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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년 천 관 우 K형에게
K형, 황막(荒漠)의 미개경(未開境) 애리조나에 와서 이처럼 조화의 무궁을 소름끼치도록 느껴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그랜드 캐년’의 그 웅혼 괴괴한 절승(絶勝)을 그 한 모퉁이나마 전해 드리려고 붓을 들고 보니, 필력이 둔하고 약한 것이 먼저 부끄러워집니다.
K형, 애리조나주 피닉스, 불사조의 이름을 지니는 이곳에 온 것이 5월 7일, 기온은 화씨 90도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메마른 암괴로만 되어 있는 듯 기묘한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미국 남부 특유의 산형과, 거리마다 우거진 높다란 종려의 가로수입니다. 이 피닉스에서 다시 대협곡의 관문인 ‘홀래그스태트’까지 자동차로 여섯 시간의 행정입니다.
저 멀리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바람기둥이 되어 하늘을 찌르면서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가 하면, 막막한 대야(大野)에 해 뜨는 부분, 그 구름 낀 부분이 소낙비 지나가는 풍경처럼 완연히 대기의 경계를 지우며 이동하는 것이 보입니다. 선인장도 이제는 봉상(棒狀)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것처럼 손바닥같이 생긴 놈들이 산야를 덮습니다. 얼마를 더 가면 초원입니다. 이것 역시 누렇게 마른 잔풀이 서리를 얹은 양 보얗게 깔린 곳입니다. 또 얼마를 가면 석원(石原)입니다. 돌도 탔는지 모질게 일그러졌습니다.
황혼이 스며듭니다. 서천(西天)의 발간 낙조가 몸서리치도록 화려합니다. 이 근방에 집단 부락들을 가진 ‘인디언’의 얼굴들이 유난히 표한(慓悍)하게 보입니다. ‘훌래그스태트’라는 동리에서 일박, 나그네의 회포는 비경을 찾아 드는 흥분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아침 아홉 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멀리 백설을 이은 ‘함훼리’ 12,611척의 고봉이 운무에 서리어 있을 뿐, 딥 하나 제대로 찾아보지 못하는 평원을 달리기 또 두 시간 만에, 낙락장송의 숲을 지나자 드디어 ‘그랜드 캐년’의 종착역입니다. 오슬오슬 춥습니다. 피닉스의 더위, 이곳의 추위, 좀 어이가 없습니다. 안내소 안의 ‘홀’에는 난로가 확확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안내소 뒤편에 마련된 조망대로 들어섰습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아아 황홀한 광경! 어떤 수식이 아니라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 광경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옳을는지. 발밑에는 천인(千?)의 절벽, 확 터진 안계에는 황색, 갈색, 회색, 청색, 주색으로 아롱진 기기괴괴한 봉우리들이 흘립(屹立)하고 있고, 고개를 들면 유유창천(悠悠蒼天)이 묵직하게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550m의 협곡 남안(南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K형, 나는 이것을 보려 여기에 온 것입니다. 별안간 일진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치며 옷자락을 휘몰더니 휘날리는 눈, 눈. 멀리 이 협곡의 대안(對岸)인 ‘포웰’ 고원을 운무의 품안에 삼키고, 기발한 봉우리를 삽시간에 차례차례로 걷우고, 마침내 눈앞에 보이던 마지막 봉우리를 삼키고, 망망한 운해, 휘날리는 눈보라, 그리고 숨 가쁜 강풍. 회명(晦冥)하는 천지 속에 나는 옷 젖는 것도 잊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염천지지유유(念天地之悠悠) 독창연이체하(獨愴然而涕下)’라고 한 옛사람의 글귀가 선뜩 머리를 스치면서 까닭 모를 고요한 흥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 :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노라니 홀로 처연하여 눈물이 흐른다)
차가 떠난다고 합니다. 그랜드 캐년 남안 112킬로미터를 달리는 관광버스입니다. 어느 틈에 구름이 개이고 차창으로 보이는 대협곡의 모습은 갈수록 웅장을 더해 갑니다.
대협곡의 남안을 따랄 천인절벽 위를 차는 달리고 있습니다. 협곡 속에서 죽순처럼 솟아오른 군봉의 꼭대기들이 우리가 달리는 언덕과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쳐다보는 충경이 아니고 바라보고 굽어보는 풍경입니다. ‘야바다이’ 전망대라는 곳에서 안내인의 수다스러운 설명이 끝날 줄을 모릅니다. 이 절승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대고원에는 태초에 강이 있었다. 강은 흐르면서 양안(兩岸)을 침식하고, 고원은 서서히 융기했다. 기슭을 깎는 강류에 협곡은 점점 넓어지고, 거기에 풍상우로(風霜雨露)의 쉴 새 없는 조탁(彫琢)으로 산형은 점점 변해졌다. 그동안이 약 700만 년 내지 900만 년…….
차는 또 달립니다. 척도의 웅혼한 것도 그것이려니와 색채의 풍염한 것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봉우리들이 제각기 빛이 다르고, 같은 봉우리가 머리와 허리와 발밑이 달라 본래가 소녀의 색동저고리 같은 것인 데다가, 지나가는 운영에 따라 밝던 빛이 어두워지고, 짙던 빛이 엷어지면서, 그야말로 오색영롱, 그것도 너무나 터무니없이 웅장한 영롱을 이루는 것입니다. 날씨는 흐리다가 개다가 또 눈이 휘날리다가 대중을 잡을 수가 없고 봉우리 뒤에 머뭇거리던 안개가 홀연히 앞을 가리고 하류 쪽을 배회하던 구름이 홀연히 상류로 용솟음쳐 올라옵니다. 절벽 위라고 하지만 탄탄대로 옆에는 울창한 수품이 심심찮게 끊이지 않고 그 속에서 사슴 떼가 기웃이 고개를 들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랜드뷰’, ‘리판 포인트’ 등등의 이름을 지닌 몇 지점에 내려서 다시금 감탄을 거듭하고는 하였습니다. 이 ‘코스’의 종점인 ‘와치 타워’라고 하는 곳은 처음 협곡 첫 입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 협곡을 대표하는 전망대입니다.
이곳의 선주민인, 그리고 지금도 이곳을 본거의 하나로 삼고 있는 인디언이 쌓아올린 원통형의 망루입니다. 경주 첨성대보다는 훨씬 큰 이 탑을 들어서면 인디언의 수공품을 파는 것, 간단한 민속 대료 진열실, 음식점 같은 곳이 있고 그 꼭대기가 전망을 위한 곳입니다. 지금까지 차가 달려온 방향대로 시선을 돌리면 멀리 유명한 ‘페인테드 데서트’가 가로놓였습니다. 채색 사막이라는 이 사막의 빛깔은 317종이라고 합니다. 차가 달려온 방향을 거슬려 바라다보면 ‘그랜드 캐년’ 40마일의 종경(縱景)이 일목에 들어옵니다. 어느덧 기엿기엿 석양입니다. 뭉게뭉게 끝없이 움직이는 운무 속에서 넘어가는 햇빛을 받으면서 대협곡은 그 무궁의 시간 속에서 오늘이라는 하루를 기록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꾸밈이 없이 제멋대로 생겼던 웅장한 묏부리들도, 이제 와서는 끝없는 하늘과 끝없는 고원 속에 약간의 변화를 보이면서 한낱 소박한 장난감들처럼 그저 얌전히들 제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마천루와 기계 소리와 원자탄과 자동차의 홍수가 이 대협곡에서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출발점으로 돌아오니 벌써 어두웠습니다. 인디언의 춤이 시작되었습니다. 흰 바지에 붉은 저고리를 입은 남자가 털벙거지에 북을 들고, 흰 치마에 검은 저고리를 입은 여자가 목에는 구슬을 주렁주렁 달고, ‘요헤이야에!’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춤을 춥니다. 상반신을 벗고 요령을 흔들면서 하는 춤도 있고, 벼슬이며 우모(羽毛)며 닭의 모양을 하고 나온 춤도 보여줍니다. 왕년에는 이 대륙을 독차지했던 이 겨레이건만 오늘은 춤이 끝난 뒤에 백인들이 던져주는 돈을 주우면서 ‘생큐, 생큐’를 연발하고 있는 그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 천관우
천관우(千寬宇:1925~1991)는 언론인이자 역사가이며 서예가 겸 수필가이다. 본관은 영양(穎陽)이고 호는 후석(後石)이며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하였다. 제천군 청풍면에서 태어난 천관우는 어릴 때는 신동으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아홉 살 때 그가 쓴 서예 작품이 「동아일보」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해방 뒤인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1월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의 외신부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서 첫 시작을 떼었다. 이듬해 9월까지 이어진 기자 생활에 대해서 천관우 자신은, "세 끼 밥을 먹기 위해 친구의 연줄로 대한통신 기자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유네스코 기금으로 9월부터 6개월 동안 미국 미네소타 대학 신문학과에서 연수할 때 쓴 '그랜드 캐년'은 한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만큼 필력이 뛰어났다.
1954년에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논설위원이 되었고, 조사부 차장으로서 칼럼 '지평선'을 맡게 되었다. 천관우는 자신이 '지평선' 칼럼의 필자가 된 것이 "30세의 젊은 기운에 앞뒤 가리지 말고 마구 쓰라고 신문사에서 일부러 그런 직책을 주었다"고 술회한다. 2년 뒤에 「조선일보」로 이직, 1958년 33세의 나이로 편집국장이 되었다. 「조선일보」에서 그가 만든 칼럼칸이 '만물상'이었는데, 멋있고 무게 있다는 평을 받은 '만물상'의 호평과 더불어, 편집국장으로서 천관우는 당시 자유당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9년 천관우는 다시 「한국일보」로 돌아갔다가 4·19 혁명이 있은 직후인 1960년 6월 또다시 「세계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세계일보」의 제호를 「민국일보」로 바꾸고 '샘물'이라는 칼럼 란을 만들어 글을 기고하는데, 전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지낸 이혜복은 "역사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과 언론인으로서의 예리한 판단력 그리고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력을 구사"했다고 당시 천관우에 대해서 회고하였다. 이러한 천관우의 잦은 언론사 이직은 천관우 자신의 말에 따르면 당시 열악한 언론사 환경에서 다소 유랑벽이 있는 일부 젊은 언론인들 사이에 일종의 '유행' 같은 것으로, 외압이나 권력 같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과 세상의 현실을 자유롭게 표출하며 산다는 언론인으로서의 독립불기(獨立不羈) 정신의 표출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1961년 3월에는 서울신문 주필, 1963년 1월에는 「동아일보」편집국장, 1964년 9월부터는 당시 복간된 「신동아」의 주간을 거쳐 1965년 12월에 「동아일보」주필 겸 이사가 되었다. 1966년에는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1970년)이 되었다. 그러나 1968년 당시 '차관' 문제와 관련해 기사를 실은 『신동아』 10월호를 트집 잡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동아일보 기자들이 연행되어 심문받고, 당시 주필이었던 천관우와 주간 홍승면 등도 구속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 상근이사로 다시 복직하지만 이듬해 12월에 퇴임하면서 그는 다시는 언론 관련 직업을 갖지 않았다. 4월 19일에 김재춘 · 천관우 · 이병린 등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였는데, 1972년 전 서울대생 4명의 내란 예비음모사건과 관련해 서울형사지법은 공판서 함석헌, 김재준 등과 함께 37명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 천관우를 채택하였다. 1973년 11월 5일 김재준 · 함석헌 · 지학순 · 법정 · 이호철 등 10명과 함께, 민주적 제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듬해 1월 13일 함석헌, 안병무, 문동환, 김동길, 법정, 계훈제 등과 함께 연행되어 조사받기도 했다. 11월에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81년 5월 14일 민족통일중앙협의회가 발족하여 천관우가 그 회장을 맡게 되는데, 한때 그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송건호는 이를 변절이라 혹평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아래서 국토통일원 고문,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회 위원, 국정 자문위원 등의 관직을 맡았던 경력으로 민주화 진영은 물론 언론인들까지 그와 발길을 끊었고, 학계와 언론계에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한 천관우는 1991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썰물 밀물》, 《언관사관》, 《한국사의 재발견》, 《가야사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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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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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