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실패, 아픔과 치유 등 劇的 요소 가득 담긴 삶 개방·소통·공유 통해 인류 집단지성 도약시켜… 융합·혁신과 정체성·전통 묶어내는 것은 우리의 과제
융합과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한 입 베인 사과'를 남기고 영면(永眠)의 길을 떠났다. 그가 남긴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에 버금갈 정도로 평가되고, 앞으로 역사는 세상을 '아이폰 이전(以前)과 이후'로 구분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실 진정한 정보화 혁명은 잡스의 '사과'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잡스에 대한 애도(哀悼) 열기로 뜨거운 것은 그의 '사과'가 단순히 IT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스의 '사과'에는 성공과 실패, 아픔과 치유의 극적(劇的) 요소가 가득 담겨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입양되고, 대학에 입학한 얼마 뒤 중퇴하는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 도입이다.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퇴출당하는 아픔과 연이은 실패를 극복하고 당당하고 화려하게 복귀하는 과정은 기막힌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젊은 시절 스튜어트 브랜드의 '지구백과'에서 읽은 "항상 갈구하고, 우직하라"는 금언(金言)을 잊지 않고 '창조적 천재'와 '혁신적 기업가'로 우리 앞에 우뚝 서는 클라이맥스는 숨 막히는 것이었다. 그런 잡스도 스스로 '생명의 최고 창작'이고 가장 중요한 '변화의 매개'라고 믿었던 숙명적인 죽음은 어쩔 수 없었다. 독특한 은둔의 자세를 지켜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별에도 역시 잡스다운 멋이 담겨 있다.
잡스의 '사과'에는 소비자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맛'이 필요하다는 기술혁신의 새로운 철학이 담겨 있다. 그에게 기술자, 기계, 기술만을 위한 기술은 의미가 없다.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라도 소비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창조성이고, 모든 소비자에게 개방되어 공유되는 콘텐츠다. 융합을 통해 모든 기술적 복잡성을 말끔하고 단순하면서도 일관된 디자인 속에 감춰버리는 것이 잡스의 탁월한 전략이었다. 극단적인 집중과 단순성, 그리고 철저한 개방·소통·공유가 애플 마니아를 열광시키는 혁신의 핵심이었다. 그런 잡스의 입장에서는 한 입 베인 사과의 무지개 색깔도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잡스의 '사과'에 담긴 융합과 혁신의 꿈은 단순히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같은 기술혁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무선 인터넷과 개방형 콘텐츠가 우리의 집단지성(集團知性)을 획기적으로 도약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집단지성이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다. 집단으로 사냥을 하는 사자나 상당한 수준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미와 꿀벌에서도 집단지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도로 복잡한 언어를 이용해서 집단지성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소통·분업·교역을 기반으로 하는 화려한 문명을 이룩했다. 인류의 집단지성은 문자와 인쇄술을 통해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제 20세기의 정보화 기술을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도록 만들어준 잡스의 '사과'가 인류의 집단지성을 궁극의 지위로 끌어올려주고 있다.
극단적인 분화(分化)와 전문화로 사회와의 공감대를 잃어가고 있던 인문학과 예술이 잡스의 '사과'를 통해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인문학과 음악과 미술의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새로운 형식의 '디지털 인문학'과 '디지털 아트'가 꿈틀거리며 솟아나고 있다. 인종과 국경의 벽도 무너지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새로운 음악시장이 등장했고, K-팝이 세계적 광풍(狂風)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도 흔들리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외면하던 중동의 권위적 정권들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앞세운 재스민혁명에 힘없이 무너져버렸다. 어렵게 쟁취한 우리의 민주주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잡스의 '사과'에 의한 변화가 앞으로 우리의 삶과 문명을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융합·참여·소통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융합과 혁신에 매달릴 일은 아니다. 무엇이나 섞는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혁신이 언제나 좋은 것도 아니다. 진정한 융합과 혁신은 인문학과 과학과 기술과 예술이 나름대로의 확고한 정체성과 전통을 지켜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칫 과도한 융합과 혁신은 아무도 원치 않는 획일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제 잡스가 남기고 간 '사과'를 어떻게 활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는 온전하게 우리의 몫이다.
스티브 잡스를 보면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버려졌고, 가난한 집에 입양되어 배고프게 자랐고, 대학에 1년도 채 못 다니고 중퇴하였지만 성공하였다.
큰 인물들은 밑바닥의 쓰라린 환경에서 태어나 처절한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밑바닥에서 출생하는 이유를 하느님의 섭리라고 볼 수도 있고, 전생에 이미 공부해 놓은 성적이라 할 수도 있고, 팔자소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다음에는 후천적인 노력이 추가되면서 내공이 쌓인다.
즉 3가지 액체를 흘린 양에 내공은 비례한다. 피·땀·눈물이 그 3가지 액체이다. 피·땀·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가에서 결판이 난다. 이거 안 흘린 사람들은 말을 해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카리스마도 별로 없다.
'맹자(孟子)'의 '고자장(告子章)'에 이 대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천장강대임어사인야(天將降大任於斯人也: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하면), 필선노기심지(必先勞其心志: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고기근골(苦其筋骨: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아기체부(餓其體膚:몸을 굶주리게 하고), 궁핍기신행(窮乏其身行:그 생활은 빈곤에 빠뜨리고), 불란기소위(拂亂其所爲: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시고동심인성(是故 動心忍性: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증익기소불능(增益其所不能: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절해고도로 유배를 가서 처절한 고독과 고통을 겪을 때 방 안에 써 붙여 놓으며 스스로를 달랬던 글이 바로 이 '고자장'이다. 아마 이 '고자장' 없었으면 유배 가서 많은 이가 자살했을 것이다.
내공을 쌓는 또 하나의 방법은 집중력이다. 스티브 잡스의 날카로우면서도 약간 매부리코 같은 코가 주목된다. 시비가 분명하고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는 아주 단호한 코이다. 잡스가 젊었을 때부터 선불교(禪佛敎)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선(禪)의 요지가 불립문자(不立文字)요, 단도직입(單刀直入)이다. 잡스의 이 매서운 코는 단도직입하는 칼과 같이 상대를 한칼에 쳐버리는 기세를 품고 있다. 인간적으로는 매정하고 피곤한 코이지만, 애플의 집중력과 추진력은 잡스의 이 코와도 무관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애플컴퓨터는 1983년 '애플시리즈' 후속 신제품으로 '리사'라는 컴퓨터를 내놓았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첫딸 이름을 붙인 리사는 당대 최고 기술이 모두 집약된 명품 컴퓨터였다. 우선 키보드가 아니라 마우스로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혁명적 컴퓨터 사용방식을 썼다. 마우스 말고도 리사는 경쟁업체들이 몇 년 동안 흉내도 못 낸 첨단기술을 여럿 선보였다.
▶잡스는 리사 개발에 나서면서 "우주에 영향을 미칠 만큼 아주 중요한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무된 엔지니어들은 당시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어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당초 2000달러로 잡았던 가격이 9995달러로 치솟았다. 결국 리사는 최악의 실패작이 돼버렸다.
▶잡스는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디자인에 집착했는가 하면, 누구보다 과감하게 미래지향적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격과 외양에 비해 성능이 떨어지는 졸작을 내놓기도 했고,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기술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뒤 만든 넥스트 컴퓨터가 대표적 사례다. 정육면체 검은색 케이스의 파격적 디자인에 최초로 CD-ROM 드라이브를 채택해 화제를 모았지만 기술적 결함이 많았고 시장 반응도 냉담했다.
▶잡스는 이런 실패들을 미래의 성공으로 올라서는 디딤돌로 삼았다. 그의 '단순함의 미학'은 엔지니어들과 끝없는 마찰을 빚었지만 결국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아이팟 디자인으로 꽃을 피웠다. 넥스트 컴퓨터는 실패했어도 그 운영체제(OS)는 훗날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뒤 개발한 'OS X(10)'라는 강력한 운영체제로 부활했다. 모토로라와 제휴해 만들었던 '아이튠스 폰'의 실패 역시 아이폰의 성공을 낳는 밑거름이 됐다.
▶"끊임없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짜 예술가다." 1996년 잡스가 포천지(誌)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그의 명언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실패를 용인하는 데 인색하고, 그래서 벤처 창업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갈수록 줄고 있는 우리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한국의 잡스'가 나오려면 실패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이 바뀌고, '패자 부활'의 길을 열어두는 시스템부터 갖춰야 한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31] 컴퓨터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 2011. 10. 8.
컴퓨터는 원래 전쟁의 산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은 군사 공격과 관련된 복잡한 공학 계산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기계 개발에 나섰다. 1943년 6월, 육군과 계약한 펜실베이니아대학 실험실에서 최초의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해군이 MIT에서 대용량 메모리의 컴퓨터를 개발했다. 계산 기능 외에 컴퓨터를 실로 다방면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또 한 가지 혁명적인 개념은 디지털 전송 방식이었다. 정보나 음성을 비트라고 부르는 2진법 숫자의 흐름으로 전환하여 송출하는 이 방식 역시 2차대전 중에 미국 정부의 후원을 통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초기 컴퓨터는 주로 전쟁과 관련되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개발되었다. 그 결과물은 거대한 공장 설비와 유사했다. 육군이 내놓은 에니악(ENIAC)은 무려 30t이나 나가는 거구였다. 당시로서는 장차 수십 년 내에 성능이 훨씬 좋고 속도도 빠른 소형 컴퓨터를 적당한 가격에 사서 개인이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꿈 같은 일을 가능케 한 것이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괴짜(geek)'들의 공헌이었다.
전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컴퓨터 부품 가격이 인하되자, 전국적으로 컴퓨터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부품을 직접 조립해 소형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포퓰러 미캐닉스(Popular Mechanics)〉지 1975년 1월호 커버에 이러한 아마추어가 만든 소형 컴퓨터 사진이 실렸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당시 20대 초반의 유능하고 꿈 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22세였던 폴 앨런과 20세의 빌 게이츠가 만나 사업을 꾸몄고, 마이클 델은 텍사스대학 기숙사 방에서 주문 제작형 IBM 호환성 컴퓨터를 혼자서 조립했다. 비슷한 시기에 스티븐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는 차고 안에서 애플사를 창립했다. 개인용 컴퓨터(PC)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번 시작된 변화의 흐름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성능이 점차 개선되는 동시에 가격이 하락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컴퓨터는 기업과 가정집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원래의 전쟁 업무와는 무관한 교육과 오락, 비즈니스의 핵심 도구로 변모한 이 기술은 사람들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하면 적국을 철저하게 파괴할지 계산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 이제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일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이처럼 세계를 변화시킨 창의성의 핵심이 무엇이었을까?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다르게 생각하라.'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난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인의 부음을 듣는 것 같다.'
2004년부터 췌장암을 앓아온 스티브 잡스가 56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6일 오전.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집어들고 문자메시지로, 트위터로, 인터넷 댓글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같은 시각 미국·유럽·남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문장은 짧았다. '아이 새드(iSad·슬퍼)'. 당연히 그의 히트작 아이패드(iPad)에서 온 말이다.
하버드대를 다닌 천재이자 기부·선행의 대명사인 빌 게이츠가 '모범답안' 천재라면,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망나니짓을 하고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의 시작은 삼류였다. 자기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대드는 직원은 가차없이 잘랐다.
그런데도 세계는 이 괴팍한 창조자에게 열광했다.
스티브 잡스는 소문자 'i'면 충분하다는 걸 증명했다. 애플의 아이맥(iMac), 아이폰(iPhone), 아이팟(iPod), 아이패드(iPad)엔 모두 'i'가 붙는다. 대문자가 아니라 소문자다. 죽은 그가 'iHeaven(천국)'에 있을 것이란 농담도 그래서 나온다.
"나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본 적이 없다. 나는 룰을 만드는 사람이다." 당돌한 비주류 선언이었다. 젊은이들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래, 나(i) 별거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나는 나다.
그가 40대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 "외부 세계는 당신을 특정한 이미지로 규정하고 그걸 더 공고히 만들려 할 것이다. 예술가로 살아가기란 점점 더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잘 있어, 나는 벗어나고 싶어'라 말하고 박차고 일어나야 해." 잡스 제품은 오만하고 낯설었다. 아이폰·아이패드는 배터리를 교체할 수 없다. 매끄러운 디자인을 위해서다. 소비자가 싫어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이런 뜻이다. 좀 깨지면 어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 잡스에게 '대세'란 의미 없고 따분한 것이었다. "나는 세계 최대가 아니라 최고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다." 잡스는 애플2로 PC(개인용컴퓨터)시장을, 다시 아이패드·아이폰으로 '포스트PC'시장을 만들었다. 경쟁자와 아등바등하는 대신 쿨(cool)하게 시장을 새로 창조했다. 청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로도 충분히 멋지다는 것, 커다란 회사명 대신 '애플' 마크 하나로도 디자인이 멋질 수 있다는 것, 전화기로 전화만 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도 스티브 잡스였다.
6일 지구인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은 그가 '다르게 생각하기(Think Different)'라는 새로운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걸 잡스 스타일이라 부른다.
'애플'의 창업자 겸 전 최고경영자(CEO)로 우리 삶을 혁신했던 스티브 잡스(56)가 5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기술·경영·디자인을 꿰뚫어 본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뉴욕타임스)도 암과 벌인 7년 전쟁에선 승리하지 못했다. 2004년 췌장암 수술,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고도 보란 듯 다시 나타난 그였다. 잡스는 지난 2월 17일 미국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자신에 대해 '6주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보도한 다음 날 오바마 대통령이 주재한 IT 기업 경영진과 만찬 회동에 참석했고, 3월 2일 아이패드2 제품 발표회에 나왔다.
▲ 5일(현지 시각)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애플스토어를 찾은 추모객이 젊은 스티브 잡스가 사과(애플)를 들고 있는 사진을 아이폰에 띄운 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AP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검은색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으로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이라는 문구만 달았다. 그리고 "스티브의 영민함과 열정, 에너지가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 덕분에 우리 삶은 윤택해지고 향상됐다"고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뒤 입양,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로부터 축출된 뒤 복귀와 재기, 희귀암 발병과 투병, 아이폰·아이패드 출시를 통한 디지털 시대 새 라이프 스타일 창조…. 그는 드라마의 상상력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었다.
▲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 앞에서 5일 밤(현지시각) 중국인 유학생들이 길바닥에 촛불을 세워 애플 로고를 만들고 있다. 이날 세계 곳곳에서 잡스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AFP 연합뉴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입양됐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잡스의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에 다닐 때 캠퍼스 커플로 만났지만 "딸을 시리아인 유학생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심슨 부친의 반대로 미혼 상태에서 잡스를 낳았다. 잡스는 '대학 진학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양부모 폴·클라라 잡스에게 맡겨져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서 자랐다.
▲ 1983년 11월 당시 28세의 스티브 잡스(왼쪽에서 둘째)가 방한,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을 만났다. 73세였던 이 회장은 당시 잡스에 대해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 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제공
어린 시절 잡스는 호기심이 강해 늘 말썽을 일으켰다. 집 구석에 놓인 바퀴벌레약을 먹고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전자 부품을 조립해 만드는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학·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진 않았다.
잡스는 오리건주 리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공부를 때려치운다. 그는 중퇴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훗날 고백했다. 당시 친구의 방바닥에서 자고, 먹을 것을 구하려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한 종교 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7마일(약 11.3㎞)을 걸어가기도 했다.
히피 저항 문화에 휩쓸려 밥 딜런과 비틀스에게 빠져 살았던 잡스는 자퇴 후 다니던 전자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불교로 개종해 아내 로린 파월과 결혼식도 불교 의식으로 진행했다.
그는 1976년 다섯 살 많은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애플을 공동 창업한다. 사무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양부모 집의 창고였다. 잡스는 이듬해 개인용 PC 애플2를 내놓으면서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30세 때인 1985년 자기가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동안 내놓은 매킨토시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면서 실패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됐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다. 그는 1996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디지털 시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 PC 시대를 열었던 그는 PC 이후 시대까지 열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올해 1월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말했다. 그는 췌장암 판정 후 '죽음'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의 중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를 돕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기하는 것이다" "묘비에 '최고 부자 잠들다'는 글귀엔 관심이 없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 때 '오늘 굉장한 일을 해냈지'라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죽음은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에 길을 내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서 "늘 갈망하고 늘 우직하게 살라(Stay hungry. Stay foolish)"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잡스가 이끈 제품은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었다. 혁신의 산물이었다. 그는 "혁신은 우리가 절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 정말 많은 노력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는 1000가지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섰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른 놀라운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 내십시오."(2006년 5월 NBC뉴스 인터뷰)
그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 앤과 사이에 딸 리사가 태어났지만 혈육임을 부인했다. 양육비도 주지 않아 미혼모 앤이 근근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성장한 딸이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자기 딸로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면서 당시 일을 언급했다. 생부가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끝내 매몰차게 외면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독재자'나 '사소한 일에까지 목숨 건 관리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디자인·광고 문구에도 관심이 많아 300개 특허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카피 탄생에 관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각계 각층에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아이패드(iPad)에서 따온 '아이새드(iSad)'라는 추도사가 퍼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 빌 게이츠는 잡스가 자주 썼던 표현을 인용하며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정말로 대단한 영광(insanely great honor)'이었다"고 말했다. IT 분야 싱크탱크인 엔드포인트 테크놀러지의 로저 케이 소장은 "전체적인 영향으로 본다면 스티브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그레이엄 벨에게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여자 친구와의 첫 딸 혈육 부인… 양육비 안보내기도… 꼭 한번 만나달라는 생부 제안도 매몰차게 외면
▲ 잡스와 부인 로렌.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5일 유족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스티브가 오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면서 "그는 공적인 생활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고, 사적인 생활에서는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잡스의 가족사는 순탄하지 못했다. 잡스는 1955년 시리아 출신 유학생과 동갑내기 미국인 여학생 사이에서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입양됐다. 친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80)는 지난 8월 처음으로 자기가 잡스의 친아버지라고 밝혔다. 그는 "잡스가 친아들이란 걸 몇 해 전 알게 됐다. 그에게 몇 차례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면서 "내 나이와 아들의 건강을 고려할 때 더 늦기 전에 만나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친어머니 조앤 심슨은 잡스를 입양시킨 뒤 잔달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4년 만에 끝났지만 잡스의 친동생 모나 심슨(54)을 낳았다. 잡스는 여동생이 있는 줄 모르다가 27세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잡스는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동생에 대해서는 1997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우리 둘은 가족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다. 그녀와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소설가인 심슨은 잡스를 모델로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평범한 사내(A Regular Guy)'를 쓰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1991년 결혼한 부인 로렌과 1남 2녀(리드·에린·이브), 23세 때 여자 친구 크리스앤 브레넌과 낳아 훗날 친자로 인정한 딸 리사(33)가 있다. 잡스는 애플 CEO로 상징적인 연봉 1달러만 받았지만 애플 주식 542만주, 디즈니 주식 1억3800만주(지분 7.4%로 개인 최대 주주) 등 재산 83억달러(약 9조8600억원)를 보유해 지난해 미국 42위 부자로 기록됐다.
스티브 잡스가 앓았던 암은 췌장암이다. 그중에서도 신경내분비종양(neuroendocrine tumor)이다. 이름 그대로 신경계와 내분비계 조직이 뭉쳐 발생한 종양이다. 내분비계는 호르몬을 생산하는 기관인데 그 부위에 신경조직이 뒤엉키면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한 것이 신경내분비종양이다. 인구 10만명당 5명 정도 생기는 희귀 종양으로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에게 더 많다. 직장과 위장에 많이 발생하고, 그다음이 대체로 췌장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송시영 교수(췌장암 전공)는 "신경내분비종양의 약 10%가 잡스처럼 다른 장기로 전이된다"며 "이때는 항암제를 써도 치료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췌장에 생기는 암으로만 치면, 신경내분비종양은 그 비율이 1%도 안 된다.
기본적으로 이 종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암(癌)은 아니다. 암은 크기가 커질수록 혈관과 림프관을 침범해 전신에 퍼지거나 다른 장기로 전이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신경내분비종양은 크기가 크더라도 발생한 그 자리에서 주로 자란다. 암이라는 말 대신 종양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태생이 원래 암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드물게 스티브 잡스같이, 이것이 암처럼 행동할 때도 있다. 종양세포가 멀리 있는 장기로 퍼져서 그곳에서 새살림을 차리는 것이다. 잡스의 신경내분비종양도 간으로 퍼져서, 2년 전 간 전체를 들어내는 간 이식을 받은 바 있다.
치료 원칙은 먼저 수술로 제거하는 것이다. 종양을 다 떼내지 못했거나 다른 장기로 퍼진 상태라면, 항암제 치료를 시도한다. 지금까지 특효로 쓰이는 항암제가 없었으나, 최근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 등에서 신경내분비종양 신약(新藥)을 개발하고 임상시험 중에 있다. 의료계에서는 스티브 잡스도 이 신약을 투여받았을 것으로 보나, 잡스의 종양이 이 신약에 반응하지 않는 유형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남긴 IT 명작들] 애플Ⅱ - 전문가만 쓰던 컴퓨터를 일반인도 쓸 수 있게 해 매킨토시 - 마우스로 아이콘 선택하는 윈도 형식 운영체제 창안 아이팟 - 음악 재생장치였던 MP3에 음원 판매 시스템 결합 아이폰 - 쓰기 편하게 스마트폰 혁신, 애플리케이션 생태계 만들어
스티브 잡스가 만들고 변화시킨 것은 매킨토시·아이폰·아이패드 같은 단순한 IT기기(器機)가 아니다. 잡스는 인간이 소통하는 방식, 음악과 동영상 등 문화를 즐기는 수단,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채널을 바꾸었다. 궁극적으로 잡스 시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애플II(1977년), 개인(個人)에게 컴퓨터를 주다
컴퓨터는 소수의 정부기관이나 대학 연구소의 전문가 집단만이 접근 가능한 대형 '설비'였다. 잡스가 애플II를 만들면서 컴퓨터가 새로운 역사의 문으로 들어섰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신에게서 불을 가져다가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처럼 잡스는 컴퓨터를 전문가의 독점물에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개인 기기로 만들었다.
애플II는 세계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다. 일반인이 컴퓨터를 쓰면서 '교육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게임'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등장했다.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용 프린터와 같이 지금은 일반화된 사무용 도구 역시 애플II에서 비롯된 것이다.
◆매킨토시(1984년), '클릭' 한 번으로 정보의 바다에 뛰어들게 하다
개인용 컴퓨터(PC) 시대가 열렸지만 PC는 여전히 사용하기 어려운 도구였다. 미리 정해져 있는 복잡한 명령어를 외워서 키보드로 입력해야 컴퓨터가 실행되었다. 잡스가 1984년 내놓은 매킨토시는 어린이까지 PC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면에 있는 아이콘을 마우스로 선택해서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지금은 일반화된 이 기능을 잡스의 애플이 만들었다.
◆토이스토리(1995년), 디지털 애니메이션 장르를 만들다
잡스는 경영권 분쟁으로 애플에서 밀려난 후 1985년 컴퓨터 그래픽 회사 '픽사'를 사들였다. 당시 픽사는 그래픽용 고성능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였다. 잡스가 주목한 것은 이 회사가 컴퓨터 판촉용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다. 픽사는 잡스의 지휘 아래 애니메이션 회사로 변신했다. 이후 내놓는 단편 애니메이션마다 오스카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뒀고 1995년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뒀다. 토이스토리 이후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일반적인 영화의 한 장르가 됐다.
◆아이맥(1998년), PC를 가전제품처럼 쉽게 만들다
잡스는 복잡한 PC를 가전제품처럼 만들었다. 아이맥 이전의 PC는 설치 과정이 복잡했다. 모니터와 본체를 여러 개 선으로 연결하고 전원선도 각각 연결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맥은 컴퓨터를 사다가 탁자에 올려놓고 코드만 꽂으면 작동한다. 본체와 모니터를 하나로 합쳐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많은 PC 제조업체들이 아이맥을 따라 코드만 꽂으면 작동하는 PC를 내놓았다. 흰색과 반투명 플라스틱으로 꾸민 겉모습 역시 PC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이팟·아이튠스(2001년), 음악을 즐기는 방식을 바꾸다
잡스는 아이팟과 함께 '아이튠스 뮤직스토어'를 만들어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이전의 MP3 재생기 회사들은 '우리는 기계만 팔 뿐 음악은 알아서 구하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음악을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장터까지 만들었다. 저장장치로 하드디스크를 채택해 많은 노래를 한 번에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이전의 MP3재생기는 불과 10여곡밖에 담을 수 없었다. 아이팟이 등장한 이후로 휴대용 카세트테이프·CD플레이어는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본격적인 디지털 음악 감상시대를 연 것이다.
◆아이폰(2007년), 손 안에 정보의 바다를 쥐게 하다
아이폰 이전에도 스마트폰은 있었다. 하지만 아이폰이 등장한 이후에야 비로소 스마트폰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전의 스마트폰은 문자 그대로 '들고 다닐 수 있는 PC'였다. PC를 쓰는 것처럼 복잡하고 에러도 잦았다. 전문가만이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잡스가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진정으로 한 손에 전 세계 네트워크가 들어왔다. 정보의 바다가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이다.
잡스는 온라인 장터 '앱스토어'도 만들어 개인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응용 프로그램(앱)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애플·개발자·사용자가 함께하는 '앱 생태계'를 만든 것이다.
앱스토어는 IT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7 OS 등에도 비슷한 온라인 장터가 있다.
◆아이패드(2010년), 태블릿PC 시대를 열다
아이패드가 나오기 전 전문가들은 '과연 키보드 없는 태블릿PC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의심했지만 잡스는 애플II로 PC시대를 열었듯 아이패드로 키보드 없는 PC시대, 태블릿PC 시대를 또 열었다.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아이패드는 최초의 쓰기 쉽고 가볍고 싼 태블릿PC였다. 인터넷·동영상·사진 등 PC에서 하는 간단한 작업을 모두 할 수 있다. 아이패드가 등장한 이후 노트북PC 수요는 급감했다. PC시대를 연 잡스는 아이패드를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PC시대의 종식을 눈앞으로 당긴 것이다.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는 아이팟(iPod)·아이폰(iPhone)·아이패드(iPad) 등을 연속 히트시키며 '혁신의 아이콘, IT업계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잡스는 쓰라린 실패도 경험했다. 그의 제품 가운데 상업적·기능적인 측면에서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제품을 정리했다.
1981년에 출시한 업무용 컴퓨터 '애플3'는 첫 번째 실패 사례로 꼽힌다. 1977년에 탄생한 전작 '애플2'가 개인용 컴퓨터(PC) 시대의 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뒀지만 뒤이어 나온 애플3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드웨어의 신뢰도가 떨어졌고 당시 PC시장에 진입한 IBM에 시장을 잠식당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AP는 전했다.
▲ 1981년 출시한 애플3(사진 왼쪽), 1998년 아이맥과 함께 내놓은 퍽마우스.
잡스는 1983년 자신의 딸 이름과 같은 컴퓨터 '리사'를 출시했다. 상업용 컴퓨터로는 처음으로 그래픽 사용자환경(GUI)을 적용하고 마우스를 도입했지만 9995달러(약 1180만원)에 달하는 비싼 가격이 문제였다. 이 컴퓨터는 1년 뒤에 나온 좀 더 저렴한 가격의 매킨토시에 자리를 내주고 빠르게 시장에서 사라졌다.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뒤 1989년에 내놓은 야심작 '넥스트 컴퓨터'도 비싼 가격 때문에 외면당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그러나 이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는 향후 매킨토시와 아이폰 운영체제의 기초가 됐다.
1996년 부진의 늪을 헤매던 애플에 '구원투수'로 복귀한 잡스는 2년 뒤 아이맥 출시로 소위 '대박'을 냈다. 하지만 이 컴퓨터에 딸린 작고 둥근 모양의 '퍽 마우스'는 크기가 너무 작고 커서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에 출시한 소형 데스크톱 컴퓨터 '큐브'는 깔끔한 플라스틱 육면체 외관을 갖춰 각종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반면 가격이 비쌌고 다른 컴퓨터에 비해 기능적으로 뛰어난 점이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디자인은 획기적이었지만 단지 이 장점 때문에 비싼 돈을 써가며 큐브를 구입할 사용자는 많지 않았다. 이 디자인은 이후 맥 미니로 이어졌지만 무난하게 가다듬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2005년 애플은 '아이튠스 폰'을 출시했다. 애플이 모토로라와 제휴해 만든 이 제품은 전화기로는 성능이 괜찮았지만 뮤직 플레이어로는 아이팟에 미치지 못했다고 AP는 전했다. 노래를 100곡밖에 저장할 수 없었고 컴퓨터에서 음악을 전송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휴대폰 네트워크를 이용해 직접 음악을 다운로드 받지 못하는 것도 단점으로 지적됐다.
애플이 2007년에 출시한 '애플TV'는 TV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설치 과정이 복잡했고 249달러(약 30만원)인 비싼 가격도 문제였다. 아이튠스에서 구입한 영화를 고화질(HD)TV로 재생할 경우 흐릿해지는 것도 단점이었다. 잡스는 생전에 애플TV에 대해 "단지 취미일 뿐"이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일은 완벽하게 판단은 냉혹하게… 그의 집엔 아인슈타인 초상화가
고(故) 스티브 잡스의 경영철학은 '극단적인 완벽주의'로 요약된다. 지난해 12월 영국의 경제전문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잡스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FT는 그의 성공 비결을 '강박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분석했다.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얽매다가 불완전한 제품을 만들곤 하는데, 잡스는 특유의 완벽주의로 독창적이면서도 흠이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잡스의 십계명은 '완벽하게 업무를 챙겨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만큼 완벽함을 중시했던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최소주의자)
애플 제품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스마트폰 아이폰은 나사 구멍 하나조차 반듯하게 들어맞아 있고, PC 아이맥은 부품을 이어붙인 흔적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잡스가 '최소의 디자인이 최선의 디자인'이라는 명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팀 쿡(Cook) 현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애널리스트들과 만난 자리에서 "애플은 사내의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에 대해 매일같이 '노(No)'를 연발하는 회사"라고 했다. 많은 것을 포기하는 대신 집중하기로 선택한 부분에 에너지를 집약해 그 부분을 세계 최고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애플의 내부 방침은 혁신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서 나온다는 잡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빈 스컬리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에 따르면, 1980년대 잡스의 집에는 침대 하나, 전등 한 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초상화 하나만 있었다. 그 외에는 흔한 장식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최소한의 완벽한 것만을 자신의 곁에 두는 완벽주의 미니멀리스트의 면모를 드러내는 사례다.
◆직원에는 냉혹, 기부에는 인색
잡스의 완벽주의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직원들에게는 냉혹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애플은 지난해 아이폰4의 전파 수신 불량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이후 잡스는 안테나 프로젝트 담당자를 조용히 해고했다. 그의 십계명에는 '채찍보다 당근을 주라'고 돼 있지만 실제 행동은 이와 다르곤 했다. 완벽한 제품에 흠결을 남긴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부에도 인색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앤드루 소킨은 "잡스의 재산은 총 83억달러나 되지만 자선기금을 냈다는 기록이 없다"며 "잡스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부자들이 최소한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자는 취지로 만든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운동의 회원도 아니며 이 운동 가입 권유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잡스는 1986년 '스티브 P 잡스'라는 이름으로 복지 재단을 만들었지만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1997년 애플에 CEO로 복귀한 후 사내 자선프로그램을 폐지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IT와 인문학의 천재적 결합…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혁신의 아이콘, 잡스] 기술과 경영의 융합 - 음악사이트 아이튠즈로 음악 비즈니스 모델 바꿔 공학과 예술의 융합 - 군더더기 하나없는 디자인, 아이폰 등 모든 제품 적용
▲ 다빈치 자화상
세계적인 경제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작년 2월 애플의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스티브 잡스 CEO를 표지모델로 등장시켰다. 표지 속의 잡스는 예수의 모습이었다. 성경 대신 아이패드를 들고 있고 '잡스의 성서(The Book of Jobs)'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잡스의 얼굴 뒤에는 예수처럼 후광이 비쳤다. 잡스의 표지 사진은 당시 신성모독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적어도 IT업계에서는 잡스가 구루(스승)를 넘어 거의 신격화될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
잡스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매킨토시 컴퓨터(1984년), MP3 플레이어 아이팟(2001년), 아이폰(2007년)·아이패드(2010년) 등을 통해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빚을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잡스를 직접 만났던 이석채 KT 회장은 올해 1월 기자간담회에서 "잡스 CEO는 혁명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이며, 그가 아프면 인류의 손실"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인문학과 IT의 '융복합'의 진수를 보여준 21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계 IT업계는 2000년대 초부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콘텐츠가 하나의 서비스로 결합하는 IT 융복합화를 구호처럼 외쳐왔다. 융복합화의 비전 아래 일본 소니가 1980년대부터 할리우드의 대형 영화사와 음반사를 인수하며 콘텐츠 분야에 뛰어들었고 일본 1위의 이동통신업체인 NTT도코모는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해 미국과 유럽의 이동통신업체 지분을 인수하며 자신들이 창안한 휴대폰용 콘텐츠 서비스 '아이모드'를 확산시키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음악 콘텐츠와 하드웨어 사이의 장벽을 깨뜨린 인물은 당시만 해도 '실리콘밸리의 이단아'라고 불렸던 스티브 잡스 CEO였다. 그는 소니처럼 수조원씩 투자해 음반사를 인수하는 대신 '아이튠즈'라는 음악 거래사이트를 만들어 단번에 온라인 음악 유통 시장을 장악했다. 엔지니어이면서 비즈니스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잡스였기에 온라인 음악거래 사이트라는 독창적인 비즈니스모델을 창안해 유통망을 장악한 것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IT 전략컨설팅업체 델파이그룹의 토마스 쿨로폴루스 CEO는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콘텐츠 중에서 애플이 직접 개발한 것은 하나도 없다"며 "애플은 이미 개발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기능적으로 잘 통합(integrate)하고 여기에 음악 콘텐츠를 결합해 새로운 서비스를 창안했다"고 말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0년쯤 그린 ‘인체 비례’ 그림에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합성했다. 잡스는 테크놀로지와 콘텐츠를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든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그래픽 이철원기자 burbuck@chosun.com
철학과 서체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인문학적인 소양은 아이팟과 아이폰의 탁월한 사용자 환경(user interface)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아이폰이나 아이팟 포장에 사용설명서가 없어도 누구든 쉽게 아이폰을 조작할 수 있고 아이폰으로 보여주는 글자들이 매끄럽고 세련돼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편집광적인 완벽주의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앤디 그로브 전(前) CEO는 "(집요한)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변화무쌍한 IT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편집광처럼 자신의 일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앤디 그로브의 교훈을 철저히 지킨 인물이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적인 CEO이면서 누구보다도 디테일(detail)에 강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도 조명이 켜지는 순서와 위치, 조도에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다. 그가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는 제품 포장지의 손잡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컴퓨터 디자인을 다시 하라고 한 적도 있다.
잡스는 탁월한 직관력(intuition)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팟이나 아이폰 등 회사의 사활이 걸린 제품을 출시할 때 단 한 번도 소비자 조사를 한 적이 없다. 그는 시장 분석이라는 마케팅의 기본 이론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의 논리는 "소비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혁신가는 무지(無知)한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내 IT 업계 한 대표는 "잡스는 자신이 내세우는 제품이나 기능을 소비자들도 좋아하게 만드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면서 "심지어 그가 억지를 부려도 애플의 팬들은 그를 두둔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구글·페이스북·삼성 등 애플 포위하며 합종연횡… IT업계 춘추전국시대로
IT업계 다극화 체제 전망, 구글이 가장 위협적 존재… 페이스북도 애플시장 잠식 아이폰 4S 반응 냉담해… 안드로이드 지배력 커질 듯
글로벌 IT 업계의 '거인'들이 일제히 '패권 다툼'에 뛰어들었다. 스티브 잡스가 사라진 IT 업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마이크로소프트(MS)·IBM·구글·삼성전자 등 주요 업체들은 활발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면서 애플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IT 업계에서는 애플의 영향력이 다소 약해지고 구글·MS 등이 세력을 키워 다극화 체제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애플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구글이다. 현재 IT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전쟁터인 스마트폰·태블릿PC에서 맞대결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플은 하드웨어·소프트웨어·콘텐츠 산업을 모두 꿰뚫으며 세상을 지배했다.
구글은 시장 판도를 바꾸기 위해 삼성전자·모토로라·HTC 등 광범위한 '우군'을 끌어들였다. 애플의 아이폰 운영체제 'iOS'에 맞서 독자 개발한 '안드로이드'를 전 세계 휴대전화 업체에 무료로 제공하는 전략으로 시장을 뒤집었다. 미 시장조사기관인 캐널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안드로이드폰의 점유율은 48%를 기록했다. 애플 아이폰의 점유율(20%)의 2배가 넘는다.
구글은 애플의 전략을 철저히 벤치마킹하고 있다. 애플이 자랑하는 콘텐츠 장터인 '앱스토어', 온라인 음악매장 '아이튠즈'와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고 경쟁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애플에 밀려 고전하던 MS도 구글의 합종연횡식 '성공 방정식'을 따랐다. 안드로이드 진영에 속한 휴대전화 제조사들을 MS 진영으로도 끌어들인 것이다. MS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막강한 특허를 무기로 삼성전자·HTC에 공세를 취한 끝에 차세대 스마트폰을 공동개발한다는 제휴를 맺었다.
세계 최대 휴대폰 업체 노키아도 MS 진영에 속해 있다. 한국MS의 김제임스우 사장은 "MS의 윈도폰 운영체제는 PC와 사용환경이 비슷해 사용하기 쉽다는 것이 최대 강점"이라며 "스마트폰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PC사업을 버리고 IT서비스와 중대형 컴퓨터 사업에 집중하고 있는 IBM은 애플·구글·MS 등과 모두 파트너 관계를 갖고 있다. IBM은 특정 회사와 대결 구도를 형성하기보다는 직접적인 대결은 피하고 실리를 취하는 전략을 쓴다. IBM 관계자는 "우리가 제공하는 전산 시스템이 없으면 주요 기업의 인터넷 서비스가 거의 운영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도 IBM과 비슷한 전략이다. MS와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PC시대를 지배했던 인텔은 최근 애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애플에 필요한 반도체를 제공해 시장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세계 최대의 소셜네트워크(인맥관리) 사이트 페이스북은 애플의 시장을 야금야금 차지하고 있다. 친구들과 안부를 묻는 기능으로 시작한 페이스북은 점차 사업 영역을 넓혀 온라인 음악·영화 서비스까지 진출했다.
애플 이외 기업들끼리 혈투를 벌이기도 한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계의 강자 오라클은 구글을 상대로 특허소송을 진행 중이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자사의 소프트웨어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 세상을 바꾼 남자] "애플, 잡스를 대체할 사람은 없다" IT 전문가들 회색빛 전망
잡스 잃은 애플의 운명은 당분간 현 위상 유지할 듯… 장기적으론 걱정스러운 눈길 팀 쿡 등 '잡스의 아이들' 충돌 없을지도 미지수
세계 최대의 IT(정보기술) 기업으로 승승장구해 온 애플이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사망으로 사상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파산 위기의 애플을 살려내고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재탄생시킨 주역이 바로 '창조 경영의 아이콘' 잡스였기 때문이다. 미 뉴욕타임스는 5일(현지시각) "잡스 없는 애플이 유례없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잡스는 지난 8월 24일 건강 문제로 최고경영자(CEO)직을 자진 사임하고 이사회 의장을 맡기로 했다. 이후 애플은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을 CEO로 임명하고 집단지도 체제로 회사를 꾸려왔다. 디자인 담당 조너선 아이브, 재무 담당 피터 오펜하이머, 마케팅 담당 필립 실러 등 8명의 수석 부사장이 각자 자신의 영역을 맡고 팀 쿡이 이를 조율하는 형태였다.
지난 4일 열린 애플의 신형 스마트폰 '아이폰4S' 발표회는 그동안 잡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줬다. 기능과 디자인을 확 바꾼 신제품이 아니라 기존 제품의 기능만 일부 수정해 내놓았던 것. 잡스의 총지휘 아래 1년마다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프레젠테이션도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팀 쿡은 초반에 간단한 인사말만 했고 신제품과 주요 서비스는 담당 부사장들이 발표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좌중을 휘어잡았던 잡스의 프레젠테이션과 달리 별다른 감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1~2년간은 큰 변화 없이 지금 위상을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잡스가 이미 하드웨어·소프트웨어·콘텐츠를 합친 'IT생태계'를 완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하지만 중장기 전망에 대해서는 걱정스러운 눈길이 훨씬 많다. 우선 집단지도 체제를 구성하는 이른바 '잡스의 아이들'이 의견 충돌없이 협조가 잘 될지 미지수다.
오프라인 매장인 애플스토어를 성공시킨 론 존슨은 최근 JC페니 백화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 컴퓨터용 소프트웨어 책임자인 버트란드 설렛도 지난 3월 회사를 떠났다.
잡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애플이 삼성전자에 특허소송을 제기한 것도 경영진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내부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세상을 지배해온 애플의 그동안 행보와는 달랐다.
컨설팅업체 엔더리그룹의 로브 엔더리는 "월트 디즈니가 사라진 디즈니, 빌 게이츠가 없는 마이크로소프트 등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기업들은 대부분 과도기를 거치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마법도 함께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도 "미래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스티브 잡스를 100%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고 평가했다.
애플은 내년 초 아이패드와 아이폰 신제품을 추가로 발표할 예정이다. 경영진이 잡스의 공백을 잘 메운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때도 실망스러운 제품이 나올 경우 시장과 애플 열성팬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다.
또 새 경영진은 잡스가 생전에 구상하고 끝내 마무리 짓지 못한 제품과 서비스를 완성해야 한다. 음악과 영화를 인터넷 서버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사용하는 아이클라우드,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보는 아이TV 등이 그것이다.
삼성·LG의 신형 LTE폰… 아이폰4S보다 액정화면 크고 데이터 교환 속도 5배 빨라 팬택은 동작인식 기능 탑재, LG는 3D 등 신기술로 대반격
6일 오전 8시 50분 수원삼성전자 디지털시티 R2(디지털미디어센터 연구소) 건물 4층 IP(지적재산권) 법무팀 사무실. 모든 직원이 전화를 들고 잡아 놓았던 외부 미팅과 약속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애플 창업자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긴급회의를 연 것이다. IP 법무팀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법원에 삼성전자가 낸 애플의 신형 아이폰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다.
◆"애플 따라 하기는 끝났다"
잡스가 이끄는 애플은 2007년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5년간 세계 휴대전화 업체들이 한 일은 사실상 '애플 따라 하기 경쟁'이었다.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나 아이폰과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가'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좋은 스마트폰(PC 기능을 가진 휴대전화)의 기준은 '얼마나 아이폰과 비슷한 디자인과 기능이 있는가'였다. 그러나 지난 8월 잡스가 은퇴를 선언한 이후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 삼성전자는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건물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인 갤럭시2 LTE 발표식을 열었다(사진 위). LG유플러스는 지난 6월 세종문화회관에서 현재 주로 사용하는 3세대 이동통신서비스보다 5배 빠른 4세대 이동통신(LTE) 서비스를 시연했다. 행사 도우미가 벽에 걸린 LG전자 TV와 손에 든 태블릿PC로 화상통화를 시연하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AP
잡스가 세상을 뜨기 하루 전인 5일 애플이 발표한 신형 아이폰은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잡스가 없는 애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아이폰4S는 삼성전자가 지난달 출시한 '갤럭시S2 LTE'보다 액정 화면이 1인치 작다. 프로그램을 돌리는 속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앙처리장치(AP) 속도는 갤럭시S2 LTE가 1.5배 빠르다. 데이터를 주고받는 속도도 갤럭시S2 LTE가 이론상 5배 빠르다. 애플이 신제품을 발표한 직후 열린 삼성전자 사장단 회의에서 "이 정도 제품이라면 굳이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다. 삼성전자 최지성 부회장의 아이폰4S에 대한 첫 평가는 "실망스럽다"는 것.
팬택 임성재 전무는 6일 회사의 새로운 스마트폰 '베가 LTE'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휴대전화 업계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분이 돌아가셨다"고 잡스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베가LTE는 아이폰을 겨냥한 제품이었다. 팬택은 베가 LTE가 어제 발표한 아이폰4S를 포함한 세계 모든 휴대전화 가운데 화면이 가장 선명한 제품이라고 밝혔다. 베가 LTE의 해상도(102만4000픽셀)는 아이폰4S(61만4400픽셀)의 약 1.8배다.
◆이젠 애플 뛰어넘기 경쟁
팬택은 또 베가 LTE는 세계 최초로 사람의 움직임을 인식해 동작하는 카메라가 달린 제품이라고 덧붙였다. 화면을 두드리지 않아도 카메라 근처로 손을 가져가기만 하면 전화를 받을 수 있다. 베가 LTE로 전자책을 볼 땐 액정에 손을 대지 않고 허공에 저어서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애플이 자랑하는 특허 기술이 바로 두 손가락으로 액정 화면을 만져 화면을 조정하는 멀티 터치 기능이다. 베가 LTE는 애플의 멀티 터치 특허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제품이다. 이 '동작 인식 기능'은 명백히 애플을 겨냥한 것이란 평가다.
▲ 미국 CNBC는 6일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주가가 급등했다는 내용을 방송했다. /AP 뉴시스
LG전자가 지난 5월 출시한 옵티머스3D는 중앙처리장치 속도는 아이폰4S와 같지만 안경을 쓰지 않고도 3D 영상을 만들고 볼 수 있는 제품. 또 LG전자는 다음 주 아이폰4S보다 데이터 송수신 속도가 5배 빠른 옵티머스LTE를 출시한다.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하는 주기는 대체로 1년이었다. 그것이 이번 아이폰4S에서는 16개월로 늘었다. 전작인 아이폰4는 작년 6월에 나왔다.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업체들의 신제품 출시 주기는 애플을 압도한다. 삼성전자는 연간 스마트폰을 50여종 개발해 출시하며, LG전자도 연간 15~16종류의 신제품을 낸다. 1년~1년 6개월에 단 한 제품만을 내는 애플로선 상상하기 힘든 속도다.
애플이 아이폰4S처럼 실망스러운 제품을 내놓는다면, 삼성과 LG의 역공을 막기 힘들다는 평가다.
신영증권 이승우 IT팀장은 "지금까진 잡스가 이끄는 애플이 업계를 선도하면서 공격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한국 기업들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콘텐츠 시장 흔들] 저가 태블릿PC 만든 아마존, 애플과 맞먹는 콘텐츠 파워 페이스북, SNS·음악 연계… 구글도 막강 e북으로 도전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지난 10년간 실리콘밸리(IT 산업)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디지털 콘텐츠 패권(覇權)을 장악했다.
2001년 등장한 아이튠스(iTunes)는 "디지털 음악 1곡은 99센트"라는 메시지와 함께 음악을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애플은 세계 디지털 음악 유통의 70~80%를 장악한 독점 업체다. 애플의 음악 관련 매출(아이팟 액세서리 매출 등 포함)은 올 1분기에만 16억3000만달러(약 1조9400억원)에 달했다. 아이튠스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TV프로그램·e북 등 모든 종류의 콘텐츠를 디지털로 만들어 팔고 있다.
잡스가 사라진 애플이 디지털 콘텐츠 시장 주도권을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다.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업체 페이스북 등이 거세게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닷컴은 최근 199달러짜리 초저가 태블릿PC '킨들 파이어'를 선보였다. 저가로 태블릿PC를 대량 보급해 자사의 디지털 콘텐츠 가게 '아마존 스토어'의 고객을 늘리겠다는 것. 아마존 스토어는 디지털 음악 1700만곡과 e북 100만권, 영화·TV프로그램 10만편을 보유하고 있다. 애플의 아이튠스(음악 1800만곡, e북 20만권, 영화·TV프로그램 6만편)에 밀리지 않는 콘텐츠 파워다.
전 세계에 8억 명 이상의 이용자를 가진 페이스북도 애플 자리를 노리고 있다. 페이스북은 최근 유럽의 디지털 음악 업체 스포티파이와 제휴했다. 페이스북은 음악을 구매하면 본인뿐 아니라 친구 관계를 맺은 다른 가입자들과 함께 들을 수 있게 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
안드로이드마켓을 앞세운 구글도 강력한 도전자다. 구글은 삼성전자·HTC 등 스마트폰 제조업체와 손을 잡고 이들의 스마트폰을 통해 앱(응용프로그램) 수십만개를 판매하고 있다. e북 수백만권을 보유한 구글은 안드로이드마켓을 이용해 디지털 콘텐츠 시장에 진입할 전망이다.
▲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5일 미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애플 매장에‘bye(안녕)’라는 글씨를 새긴 사과가 놓여 있다. 잡스 별세 이틀째에도 전 세계에서 추모물결이 이어졌다. /AFP 연합뉴스
전 세계가 스티브 잡스 애도(哀悼) 열기에 휩싸여 있다.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시(市)에 있는 애플 본사와 인근 자택은 물론, 런던·모스크바·베이징·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등 세계 주요 도시에 있는 애플 스토어에도 수많은 애플 마니아, 잡스 팬이 몰려와 조화(弔花)와 추모 글을 남겼다. 추모 성명을 발표한 명단에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빌 게이츠MS 회장,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마이클 델 델컴퓨터 CEO,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제리 양 야후 창업자,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 등 정·재계 글로벌 리더가 망라돼 있다. 애플의 강력한 경쟁사였던 구글도 초기 화면의 검색창 바로 아래 그의 이름 'Steve Jobs 1955~2011'을 내걸었다.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던 일본의 대표 기업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나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비운의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전 세계적인 추모 열기는 아니었다. 더구나 정치인들의 죽음에서 이러한 애도 물결은 최근 수십년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 한 창업가의 죽음에 전 세계가 이처럼 안타까워할까.
◆"결합으로 세계인의 삶을 바꿨다"
성균관대 정태명 교수(소프트웨어학과)는 "잡스의 업적은 공학과 인문학, 예술이라는 극(極)과 극의 완전히 다른 분야를 하나로 절묘하게 융합했다는 것"이라며 "그 덕분에 애플 제품은 철저히 소비자의 눈에 맞춰 설계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융합하는 국가와 국민은 흥하고, 융합하지 못하는 국가와 국민은 망한다는 게 잡스 메시지의 핵심이다.
▲ 동양과 서양, 그 한가운데에… 스물일곱살 잡스 - 가부좌를 튼 청년이 손에 찻잔과 책을 든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집중’의 힘이 느껴진다. 방에는 전등과 오디오, 몇 장의 LP 말고는 아무 장식도, 가구도 없다. 절제된‘단순함’이다. 1982년 어느 날 자택에서의 27살 스티브 잡스다.“ 내가 반복해서 외우는 주문 중 하나는 집중(focus)과 단순함(simplicity)이다. (집중을 통해) 일단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이처럼 통찰력과 혜안이 있는 그와의 때 이른 작별, 우리가 어찌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잡스가 미 리드대학 청강생 시절에 서체 공부에 푹 빠져 있지 않았다면 매킨토시 컴퓨터와 아이폰의 유려한 글자체, 입력 방식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잡스는 기능이 많고, 복잡할수록 좋은 IT 제품이라는 기존 통념을 완전히 깼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도 조작이 어려우면 소용없다는 것인데, 융합적 사고의 바탕 없이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실제 아이팟은 심플한 디자인에 복잡한 기능을 모두 제거한 단순함으로 단번에 세계 MP3 플레이어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아이폰은 컴맹조차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 환경(user interface)으로 2007년 6월 출시 후 2년 만에 세계 모바일 트렌드를 바꾸어 버렸다.
잡스는 인생 자체가 예술가의 삶이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토이스토리 같은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과 온라인 음악 비즈니스(아이튠즈)를 창안했다. 지식경제부 조신 정보통신 디렉터(R&D전략기획단)는 "예술가적 기질이 없다면 음악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시대의 아이콘(상징)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며 "어떻게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예술가의 삶"이라고 말했다.
▲ 닮은 듯 달랐던 두 천재의 꿈 -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일한 문제는 취향(taste)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생산한 제품에 문화를 넣을 줄 모른다는 거죠.”스티브 잡스(왼쪽)는 동갑내기이자 IT업계 라이벌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오른쪽)를 존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91년 모습이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콘텐츠의 가치를 재발견"
잡스는 소프트웨어와 앱스토어(각종 응용프로그램을 사고파는 인터넷 거래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단일 시장을 새롭게 창출했다. 이 역시 온라인과 모바일, 그리고 콘텐츠를 하나로 엮는 융복합화의 결실이었다. 이제 전 세계의 앱 개발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별다른 제약 없이 앱스토어에 개발한 콘텐츠를 올려놓고 판매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앱스토어를 기반으로 한 모바일 앱 시장 규모는 매년 70~80%씩 성장해 올해 38억 달러(약 4조5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시장조사기관 아이서플라이 자료)
이석채 KT 회장은 "모바일을 기반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한 거대한 단일 시장을 창출하고 콘텐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야말로 잡스가 일군 혁명"이라며 "콘텐츠 분야에 새 투자와 일자리가 생기고 나아가 세계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융복합화는 이미 글로벌 IT 업계에서는 미래의 흥망을 가르는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기술 기업의 대표 주자격인 구글은 올해 채용 대상 6000명 중 5000명을 인문학 전공자로 채용하며 연구 개발의 융복합화를 추진하고 있고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도 각종 제품 디자인과 제품 개발 때 인문학의 상상력을 접목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황창규 지식경제부 R&D 기획단장은 "융복합 산업은 미래 먹을거리 창출의 최대 보고"라며 "더 이상 단일 제품의 경쟁력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며 융복합 산업에 경제 국운(國運)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 늘 바빴고, 바빠야 했는지 상냥한 목소리로 사과하고 이해 도우려 전기 집필 허락 지인들과 초밥집서 작별 모임… 애플에 아이폰4S 충고도
스티브 잡스는 세상을 떠나기 몇주 전 이미 계단을 혼자 오르내릴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고 잡스의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잭슨이 밝혔다. 아이잭슨은 6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잡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1층 침실에서 극심한 통증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주택의 침실은 대부분 2층에 있는데 잡스의 건강이 계단을 오르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돼 2층 침실을 1층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잡스의 정신은 또렷했고 유머는 생동감 있었다"고 아이잭슨은 전했다.
잡스는 생의 마지막 시간 대부분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고 NYT는 전했다. 잡스의 누이인 모나 심슨은 "마지막 몇주일 동안 스티브는 애플과 네 자녀 그리고 아내 생각뿐이었다"며 "자신이 이들의 곁을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힘들어했고 이들에게 상냥하게 사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 마지막 뒷모습…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운데)가 별세 전 아내 로렌(왼쪽), 아들 리드가 지켜보는 앞에서 승용차 옆 휠체어에 앉아 있다. 혁신·창조성의 표상인‘구루(스승)’의 굽은 어깨가 안쓰럽다. 스티브 잡스가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드러낸 모습이라고 외신이 전한 사진이다. /퍼시픽코스트뉴스
평소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잡스가 전기 집필을 허락한 것은 자녀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잭슨은 "잡스는 '나는 아이들과 늘 함께하지 못했다. 아빠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아빠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이들이 이해해줬으면 한다'고 고백했다"고 전했다.
잡스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지난 2월이었다. 그는 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털어놨다. 이들은 또 지인 몇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해서 잡스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상당히 많은 잡스의 지인들이 알게 됐다. 그래서 잡스가 사망하기 몇주 전부터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에 있는 그의 집엔 그와 작별하기 위해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NYT는 전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그냥 돌아가야 했다. 잡스의 부인 로렌이 "남편이 너무 피곤하다"며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 맨발의 잡스, 정원의 로맨스… 스티브 잡스와 로렌 파월 부부가 1997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팰러 앨토의 자택 마당 의자에 앉아 있다.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잡스는 아주 가까운 지인들과는 개별적으로 작별 모임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단골 식당인 팰러앨토의 초밥집 '진쇼'에 내과의사이자 예방보건 전문가인 딘 오니쉬를 초청해 함께 식사했고, 벤처투자자인 존 도어, 애플 이사회 멤버인 빌 캠벨, 디즈니사의 로버트 아이거 CEO 등과도 만났다. 또 애플 경영진에 지난 4일 있었던 아이폰 4S의 제품 발표회와 관련한 충고도 했다고 한다.
한편 애플은 잡스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며칠 전 해당 지역 경찰에게 순찰을 강화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7일 보도했다. 캘리포니아 팰러앨토시 경찰 산드라 브라운 대변인은 "이번 주 애플 대변인측이 곧 잡스가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통보해 와 애플측과 미팅을 가졌다"고 밝혔다. 경찰은 당시 잡스가 사망할 경우 그의 집 주변에 조문객이 대거 몰릴 것에 대비해 순찰 인력을 추가로 파견할 계획을 세웠었다고 밝혔다.
스티브 잡스(56)는 ‘나쁜 남자’였다. 젊은 시절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내 딸이 아니다”라며 부인하고 양육비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 가정적인 아버지로 변모했다. 이웃에게 그는 아이들을 위한 기괴한 핼러윈 복장도 마다 않는 아저씨였다.
잡스는 고교시절부터 동거하던 여자친구 크리스 앤과의 사이에서, 1978년 딸 ‘리사’를 낳았다. 하지만 23세의 잡스는 리사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양육비조차 주지 않아 미혼모인 앤이 정부보조금을 받아 근근이 아이를 키웠다. 10년 뒤 리사가 성장하고 친자 확인 소송이 제기되고 나서야 그를 자신의 딸로 리사를 받아들였다.
▲ 스티브 잡스의 딸 '리사'
그는 1991년 로렌 파웰과 결혼했다. 자녀는 리사를 포함해 모두 4명. ‘나쁜 남자’였던 잡스는 정식으로 가족을 이루면서 점점 가정적인 면모를 가지게 된다.
수년 전 아들 졸업식장에서 잡스를 보았던 수필가 리센 스트롬버그는 그를 ‘자상한 아버지’라고 전했다. 스트롬버그는 뛰어난 CEO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자녀 셋을 둔 동네 아저씨(리사가 제외됨)”를 보았다고 했다.
스트롬버그는 “몇 년 전 수영장 파티 때 처음 보고선 당황해 아무 말도 못했다”면서 “그의 첫인상은 아이들과 수영을 즐기는 평범한 좋은 아빠였다”고 했다. 그는 학부형으로 수업을 참관하던 학부모이자, 집주변에서 아들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있던 아버지로 잡스를 기억했다. 핼러윈 파티 때는 집을 으스스한 유령 소굴로 꾸민 채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으로 변장해 있기도 했다.
가족은 안중에도 보이지 않는듯했던 잡스가 변한 이유에 대해 “암 투병 이후 가족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잡스의 개과천선은 암 투병이 시작된 2004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설적 컴퓨터 ‘매킨토시’를 출시하기 전 딸 리사의 이름을 딴 ‘애플 리사’를 출시했다. 비록 이 모델은 잡스 생애 최고의 실패작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에게 화해의 메시지 전달을 제대로 전달하게 된 셈이었다.
외신들은 잡스의 행적이 그의 친아버지와 닮은꼴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친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도 대학원 시절 잡스를 낳고 바로 입양시켰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8월, 아들을 향해 공개의 화해 메시지를 보냈다.
이웃 사는 수필가, 온라인 신문에 '나의 이웃 잡스' 기고 "아들, 졸업장 받으러 나갈땐 눈물이 뺨 타고 흐르더라"
"자기 아들의 고교 졸업식장에서 본 스티브의 모습을 기억하렵니다. 아들이 졸업장을 받으러 걸어나갈 때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내렸지만 입가엔 자부심과 미소가 그득 번졌지요."
지난달 24일 애플 최고경영자(CEO)직을 물러난 스티브 잡스(56)의 팰러 앨토(미 캘리포니아 서부 도시) 이웃인 수필가 리센 스트롬버그가 지역 온라인신문에 기고한 글 '나의 이웃, 스티브 잡스'가 포브스·포천 등에 인용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그녀는 이 뛰어난 CEO 이면에 숨어 있는 '자녀 셋을 둔 동네 아저씨'의 면모를 본 대로 서술했다.
스트롬버그는 "몇 년 전 수영장 파티 때 처음 보고선 하도 당황해 아무 말도 못했다. 그의 첫인상은 아이들과 수영을 즐기는 평범한 좋은 아빠였다"고 했다. 그녀는 학교 행사 때 같은 학부형 자격으로 수업을 참관하던 잡스를 두 번째로, 집 주변에서 청바지와 검정 티셔츠 차림으로 아들과 대화에 푹 빠져 걷는 그를 세 번째로 보았다고 말했다.
스트롬버그는 "그로부터 얼마 뒤 핼러윈 때 스티브는 자기 집을 으스스한 유령 소굴로 꾸민 채 프랑켄슈타인 모습으로 변장해 있었다"고 말했다.
스트롬버그는 "잡스가 회사 운영회의에 참석하러 근처에 왔을 때 길에서 마주치게 돼 내가 인사와 미소를 건네면 늘 답례를 했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 달라졌다. 산책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고 걸음이 느려졌으며 웃음기가 사라졌다. 올해 초 스티브가 그의 아내 로린과 손잡고 거리를 걷는 모습에서 뭔가 달라졌음을 알아챘다"고 했다.
잡스는 2004년 췌장암 수술, 2009년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잡스의 존재감을 증명하듯 그의 건강이상설이 터져 나올 때마다 애플 주가는 엄청난 낙폭을 기록했다. 재산에 비해 자선(기부) 규모는 '짜다'는 혹평도 있었다.
록스타 보노(밴드 'U2'의 리드싱어)는 "잡스는 시정(詩情) 가득한 예술가이자 기업가였다"고 말했다. 보노는 "83억달러를 가진 억만장자(잡스)는 그리 대단한 자선가가 아니었다"는 칼럼을 실은 뉴욕타임스에 반박 글을 실어 "아프리카 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퇴치운동 취지에 대해 설명하자, 잡스가 '사람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했고 애플은 가장 많이 기부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