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나는 공중혼인은 성도들의 최고 기쁜 날이다.
마22:1-14 요2:1-11 계19:6-8
인생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날이 어떤 날일까? 사람마다 다소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식한 날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결혼식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 되기를 서약하는 날이며 결혼을 통해 사회생활 단위인 가정을 이루는 일이며 종족 보존의 기능도 아울러 가진다.
결혼식은 나라와 민족 또는 종교에 따라 방법과 절차가 각각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녀 모두 만 18세가 되면 결혼할 수 있으며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 혼인 신고를 해서 호적에 기록되면 결혼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랑·신부는 양쪽 집안의 어른들과 친지 그리고 벗들에게도 알리고 축하도 받기 위해 엄숙한 절차의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가지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아름답고 즐거운 날을 추억한다면 아마도 결혼식을 올렸던 잔치집 분위기와 같은 기쁨과 행복을 기억하지 아니할까? 화사하게 화장하고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와 축하하러 온 많은 손님들, 준비되어진 각종 음식, 주례를 통해 듣는 축하메시지….지나간 날 이였지만 즐거운 회상을 갖게 한다. 그런데 때로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어야 할 잔치집이 갑자기 곤경에 빠지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요한복음 2:1-11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관한 말씀인데 우리에게 이와같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나의 인생이 잔치집과 같은 삶을 원한다면 본문의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해 보기 전에 먼저 필히 들어야 할 말씀이 있는데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신분의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영접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런 말은 죽은 자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내가 보지는 못했어도 살아계신 분처럼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만약 이 영접이란 단어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였다면 기초부터 말씀에서 벗어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는가?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신앙고백으로부터 시작되어진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는가? 자 그러면 혼인잔치와 같은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주님 공생애 중 첫 번째 기적을 행한 가나 혼인잔치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셋째 날이라고 요한복음 2장은 밝히는데 침례를 받은 후 공생애 첫째 날에는 요한과 야고보, 안드레와 베드로를 그리고 둘째 날에 빌립과 나다나엘을 택했던 제자들과 모친 마리아와 함께 제일 먼저 가셨던 곳이 가나라고 하는 지방에 혼인잔치 집이었다. 아마도 예수님 모친과 친척되는 분이었나 보다. 결혼식 잔칫날의 특징은 포도주를 마셔야 하객들이 흥겹다는 것인데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특별히 유난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도 최소한 일주일 동안 잔치를 배설했고, 여유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잔치 기간이 무려 두 주간이나 되었다고 한다.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흥겨웠다. 그런데 초대받은 잔치집은 너무 많은 손님으로 인하여 예기치 못한 위기가 갑자기 생겼습니다. 한창 흥이 오른 순간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음식이 모자랐다면 바로 만들 수 있겠지만 포도주는 바로 만들어지는 음식이 아니잖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으로서 양고기가 주식인데, 양고기에 반드시 곁들이는 음료수는 포도주로써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음식이다. 그런데 잔칫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는 상상이 갑니다. 이제껏 정성으로 손님을 대접한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을 판이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하고 낭패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곳에도 문제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치 이와같다는 것이다. 생활속에 필요를 예측하고서도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고민하고 당황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후회스러운 추억을 만들고 만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난관에 부딪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인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나타내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행히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는 인근 나사렛에 사시던 주님도 초청을 받고 와 계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주님을 초청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끝나는 바로 그 곳에서부터 주님의 능력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주님을 반드시 초청해야 주님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잔치에 모인 무리들 중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유일하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직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처녀인 자신의 몸속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인들은 이와같은 상황을 어떻게 극복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요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모자라는 포도주를 주인에게서 해결하려고 하질 않았고 아들 예수에게 부탁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기적으로 태어나신 분이었다. 바로 남자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이다(창3:15).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마리아는 아직 남자와 관계한 사실이 없었지만 불안해 하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말하기를
(눅2:31-32) 31 보라 네가 네 태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이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32 그가 크게 되고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시리니.
너를 통하여 메시야가 잉태 되어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삼하7:16).
이 말씀을 믿음으로 수태했던 마리아였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의 권능을 입고 사역하기까지 가장 가까이서 함께했다(눅4:14). 비록 자신의 육신을 빌어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님은 구세주요, 전능자이심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포도주가 갑자기 떨어진 상황에서 마리아는 잔치집 주인에게 이런 제의를 했을 것이라 본다.
"혼인잔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손님으로 참석한 예수에게 도움을 구합시다. 이제는 손님으로 참석한 예수를 주인자리에 앉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잔치집 주인에게 손님으로 참석한 예수를 주인자리에 앉히도록 권하였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이것은 분명하다. 당시 상황에서는 예수가 잔치집의 주인이 되어야 만이 그 집의 종들을 부릴 수가 있다. 손님의 자격으로는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운 후 항아리에 든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 갖다 주라는 명령에 순종할 종이 없다. 가뜩이나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에 아예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소리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 않는가? 그러나 주인의 위치에 있다면 종들은 순종해야만 한다. 그때 당시의 종들은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이란 생각할 수 없다.가나의 혼인잔치는 우리가 예수를 어떤 자격으로 손님인가? 주인인가?영접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마리아는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다. 마리아가 주님에 대한 믿음,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마리아는 주님과 의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스스로 미리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겼을 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라아가 예수님께 의뢰했을 때 주님의 답변은 (요2:4)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 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말로써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좀 어색한 번역인데 헬라어로는 ‘귀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로써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라 하지 않고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얼마나 극진했는지 보여줍니다.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메시아로서 처음 표적을 행할 때가 아직은 아니라는 의미였는데 “포도주 부족한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러십니까?”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때를 포기하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표적을 행하셨던 것은 하인들 앞에서 어머니의 권위를 존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임을 아셨던 것입니다.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비록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아들이 분명했습니다. 젖을 먹이고 귀저기를 갈아주면서 예수를 키웠을 것입니다. 충분히 어머니 행세를 하며 자식에게 요구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예수님께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만을 알렸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요2:5) 그분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이르되, 그분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아마 마리아는 혼주를 잘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순종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씀에 이제 예수님께서 움직이십니다.(요2:6-7) 6 거기에 유대인들의 정결하게 하는 관례에 따라 각각 물 두세 통 담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더라. 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그들이 아귀까지 그것들을 채우니. 유대인들은 집집마다 손이나 발을 씻기 위한 물 항아리를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잔칫집에는 돌로 된 물 항아리가 여섯 개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잔칫집 하인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깨끗하기로 소문난 민족입니다. 깨끗한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윤리로서, 이 깨끗함에는 단순한 위생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식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는 그들이 식사 전이나 외출하고 들어올 때마다 손을 씻는 항아리로써 위생적이면서 종교적인 예식의 하나였습니다. 문 입구에 놓여 있는 항아리에 손을 씻으므로 밖에서 지은 죄나 더러워진 마음을 씻고 안으로 들어가는 귀한 의식입니다. 밖에서 묻은 먼지나 더러운 것을 씻고 들어가면 행복한 가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 항아리부터 물을 채우시라는 기대 밖의 분부에 사람들이 포도주에만 집착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아무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의 물을 채우고 난 후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가져가라고 하신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물이었습니다.(요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그들이 갖다 주었더니여러분 연회장에게 물을 가져가면 하인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포도주 부족으로 잔치가 엉망이 되려고 하는데 나한테 지금 물 먹이냐고 아마 호되게 혼이 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두말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 연회장에게 가는 동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포도주도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연회장이 깜짝 놀랄 만한 고급 포도주였습니다.
(요2:9-10) 잔치를 주관하는 자는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도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종들은 알더라. 잔치를 맡은 자가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이르되 모든 사람이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
주님의 첫 번째 기적에 잔치집 분위기가 최고의 흥겨운 자리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수고한 종들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순종의 수고가 있어야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 어린 소년을 통하여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요구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예수님께 바쳐질 때, 이것을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때로는 누구의 희생을 통해서, 때로는 누군가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십니다. 물고기와 보리떡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자마자 즉시 지진이 일어나며, 나사로 무덤 앞에 막힌 큰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나사로가 나왔으면 더 놀라운 이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누운 지가 이미 나흘이나 지났으므로 사람들은 의심도 가졌었고 또 좀 더 빨리 주님이 오시지 않았음에 대해 불평도 했었지만 그들은 일단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돌이 옮겨져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다시 한 번 요한복음 2장 4절을 보겠습니다.(요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내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잔칫집의 포도주나 책임지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올무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땅에서 처음 표적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응당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위한 표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표적을 첫 표적으로 행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첫 표적을 행하셨을까요? 포도주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잔치를 배설키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실 당신의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처음 표적을 통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실 당신의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주의 첫 표적으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포도주와 더불어 공생애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들에게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마26:27-28) 27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그것을 다 마시라. 28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주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곧 흘리실 보혈과 포도주를 동일시 하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에 의한 구원을 재확인토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에게 포도주란, 주님 한 분이 십자가의 희생이 되심으로 온 인류를 살리신 구원의 표적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롬5: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아담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심판 받아 멸망할 죄인이 되었으나 주님 한 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간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 찬치에서 처음 표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이루어질 영적 잔치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이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도, 가정도, 기업도, 교회도 주님을 초청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때 그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 주님은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집을 허물 수는 있으나 집을 세우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가나의 혼인 잔치는 흥이 한창 무르익은 순간에 그만 포도주가 떨어지면서 하마터면 오래 전부터 준비한 잔치인데 어처구니없게도 용두사미로 끝장날 판이었을 때 마리아의 요청을 받은 주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 새 포도주를 마신 연회장은 그 기막힌 맛에 신랑을 불러 이렇게 칭찬했습니다.(요2:10) 그에게 이르되 모든 사람이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용두사미로 파장될 뻔했던 잔치가 오히려 신랑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보다 더 멋진 마무리로 피날레를 장식하였습니다. 이 멋진 마무리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어떤 삶을 살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복된 소식, 복음 그 자체이신 주님을 마음속에, 나의 삶 속에 모셔들이고 그분께 순종하신다면 그 분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해 주실 것입니다.
2. 신부인 교회와 신랑되신 예수님과의 공중 혼인잔치
역사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무덤속에 있던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나올 것이고 살아있던 성도들도 변화되어 구름속으로 끌려 올려져서 구름속에서 주님을 만나보는 순간이 신부된 성도들과 신랑되신 주님과의 혼인이라고 표현을 한 주님은 그날의 천국혼인잔치에 대해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2:1-14) 1 예수님께서 응답하시며 다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왕과 같으니라. 3 그가 자기 종들을 보내어 결혼식에 초대받은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이 오려 하지 아니하매 4 그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기를, 초대받은 자들에게 알리되, 보라, 내가 내 오찬을 준비하고 내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으나 5 그들이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들의 길로 가되 하나는 자기 농장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장사하러 가며 6 그 남은 자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니라. 7 그러나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자기 군대들을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멸하고 그들의 도시를 태우며 8 그 뒤에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결혼식은 준비되어 있으나 초대받은 자들이 합당하지 아니하니 9 그런즉 너희는 큰길로 나가서 만나는 자들을 다 혼인 잔치에 초대하라, 하매 10 이에 그 종들이 큰길로 가서 나쁜 자든 좋은 자든 다 만나는 대로 함께 모아 오니 결혼식에 손님들이 가득하더라. 11 왕이 손님들을 보려 들어올 때에 거기서 결혼식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그에게 이르되 어찌 네가 결혼식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이에 왕이 종들에게 이르되 그의 손발을 묶고 그를 데려다가 바깥 어두움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 하니라. 14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정된 자는 적으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혼인 잔치는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도들은 현재 천국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천국을 누리고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최종적으로 임하게 될 천국을 갈망하면서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국은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난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종요한 관심사이자 궁극적인 소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을 거부하던 자들은 캄캄하고 어두운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즉 하늘의 왕국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왕국이란 단어가 36번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은 유대적 요소와 헬라적 요소에 영향은 받은 언어상의 차이이지 의미는 동일한 것이므로 하나님나라와 하늘의 왕국 즉 천국은 동일한 말입니다.
잔치 날이 돌아오면 미리 초대장을 보낸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임금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날자가 되면 다시 종들을 보내고 그 종들은 안내하기를 준비가 되었으니 오기를 청한다. 음식과 모든 필요한 것들을 사람의 수에 맞추어 준비 했는데 오지 않으면 잔치는 망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왕의 초대를 받는 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축복된 일이다. 여기서 초대는 두 번 이루어졌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먼저 청함을 받은 자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선민으로 택함을 받아 율법을 받는 등 여러 종교적 특권을 누릴 수 있음으로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천국에 가까워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워 복음을 거부하고 은혜를 배척함으로써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먼저 청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개인 일과 사업을 핑계로 초청을 거부합니다. 초대 받은 사람 가운데 거역한 사람들은 장가를 들었으니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하고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 가보아야 한다고 거절했고 한 사람은 소를 샀으니 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리고 간청하는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왕이 분노한 것은 자신을 거역했을 뿐 아니라 모욕했고 잔치를 망치게 했기 때문이다.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초대장을 미리 보냈기 때문에 사전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해야 하고 결혼식 날을 피하여 했어야 했다. 밭을 산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소를 산 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든지 잔치 날을 피하여 할 수 있는 일이고 부득이 참석 못하겠으면 종들이 오기 전에 알렸어야 했다. 그런데 잔칫날 초청을 거절한 것은 모두 핑계에 불과하고 왕을 멸시하는 행동이며 반역 행위인 것이다. 거기에다 심부름을 하는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한 것은 엄연히 왕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행위인 것이다(5). 이는 육신적 쾌락이나 생계에 연연하느라고 가장 중요한 생명을 상실해 버린 경우에 해당합니다. 진실로 불신 가운데 처한 세상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돈이나 땅, 사업 혹은 쾌락으로 그들은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을 채우느라고 늘 분주합니다. 그들 앞에서 영혼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조롱당하기 십상입니다.
왕은 분노하여 이들을 반역 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어서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들이 사는 동네를 불살라버렸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역할 자들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종들의 초대를 거역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주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으며 모욕당하며 죽임을 당하기까지 할 것을 말씀한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귀한 예고의 말씀이기에 주의 종들은 사랑 받고 존경받는 길이 아니라 욕먹고 매 맞고 핍박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길인 것을 말씀한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거부한 백성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3.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의 받을 심판
두 번째 초청은 이방인들의 초청을 의미하는데 왕의 심판으로 인하여 그 동네가 불타고 다시 사거리 길에서 많은 사람이 혼인 잔치에 초청받습니다. 잔치는 하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 한다. 그러기에 많이 준비 했는데 초대한 자들이 오지 않으니 음식을 버려서는 안 되기에 다시 종들을 보내어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청하여 오라 했다. 종들은 주인의 명한대로 만나는 대로 청하여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새로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 온 이들이 모두 혼인 잔치에 합당한 자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초청되어 온 자 중에는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잔치 자리에 손님을 확인했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 물으니 입을 다물고 말을 안했다. 두 번째 초청되어 잔치집에 온 사람들은 부지중에 초대 되었기에 예복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기에 이미 주인집에서 예복을 만들어 비치해 놓았다. 들어오면서 입기만 하면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입고 들어왔는데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 온 것이다. 그러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것은 주인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잔치를 모욕한 사람이기에 주인은 분노한 것이다. 이 사람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되었는데 잔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와서 예복을 입지 않고 참예한 것은 악의적인 마음에서이다.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모여 있는 것은 마태복음 13장 47~50절의 그물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물 비유에서 나쁜 물고기는 좋은 물고기와 함께 그물에 걸려 올려지지만, 어부에 의해 분리된다. 마찬가지로 의인과 악인은 최후의 심판에 분리되고 악인들은 풀무 불에 던저져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물 비유에서처럼 혼인 잔치 비유에서도 분리가 일어나는데, 그 기준은 혼인 잔치에 요구되는 예복을 입었는지를 임금이 확인합니다.
(1)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왕은 크게 노했다.
(마 22:13-14) 13 이에 왕이 종들에게 이르되 그의 손발을 묶고 그를 데려다가 바깥 어두움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 하니라. 14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선정된 자는 적으니라, 하니라.
왕이 종들에게 수족을 묶어 바깥 어두운데 내던지라는 것은 산채로 죽으라는 벌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한 것은 후회하고 자신을 한하면서 고통에 못 견디어 절규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는 말은 지옥 형벌을 선언한 것이다. 이 비유가 현세적인 비유가 아니라 미래에 있을 영적인 비유이다. 이 비유의 결론은 청함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출석하는 자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구원받은 백성은 많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믿음의 의의 옷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벧전1:15-16)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라. 16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회개하는 생활로 깨끗해야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깨끗한 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죄로 더러워진 영혼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룩한 생활로 예복을 입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믿음의 옷 즉 죄를 회개하고 행위의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
(2) 여기서 예복은 무엇인가?
예복에 대해 학자들에 따라 성령, 자비, 기쁨, 의, 선한 행실 등 다양한 의미가 제시되었다. 예복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복이 가지는 기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복은 종말론적 심판을 준비하는 것으로서 예복을 입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게 됩니다. 종말적 심판 앞에 서기 위해 예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요구사항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복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으로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로운 행실입니다.
예복에 대한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 보겠습니다.
(사61:10) 내가 주를 크게 기뻐하며 내 혼이 내 하나님을 기뻐하리니 이는 마치 신랑이 장식으로 자기를 꾸미고 신부가 보석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 같이 그분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라.
(계19:7-8) 7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도다.
8 또 그녀가 깨끗하고 희고 고운 이(세)마포 옷을 차려입도록 허락하셨는데 그 고운 이(세)마포는 성도들의 의(옳은 행실)니라 하더라.
예복은 의의 옷이며 성도가 입을 세마포인데 이(세)마포를 의 즉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람이 스스로 행한 의를 말씀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입혀주신 의의 옷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는 성도들이 옳은 행실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마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마포가 스스로 입은 옷이 아니라 수동형으로 기록되어 입혀주신 옷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종말적 심판을 염두에 둔 마태의 본문들을 살펴볼 때 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선한 행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義)이며(마5:20),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마7:21 12:50 21:31) 열매 맺는 것입니다(21:41-43).
따라서 종말론적 혼인 잔치에 초청받을 때 예복을 준비하지 않으면 잔지에 초청받았더라도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손발이 묶인 채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집니다(마22:13). 여기서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가라지 비유에서 추수 때에 추수꾼들이 불사르게 단으로 묶는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가라지가 최후에 불에 내던져지는(마13:30) 것처럼
혼인 잔치에 예복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의 최후는 바깥 어두운 데
내던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좁은 문의 비유(마7:13-14)에서처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마태는14절을 통해 혼인 잔지에 초대받는 것이 그 잔치에 들어가는 보장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복음은 이후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종말 설교인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어느 시에 주님이 오실는지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마24:42, 25:13). 그러므로 임금의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성경 여러 군데 있습니다.
(살전5:4-6)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계16:15)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나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여 그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 주 예수님은 그분의 약속대로 반드시 오시는데 그분을 영접할 자는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어서 수치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자기 옷을 지킨다는 말이 무엇일까 말씀으로 확인해 봐야 합니다.
(계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도다. 8 또 그녀가 깨끗하고 희고 고운 이마포 옷을 차려입도록 허락하셨는데 그 고운 이(세)마포는 성도들의 의(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 즉 의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입혀주신 의의 옷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성도들이 옳은 행실이라는 세마포가 스스로 입은 옷이 아니라 주님께서 입혀주신 옷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공중에서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땅에서의 혼인도 사랑하는 사이에만 이루어질 수 있듯이 주님과의 만남도 분명히 주님과 우리사이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신랑되신 주님께서는 이미 2000년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을 뿐만 아니라 옆구리에 창에 찔려서까지 피를 토해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였다는 것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문제는 신부된 성도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모르신다고 마태복음 25장 염소무리에 선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성경에서 주님이 원하는 사랑을 하면 됩니다.
(요14:21) 내 명령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태내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 되는 것인데 그분의 계명은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 번째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사랑하겠지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경우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선한 행위인데 이 선한 행위가 없이는 주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데 선한행위에 대해 야고보서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약1:27)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히지 않은 신앙행위는 이것이니 곧 고난 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세상으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요한일서에서 다시 설명을 합니다.
(요일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신부된 성도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행위가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갈3:26-27) 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나니 27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를 맞이할 수 성도는 선한 행실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을 가리켜 의의 옷, 세마포, 흰옷 그리고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실 날은 하루 하루 다가오지만 세상은 말씀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으므로 정말 주님이 오실 때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는 그리고 끝까지 남은 자들은 주님을 뵈오리라 확신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