미다스는 이의를 제기하며 심판의 정당성을 의심했다. 아폴론은 이런 무식한 귀를 더 이상 인간의 귀의 형태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귀를 길게 늘여 안팎으로 털이 나게 하고, 귓불 쪽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미다스 왕은 이 재난으로 말미암아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것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즉, 넓은 머릿수건을 써서 사람들이 그의 귀를 볼 수 없게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의 머리를 손질해 주는 이발사만은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이발사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명령과 함께, 만약 이 명을 어기는 날에는 엄벌에 처하겠노라는 협박을 받았다. 그러나 이발사는 이 비밀을 말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말하지 않고는 미칠 것만 같은 지경에 이르자 이발사는 초원으로 나가 땅에 구멍을 파고 이 비밀을 말한 다음 흙으로 덮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초원에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이발사가 발설했던 비밀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후 오늘날까지도 미풍이 그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갈대는 미다스 왕의 비밀을 속삭이고 있다.((주석-토마스 벌핀치, 이윤기 옮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대원사, 1989 참조.))
이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동·서양에 전해 내려오는 너무나 유사한 이야기가 아닌가. 신라의 경문왕이나 프리기아의 미다스 왕이나 그들의 귀가 당나귀 귀에 다름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결국은 이 비밀을 언어로 표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문왕은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긴 귀로 자랐으나, 미다스 왕은 아폴론 신의 저주로 진짜 당나귀 귀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털도 났다는 점은 조금 다르다. 즉, 경문왕의 경우는 임금의 귀가 길게 자라서 마치 당나귀 귀처럼 길다는 것이고, 미다스 왕의 경우는 그의 귀가 당나귀 귀 그 자체이다. 그리고 경문왕의 비밀을 아는 이는 단 한 사람 그의 모자를 만드는 복두장이였고, 미다스 왕의 비밀을 아는 이는 그의 이발사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복두장이나 이발사나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다는 사실을 혼자 비밀로 부치기에는 너무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비밀을 누설하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자 복두장이는 대나무숲에서 이 사실을 발설했고, 이발사는 초원에 구멍을 뚫고 발설해버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 일이 있은 후, 서라벌 대나무숲에 바람이 불면 그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삭였다. 이에 경문왕이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으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 대신에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한편 프리기아의 초원에서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 바람이 불면 그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sebalkkamaki/1605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