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貪嗔痴)가 불법(佛法)이다(1) / 무비 스님
십여 년 전에 정각원에 와서 여러 불자님들을 뵌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 가지 형편상 오기가 어려웠는데 정각원 원장이신 법혜스님과의 오랜 인연의 빚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고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마침 오늘 따뜻한 봄날, 춘색(春色)이 만천하에 가득한 이 계절에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를 동국대학교 정각원과의 인연으로 이렇게 올 수 있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즐겁고 다행스런 시간이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법회를 주관하는 스님께서 전화로
“스님, 법문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좋겠습니까? 정해 주십시오.”
그러더라고요.
방금 소개한대로 ‘탐진치(貪嗔痴)가 불법(佛法)이다’라고 하니까 저 스님께서
“예? 뭐라고요? 탐진치를 떠나는 게 불법이 아니고 탐진치가 불법이란 말입니까? 스님, 말씀 잘못하신 거 아니에요?”
그랬습니다.
저는 바로 그것을 노린 거지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탐진치(貪嗔痴)가 곧 불법(佛法)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눠볼까 합니다.
불교 안에는 근기를 따라서 또 어떤 상황을 따라서 별별 이야기가 많습니다.
서로 상반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지요.
예를 들면 이쪽에서는 우리가 흔히 ‘있다’고 했다가 금방도 반야심경을 외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눈이 ‘없다’고 하지요.
가지고 있는 눈은 도대체 뭐길래 없다고 하는지 또 탐진치를 부리며 탐진치 삼독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탐진치를 떠나야 불법이다, 탐진치 삼독을 떠나야 비로소 진리이다.’ 이런 등등 어찌 보면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그런 불교 속에서 참으로 많은 세월을 갈등하고 고민하고 몸부림도 치는 그런 세월을 겪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쯤에 와서는 그동안 우리가 일반적인 불교에서 알고 있었고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래야만 이게 부처님 말씀이고, 이래야만 이게 불교가 아니겠는가 하는 그런 진부한 이야기로서는 저 자신에게도 별로 흥미가 없고 성에 차지도 않고, 또 그런 이야기는 내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착한 일 하고 나쁜 일 하지 말고 탐욕 부리지 말고, 화내지 말고, 어리석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는 말은 불교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요.
이웃집 어른들도 자나 깨나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말이고, 어려서부터 불교하고 관계없이 끊임없이 들어온 그런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과연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육년 고행을 했겠는가, 또 그 좋은 자리인 태자의 지위를 헌신짝 버리듯이 버렸겠는가, 그런 이야기 하려면 굳이 태자의 지위를 버리지 않아도 될 것이고, 육년 고행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굳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한 그런 거창한 사건까지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 말도 있습니다.
있지마는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굳이 부처님이 그런 고행과 성도라고 하는 것이 필요했겠는지 상당히 의문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 유치원 선생님들도 늘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말인데 그것이 과연 불교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서를 소개하는데도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뭡니까?
사람은 그야말로 좋은 것을 보면 끊임없이 탐욕이 일어나고 마음에 안 들면 표현을 하든 하지 않던 간에 화를 내고 또 자기 앞에 이로운 것이 어른거리면 으레 미혹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이것이 우리의 살림살이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근본 열 가지 번뇌와 또 스무 가지 따라서 일어나는 수(隨)번뇌라는 것이 있지요.
근본번뇌야 재미없지만 수번뇌를 가만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요.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잘못을 덮어버리려고 하는 그런 기본적인, 말하자면 소인배적인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요.
쥐꼬리만한 잘난 것이 있거나 무엇을 한 공력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끝없이 자랑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스무 가지 수번뇌 가운데 다 소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