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나’의 존재 인식과 시적 진실
--김남혜 시집 『상처는 가슴 속에 남아』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나의 삶 나의 인생’과 존재의 인식
현대시의 발상이나 동기는 대체로 ‘나’를 중심으로 생성하는 정서와 사유(思惟)에서 발원하는 특성이 있다. 이는 나의 사고(思考) 중심에서 흐르고 있는 의식이 나와 직접 상관하는 자아의 형태가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하는가에서 작품의 상황이 설정되고 전개하는 시법(詩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인 구도는 그 시인이 삶을 통해서 체험한 다양한 행로들이 상상력을 통해서 재생하면서 창출된 이미지가 그의 시적인 원류가 되고 나아가서는 그 시인이 추구하려는 주제의 정립으로 적시되는 경우를 흔하게 대할 수 있게 한다.
여기 김남혜 시인이 상재하는 시집의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이와 같은 관점을 먼저 상기하는 것은 ‘나’라는 주체가 삶의 중심에서 실제로 접하게 되는 현실 생활(real life) 즉 우리 인간의 칠정(七情-희노애락 애오욕)에서 야기하는 심리적인 변화가 이미지로 생성하는 발원지가 되기에 우리는 시창작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직이 근대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우리들 삶에서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서 이상(理想)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시인들은 우리의 오감(五感)을 통해서 다변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를 통한 정서의 지향과 사유의 정점이 어떻게 유동(流動)하느냐에 따라서 시인들이 창조하는 시의 위의(威儀)나 그 본령(本領)이 어떤 형태로 현현되느냐 하는 시법이 명징(明澄)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아련한 추억 속으로 떠나는
끝없는 나락 속에 내가 있다
숱한 시간을 뒤로하고
떠나는 나만의 세계
먼 산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마저도 내 마음을 아는지
안갯속에 감추어진 모습
그 속에 내 모습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은
어두운 맘은 왜일까
그곳엔 보이지 않는
나만의 향기
사랑이 숨어 있기 때문인가 봐
--「나만의 향기」 전문
김남혜 시인은 ‘나’라는 자아의 존재 인식에 대한 깊은 애정 곧 자애(自愛)의 순정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나만의 향기’를 통해서 지나간 시간의 추억에서 음미하는 향기는 안개 속에 ‘내 모습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은 / 어두운 마음’을 이제사 인식하는 자아 탐구에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가 ‘끝없는 나락 속에 내가 있다’는 아련한 심리가 이제 ‘나만의’ 인생 행로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바로 시를 통해서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시의 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이해하게 하고 한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나’라는 명제는 ‘이드(id)', 자아, 초자아라는 세 단계의 구성으로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것을 퍼스낼리티(personality)라 해서 각각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에서 합리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 이드는 어떤 충족을 위한 갈망(쾌락 원리-원초적 또는 최초의 생활 원리)을 말하고 자아는 이러한 쾌락 원리를 배제하고 현실적인 생활 방식에 적응하면서 인내와 규범을 인식하는 심리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초자아(超自我)는 쾌락보다는 완성된 인간을 지향하면서 선과 악, 덕과 죄를 구분하는 도덕률에 근원을 둔다.
여기에서 김남혜 시인의 ‘나’는 어떤 형태의 자아의식으로 발현되고 있는가. 그가 추구하는 ‘나만의 향기 / 사랑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주제를 획인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인 존재의 인식은 정신적인 주체로써 그의 시적인 진실 탐색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커피 향기 멀리 모두
잃어버린 지금 나는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 되어가고
나의 삶 나의 인생
모두가 향기 없는 커피가 되어가니
어찌할거나 이 아픔을
뉘 어히 막을 수 있나
기다림을 모르고서
기다려 주지 않고
모두는 떠나가니
영원은 없는 것을
부질없이 가고 오다
만나고 헤어짐에
한평생을 어찌 알까.
--「약속」 전문
한편 김남혜 시인이 갈구(渴求)하는 ‘나의 삶 나의 인생’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그의 자아 의식의 지향점은 무엇인가를 구명(究明)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이 향기를 상실한 아픔을 감내하고 있다. 다시 그는 ‘한평생을 어찌 알까’라는 삶과 생에 대한 의문이 그의 뇌리에 가득하다. 이를 해소하는 해법을 찾기 위해서 향기 없는 커피에 비유하면서 기다림과 만남과 헤어짐 등에 대한 심정이 하나의 ‘약속’으로 기대하면서 나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나와 삶에 대한 심리적인 분사(噴射)는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흥미롭다. 여기 이 시편들에서 그의 다채로운 삶에 대한 향방을 통한 사유에서의 시적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내 삶의 물굽이 길에는 늘 / 천둥번개 몰아친다 / 난 바다 깊은 태풍을 뚫고 / 모세의 길잡 이 따라 바다가 열리듯 / 안맹이 눈을 뜨듯(「여명」 중에서)
-내 삶의 동반자들 모두 잠재우고 / 내일을 열어가는 봉사자로 / 열정적인 몸부림에 허벅지 가 호젓하다(「야생마의 길」 중에서)
-삶이 무섭고 괴로워 / 찬바람 끌고 와 밀면 / 깨끗한 맑은 햇살에 / 꽃향기 가득한 대지에 서 / 흙냄새 풍기는 손을 잡고 / 우리 모두 웃으며 /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리라(「흐려진 아침」 중에서)
-나의 삶에 작은 여울 남기고 / 홀연히 떠난 사람 / 장마 빗속으로 사라지니 영영 볼 수 없 네(「빗속으로 떠난 사람」 중에서)
-긴 산 그림자 다가와 / 땀 흘려 지내온 도시의 삶 / 바람소리에 옷고름 풀고 / 언덕 위에 누워 지친 몸 / 풀 냄새와 들꽃에 엮어(「여름 휴가」 중에서)
-바람결에 날아가듯 저만치 / 날려 보내니 내 삶의 묶은 때 / 조금씩 바람 속으로 날아가는 구나 (「삶의 슬픔 역사를 내세우면서」 중에서)
-내 인생은 / 돌고 돌아가는 바쁜 삶이다. // 어디서 왔을까? / 또는 어디로 가고 싶을까? / 바람이 부는 대로 / 그 끝이 어딘지는 나도 몰라(「선풍기 인생」 중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 들으며 / 내 삶 속의 아픔의 세월 뒤돌아본다 / 철석 이는 파도에 삶의 찌꺼기 날려버리고(「주문진 바닷가에서」 중에서)
-당신의 불꽃같은 삶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 꿈이 성취될 때 더욱 열심히 나아가라고 / 달 리는 삶 멈추지 말라고(「불꽃같은 삶」 중에서)
-내 생에 가장 / 사랑했던 그리운 사람 / 내 삶에 영원히 잊지 못할 / 아름다운 호숫가를 그 려 보면서(「내 생애 가장 아름다움 사람」 중에서)
2. ‘세월’과 동행하는 인생 여정의 애환
김남혜 시인의 인생 여정에서 ‘세월’과 동행한 삶의 여적과 애환을 통한 시간성에서 탐색하는 시적인 진실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고 있다. 이는 그가 살아온 행로에서 감지하거나 그렇게 감득한 추억에서 회상하거나 반추해보는 자전적인 기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세월이 흘러 옛날 이야기지만 / 어릴 적 그때 그 얼굴들 // 아련히 추억 속에 떠오르니 / 그때 그 사람이 보고파온다(「그때 그 사람」 중에서)’라는 어조와 같이 아련한 옛날 이야기에서 보고 싶게 재현되는 ‘그때 그 사람’을 우선적으로 세월의 중심에 설정하는 것은 그의 인생여정에서 지금도 불망(不忘)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정감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정지된 곳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잊히지 않는 삶의 뒤안길
얼마나 많은 날 가슴 아파했는가
사랑했지만 잊어야 했던
너무나 가슴 아픈 길고 긴 여정
아름답게 살아온 삶도 아닌데
가슴 속에 묻어 잊히지 않는 상처
너무나 사랑했기에 아파했지
어쩜 초라했던 그때 그 시절
지금도 생각해보니 아픈 상처로
세월 속에 묻혀 사라져 갔지만
가슴 한곳에 남아있는 사랑의 상처
정말 잊을 수 없기에 그때를 생각하며
가슴에 남아있는 언저리 세월의 향기로 나려 보낸다
--「잊을 수 없는 삶의 아픈 추억」 전문
그렇다. 김남혜 시인은 이와 같은 아픈 추억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잊혀지지 않는 삶의 뒤안길’에서 감수(感受)한 ‘너무나 가슴 아픈 길고 긴 여정’은 그의 ‘가슴 속에 묻어 잊히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지만 그에게서는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인생 역정(歷程)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 속에 묻혀 사라져 갔’으나 아직도 그 사랑의 상처는 ‘가슴에 남아있는 언저리 세월의 향기’로 회억(回憶)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의 결론적인 시법은 영국 시인 워즈워스의 말처럼 시는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두기 때문에 ‘세월의 향기’는 김남혜 시인에게서 애틋한 미감의 메시지를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가슴 아파하며 지냈는가 / 머나먼 길 광명의 길 찾으려 / 낯선 타향 땅에서 // 살아온 세월이 얼마였나 / 그 낯선 땅의 주인으로 / 살아온 세월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네(「낯선 땅의 주인으로」 중에서)’라는 동일한 시상(詩想)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는데 ‘세월=아픔’이라는 등식으로 그의 내면 심저(心底)에 각인되어 있는 인생론을 대하는 것 같은 공감울 유발하고 있다.
고고하게 한자리에서
변하지 않은 강산을 지키며
오고 가는 손 반겨주며
비바람 몰아쳐도
흐르는 세월 따라 역풍을 막고
나그네에게 이정표 되며
옛날을 증언하며
말없이 영원히 자리 지키네
여실하게 늘 푸른 산천
낮이나 밤사이
눈이 내리면 흰옷을 입고
바람결에 흰 눈을 뿌려
차가운 밤하늘의 파수꾼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아침햇살 떠오를 때면
지켜온 세월 곱구나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 전문
김남혜 시인은 풍상(風霜)을 음미하면서 ‘흐르는 세월’에서 근엄하게 도출한 결론적인 주제는 바로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는 비장한 메시지를 적시하고 있는데 이는 세월이라는 시간성이 제공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인생론으로 대칭하려는 가치관의 여망이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 개의 바위로서 ‘고고하게 한 자리에 서서’ 무변(無變)의 강산에서 고적(孤寂)하게 ‘나그네에게 이정표’로 ‘말없이 영원히 자리 지키’면서 과거를 증언하려는 메시지는 바위라는 이미지와 세월이 복합적으로 우리 인생들의 애환을 증언하려는 그에게 내재된 예언적인 정감이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갈길이 멀어진 / 길 잃은 나그네 / 하염없이 눈물지며 / 베풀지 못한 긴 세월 / 애절한 맘 달래는데 // 황혼빛은 언덕위에 누워 / 긴 산 그림자에 기대 / 여울진 갯 고갯길을 넘고 / 들러오는 냇물소리 산장을 때려 / 산사의 풍경소리 단잠을 깨우네(「개여울 중에서)’라는 어조에서는 앞에서 한 개의 바위로 서 있던 화자가 이제는 ‘길 잃은 나그네’로 변신하여 ‘베풀지 못한 긴 세월’을음미하고 있다.
이처럼 세월의 시간성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행로에 동반하면서 희로애락의 정감과 동일하게 사유의 폭을 확대하고 있어서 세월은 곧 인생이라는 대칭점을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3. 오매불망 ‘그리움’의 진원지 탐색
김남혜 시인의 정서와 사유에는 천성적으로 잠재한 ‘그리움’의 DNA가 무시(無時)로 생성하고 있다. 그는 생애에서 오매불망(寤寐不忘)하는 그리움의 진원지는 바로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 누구나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에 심취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끼마는 특히 시인들은 나의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가 작품으로 승화하는 현상을 자주 대하게 된다.
이러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법은 김남혜 시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해토머리 눈물은 / 해넘이 붉은 수평선까지 / 불효자 청개구리 사모하다 열반에 드신 / 그런 울 엄마가 그립다.(「해바리기 울엄마」 중에서)’는 애절한 심정의 토로(吐露)는 ‘퍼내고 퍼내어도 / 마름 없이 솟아나 샘솟는 모정’에 대한 진정한 효심이 깃든 한 편의 사모곡으로 작품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의 원로 김남조 시인도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 지체없이 강렬한 전류가 온다. 아픈 전류이다. 아프고 뜨거운 전기이다.’라고 어머니를 칭송하고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는 영원한 시적인 진실로 승화할 것이다.
실루엣 어깨 짚고
귀뚜라미가 서럽게 울어대던 소야곡에
빗방울보다 굵은 눈물이 흘러
겨울밤이 깊어간다
화롯불에 둘러앉아
오동통 보조개 밤을 굽다가
몽달귀신 옛날이야기 들려주시는
외할머니가 그립고
보름달아 가슴이 울어
퍼내도 마름 없이 솟아나는 모정이 있어
넉넉한 사랑으로 정 담아주신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귀뚜라미 눈물」 전문
보라. 김남혜 시인은 ‘귀뚜라미가 서럽게 울어대던’ 밤이면 ‘퍼내도 마름 없이 솟아나는 모정’이 더욱 애절한 사유의 깊은 심저를 울려주고 있다. 이러한 모정은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귀뚜라미의 눈물’로 겨울밤 ‘빗방울보다 굵게’ 내리고 있어서 그의 감성은 결국 ‘넉넉한 사랑으로 정 담아주신 / 어머니가 보고 싶다.’라는 사모의 정한(情恨)으로 그리움을 재생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확인은 ‘외로 울 때면 피어나고 / 슬플 때는 사방이 소쩍새처럼 울어대고 / 가슴 깊이 자꾸만 차오르니 / 신생아 눈을 뜨듯 / 그런 행복들이 그립다(「어머니 빈자리」 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이제는 떠나가고 없는 ‘어머니의 빈자리’에서 지각하는 허털과 ‘끝없이 솟아나는 푸른 모정’이 ‘고운 밤 잊으려 해도 / 자꾸만 떠올라 / 그리움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로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술잔에 달을 담고 / 잊으려 해도 떠오르는 / 그리운 어머님의 얼굴 // 아픈 마음 달래려고 / 슬픔과 기쁨이 갈래질가 / 비우며 술잔을 던져놓고 / 그리워 그리워하네(「술」 중에서)’라는 애통함도 읽을 수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함박눈이 내리니
잊힌 추억 속에
그대가 보고파
가슴 아파하며
그대 그리워하네
너를 사랑했던 그 날도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오늘처럼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지나간 추억 속
네가 보고파
오늘도 너를 그리워하며
추억 속 너의 모습 보고파서
쏟아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본다.
--「추억 속 너의 모습 보고파서」 전문
김남혜 시인의 그리움에는 또 다른 ‘지나간 추억 속’의 대상이 있다. 그는 이를 이인칭으로 묘사한 ‘그대’, ‘너’ 또는 당신‘으로 실체가 현현되고 있어서 그리움의 진원지는 어머니와 함께 ’가슴 아파하며‘ 보고 싶어 하고 있다. 그는 잊혀진 추억에서 상기하는 그대에의 그리움이 ’오늘처럼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사랑했던 당신이 그리워지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그의 진실은 작품 「그리운 그 사람」 중에서 ‘눈보라 속에 임의 얼이 그리워
약속 시간 다가오는데 / 흰 눈이 쌓인 언덕에서 / 꺾어진 노을빛에 여행가나 / 그 사람 // 아련히 멀어진 길 헤메이나 / 찾을 길 없어 눈물지며 애태우는데‘라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미련과 아쉬움‘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그는 이러한 그리움의 대상이 모두 하나의 인연에 의해서 생성한다는 의식의 흐름을 인정하고 있는데 ‘뜨는 해 둥글지만 / 지는 달 항상 변해 / 인연의 끈에 매달려 // 가는 정 곱다지만 / 오는 맘 믿을 수 없고 / 떠드는 그리움에 / 꺾어진 여울목에서 / 머무는 자리 찾을 수 없구나(「인연」 중에서)’라는 그의 독백처럼 이 ‘인연’에서 발현하는 그리움의 원류가 되고 있는 것이다.
4. 자연 풍광의 서정적 동화와 투사
김남혜 시인은 자연 풍광과 교감하는 서정시인이다. 자연 풍광이라 하면 만유(萬有)의 산하와 거기에서 서식하는 많은 생물들, 꽃이나 나무 숲 그리고 짐승이나 벌레 등이 연상되지만 이러한 정경들은 모두가 시인의 안온하고 화평한 정감에서 발상하게 되는 점을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우선 그는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산에서 ‘땀에 젖은 옷고름 풀고 / 눈가에 펄쳐진 초원 / 꽃바람이 산들 산들 / 꽃잎을 날려주면 / 산장의 풍경소리 / 어스름한 추억 속에 / 지친 몸 쓸어버리면 / 내일의 희망이 피어오르네(「山」 중에서)’ 또는 ‘밀림의 숲속에는 / 산 너머 바람의 노을 / 풀잎 끝에 매달려 / 풀벌레 황혼이 온다며 / 구슬프게 노래에 젖어 / 하염없이 애태우니 / 숲속에 산새소리 찬 서리에 / 둥지 틀어 단밤을 꿈꾸네(「서산에 지는 노을」 중에서)’라는 자연 친화의 정감이 그의 서정성을 고양(高揚)시키고 있어서 그의 친자연적 서정 시법은 우리 모두를 공감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풋 파란 텃밭 길을
구비 돌아 언덕 너머
청보리 익어가니
먹구름이 보릿고개를 막아
찌들은 베적삼을 풀면
알알이 청보리 익어
허기진 배 물로 채워
겉보리 까락을 비벼
쑥국으로 보리개떡을
한입 물면 만사형통
꽃반지 끼고 풀피리 소리에
보릿고개를 훌쩍 넘어가니
여치 소리가 장단 맞추어
노을 진 석양빛이 곱구나
--「청보리」 전문
김남혜 시인의 서정적 시법은 사물의 단순한 시각적인 묘사에 머물지 않고 청각까지도 복합적으로 융합하는 고도의 작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가 도입하는 상황은 ‘풋 파란 텃밭 길’, ‘먹구름’, ‘청보리’, ‘노을진 석양빛’ 등의 시각과 ‘허기진 배’와 ‘쑥국으로 보리개떡’ 등의 미각, 그리고 ‘풀피리 소리’와 여치 소리‘ 등의 청각까지도 작품 한 편에 고르게 투영하여 시적 효과를 상승시키고 있다.
우리들은 일찍이 시창작법을 연수하면서 외적 사물의 응시(凝視)에서 감응(感應)하는 감도(感度)가 어떤 형식으로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시각과 감각의 대명제로 발전하게 되는 관념의 세계로 동화와 투사로 교통(交通)하게 된다.
우선 김남혜 시인의 시각에는 자연 정경의 풍취에서 흡인하는 다채로운 물상들이 저마다의 자태와 거기에 어우러진 여타 생물들과의 교감에서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청각적인 자연 세계의 섭리에서 창출한 이미지가 그의 서정적인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교수의 시론에 따르면 자연의 인격화에는 동화(同化-assimilation)라 해서 모든 자연을 시인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내적 인격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투사(投射-project)로써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가 있는데 대체로 이 두 가지 현상을 시인들이 많이 응용하여 창작하게 된다.
겨울 내 애잔하게
시리도록 선연한 자태
시달린 냉이 꽃잎
아지랑이 밟지 말고
꽃향기에 벌 나비 찾아들면
고고한 자태로
매화 꽃잎을 열어
뜰아래 향기 가득하고
무정한 꽃샘추위
매화나무 꺾지를 마라
구름을 봄바람이 밀면
매화꽃향기 따라
울 밑에 개나리꽃 피고
엉킨 가지 두견화 피니
벌 나비 봄바람 타고
춤을 추며 여행을 가네
--「매화꽃향기」 전문
김남혜 시인은 자연과의 심취에서도 꽃에 대한 미감(美感)에 흡인력이 시적 형상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가 시적소재에서 ‘꽃’, ‘동백꽃’, ‘양귀비’, ‘코스모스’, ‘구절초’, ‘들국화’, ‘아카시아’ 등등 화초에 대한 이미지의 창출은 그가 자연 사랑 중에서도 특히 화훼(花卉)에 대한 향유(享有)와 동시에 꽃들의 속삭임과 향기를 작품으로 승화하는 시법에 충만해 있는 것이다.
이 작품 ‘매화꽃향기’에서 감응할 수 있는 메시지는 매화의 자태와 향기가 시간적인 ‘겨울’과 ‘아지랑이’, ‘곷샘추위’, ‘봄바람’, ‘개나리’, ‘두견화’, ‘벌 나비’ 등등 봄의 이미지가 융합하면서 동화하는 정감이 향기라는 후각(嗅覺)의 경지까지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계절적인 시간과 해후할 때 자연의 현상은 만물을 생기있게 발원하게 되는데 작품 「꽃샘추위」 중에서 ‘눈 속에서 움츠리다 / 산 넘어 훈풍이 넘어와 / 꽃바람에 냉이 꽃피니 / 동내 처녀 호미 자루 던지고 / 바람이나 여행은 갔네’라거나 작품 「동백꽃」 중에서도 ‘세월로 잊었나 / 눈보라 찬 서리에 / 오는 봄 기다려 / 고운 밤 반겨주려 / 빨간 립스틱이 곱구나’라는 그의 서정성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그는 이 밖에도 작품 「노란 싹」 「꽃」 「양귀비」 「숲」 등에서도 사물의 관조(觀照)에서 지적으로 가미한 시법이 우리의 정감을 충분히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찻잔에 / 웃어 좋은 그런 인연 하나쯤에 / 눈 속에 떠다니는 순백의 파라다이스(「구철초의 향기」 중에서)’ 그리고 ‘풋풋하게 천대받으며 / 인고의 언덕을 지킨 들국화’ 등의 친화적 서정성은 요즘 흔히들 말하는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한 노력에도 일조(一助)를 하지 않을까하는 여망도 깔려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김남혜 시집 『상처는 가슴 속에 남아』에서 살펴본 시적정황(situation)이나 작품 전개가 ‘나’를 중심으로 한 심층적(深層的) 탐구의 시법에 감동할 수 있으며 그가 추구하려는 주제는 나만의 향기로 삶이나 인생론에 접근하려는 존재의식, 그리고 세월이라는 시간성과 동행하는 인생 여정과 어머니와 ‘그대’를 통한 그리움의 원류를 탐색하고 마지막으로 자연 정경에서 동화하는 서정시의 흡인 등의 흐름을 그는 주안점으로 이번 시집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다.
고대 시인 호라티우스가 그의 「詩論」에서 말했듯이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들의 심중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논지를 잘 이해하고 이를 응용하면 앞으로 더 숭엄한 시인으로 활기차게 정립(挺立)할 것으로 기대한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