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 적은 누룩과 하나님 나라 옥한흠 목사 누가복음 13:20~21 2007.12.16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 영상자료 - 옥한흠목사님 한국 교회를 위한 나의 바람과 기도 2005-09-06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 영상자료 - 한복협 발표1) “주여 우리에게 각성을 주시옵소서!” 옥한흠 목사 2008-01-04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 2007 평양대부흥100주년 기념 상암대회 중 옥한흠 목사님 말씀 사랑의교회 건축, 옥한흠 목사의 진짜 생각은?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7C74E4EC3C6A72B)
▲ 옥한흠 목사는 <디사이플>과의 대담에서 "사랑의교회가 초대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랑의교회가 새 예배당 건축 작업에 돌입했다. 사랑의교회를 개척해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교회로 일군 옥한흠 원로목사는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담임 오정현 목사의 생각보다 원로 옥한흠 목사의 입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옥한흠 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교회를 크게 키운 과거는 후회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더 크게 키워야 한다"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한다. 옥한흠 원로목사가 원장으로 있는 국제제자훈련원 발행지인 <디사이플>은 11월 호에 옥한흠 목사 대담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나의 교회론과 제자 훈련은 엇박자가 된 것 같다'. 옥한흠 목사의 교회론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바로 서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옥한흠 목사의 브랜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제자 훈련', '평신도를 깨운다'는 다 여기에서 나온다. 그럼 어느 부분에서 엇박자가 생긴 것일까. 옥한흠 목사는 사랑의교회의 대형화를 막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면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교회론대로 목회했다면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사랑의교회라는 개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성장하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목회를 해야 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하나님 앞에 죄송합니다." 옥 목사는 양적으로 성장한 사랑의교회가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다. 교회 규모가 커지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담임목사가 조직을 튼튼히 해 자신과 같은 부교역자 수백 명과 함께 사역을 해도, 규모가 너무 커지면 가짜 제자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옥 목사는 사랑의교회가 초대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큰 교회가 자기의 교회론에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교회 크기를 정해 성장을 억제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고 했다. 적정 수준의 교회 크기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사랑의교회가 초대형 교회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렇다고 모순된 교회 크기와 교회론의 틈새를 줄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옥한흠 목사가 생각했던 것은 교회 분가다. "좋은 지도자를 세워 독립시켜 사랑의교회 같은 교회론을 가진 제2, 제3의 사랑의교회를 뿌리내리게 했으면 지금과 같이 실패했다는 감정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건전한 목회를 하는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자라는 것을 비판해서는 안 되지만, 제자 훈련하는 교회가 분수에 지나친 성장의 덫에 걸려, 결과적으로 허약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이 과거에 대한 평가라면 미래에 대한 전망은 무엇일까. 옥한흠 목사는 11월 15일 주일예배 설교 후 상영된 동영상에서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11월 15일은 사랑의교회 건축 헌금 작정 주일이었다. 옥한흠 목사는 영상을 통해 교회 건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5분간 방영된 영상에서 건축의 필요성, 반대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을 교인들에게 전했다. | ![1645B9504EC3C6C40EC940 1645B9504EC3C6C40EC940](https://t1.daumcdn.net/cfile/blog/1645B9504EC3C6C40E)
| | | | ▲ 11월 15일 동영상을 통해 옥한흠 목사는 "세계 교회를 움직이려면 교회가 더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사랑의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 | |
옥 목사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사랑의교회가 제자 훈련을 통해 세계 교회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는 힘이 없어 세계를 흔들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를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옥 목사는 교인들에게 대형 교회라는 문제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지 말고, 사랑의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목하라고 요구했다. 교회 건축도 교회가 앞으로 많은 일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다. 교회 건축 비용을 선교와 사회봉사에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지만, 교회와 사회를 위해 일하려면 인프라를 먼저 구축해야 한다. 옥 목사는 건축 비용을 다른 곳에 사용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은 일리가 없다고 했다. "교회 건축 안 하면 2,000억을 모으느냐. 사람들이 헌금 안 하죠. 교회가 진짜 사회를 위해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인프라를 위해 투자하고, 그 인프라를 바탕으로 축적된 힘을 사회를 위해, 가난한 자를 위해, 선교를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에요. 이거 지난 우리 30년 교회 역사를 통해 증명했잖아요." 옥 목사는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다른 이유로 교인들이 예배하기 불편한 것을 들었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사랑의교회는 2,000명을 기준으로 지어졌다. 현재 출석 교인만 4만 명이 넘는다. 장애인들이 교회에 접근하기 힘들고, 교육관이 좁아 주일학교 학생들이 고생하는데, 좀 더 나은 환경으로 가려 한다고 했다. 경기가 어려우니 건축하지 말자는 의견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교회는 어려울 때 건축을 했다고 답했다. 건축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의견에는, 교회의 크기와 위치를 생각하면 큰돈이 아니라고 했다. 옥 목사의 영상은 "한마음 되어 성적 건축을 이루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로 끝났다.
다음은 <디사이플> 대담 기사이다.
"나의 교회론과 제자 훈련은 엇박자가 된 것 같다" - <디사이플> 11월 대담 기사 - (생략) 목사님께서 지난 30년 가까이 목회를 해 오시면서 붙잡았던 교회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생략) 전통 목회는 평신도가 동원(動員)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평신도를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주체, 동역(同役)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평신도를 교회의 실력을 대변하는 숫자나 부흥의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도 좋고 열 사람도 좋았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설 때 이것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략) 그러나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 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 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 수 2만 3,000명, 전체 등록 교인 수 5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저의 교회론에 일치하는 목회를 위해서 적정 수준의 교회 사이즈를 유지했으면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했느냐고 묻는다면, 인위적으로 교인 수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교회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려서 최대한의 수확을 거두는 것은 영적 농사인 목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교회 사이즈를 획일화해서 성장을 억제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2,000명이 넘어가면 제 교회론에 일치하지 않는 목회 즉, 잘못하면 속 빈 강정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지도자를 세워 독립시켜 사랑의교회와 같은 교회론을 가진 제2, 제3의 사랑의교회를 뿌리내리도록 했으면, 지금과 같이 실패했다는 감정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 훈련의 선두 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 후임자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담임목사 한 사람이 아무리 조직을 튼튼히 해서 자신과 같은 분신 부교역자 수백 명과 함께 사역을 한다고 해도, 규모가 너무 비대해 버리면 한계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쭉정이가 나올 수 있고 본질이 흐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교회가 초대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주장했던 것과 실제 현실 목회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교회가 저절로 자라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잘 지어서 교인들이 편안했다면 모르겠는데, 사랑의교회처럼 시설이 불편한 교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양적으로 너무 비대해져 버렸습니다. 교회론대로 목회했다면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사랑의교회라는 개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목회를 했어야 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지상의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초대형화해도 초창기 사랑의교회에 1, 2000명(일,이천명) 모였을 때처럼 제자 훈련을 통해 알찬 제자들이 나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와 능력을 계속해서 사랑의교회가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마 방법은 있어도 실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미국 교회의 경우, 출석 인원 2,000명만 넘어도 대형 교회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한국 교회 안에 제자 훈련을 잘하는 교회들은 이미 그 수를 넘어 대형화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자 훈련으로 성장한 교회 가운데, 등록 교인이 5,000명을 넘어가는 교회들만 따져도 10곳이 훨씬 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즉, 제자 훈련을 착실하게 하고 있는 교회 중에는 괄목할 만큼 성장하는 교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의미 있는 연구 과제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평신도를 그리스도의 몸 된 주체로 잘 세워, 작아 보여도 큰 강국을 이루는 역동적인 제자를 만들면, 적당히 억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자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건전한 목회를 하는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자라는 것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자 훈련하는 교회가 분수에 지나친 성장의 덫에 걸려서, 결과적으로 허약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민은 제가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후배들이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생략) 故 옥한흠 목사님 유언과도 같은 인터뷰 “교회 침체가 아니라 교회 본질이 파괴되는 문제다”
21세기의 첫 십 년이 저무는, 2009년의 끝자락에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를 만났다. 그는 짐짓 무슨 할 말이 있겠냐는 말로 운을 떼었지만, 40년 목회 인생의 닻을 내린 후 한국 교회를 보는 그의 시선은 더욱 선명해진 듯 단호한 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 발자국을 조용히 살피면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대를 십자가의 은혜가 확정되는 날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시대는 그 흐름을 거스르기 힘든, 오직 하나님의 의지로만 그 방향이 달라지는 은혜의 땅이었다. 과연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은혜의 시대를 구하고,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의 말을 들어본다. 한국 교회가 지금 서있는 위치가 어디쯤 된다고 생각하는가. 영적 상황을 생태학적 흐름에 빗대면 어릴 때, 젊을 때, 나이 든 때가 있을 텐데, 한국 교회는 어디쯤에 서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한국 교회는 신세대 자녀를 앞에 놓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부모와 비슷한 상황이다. 자녀가 성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과잉보호도 하고, 과소비도 하고, 지나친 모험도 하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정말 영적 주도권을 잡고, 아니면 도덕적 주도권을 잡고 다음 사회를 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잘 크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딜레마에 빠져있다. 그리고 냉정하게 보면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하는지도 의문이다. 교회도 형식만 남았고, 프로그램만 남았지 사실은 생명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교회에서 큰 감동을 못 받고 돌아와서는 즉시 사회의 혼탁함에 휩쓸리고,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방식조차 부지불식간에 그대로 묻어서 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어떻게 할지 모르고, ‘때가 되면 저애들은 저애들대로 살겠지’라고 체념하는 부모의 분위기가 지금 한국 교회의 분위기다. 교육의 부재가 가정이나 교회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데, 어쩌면 자포자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할 능력이 없으니까. 교회가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며 이런 무기력증에 빠져있지 않나 싶다. 이걸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교회가 처한 가장 심각한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속주의다. 세상적인 가치를 거의 다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입장에서 수용을 하되, 성경적으로 적당히 포장해서 수용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것을 다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나님 말씀이 이러이러하니 따를 수 없다고 선을 분명히 긋는 태도는 발견하기 어렵다. 간혹 설교에서도 차별화가 무너지고 있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했던 유럽 교회의 역사를 우리가 되풀이할 수 있다. 미국 교회가 유럽 교회를 서서히 따라가고 있는데, 미국 교회를 따라서 동양 교회 대표인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아닌가 싶다. 목회자의 잘못이 크다고 볼 수 있는가? 100% 목회자의 잘못이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단, 신학교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부터도 그렇지만, 성경에서 이혼을 정당하게 여기는 몇 가지 경우가 있는데, 그 외에는 안 된다고 이혼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만약 그것을 설교에서 지적하면 내 주변도 그렇고 걸리는 사람이 상당수일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은 여전히 이혼불가가 원칙이다. 이것만 비교해 보아도, 한국 개신교가 자기 자리를 못 지키고 자기도 모르게 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점점 타협하는, 힘없는 모습으로 새로운 세대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교회 침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파괴되는 문제다. 이것을 놓고 고민을 할 능력도 부족해 보이고, 책임을 지고 고민하려는 사람도 적은 것 같아 무척 안타깝다. 머리카락이 모두 잘린 삼손이 떠오른다. 복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이비드 웰스 같은 사람의 경고는 책으로 나와도 잘 안 읽힌다. 들으면 부담스럽고, 따르려니까 능력이 없고, 그래서 읽을 이유가 사라진다. 이런 무기력증에 깊이 빠지면, 교회는 결국 교역자에게 직장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내 가게 장사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소인 의식에 빠져서 내 교회 목회에만 신경 쓰는 현상이 주류를 이룰 수 있다. 한두 교회에는 은혜가 있어도, 전체 교회에는 영향을 전혀 못 미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교단들이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과잉공급이 심각한 문제다. 목회자가 넘치기 때문에 출혈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밀린 패배자는 모든 사고를 부정적으로, 냉소적으로, 비판적으로 갖게 되고, 이런 추세가 계속해서 심해질 수 있다. 그럴수록 교회의 힘이 파괴적인 쪽으로 쌓이면서 누수 현상이 일어난다. 파괴적인 힘은 더 커지고, 건설적인 힘은 더욱 약화되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들면 가톨릭은 그런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함부로 신부가 될 수 없는 체제를 만들어서 신부 수는 늘지 않지만, 교인 수는 점점 늘고 있다. 그들을 영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는 우리가 각성해야 할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과잉공급의 중심에 있는, 목회자 되려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 신학교 지원해서 안 되면 다른 신학교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배가 가라앉는데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는 것과 같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풍토에서 준비된 사람이 나올 리 없다. 아까 말했듯 경쟁이 심해지면서 점점 목회 현장은 살벌해지고, 그러다보면 교회 밖 사람들에게 비치는 교회 이미지도 기업이나 구멍가게 같은 이미지로 박힌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반면 기존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도 안정된 교회 분위기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심해진다. 대형교회로의 쏠림 현상은 더 심해진다. 그러면서 점점 교계 내에는 심각한 갈등구조가 생긴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구도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도 성령의 능력은 살아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불쌍히 여겨서 무기력증에 빠진 한국 교회를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하실지 궁금하다. 남북을 통일시켜서 북한의 지하교회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기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나서서 한국 교회를 새롭게 갱신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비상 섭리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는,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 가지고는 도무지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소리를 하면 비관론자라며 돌이 날아올지도 모르겠다. 요즘에는 비관적인 이야기를 할 만한 자유도 없는, 기막힌 상황이다. 골치 아픈 일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씨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설교 면면에 흐르는 것은 비관적 낙관론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는 소망을 평소에 피력했는데? 낙심은 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침묵하실 때가 많았다. 구약을 봐도 그렇고, 기독교 역사를 봐도 그렇고, 진짜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야 될 것 같은데, 안 일어나시고 침묵하실 때가 많다. 우리가 지금 그런 어려운 시점에 처해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특히 한국 교회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런 상황을 그래도 꿰뚫어 보는 영적 통전성을 가진, 깊이를 가진 지도자들이 한국에 그래도 많이 있지 않을까? 신실한 사람들은 다 숨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짜 인정하는 사람들은 사람 눈에 잘 안 보인다. 하나님이 그들을 좀 더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 때가 왔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선지서가 대체로 시대에 비관적인데,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는 거짓 선지자들은 대체로 비관적이지 않고 낙관적이라는 데 있다. 지금도 낙관을 부르짖는 사람이 많다.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들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말하는 것은 자유다. 사람들은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니까 교회가 잘못된 길로 빠져도, 멈춰 세울 힘이 없다. 비정상적인 낙관주의가 판치는 상황이라 걷잡지 못할 것이다. 그 수가 몇이나 될지 모르지만, 이런 흐름을 타고 기독교 스타도 나올 것이다. 긍정의 복음을 강조하는 사람의 글이 아무런 비판 없이 나오는 것도 문제고 그 흐름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쪽에서 비롯되는 것도 안타깝다. 그러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분별력을 잃었다. 이런 시대를 구원하려면, 나부터 지도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정도를 걷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다. 나부터 용기가 없다. 언젠가 설교 중에 칼빈의 마지막 유언으로 소개한 내용이 “나는 날마다 화형장에 끌려갈 각오를 하고 살았다”라는 유언이었다. 그 당시는 종교개혁 때였고, 진짜 교리를 위해서 죽느냐 사느냐 생명을 거는 시대였으니까, 오히려 명쾌했다. 개혁 측에 서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한 현실이었으니까, 오히려 당연한 선택이 가능하다. 1930년대 일본이 노골적으로 교회를 탄압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할 때에는 흑백이 분명했기 때문에, 목사들도 색깔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교회를 장악한 세속주의의 색깔은 회색이다. 회색지대에 있는 것이 편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벗어나서 흰색으로 가겠다, 선을 넘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각오를 해야 한다. 상당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나부터 그렇게 못했다. 진짜 영웅이 필요한 시대다. 십자가를 지고, 한국 교회에 선지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참 영웅이 필요한 시대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하나든 둘이든 일으켜서 한국 교회를 바로 좀, 제자리를 잡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한국 교회가 가진 잠재력이 참 엄청난데, 그 잠재력을 생산적으로 살릴 수 있다면, 아무리 다음 오는 세대가 타락한 세대라고 해도 교회는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니 가장 크게 남는 회한이 무엇인지? 회한을 이야기하자면 많다. 말로하기 힘든, 목회자의 양심으로 나만이 아는 회한이 어찌 없겠는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는데, 왜 그 말씀이 필요한지를 요즘 생각한다. 자기만이 아는 가책과 실패와 고통, 이런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말끔하게, 은혜롭게 처리해주시기 위해서 심판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완전한지를 도장 찍어주기 위해서 심판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목회자 가운데 완전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처럼 포장이 된 사람은 더 그렇다. 노출이 안 됐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또 하나의 아픔이 있을 수 있다. 차라리 노출이 되고, 돌을 맞고, 그랬으면 그것으로 씻음을 받았다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이런 말 하면 완벽주의자라고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한다. 그래서 병에 걸린다고. 그리고 사랑의교회가 좀 더 예수님의 제자다운 교회답게, 성도들을 좀 더 제대로 갖추어 놓고 물러나 앉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깨어있으면 한국 교회와 한국사회를 뒤집어 놓고도 모자람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도 크다.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을 통해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행복하게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을 보면 나름대로 소명을 다했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어두운 영역을 보면 답답하다. 내가 속한 교단, 그 교단에 순기능 역할을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을 때 무력함을 느낀 적도 있다. 잘 결정했다, 행복했다, 그런 것도 있는지?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던 것이 가장 행복한 결정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결정이 행복했던 이유는 마음을 완전히 비웠기 때문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울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 모른다. 작은 교회가 될지, 큰 교회가 될지, 성공할지, 안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서초동에 자리를 잡은 것도, 준비를 하시던 목사님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었고,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 오직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일을 해라, 내가 성령을 밀어 줄 테니 그것으로 만족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식이나 아내 생각도 채 못하고, 어찌 보면 무모한 결정이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하나님의 강력한 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목회한 지난 40년은 정말 행복한 기간이었다. 아마 다시 이런 기회가 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5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불어 닥친 폭발적인 부흥의 끝자락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침체가 시작됐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 중에 하나인 것 같다. 한 시대가 번영하면, 그 다음 세대는 쇠퇴한다. 주기가 있다. 청교도 신자의 검약, 절제, 정직, 근면이 자본주의의 틀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서구 사회가 발전했다. 그런데 다음 세대는 추락하고 있다. 번영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라면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린 세대가 주인이 되고 나자 제일먼저 피해를 본 게 교회다. 가장 좋은 예가 영국 교회다. 어떻게 보면 영국 교회는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런 주기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배부르게 먹고 자란 애들이 커서 허리띠 조아 매면서 고생한 세대하고 같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시절에 목회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인지, 어떤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것 모두가 감사하다. 우리같이 부흥기를 경험하면서 목회한 사람들이 제대로 잘해야 다음 세대가 쇠락하지 않는데, 지금 교회 모습을 보면 우리가 잘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했으면 아무리 세속화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교회는 자기 정체성을 바로 유지하면서, 사회 변화를 주고 감동을 줄 수 있을 텐데, 너무 허무하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니까, 뭔가 잘못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제대로 읽고 자기반성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교회에 바라는 바가 있는지?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는 평신도의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 전문화된 사람들이 평신도 중에 많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소리가 너무 크다. 말씀을 가르치는, 똑바로 가르치는 소리가 크다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의 전문성과, 경험, 상식, 사회를 내다보는 통찰력 등을 최대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결집시켜 끌어가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평신도에게 안 준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예배 군중 비슷하게 무력하게 앉아있는데, 이렇게 되면, 교회 장래에 영향을 줄 만한 힘을 못 가진다. 이것을 한국 교회의 비전으로 생각해도 되겠는가? 비전으로 생각해도 좋다. 내가 평신도를 깨우자고 했던 것은 갱신 받지 못한 사람 갱신시키자는 말만은 아니었다. 평신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굴해서, 교회 주체로서 평신도가 제자리를 찾도록 하자는 것인데 무척 힘든 일이긴 하다. 나 역시 직접 해보니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면, 때를 맞춰서 일하실 것이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를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다. 고령화 사회가 본격화되고, 출산이 저하되면, 교회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문 닫는 교회도 생길 것이다. 불과 20년 후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사랑의교회에 3만 5000명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서 40%이상이 65세 이상이라고 상상해 보라. 교회 문화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주일학교는 엄청나게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서, 지금 정도만 유지하면 좋겠지만, 기후 변화나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터지면, 한국 경제는 삽시간에 뒤엎어질 수 있다. 그런 위기를 만났을 때 교회 문화가 어떻게 바뀔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들은 연합해서, 그 교회 안에 있는 평신도의 전문성을 살려서 한국 교회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길을 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전문성을 가진 NGO들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측면에서 지원하고 격려하는 일도 같이 해야 한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자산이 생산적으로 모일 때 비로소 작은 교회, 큰 교회 나누이지 않고 함께 그 열매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Christianity Today Kore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