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혁명, 이념, 특권
“왕의
목을 베어본 역사를 갖지 못한 국민은 혁명을 말하지 말라!” 프랑스대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로베스피에르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국왕 루이 16세는 물론 수많은 봉건귀족과
정적들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나갔고, 자코뱅 당은 급진적 정치․사회개혁을 내세우며
광기서린 공포정치를 폈다. 혁명에 환호하던 시민들은 자코뱅 일파의 부릅뜬 눈초리를 피해 하루하루를 죽은
듯이 지내야했다.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은
정치적 선전구호였을 뿐, 국민이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니었다. 봉건계급이 지녔던 특권은 폐지되었는가? 아니다. 혁명세력 중 부패분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혁명 주역인 당통마저도
부정부패 혐의로 처단될 정도였다.
공포정치는
영구히 지속될 수 없다. 결국 테르미도르 쿠데타로 집권 5년
만에 실 각한 로베스피에르는 정적들의 피로 얼룩진 기요틴의 칼날 아래 엎드려야 했고, 오래지 않아 나폴레옹
황제시대가 개막된다. 전제 왕정을 타도한 자유혁명의 뒤끝에 절대권력의 제정이 시작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족의
특권은 자코뱅을 거쳐 황족에게로 넘어갔다. 새 권력이 옛 특권을 차지한 것이다. 앙시앵레짐은 무너졌지만, 특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시민혁명의 이념이었고, 능멸 당한 것은 프랑스 국민이었다.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을 즉결처형한 레닌의 볼셰비키 일파는 러시아의 왕족, 봉건귀족, 정교회 성직자들을 사형대로 내몰았다. 그들이 누리던 특권은 폐지되었는가? 아니다. 볼셰비키의 전유물이 되었다.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무산대중의 유혈투쟁으로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사회를 이룬다고
주장했지만, 노동자․농민의 대표로 자처하던 볼셰비키는 새로운 유산계급 노멘클라투라(номенклату́ра)로 변신했다. 특권을 누리는
계급만 달라졌을 뿐, 특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서민대중은 숙청된 귀족․지주들의
재산과 권리를 자기네가 차지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 재산과 권리는 공산귀족 노멘클라투라의 차지가
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이 시행되자, 정권실세들은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뛰어들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새로운 특권계급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의 출현이다.
민중은
여전히 가난한 상태로 남겨졌고 그들의 후손 역시 빈곤을 상속받았을 뿐이지만, 특권층 노멘클라투라와 올리가르히는
제 자식들까지 공산당에 입당시켜 대대로 부와 권력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권력핵심의
부패 의혹은 그 서글픈 데자뷔 아닌가? 부모의 재산과 권력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부조리, 그 불공정한 현실 말이다.
‘자본주의의
고질적 폐해는 행복의 불공평한 분배, 사회주의의 고질적 폐해는 불행의 공평한 분배…’ 윈스턴 처칠의 이 지적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다. 사회주의 러시아에서는
불행도 공평하지 않았다.
서민들은
혁명 이전에나 이후에나 늘 빈곤의 불행 속에 있었지만, 사치와 향락에 빠진 올리가르히는 천민자본주의적
행복을 즐기면서 심지어 마피아와도 검은 손을 맞잡았다. 계급타파와 평등사회의 이념은 정치적 선동구호였을
뿐, 러시아 국민에게 주어진 현실은 아니었다. 민중은 철저히
능멸 당했다.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결코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
<지식인의 아편>을 쓴 레이몽 아롱의 촌철살인이다.
평소에
마치 도덕군자요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해온 권력실세가 전대미문의 부패 의혹에 휩싸였다. 왕의 목을 벤
자코뱅처럼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새 정권에서 실력자가 된 그는 레닌주의를 추종하는 사노맹 활동 전과가 부끄럽지 않다면서 끝내 전향 고백을 거부했다.
좋은
머리로 치밀하게 기획한 듯한 그 희대의 부패 의혹이 사실이라면, 아롱의 말처럼 그는 정직하지 않은 좌파, 위선적인 특권좌파에 불과할 것이다. 진보라니, 세상에 그런 진보는 없다. 둘도 없을 가짜 진보일 따름이다.
촛불시위를
혁명이라 부르는가? 혁명도 이념도 특권을 없애지 못했다. 특권계급만을
바꿨을 뿐이다. 부르주아 자유혁명은 우파특권계급을, 프롤레타리아
공산혁명은 좌파특권계급을 키워냈다. 역사의 뼈아픈 진실이다. ‘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 현란한 정치구호가 등장할 때마다 서민대중은 넋을 잃고 환호성을 지르지만, 결국엔
스스로 능멸 당했음을 깨달아야 하는 비극의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그 비극은 역사에서 배우기 싫어하는
국민의 몫이다.
이 우 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첫댓글 좋은 글 읽게 배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