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황만기(국립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1. 머리말
2. 불굴의 항쟁과 최후의 선택
3. 풍산으로의 낙향
4. 북벌에 대한 의지
5. 맺음말
요 약 문
본 논문은 청음 김상헌이 안동에 우거하면서의 활동상황과 그의 문학적인 측면을 살펴본 논문이다. 청음이 안동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7년이다. 체류한 시기는 두 차례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1618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해야 한다는 북인정권의 혼정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어머니이부인을 모시고 풍산으로 낙향하여 1621년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가기까지 3년간 체류 하였다. 이때 청음은 청원루에 기거하면서 삼구정이나 주변의 경치나 인물들을 탐방한 것으로 확인된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한 달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고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는 병든 몸으로 하직 인사를 고하고는 마침내 정축년(1637) 2월 7일 풍산으로 낙향한 것이다. 이듬해 서미동 목석거로 은거해서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기전까지 3년 9개월간의 생활이다.
문학적 활동은 두 번째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두 번째 시기에서 청음은 북벌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은거생활을 지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청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시간이었다. 이후 청음은 1640년 12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6년간 억류되어 있으면서 북벌에 대한 집념은 더욱더 확고하게 된다.
그리고 심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실천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이런 그의 북벌사상은 효종의 국가 통치이념과 맞물려 한층 더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벌의 꿈을 이루기 전에 청음은 세상을 떠난다. 비록 생전에 꿈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런 사상은 문인인 우암 송시열을 통해 최고조의 상황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 북벌사상이 연암시대에 와서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북벌 자체가 가지는 한계도 있었지만, 독립국가체제형성을 위한 격분의 아우성이었음을 감안하면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이 북벌北伐 사상이 한 세기 뒤에 와서는 북학北學사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왜냐하면 18세기 연암의 시대에는 청이 국제적으로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은 더 이상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본받아야 할 모태가 된 것이다.
1. 머리말
청음 김상헌(1570~1652)은 주지하다시피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친을 강경하게 거부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이다. 병자호란은 17세기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은 대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오랑캐로 일컬어지던 청이 문명의 중심을 자처했던 명을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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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은 이런 변화의 동태를 지켜보았다. 문화의 중심축이 흔들리고 새로운 나라가 중원을 장악할 때 청음은 아직 이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청은 문화국이 아니라 여전히 미개국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리義理’를 내세워 그 이념과 철학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던 것이다.1)
청음이 안동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모두 두 차례이다. 첫 번째는 1618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해야 한다는 북인정권의 주장을 받아들인 혼정에 인심은 이반되고 도성은 그야말로 한치 앞도 장담 못하는 흉흉함 그 자체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어머니 이부인을 모시고 풍산으로 낙향하였다. 1621년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가기까지 만 3년간의 생활을 풍산 소요산素耀山에서 보냈다.2) 소요산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으로 불렸으나 마을 이름이 너무 화려한 것을 꺼려한 청음이 평소의 생활신조로 여겼던 청렴결백의 의미를 지낸 ‘소素’자를 사용하여 ‘소요산’이라 개명하였다고 전한다.3)
두 번째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한 달 만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고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는 병든 몸으로 하직 인사를 고하고는 마침내 정축년(1637) 2월 7일 풍산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 서미동 목석거로 은거해서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기 전까지 3년 9개월간의 생활이다. 국가가 위기나 혼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청음은 왜 안동을 찾았을까? 본론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안동은 청음의 본향이자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5대조인 김계권金係權(?~1458)이 한성판관에 재직할 당시청풍계 일대에 터전을 잡았고, 이후 손자인 김번金璠(1479~1544)이 본격적으로 세거를 시작하기 전까지 청음의 선조들은 안동에서 살았다. 그리고 김번의 형 삼당三塘 김영金瑛(1475~1528)은 다시 안동으로 낙향하여 토착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현재까지 안동 풍산일대는 안동김씨 세거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안동에 있고, 안동을 빼놓고 청음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음이 안동에 체류했던 시기에 대해서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황만기, 「청음 김상헌 시문학에 나타난 의리정신」(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논문 요약문 재인용.
2) 청음연보권1, 광해군 10년 무오 2월조. “奉李夫人, 往安東豐山寓居(時, 時事昏亂已甚, 人心危懼, 都下洶洶, 若不保朝夕,
仙源先生, 奉几筵, 寓居關東, 先生亦奉李夫人, 南歸).”
3)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지명유래(민속박물관, 2002). 500 _국학연구제20집
2. 불굴의 항쟁과 최후의 선택
조선시대를 통틀어 국내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전국토의 대부분이 왜적에게 점령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전쟁이다. 임란 시기에 선조는 류성룡을 체찰사로 임명하여 육지에서는 권율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그리고 곽재우 같은의병들이 국난극복을 위해 헌신을 기울인 결과 항복이라는 불명예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란은 몽진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남한산성 안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어 버렸다. 오랑캐의 기세가 섬광처럼 빨라 청병은 압록강을 건넌 뒤 보름만에 임진강 주변까지 침입하였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행차하려고 숭례문에 이르렀으나, 나갈 수가 없어서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날이 12월 14일이었다.4)
4) 청음연보권2, 인조 14년 병자 12월조. “十二月, 淸人入寇, 十四日, 上幸南漢山城, 先生追赴行
在(虜勢焱疾, 犯境三日, 哨馬已到西郊, 上欲幸江都, 至崇禮門, 不得出, 蒼黃入南漢山城, 先生聞
變, 追赴病臥寓舍).”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01
몽진의 기회를 잃은 군주와 조정 신료들은 최후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의 공론은 양분화 되기에 이르렀다. 일시적 굴욕은 감내하고 먼저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면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항전하자는 주전론자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에 청음은 병석에서 뛰쳐나와 화친을 반대하고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청음은 인조와의 독대에서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다음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한갓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5)라는 말로 전쟁을 주장하였다.
5) 위의 책, 같은 곳. “十七日, 肅拜行宮, 請對, 卽命引見, 上曰, 不遇識務之人, 以至於此, 先生對曰, 群臣之罪, 可勝言哉, 然旣往不 諫, 今日之計, 必須先戰後和, 若徒事卑辭請和, 則和亦不可望.”
이에 인조는 청음의 말을 옳게 여겨 화친을 보류하였다. 그러자 조정대신들은 청나라의 압박 때문에 왕세자를 인질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을 보고만 있을 청음이 아니었다. 종사에 주인이 없으면 종사라고 할 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왕세자를 인질로 보내자는 영의정 김류 이하 조정대신들을 질타하였다.6) 때문에 청음은 이들에게 있어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
6) 위의 책, 같은 곳. “十九日, 詣朝堂, 折斥王世子就質之議(大臣以下, 請對, 欲以世子爲質于虜營, 先生卽進于備局, 詰問領相金瑬, 答曰, 爲宗社, 不得已也, 先生切責曰, 宗社無主, 則何以爲宗社,豈有臣下倡爲以儲君與賊之議者乎, 我與建此議者, 不可同日生也. 相公卽可復入自陳前計之誤, 不然, 忠臣義士, 必有奮臂而起者矣. 辭氣嚴峻, 左右縮頸, 瑬惶汗沾背, 不知所出, 乃詣閤待罪, 世子由此停退, 自是廟議稍絀, 然疾視先生, 如待一敵國云).” 502 _국학연구제20집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된 그는 북쪽 오랑캐를 막을 방비책에 대해서 진언하기에 이른다. 성곽을 지키는 군병이 1만 7천 수백 인이고, 성안의 백성 및 호종하는 백관의 노비, 각사의 아전, 본주(廣州)의 관노 또한 7·8백 명 이하가 아니며, 본성의 형세 또한 험준한 곳이 많습니다. 방비가 조금이라도 허술한 곳은 지금 헤아려서 잘 분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 진영의 정예병들을 추스르면 4·5천 명은 될 것이며, 무신들 중에서 군사를 통솔할 만한 자를 선발하고, 각각 천명 내지 수백 명을 배속하고 밤낮으로 같은 곳에서 좋은 시기를 타 기이한 계책을 내며 밤마다 적진하나 구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지死地에서 살아가기 위한 식량은 한계가 있고 외부에서 구원병은 믿기 어려우니,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7)
7) 위의 책, 같은 곳. “守堞軍兵, 一萬七千數百人, 城中民及扈從百官奴子, 各司胥徒, 本州官奴, 亦不下七八百人, 而本城形勢, 亦多險絶. 防守稍緩處, 今須料理善爲分配, 抽閱各營精兵, 可得四五千, 擇武臣可堪將領者, 各配千名或數百, 日夜同處, 乘便出奇, 夜䂨虜營, 萬一有濟, 今當於死中, 求生糧食有限, 外援難恃, 豈可坐以待亡乎?”
청음은 남한산성의 험준한 지형과 산성 안에 머물고 있는 군사와 백성들을 활용하여 적들을 공격하자는 안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남한산성에서 한 달을 버티었다. 추운 겨울에 눈도 많이 내리는 시기라 양국간의 고초는 매우 심하였다. 그러자 청인들은 ‘초항招降’이라 적힌 깃발을 흔들면서 항복을 종용하였다. 인조는 결국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고 종사의 안위를 지키자는 주화파들의 손을 들어 최명길을 보내어 저들과 강화협상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결국 청에게 항복을 하였다. 명분상 강화의 형식을 취하였지만, 이것은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인조가 치욕스런 삼배구두를 위해 남한산성을 떠나던 날 청음은 형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이미 분신자살했다는 뜻밖의 비보를 듣는다. 이날이 2월 1일이었다.8)
8) 淸陰年譜, 인조 15년 정축 2월조. “二月一日, 聞伯氏仙源先生殉節江都.”
그러나 김상용이 분신한 실제 날은 1월 22일로 아들 광현光炫 (1584~1647)이 부음을 접한 날은 1월 30일이다. 광현은 부친의 유체遺體라도 찾을 요량으로 남한산성에서 적진을 뚫고 강화도로 갔다. 열흘간이나 찾아보았으나 분신한 몸이라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유의遺衣만 가지고 양주 도혈리陶穴里(지금의 석실)에 장례를 치른다.9) 형 김상용이 절의를 지키다가 거룩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청음이 아니었다. 그도 곧바로 자살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9) 水北集 부록, 「연보」. “十年丁丑正月, 聞議政公訃, 議政公在江都, 見守臣遁去, 賊勢已逼, 登
南門樓, 投火焇黃以自焚, 實是月二十二日, 而三十日訃聞, 南漢先生晝夜號擗, 口不入水漿, 衝冒
虜陣, 奔覓遺體十日, 卒不可得, 乃奉遺衣, 葬于楊州陶穴里先塋右麓坐乾之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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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순간을 연려실기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노끈으로 자결하여 거의 목숨이 끊어지게 될 무렵 나만갑羅萬甲이 달려가서 구하였다. 또 바지를 묶는 가죽으로 자결하려 하자 곧장 또 다시 구하였다. 그 조카 광현光炫과 아들 광찬光燦은 방 밖에서 옷을 갈아입고 가슴을 두드리며 운명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므로 만갑이 말하기를, “부형의 죽음이 비록 강상綱常을 부지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공들은 어찌하여 부형이 자결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하니,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부형의 일은 영감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이미 한 번 죽기로 작정하셨으니우리가 비록 구하려고 한들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수직守直하였고, 다음날 또 오랑캐의 진영으로 송치하려는 의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죽지 못했다.
병자록10) 이 기록은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의 기술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다. 모든 희망을 잃은 청음으로서는 최후의 수단인 자살을 선택한다. 첫 번째 노끈으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나만갑에게 발각되어 실패를 한다. 그러자 곧바로 노끈보다 강도가 높은 허리띠로 목을 맨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만갑에 의해 결국 죽지 못했다. 아들 광찬과 조카 광현이 계속 만류하였지만, 한번 결정한 것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 청음의 성정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죽음을 감행할 지 알 수 없기에 결국 수직守直을 해서라도 청음의 자살을 막았다.
10) 燃藜室記述 卷25, 仁祖朝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禮判金尙憲, 引繩自裁, 幾至絶命, 羅萬甲馳救之. 又以束袴之皮自裁, 旋又救. 其姪光炫及子光燦, 在房外易服, 摽擗如待命終. 萬甲 曰: ‘父兄之死, 雖出於扶植綱常, 公輩何至任其裁耶?’ 垂淚而答曰: ‘父兄之事, 令公所知, 旣以一死自判, 雖欲救之, 何可得也?’ 諸人守直, 翌日又有欲送胡陣之議, 故竟不死.”(丙子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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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청음은 척화의 주도자들을 청나라로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에 가서 만주족의 조선 침략이 잘못되었음을 전하고, 비록 국왕은 항복하였지만, 자신은 죽을 각오로 명明에 대한 의리로 맞설 것을 다짐하였기에 자살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모두가 의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기에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애통하고 통곡하였다.
3. 풍산으로의 낙향
청음은 정축년(1637) 2월 7일 남한산성을 떠나 3월에 이곳 풍산으로 왔다. 이에 대한 증거는 당시 이곳으로 함께 낙향했던 손자 김수증의 기록이다. 할아버지께서 남한산성에서 죽령을 넘어 안동 소요산 선영先塋으로 돌아가신 것이 정축년 3월이다.11) 숭정 정축년 봄에 할아버지께서 남한산성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우거하셨다. 무인년(1638)에 서미동西美洞으로 들어가셨고, 경진년(1640)에 심양으로 가셨다. 신사년(1641)에 할머니께서 별세하셨으며, 임오년(1642) 봄에 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유해를 모시어 석실石室로 반장返葬하셨다. 우리들이 수행했는데, 지금 45년이 되었다.12)
11) 谷雲集 권3, 「丙丁避亂事實」. “祖考先府君自南漢來會, 仍踰竹嶺, 還安東素耀山先廬, 是丁丑 三月也.”
12) 谷雲集권4, 「花山記」. “……崇禎丁丑春, 王考自南漢來寓, 戊寅, 入西美洞, 庚辰, 有瀋陽之行, 辛巳, 王母捐世, 壬午春, 先君奉喪返葬石室, 余輩隨行, 今至四十五年.”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05
위의 두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청음이 풍산으로 낙향한 것은 분명 3월이다. 풍산으로 낙향한 그는 청원루에 우거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세인들의 이목을 피해 다시 서미동으로 들어갔다. 서미동으로 들어간 그는 스스로 서간노인西磵老人이라 칭하였다. 경진년(1640) 11월에 심양으로 압송되기까지 3년 9개월을풍산과 서미동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청음이 풍산에 낙향한 것은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니다. 1618년에 어머니 이부인(전주이씨)을 모시고 풍산에 낙향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조정은 인목대비의 폐위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기였다. 광해군을 등에 업힌 대북파들은 영창대군을 둘러싼 소북小北의 행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옹립대상자인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가둔 채 처절하고 애절한 죽음을 맞게 하였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시키려 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수많은 대신들은 모두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기에 이른다. 오리 이원익과 한음 이덕형은 죽임을 당하였고, 백사 이항복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조정에서는 이이첨을 둘러싼 북인들만 조정을 메우게 되었다. 누구 하나 이들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이런 북인정권하에서 청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미 관과觀過의 죄13)로 로 관직이 삭탈된 바 있거니와 아들 광찬光燦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손녀사위였기 때문에 역적의 집안과 혼인한 죄목으로 결국 강제파혼을 당하게 된다.
13) 光海君日記卷93, 7年(1615) 8月 13日조. “司果 金尙憲이 지은 恭聖王后의 책봉 誥命에 대한 謝恩箋文에 ‘어머니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귀해짐을 생각한다’, ‘삼가 허물을 보면 어진 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데 관계된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허물을 보면’이라는 뜻의 ‘觀過’ 자는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청음은 기롱하고 풍자하는 말을 감히 사은 전문에다 써넣었으니, 그가 임금을 무시하고 도리를 어긴 정상이 몹시 통분스럽습니다(司憲府啓曰: “司果金尙憲所製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中, 有念母貴之由子竊干觀過之聽等語, 觀過二字, 臣子所不敢言者, 尙憲乃以譏剌之言, 敢綴謝恩之文, 其無君不道之狀, 極爲痛憤.”).
506 _국학연구제20집
이런 현실에서 청음은 더 이상 도성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머니 이부인을 모시고 6대조와 5대조들의 묘소가 있는 풍산으로 낙향하게 된 것이다. 풍산으로 낙향한 청음은 평양서윤을 지낸 그의 증조부 김번金璠(1479~1544)의 옛 집에서 우거하게 된다. 그리고는 이 집을 새롭게 단장하고는 ‘청원루淸遠樓’ 라는 시판을 붙인 것이다. ‘청원淸遠’이라 명명한 것은 송나라 주돈이(1017~1073)의 애련설에서 취한 것임은 물론이다. 주돈이는 연꽃을 군자에 비유하고 있다. 비록 진흙 속에서 나왔지만 물들이지 아니하고, 맑은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은(蓮之出於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연蓮의 속성을 좋아하였다. 또한 연은 비록 속이 비었지만 겉모습은 곧으며, 넝쿨도 가지도 없는(中通外直, 不蔓不枝) 연을 사랑하였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으며, 꼿꼿이 맑게 심겨져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가서 만질 수는 없는(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玩焉) 연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주돈이는 군자다운 풍모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연을 ‘꽃의 군자’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연은 군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송대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우리 조선의 사대부들도 연을 사랑하였다. 특히 어떠한 외부의 압력과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원리원칙을 고집하면서 꼿꼿한 선비상을 지켜온 청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는 구절을 취하여 누의명칭을 ‘청원’으로 호칭한 것이다. 14)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밝히고자 한다. 전라도 순천에 있는 청원루에 대한 김수온金守溫(1410~1481)이 기문을 지으면서 분명히 주렴계의 ‘향원익청’에서 취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며,15)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충청도 청안淸安의 별장 청원정淸遠亭에 대해서도 ‘향원익청’에서 취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다.16)
14) 청원루에 대한 기록으로 인터넷이나 각종 서적들을 들춰보면 모두 청음이 ‘청나라를 멀리한다’(淸遠)는 뜻으로 ‘淸遠樓’라고 이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음이 비록 청나라를 꺼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춘추대의를 논하는 그가 속 좁은 행동은 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15) 拭疣集 권2, 「淸遠樓記」. “遂取濂溪先生蓮說之香遠益淸, 以淸遠文其樓, 先生續聖人之統於千百載之下者也.”
16) 四佳集 권2, 「淸遠亭記」. “余重違侯命, 取濂溪香遠益淸之語, 請名淸遠, 仍言曰, 夫物之挺秀, 物之可愛者也.”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07
청원루는 다른 기록에서도 산견散見된다.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평안도 청원루에 대한 기록으로 인터넷이나 각종 서적들을 들춰보면 모두 청음이 ‘청나라를 멀리한다’ (淸遠)는 뜻으로 ‘淸遠樓’라고 이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음이 비록 청나라를 꺼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춘추대의를 논하는 그가 속 좁은 행동은 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평양에도 청원루가 있었고17), 전라도 부안현에 현감 성수겸成守謙이 세운 청원루가 있었다.18) 또 용궁현에 전원발全元發이 살았던 청원정이 있었다.19) 모두 애련설의 ‘향원익청香遠益淸’에서 따온 말이다.
그렇다면 청원루는 누구의 글씨일까? 실로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청원루淸遠樓에 관한 기문이 남아 있다면 쉽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단서로는 ‘청원루’ 대자 글씨 옆에 글씨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회옹晦翁’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청음의 문인이자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장인인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1608~1670)으로 추정하고 있다.20) 조한영은 청음의 문인으로 평소 청음의 절개 있는 모습에 매료되어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으며, 청음과 함께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가 신득연申得淵의 고변으로 인해 심양으로 잡혀 갔다. 두 사람이 함께 심양으로 잡혀가면서 서로 수창한 설교수창집雪窖酬唱集이 전하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 글씨를 집자集字했다는 의견이다. 이는 ‘회옹’이 바로 주희의 호이기 때문이다. 청음이 어려서부터 주자가 편한 소학小學을 즐겨 읽고 실천덕목으로 여긴 것은 분명하다.21) 그러나 주자의 글씨를 집자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두 가지 견해를 종합해 보건대, ‘청원루’ 현판 글씨의 주인공에 대한 해답은 구체적인 증빙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설득력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4, 「平安道‧平壤府」, <古跡>조. “淸遠樓, 崔滋賦, 多景跨滄海, 淸遠撑半空.”
1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4, 「全羅道‧扶安縣」, <樓亭>조. “淸遠樓, 在客館東, 縣監成守謙建.”
19)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慶尙道‧龍宮縣」, <樓亭>조. “淸遠亭, 全元發舊居, 在星火川東岸, 以篆刻淸遠亭三字於石壁上, 後 琴柔繼居之.”
20) 素山洞의 淵源(도서출판 한빛, 2006), 16쪽. 최근 안동김씨 소산종회에서 출간한 책자에는 晦谷 曺漢英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21) 宋子大全 卷142, 「九四堂記」. “淸陰先生自少以小學律身, 而其學專主於敬. 眞得爲學之要。故其操而存之日益固, 擴而充之 日益遠.”
508 _국학연구제20집
청원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삼구정이 있다. 삼구정은 김계권(?~1458)의 5남 영수永銖가 그의 둘째형 영전永銓과 넷째형 영추永錘와 함께 88세의 노모 예천권씨(1409~1496)의 축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22) 그러나 노모는 그해 겨울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부친이 한성부판관으로 있으면서 닦아놓은 장의동에서 세거를 이어 갔다. 그의 세 아들 중 맏이 영瑛과 둘째 번璠은 나란히 문과에 급제하여 장동에서 살았다. 그러나 영瑛은 그의 손자 기보箕報 대에 와서 소산으로 다시 낙향하여 소산파를 이루었고, 번璠은 이곳에 서 계속 살면서 장동김씨의 시대를 열어 갔다. 청음이 바로 이분의 증손자가된다.
청원루에 대해 기록한 김수증의 「화산기花山記」를 살펴본다. 22일 정축일 …(중략)… 저녁에 소요산素耀山에 도착해서 곧바로 삼구정三龜亭에 갔다. 정자 앞에는 예전처럼 교목 한 그루가 있다. 세 개의 거북돌은 우뚝하지만 오래된 소나무는 거의 다 꺾이었다. 곧장 옛날 지내던 집으로 들어가니, 나무가 썩고 기울어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동쪽 누각 몇 칸은 서윤 선조(金璠)께서 독서하셨던 곳인데,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또한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누각 아래 작은 방은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던 곳인데, 지금 하인이 지키며 살고 있었다.
방과 뜨락은 황폐해져 발을 붙일 곳도 없었다. 집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대추나무 한그루가 옛 그대로이다.23) 반백년 세월에 청원루는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퇴락한 집으로 바뀌었음을 전하고 있다. 지금은 우물가의 대추나무 한 그루만이 지나온 세월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22) 김계권은 부인 예천권씨 사이에서 5남 6녀를 두었다. 장자는 학조로 출가하여 세조 때 불교에 공헌한 燈谷大師이다. 둘째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永銓, 셋째는 進士 永鈞, 넷째는 안동김씨 중에서 보백당 김계행을 이어 두 번째 문과에 급제한 永錘, 그리고 막내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永銖이다.
23) 谷雲集 권4, 「花山記」. “二十二日丁丑…(中略)…夕至素耀山, 直到三龜亭, 亭前猶有喬木一株, 三龜石巍然, 而老松太半摧折, 仍入舊居屋宇, 朽敗傾側, 幾不可支, 東樓數間, 是庶尹先祖讀書處, 余兄弟兒時, 亦嘗讀書於此, 樓下小房, 是王考所處, 今守莊奴入處, 房室庭除, 荒穢無着足處. 家右有井, 井邊棗木一株依舊,”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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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은 그의 나이 52세 되던 1621년 봄에 양주 석실로 돌아가기까지 약 3년 동안 이곳 청원루에 머물렀다.24) 이후 16년을 석실에서 지내다가 1637년 3월 다시 안동을 찾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청음은 국가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을 때에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선조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안동을 찾은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청음의 낙향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청음은 「풍악문답豊岳問答」과 「의여인서擬與人書」를 지어서 해명한다. 먼저 「풍악문답」의 내용이다. 25)어떤 이가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라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만약 성 밖 한 걸음의 땅이라도 밟았다면 이는 순順을 버리고 역逆을 따르는 날이다.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임금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출처와 진퇴가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26) 위 인용문에서 청음은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성하지맹을 맺으러 갈 때, 대가를 따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세 가지 신하로서의 의리(臣子之義)에 입각해서 취한 행동이었음을 설명한다. 임금이 대의를 위해 사직에 죽으면 신하도 함께 죽어야 하지만, 임금이 대의를 저버려 신하로서 간하다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도 신하로서의 의리임을 내세우면서, 신하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임금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24) 청음연보 권1. “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先生五十二歲), 春還楊州石室.”
25) 「풍악문답」이라 명명한 것은 豊岳山城이 이곳 소요산에서 멀리 않은 ‘上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붙인 것인지, 아니면 풍악산성에 살던 사람에게 답변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6) 淸陰遺集 권5, 「豊岳問答」. “‘或問, 大駕出城之日, 子不從何也?’ 余應之曰, ‘若蹈城外一步地, 則是去順效逆之日, 大義所在, 一毫不可苟. 國君死社稷, 則從死者, 臣子之義也. 爭而不用, 則退而自靖, 亦臣子之義也. 古人有言: 「臣之於君, 從其義, 不從其令.」 士君子出處進退何常? 惟義之歸. 不顧禮義, 惟令是從者, 乃婦寺之忠, 非人臣事君之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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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예의에 벗어난 충성은 신하로서 군주에게 대하는 충성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청음은 자신의 모든 행동은 모두 대의에 따라서 실천하였음을 주장한다. 이런 청음의 답변에 대해서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청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변란이 일어났을 때 초야에 유락되어 있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 되는 법이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될 필요가 있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 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옛 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27)
27) 淸陰遺集 권5, 「豊岳問答」; 청음연보 권2. “變亂之時, 流落草間, 不得扈從, 則賊退, 義當奔問. 余則同入圍中, 言不行而去之, 日之終, 尙不可竢. 何區區小禮之必拘乎? 子家覊曰 : ‘貌而出者, 入可也; 寇而出者, 行可也.’ 古人於出入之際, 斷之以義, 有如此者.”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11
청음은 마찬가지로 의에 따라 행동하였음을 피력하고 있다. 계손씨를 적으로 여겨 떠난 자가기의 말을 인용해 자신은 청인들을 적으로 여겼기에 조정을 떠난 것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자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청음의 대답은 이러하다.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따르지 않아 200년의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가 본디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맹세하면서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앞 다투어 임금에게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다. 그러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28) 진정으로 선왕의 은택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200여 년을 지켜온 강상을 끝까지 지키려 했음에 있다고 역설한다. 모두가 대의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말하고 있다.
28) 위의 책, 같은 곳. “吾之從義不從令, 欲扶二百年綱常者, 所以不負先王敎育之澤也. 我國素以禮 義聞於天下, 一朝遇難, 不能誓心自守, 爭勸君父屈膝於寇讎之庭. 何面目見天下士大夫, 亦何以見先王於地下也? 嗟嗟! 今之人, 亦獨何心哉?”
이런 대의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둘러싼 조정대신들은 항복이라는 비굴한 방법을 선택하여 종사의 안위를 지키려 한 것이기에 자신은 따르지 않고 이곳 풍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청음은 「의여인서擬與人書」를 통해서 자신의 낙향에 대한 의혹을 풀어주고 있다. 금金나라의 오랑캐들이 스스로 흔단을 만들어 내고는 뱀이나 멧돼지와 같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면서 우리 사민士民들을 쳐 죽이고, 우리 부녀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우리 사도四都를 무너뜨리고, 우리 임금[인조]를 겁박하고, 우리 저군儲君을 핍박하고, 우리 종사를 더럽혔습니다.
그러니 이는 우리나라 신민들이 백대토록 잊어서는 안 되는 원수인 것입니다. 원수인 오랑캐의 조정에서 충성을 바치면서 순종하는 짓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이 비록 용사用事하는 자의 계책을 잘못 따라서 우선은 그들에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개 광망한 자가 자신의 뜻을 지키고자 하여 스스로 산야로 물러나 숨어 지내는 것도 역시 성현의 의에 따르라는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스스로 그것이 그른 줄을 모르겠습니다.29)
29) 淸陰遺集 권5, 「擬與人書」; 청음연보 권2. “金虜自作釁端, 蛇豕荐食, 虔劉我士民, 係虜我婦女, 傾覆我四都, 劫奪我國寶, 逼行我儲君, 汚辱我宗社, 此我國臣民百世不可忘之讎也. 效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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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의 주장은 일목요연하다. 그는 청인들이 잘못된 행동을 6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사민士民들을 함부로 죽인 점, 둘째 부녀자들을 마구 잡아간 점, 셋째 국토를 유린한 점, 넷째 임금을 겁박한 점, 다섯째 세자를 핍박한 점, 여섯째 종묘사직을 욕보인 점이다. 청의 야만적이고 무례한 행동은 유교적 윤리강상을 신념으로 인식하던 청음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4. 북벌에 대한 의지
목석거 유허지로 들어가는 서미동 동구어귀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이 바위에는 ‘은자암隱者巖’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청음의 7세손 김학순金學淳(1767~1845)이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820년에 새긴 것이다. 김학순이 자신의 선조 청음을 은자로 인식하고 지칭하였음이 물론이다. 곡운 김수증의 「화산기」에 의하면 청음이 이곳에 은거할 때도 은자암 바위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0) 청음 이전에는 5대조 학조대사가 이곳 중대사中臺寺에 와서 불가에 심취하였고, 안동김씨 문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학조대사가 영瑛‧번璠‧순珣 세 조카들에게 준 세뱃돈을 조카들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이곳에 묻어두었다고 한다.31)
順於寇讎之庭, 其何可忍, 朝廷雖過聽用事者之計, 姑與之順從, 而一介狂妄, 欲守其志, 自屛於山野者, 亦出於聖賢從義之訓, 自不知其爲非也.”
30) 谷雲集 권4, 「花山記」. “往訪西美洞, 由新村, 歷樊村新寧村入洞中, 路邊有大巖斗起, 名隱者 巖, 到中臺寺下, 有人家八九, 此非舊時所有, 轉過一崖, 到舊基.”
31) 학조대사가 중대사에 머물러 있을 때 그의 조카 瑛‧璠‧珣 3형제가 오랜만에 세배를 올리러 가기로 하였다. 세배 온 조카들을 맞은 학조대사는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하였다. 조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가 저무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서운하지만 조카들을 산에서 내려 보내면서 세배 값으로 은자 몇 닢씩 나누어 주었다. 삼형제는 은자를 받아들고 중대바위라는 곳에 지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쉬면서 세배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게 되었다.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13
‘은자암銀子巖’이라 불리던 이 바위는 김학순이 백이숙제의 의리를 지향한 청음의 은거적 삶을 기리기 위해 동음이의어인 ‘은자암隱者巖’으로 바꾸어 새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왼편에는 ‘해동수양海東首陽 산남율리山南栗里’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학가산을 ‘우리나라의 수양산’으로, 서미동을 ‘영남의 율리’로 부른 것이다. 주지하듯이 수양산은 백이숙제가 주나라를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은 곳이고, 율리란 동진東晋 시대 도연명陶淵明(365~427)이 은거적 삶을 영위한 곳이다.
청음이 서미동西美洞32)을 ‘서미동西薇洞’이라 명명한 것은 백이숙제의 절의정신을 본받고자 함이었고, 김학순이 이곳 에 ‘해동수양 산남율리’라는 글귀를 바위에 새긴 것은 백이숙제의 절의를 몸소 실천한 자신의 선조 청음의 절의정신을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김학순 이전에도 물론 안동김씨 후손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김학순이 글씨로 새긴 이후에는 성지순례聖地巡禮 코스로 이곳을 찾게 되었다. 도로를 따라 얼마 안 가서 중대암 밑 한적한 곳에 ‘목석거木石居’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가 나온다. 이곳의 글씨도 역시 김학순이 안동부사를 역임하던 경진년(1820)에 새긴 것이다. 이 바위 위에 쓰러질 듯하면서도 위풍을 과시하면서 버티고 있는 누각이 있다. 다름 아닌 ‘청음선생 목석거유허비’이다.
32) 한편 영가지에 의하면 서미동은 현공산과 오적산 사이에 있으며, 西厓 柳成龍(1542~1607)이 만력 을사년(1605)에 이것을 우거하다가 이화동梨花洞으로 改名한 기록이 있다. 永嘉誌 권1, 20면(a). “西美洞村, 在懸空五赤兩山之間, 西厓柳先生, 萬曆乙巳寓居, 改名梨花洞.” 514 _국학연구제20집
맏이 영은 아무리 백부지만 중은 중이니, 중이 준 돈은 깨끗하지 못하니 버리고 가자고 했다. 둘째 번은 그래도 백부께서 주신 돈이니 소중히 간직했다가 좋은 곳에 써야 한다고 했다. 셋째 순은 형들의 거취만 보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침내 맏형의 주장대로 돈을 바위 밑에 묻고 가기로 했다.
신통력을 가진 학조대사가 어찌 이 일을 미리 예상치 못했겠는가. “역시 둘째 조카 놈은 인정이 많은 놈이군”하면서 미소만 지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銀子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뒷날 학조대사가 지금의 양주 덕소리(석실)에 있는 璠의 처가인 남양홍씨 방앗간자리에 璠의 무덤자리를 미리 잡아주면서 후손들이 잘 되고 번영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칭 이곳을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이라고 부른다. 그의 예언대로 이후 장동김씨들은 대단한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새배값 받은 銀子」, 안동김씨 연원록, 53~54쪽).
내용은 이희조李喜朝가 찬하였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백이伯夷이시고 학가산은 선생의 수양산首陽山이니, 어찌 고사리를 캐시던 유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있으랴? 마침내 하나의 작은 비석을 세우고 비면에 ‘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라 새긴다.33) 백이숙제는 무왕에게 부왕인 문왕의 상도 치르지 않은 채 전쟁을 하는 것은불효라고 울부짖으며 ‘고마이간叩馬而諫’으로 성토하였으나 결국 그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청음은 ‘수열항서手裂降書’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안동의 학가산 서쪽 서미동에 은거하였다. 이희조는 청음의 이러한 행적에 대하여 학가산을 수양산에 견주고, 청음을 백이숙제에 비긴 것이다. 김수증의 「화산기」에 의하면 무인년에 2칸의 작은 집을 짓고 방안에는 ‘만석산방萬石山房’이라는 당호를 걸고, 방밖에는 ‘목석거’라는 당호를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수증은 이 글씨를 써 준 사람을 ‘한산당숙韓山堂叔’이라고 명기하고 있다.34)이는 다름 아닌 청음의 동생 김상복金尙宓(1573~1652)의 아들이자, 청음의 조카인 김광식金光烒(1616~1664)이다.35) 그는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지냈으며, 23세 때 쓴 글씨이다. 삼연 김창흡은 김광식의 묘지명에서 그의 글씨가 강건하고 아름답다고 기록하고 있다.36) 아마 청음이 낙향할 당시 백부를 따라 이곳에 온 것으로 보인다.
33) 芝村集 권24, 「鶴駕山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 “先生我東之伯夷, 而鶴駕是先生之首陽, 豈可使採薇遺跡, 泯沒如此耶, 遂立一小石, 鑱其面, 曰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
34) 谷雲集 권4, 「花山記」. “二十三日戊寅, 朝往驛洞先塋, 展拜判官掌令先祖墓兩位, 松柏比前稀疏, 曾見有松鼠, 今無見矣, 食後, 與景晉,野叟及他宗人, 往訪西美洞, 由新村, 歷樊村新寧村入洞中, 路邊有大巖斗起, 名隱者巖, 到中臺寺下, 有人家八九, 此非舊時所有, 轉過一崖, 到舊基,王考於戊寅, 構二間小堂, 房內壁上, 揭以萬石山房四字, 房外揭以木石居三字(皆韓山堂叔筆)”
35) 安東金氏世譜 임술(1982)보 참조.
36) 三淵集 권27, 「韓山郡守金公墓誌」. “淸陰公甞拜牀下, 公內外襲休, 幼負儁望, 白晳茂風姿, 筆札遒麗.”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15
청음이 이곳으로 와서 느낀 감회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을 살펴보자.
石室先生一角巾 석실선생일각건 석실 선생 머리 위에 각건을 쓰고서
暮年猿鶴與爲群 모년원학여위군 노년에 원숭이 학과 함께 살아가네
秋風落葉無行跡 추풍낙엽무행적 가을바람 지는 잎에 인적이 없어서
獨上中臺臥白雲 독상중대와백운 동중대사에 홀로 올라 백운루에 누웠네37)
37) 淸陰集 권2, 「西磵草堂偶吟」.
516 _국학연구제20집
이 시는 청음이 서미동 목석거에서 읊은 것으로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손자 김수증, 김수항, 증손자 김창협 김창흡, 그리고 7세손 김학순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차운하였다.
석실선생은 청음 스스로를 가리킨다. 청음의 초고에는 ‘선생’이란 칭호를 쓰지 않고 ‘산인山人’이라는 호칭을 썼을터이지만, 후대에 청음집을 간행하면서 후손들이 선생으로 고친으로 보인다. 청음은 고대 은자들이 쓰던 각건을 쓰고서 만년에 동물들과 무리를 이루어 자연 속에서 은자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은 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이고, 공간적 배경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서미동 목석거 뒤편에 위치한 중대사中臺寺이다. 시간과 공간 모두 쓸쓸함과 적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래서 청음은 홀로 중대사 백운루白雲樓에 올라 수심에 잠긴 것이다. 비록 전쟁을 불사한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하고 굴욕적인 화친의 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국론이 결론지어져서, 부득이 안동으로 낙향하였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鶴峯西畔草堂深 학봉서반초당심 학가산 서쪽 기슭 깊숙한 초당에
五月淸陰爽客襟 오월청음상객금 오월의 맑은 그늘에 길손 마음 상쾌하네
萬事世間都已變 만사세간도기변 세상의 온갖 일이 모두 이미 변했지만
氷壺一片尙初心 빙호이편상초심 빙호 같은 한 조각 맘 여전히 초심이네38)
병중에서 회포를 읊은 시다. 학가산 서쪽 초당에서 맞는 5월의 싱그러움 덕분에 밤낮 나라 걱정으로 병이 든 자신의 마음이 위로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일편단심 의리를 지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지고 있다. 몸이 병들면 정신도 약해지기 마련이지만,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청음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고 있다. 마지막 결구에서 북벌에 대한 맹아萌芽의 조짐이 태동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대해서 동생 김상복은 다음과 같이 차운하고 있다.
傍山籬落樹陰深 방산이락수음심 산 곁의 울타리에 녹음이 짙은데
一榻淸風快散襟 일탑청풍쾌산금 자리 위로 청풍 불어 가슴이 시원하네
萬事世間無係念 만사세간무계념 세상의 온갖 일을 개의치 않고서
白頭惟有戀君心 백두유유변군심 흰 머리로 오로지 임금을 그리네39)
녹음이 짙어가는 목석거 산방에서 지내는 형에 대한 정을 담았다. 세상사에일체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군주를 향한 일편단심만을 생각하는 형의 지조와 절개를 칭송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일편단심은 군주에 대한 신하로서의 애국충정인 것이다. 비록 항복문서를 찢고 안동으로 낙향했지만, 임금을 향한 마음이야 변할 수 없는 노릇이다.
南阡北陌夜三更 남천북맥야삼경 남북의 논밭 길에 밤이 깊어 삼경인데
望月追風獨自行 망월추풍독자행 달을 보고 바람 좇아 호젓하게 길을 가네
天地無情人盡睡 천지무정인진수 천지는 고요하고 사람 모두 잠을 자니
百年懷抱向誰傾 백년회포향수경 백년의 회포를 누구에게 토로할까40)
38) 淸陰集 권3, 「病中書懷」.
39) 淸陰集 권3, 「次韻」.
40) 淸陰集 권3, 「夜起獨行」.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17
앞의 시는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홀로 밭둑과 논둑을 걸어가면서 읊은 것이다. 천지 사방이 고요하게 잠든 한밤중에 청음은 홀로 나라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맞으며 나라를 향한 충정을 쏟아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우국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맑은 바람과 밝은 달 만이라도 자신의 우국충정을 알아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扈蹕前年駐漢南 호필전년주한남 지난 해에 어가 따라 남한산성 머무를 땐
會稽遺恥到如今 회계유치도여금 회계 땅의 남은 수치 오늘에 미쳤네
殘生不是貪生者 잔생불식탐생자 이 몸이 살기를 탐하는 건 아니지만
尙在人間負宿心 상재인간부숙심 아직도 살아 남아 숙원을 저버렸네41)
41) 淸陰集 권3, 「感意」4수 중 첫 번째.
518 _국학연구제20집
이 시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태조에게 삼배고구두三拜叩九頭의 치욕스런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이는 의리지학을 익힌 청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굴욕적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그가 종묘사직의 안위를 위해 부득이 굴욕적인 화친을 선택한 조정대신과는 입지가 어긋나 부득이 낙향을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청음은 춘추시대 회계전투에서 월왕 구천句踐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공격을 입어 패전敗戰하자, 회계會稽에 있으면서 오왕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가 되기를 애원하여 겨우 살아난 고사를 인용하면서 굴욕적인 치욕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3‧4구는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치욕을 당하면서도 끝내 살아남아 오나라를 패퇴시켰는데, 자신은 세상에 살아남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숙심宿心은 복수설치復讐雪恥의 일념이지만, 청음의 이러한 염원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숙심을 저버렸다고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청음의 마음속에는 언젠가는 북벌을 해서 청에 대한 치욕을 씻겠다는 의지가 오롯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國破家殘身落南 국파가잔신낙남 국가는 다 깨진 뒤 몸만 영남으로 내려와
逢人羞愧說當今 봉인수괴설담금 사람 만나 당시 일을 말하려니 부끄럽네
柴門倚杖看新月 시문의장간신월 사립문에 기대어 새로 뜬 달 바라보니
誰識山中此老心 수식산중차노심 뉘라서 산중의 늙은이 마음을 알겠는가42)
병자호란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백성들이 유린당하였으며, 심지어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청음은 이러한 불의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안동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을 만나 남한산성에서 일을 말하려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곳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지만, 복수설치의 마음은 금할수 없다. 그래서 달을 보며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겠는가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시를 살펴보자.
種蠡高名揭斗南 종료고명게두남 종려의 높은 이름 남두성에 걸렸건만
古人何必勝於今 고인하필승어금 옛사람이 어찌 꼭 지금보다 낫겠는가
誰知西磵菴中客 수지서간암중객 누가 알리? 서간암에 머무는 나그네가
獨抱當時管樂心 독포당시관낙심 홀로 당시 관악의 마음을 품은 줄을43)
42) 淸陰集 권3, 「感意」4수 중 두 번째.
43) 淸陰集 권3, 「感意」4수 중 세 번째.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19
위 시는 후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세 번째 시다. 1구의 종려種蠡는 월왕 구천의 책사인 문종文種과 범려范蠡이다. 이 두 사람은 구천이 오나라를 쳐서 회계의 치욕을 씻을 때 구천을 보좌하여 마침내 그 원한을 씻게 한 인물들 이다. 이들을 첫머리에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다. 비록 문종과 범려가 월왕 구천을 도와 회계산의 설욕을 씻었지만, 청음은 이들의 행동을 낙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천으로 하여금 합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비굴함을 감내케 했기 때문이다. 청음이 생각하는 군왕은 차라리 적의 칼날에 죽을지언정 적에게 항복하는 비굴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구의 서간암은 목석거 초당 뒤에 위치한 중대사中臺寺요, 암자 속의 나그네는 청음 자신을 가리킨다. 4구의 관악管樂은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를 가리킨다. 관중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어진 재상이다. 이름은 이오夷吾인데, 제 환공齊桓公을 도와 부국강병을 이룩하였다. 악의는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장수로 한韓‧위魏‧조趙‧연燕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제齊나라를 쳐서 70여 성을 빼앗은 인물이다.
청음은 마지막 결구에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지를 말하고 있다. 비록 적막한 서미동 중대사에서 은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다시 관계官界에 나아가 관중과 악의처럼 군주를 도와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청나라를 쳐서 이들의 국토를 빼앗을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실로 원대하고 웅건한 기상이 아닐 수 없다. 청에 대한 복수의 칼날이 마음속 깊이 용솟음치고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네번째 시를 살펴보자.
常怜庾信賦江南 상령유신부강남 언제나 유신의 강남부를 좋아했는데
千古哀詞動至今 천고애사동지금 천고의 애절한 말 지금에도 감동되네
地下定逢徐散騎 지하정봉서산기 지하에서 서산기를 만나게 된다면
燕歌楚老若爲心 연가초노고위심 형가와 굴원 같은 마음을 먹으리라44)
44) 淸陰集 권3, 「感意」4수 중 네 번째.
520 _국학연구제20집
청음은 첫 번째 구에서 남조南朝시대 양梁나라의 유신庾信의 「강남부」를 언급하고 있다. 유신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어 고향을 떠나 사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했던 것처럼, 청음은 나라가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어 도성을 떠나 안동으로 내려온 서글픔을 표현하였다. 어릴 때부터 소학을 즐겨 읽고 춘추대의에 입각한 의리를 생활실천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그에게서는 배신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후금에 대한 항전의식이 더 면밀히 드러낸다. 3구의 서산기徐散騎는 남당南唐의 마지막 임금인 이욱李煜과 함께 송宋나라에 항복하여 누차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서현徐鉉을 가리킨다. 4구의 연가燕歌는 전국 시대 연나라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길을 떠나면서 부른 비장悲壯한 곡조로, 여기서는 형가를 비유한 것이다. 초 노인네는 초나라의 충신인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청음은 만약 죽어서 지하에서 서현을 만났다면 송나라에 항복한 잘못을 질책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청에 항복하기로 논의하여 항복문서를 작성한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론자들을 빗대어 한 말이다. 이들과 다른 입장을 견지한 청음은 형가와 굴원처럼 끝까지 청에 항거하는 주전론의 입장을 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듯이 청음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안주하는 여느 은자들의 의식과는 사뭇 다르다. 비록 은거하고 있지만, 이것은 다음을 준비하는 와신상담의 시간인 것이다. 겉모습은 은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상은 은일이 아니고 새로운 뭔가를 모색하는 단계인 것이다. 군주에 대한 충성, 은혜에 대한 의리, 원수에 대한 복수심, 불굴의 항전의식 등 결코 주저앉을 수 없는 것들만 가슴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말하자면, 청에 대한 강한 복수심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청음은 71세의 노구로 심양에 잡혀가게 된다. 심양에 잡혀가면서도 전혀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골대같은 후금의 장수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꺾이지 않는 절의정신에 후금도 감복하여 차마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6년간의 심양의 불모생활에서 풀려난 청음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와 또 다시 북벌에 대한 그의 의지를 표명하게 된다.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_ 521
∙ 2012. 05. 20 : 논문투고 ∙ 2012. 06. 01 ~ 06. 11 : 심사
∙ 2012. 06. 15 : 수정완료 후 제출 ∙ 2012. 06. 18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그리하여 효종으로부터 군주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고, 사후에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비록 북벌을 실행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지만, 청음의 북벌의 의지는 이후 문인 송시열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북벌사상의 모티브는 청음에게서 비롯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북벌사상은 효종대를 거쳐 조선후기까지 그 영향이 이어져 왔음은 물론이다. 북벌사상이 연암시대에 와서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북벌 자체가 가지는 한계도 있었지만, 독립국가체제형성을 위한 격분의 아우성이었음을 감안하면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이 북벌北伐사상이 한 세기 뒤에 와서는 북학北學 사상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18세기 연암의 시대에는 청이 국제적으로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은 더 이상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가진 본받아야 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522 _국학연구제2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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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海君日記
宋史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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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_국학연구제20집
Activities and Literary Works of Kim Sang-heon
(金尙憲, also known as by his honored name, Cheong Eum,
淸陰) During the Period of Staying in Andong
―
Hwang, Man-ki
(th Toegyehak Institute
Andong National univ.)
This paper aims at looking into the status of Cheong Um, Kim Sang-heon’s literary activities while he was staying in Andong, and the aspects of his literary works as well. The period of time when Cheong Eum had stayed in Andong was about seven years and he had stayed there two times. In 1618, He gave up everything related to his government post because of chaotic political situations caused by the power of the fraction of Northerners in that the Northerners strongly argued that King Gwanghaegun should depose the Queen Dowager Inmok. Then, he left Hanyang (Seoul) to retire in the country of Pungsan taking his mother, Lady Lee, with him and in 1621, he moved to a village called Seok Sil in Yangju, and stayed there for about three years. It has been confirmed that during that period, Cheong Eum lived at Cheongwollu, and toured around nearby Samgujeong pavilion, and visited prominent people. Second period started from the year of Jeongchuk, 1637. This was the year when King Injo retreated from Namhan San Seong fortress having concluded a treaty signed under coercion after just one month from the outbreak of Manch Invasion(丙子胡亂, Byeongja Horan). At last, on Abstracts _ 525 February 7, 1637, he left Hangyang again to retire to the country of Pungsan having bidden a farewell to the King with his sick body. Next year, he retired to a hermitage in Seomidong, Mokseokgeo, and had lived there for three years and nine months until he was sent
to Shen Yang under escort in November 1640. The researcher has investigated Cheong Eum’s literary activities with a focus on this second period of time. During this time, Cheong Eum had strengthened
his willingness for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It seemed that Cheong Eum had sought a live in retirement just for form’s sake, however, he fed on his anger with retaliatory against Qing. In
December 1640, Cheong Eum was transferred to prison in Shen Yang, and detained there for six years. And his tenacity for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had become stronger. After returning from Shen Yang, he had sought a specific action plan for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His thought had become more feasible having interlocked with King Hyojong’s state ruling principle. However, Cheong Eum passed away before accomplishing his goal of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Although he had not achieved his aim during his lifetime, his thought had reached its peak through Uam Song Si-yeol, who was one of the prominent literati. In the era of Yeon Am, this thoughto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revealed a limit in that had not fully recognized the stream of international situations. However, considering that it was an outcry in a rage in order for formation of independent state system, it cannot be dealt with in a negligent manner. In the end, century later the thought o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had been deteriorated as by Northern Learning. This is because, 526 _국학연구제20집 in the 18th century, the era of Yean Am, Qing’s culture was superior]to other cultures, so then Qing dynasty had turned out to be a fertile ground to emulate and adopt advanced culture, not a subject to revengeany longer.
Key word
: Cheong Eum, Kim Sang-heo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Andong, Reve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