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워하며 - 전보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읽다 -
오늘은 6∙25 발발 70주년 기념일이다.
우리 아버지도 전쟁 참전 용사셨다. 장례식에 보훈처에서 나온 분들이 참전용사로서 장례예식을 거행해 주셨다. 서로에게 아픈 상처를 70년 동안 간직하고 살았다. 이제는 남북이 서로 상처를 극복하게 되길 바란다. 오랜 세월 지켜보았지만, 결코 정치인들은 상처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처를 이용해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능과 계략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 하고 부르면 마음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진다.
아버지의 말없는 배려와 가슴의 온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휘휘할 때, 생각이 정지될 때, 힘들고 어려울 때 아버지를 부르며 쉼을 얻는다. 그 만큼 아버지는 타인을 배려하셨고, 이웃의 어려움을 잘 보살폈다.
아버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안선생님께서 내게 귓속말을 해주셨다.
“지비 아버지는 어려운 사람 시정을 잘 아셨어. 내가 힘들고 배고플 때 밥을 많이 사주셨고 때로는 5만원, 10만원을 주머니에 몰래 넣어 주셨지.”
“아버지를 전에부터 아셨어요?”
“아버지 은퇴하기 전부터 아셨지.”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은퇴하고 난 뒤에 우여곡절 끝에 우담에 와서 살게 되어 아버님을 다시 만나게 된 거지.”
안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의 정겹고 살가운 마음이 오르르 느껴져서 눈물이 솟았다. 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버님은 작년 6월 6일에 소천하셨지만 음력으로 추모예배를 드리겠다는 모친의 주장 때문에 평일이 되어서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날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자녀도 있었고 모두들 일하고 있어서 대충 오후 5시에 모여서 같이 성묘에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피곤하고 마음이 분주하여서 세 사람만이 성묘에 갔다.
아버님 산소 가는 길에 개망초와 진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산딸기가 수줍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묘 앞에는 삐비꽃이 하얗게 피어서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버님 묘 봉분에는 잔디꽃이 곱게 피어서 포근하게 보였다.
아버님 떠나신 후, 일어났던 개인적이고 국가적이며, 세계적인 일들을 묵상하는 중에 아버님께서 가장 복되게 가셨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단군 이래로 최고로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기에 소천하셨기에 아버님의 장례 일정이 순조로웠던 것이리라!
아버님의 1주기 추도식을 준비하면서 기억의 창고 밑에 숨겨져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이 지상으로 올라 왔다. 샘물을 퍼내면 새로운 물이 솟아 올라오듯이 기억 창고 아래 저장된 것들이 올라 온 것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아버님이 보내주신 전보였다.
신학교에 공부하러 떠나면서 집에서 쫓겨났다. 보따리를 싸들고 나서는 내 뒤 꼭지에 대고 모친은 분노의 언성을 토해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보따리를 하나 들고서 대부둑 까지 따라오시면서 걱정하지 말고 가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셨다.
아버님이 못난 나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신 말은 “ 한 우물 파라, 열심히 파라.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노력 이상의 것은 없다.” 이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시내버스가 올 때 까지 나즉한 음성으로 축복받지 못한 상태에서 떠나는 나를 붙잡아 주셨다.
한 달 기숙사비 밖에 없었던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직을 찾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한신초등학교 학생을 찾아서 파트타임으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 아이네 집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급여를 책정하지 못하여서 마음속으로 고민이 컸다. 이틀이면 한 달이 다 되는데 기숙사비를 낼 돈은 없고, 학생 네 집에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으니 속이 탈대로 타고 있었다.
아마 3월 28일 오후 4,5시 경이었을 것이다. 수위실에서 전보가 왔으니 받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전보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전보를 칠 사람이 없는데 집에서 왔으면 무슨 사고 소식이 분명할 것이다 하면서 쿵쿵 뛰는 가슴을 억제하며 수위실에 당도하였다.
친절한 수위 김선생님께서 전보를 주었다. 전보에는 놀라운 말이 적혀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다음 달 기숙사비 보내마.”
아버지는 아무 대책 없이 서울로 떠난 딸을 잊지 못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빈 손으로 올려 보낸 후에, 나의 공부를 반대하는 모친을 끊임없이 설득하셨다. 설득의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아버지는 서울에 외롭게 버려진 딸의 불안과 고통을 생각하여 먼저 전보를 보낸 것이었다.
딸을 구원하기 위해서 절체절명의 시간에 전보를 보내 주신 아버지의 사랑에 전율하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자르르 흘렀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삼일 후에 아버지는 약속대로 전신환을 보내주셨다.
추모예배를 준비하면서 모두들 반대하는 길을 나선 나를 지지해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손끝에 집혀서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굽이굽이 중요한 길목마다 아버지가 서계셨다.
은퇴하신 후에 농사일을 도맡아 지셨건만 아무 주장 없이, 소리 없이, 말없이, 경제적인 권리나 일체의 주장 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며 사신 아버지를 사람들은 호구, 바보,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술을 많이 마셔서 모친을 염려하게 만드는 분 정도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인자와 긍휼을 보여주셨다. 아버지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깊이 나아갈 수 있었다.
예배시간에 어린아이처럼 손을 높이 들고 손 까불며 찬송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박수만 쳐도 되는 데 손은 왜 높이 들고 흔들어요?”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면 나도 기쁜데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시겠니?”
나는 아버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처럼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와 2년 6개월 동안 함께 지내면서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이기며 사시는 아버지가 성자(聖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를 철저하게 내려놓고 사시는 겸손하고 초라한 우리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5년이라는 긴 휴가 아닌 휴가를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0.6.25. 목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침묵하셨던 선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