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 : 2024년 5월 11일
21번째 성지순례는 1.김제순교성지 → 2.초남이성지 → 3.전주숲정이성지 → 4.전주 옥터 → 5.치명자산성지 → 6.서천교.초록바위 → 7.전동성당 이렇게 다녀 왔습니다.
"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터 "
초남이 성지(생가터/교리당)
[전주교구]
초남리 -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1756-1801년)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6년 이곳 초남이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柳重哲, 1779-1801년)은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1782-1802년)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았던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동정부부는 1797년 혼인 후 1801년과 1802년에 신유박해로 치명할 때까지 4년여 간 이곳에서 동정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와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이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또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전 등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웠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이존창 루도비코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가 독성죄에 해당됨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래서 윤유일 바오로가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이에도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柳文碩, 1784-1801년), 동생 유관검 등 그의 일가친척들이 거의 다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고향인 초남이 땅에 묻지 못하고 들 건너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백이에 가매장했다.
1914년 4월 19일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은 바우백이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破家瀦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것)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과 사돈 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의 생가터에서 약 400여m 떨어져 있는 교리당터도 확인했다. 또한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파가저택’(破家瀦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교리당
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3일 생가터에 피정의 집과 새 제단 및 각종 성인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 교리당터에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유항검 사랑채),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5년 5월 28일 사랑채 옆 교리당 부지에 30여 평 규모로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하여 봉헌했다. 경당 안에는 미사를 봉헌하는 주문모 신부와 유항검과 신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2006년 10월 23일에는 파가저택지 한편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3칸짜리 한옥으로 지어진 행랑채는 유항검이 왕손을 며느리로 맞으며 황송한 마음에 따로 별채를 지어 아들 내외가 살 수 있도록 배려했던 곳으로 현재 성체조배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의 시복을 준비하며 생가터에 경당을 마련하고, 교리당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했다.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柳重誠, 1784?-1802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모두 시복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29일)]
십자가의 길
† 주 예수님,
저희를 위하여 온갖 수난을 겪으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나이다.
저희에게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수난을 함께 나눌 마을을 주시어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성직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죄인이 회개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소서.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을 묵상합니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니다.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 지심을 묵상합니다.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니다.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지가 짐을 묵상합니다.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니다.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니다.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니다.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합니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니다.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니다.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