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의 죽음과 3ㆍ15 부정선거
민주당은 이날 오후 "3ㆍ15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제1차 데모가 일어났다. 수천 명의 마산 시민들이 저녁 7시 30분경부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민주당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으로 넘어간 허윤수 의원의 집과 자유당 마산시당본부 등에 돌을 던졌다. 이때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마구 쏘아 16명이 죽고 72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최인규는 이 시위가 공산당이나 민주당의 지령에 의한 것인 양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공산당이 배후를 조종했다고 조작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호주머니에 불온문서를 넣기도 했다. 그런데 3월 15일 1차 마산봉기 때 행적이 묘연해진 마산상고 1학년 학생 하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주열이다. 그의 시신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은 "살인선거 물리치자", "시신을 인도하라"고 외치며 경찰서와 자유당 본부, 자유당 의원의 집, 시장 관사, 서울신문사"등에 돌을 던지고 서류를 불태웠다. 이날 밤 9시 35분 마산경찰서에서 경찰은 수백 발의 총알을 쏘았고 마산은 다시 한 번 피로 물들었다. 두 젊은이가 죽고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
제2차 마산사태는 사흘간 계속되었다. 매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이기붕 죽여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고 외쳤다. 마산 시내의 각종 행정사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았으며 부산의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초등학교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학교에 등교 중지명령이 내렸고 마산시청의 서류와 기물은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신도성 경남지사는 국회조사단에게 "마산의 2차 데모는 공산당 수법과 흡사하다"고 말했으며, 경찰은 소요 및 공공건물 파괴혐의로 30명을 구속하였다. 4월 15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남쪽 끝 항구도시 마산에서 솟아오른 민주화 투쟁의 불길은 그냥 꺼져 버리지 않았다. 김주열 군의 죽음이라는 한 점 불씨는 들불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은 소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4월 14일 진주시와 진양군의 중ㆍ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다음 날에는 전주의 민주당원과 부산 동래고교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4월 16일 청주공고생 전원이 청주역 광장에서 "불법선거는 무효다", "경찰의 만행을 쳐부수자"고 외쳤으며 17일에는 인천과 진주, 하동, 창녕 등지에서 민주당원들의 데모가 있었다.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4월 18일은 대학 중에 최초로 궐기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유명한 날이다. 부산의 동래고교, 경남공고, 부산공고, 항도고교생 수천 명과 청주의 청주고교, 청주상고, 청주여고생 3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오후 1시경 4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 종로를 거쳐 아홉 번이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2시경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를 높이자"는 플래카드를 걸고,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 책임자를 처단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고 외치며 연좌농성하였다.
<대학 가운데 최초로 궐기한 고려대 학생들.>
고대 학생들은 7시경 농성을 풀고 학교로 행진해 왔다. 이 때 경찰의 바리케이드 때문에 데모에 합류하지 못했던 수만 명의 시민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을 지날 무렵 그 곳에 잠복해 있던 1백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 쇠갈퀴, 몽둥이, 벽돌 등을 마구 휘두르면서 습격하였다. 학생들은 학교에 도착하여 교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애국가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 이날 고대생을 습격한 정치깡패들은 반공청년단의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단부'라는 이름의 조직폭력배들이였다.
그 다음 날, 4월 민주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와 잔인한 총격, 참혹한 유혈과 죽음으로 얼룩진 날이 4월 19일이다.
서울대학생들은 이렇게 선언하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뛰어나갔다. 서울 시내 중심가 일대에서는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까지 십만을 헤아리는 학생들이 운집하였다. "이놈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빼앗긴 민권을 도로 찾자", "썩은 정치 수술하자", 국회 의사당, 중앙청, 경무대, 이기붕의 집, 동대문, 종로와 혜화동 등 곳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오후부터는 학생과 시민이 합세, 백차와 소방차를 탈취하여 차량시위를 벌였고 40여 군데 파출소에 불질렀으며 문교부ㆍ부흥부ㆍ중앙청 등 행정관청을 파괴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다.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가 일제히 궐기하는가 하면 부산의 경남공고, 부산상고, 테레사여고, 광주의 대부분의 고등학교, 청주농고, 인천공고, 경북대학교 등 지방도시의 학생, 시민들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날도 경찰 발포로 모두 1백15명이 숨지고 1천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1시를 기해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국에 임시휴교령이 떨어졌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학생에 대한 보복금지를 약속하고 평화적인 시위자는 폭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계엄군은 총을 쏘지 않았고, 송요찬 장군은 숨진 학생의 시신앞에 경의를 표했다. 사태는 일단 수습되는 듯했다. 서울시경은 7백4명의 연행자 중 6백67명을 석방했다. 서울의 시위는 계엄군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으나 인천, 수원, 대구, 전주, 이리, 임실, 광주, 군산, 포항 등지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4월 19일을 전후하여 "부정선거 다시하라"에서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이기붕과 자유당에 책임을 돌리기에 급급했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서울시내 대학의 교수 2백58명이 25일 서울의대 도서관에 모였다. 이들은 시국선언을 발표한 다음 태극기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민의 열렬한 환영과 박수갈채를 받으며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과 더불어 이항녕 교수(서울대)가 14개항으로 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정석해 교수(연세대)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한 후 해산하였다. 한국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국민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던 대학교수들의 시위는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교수들은 전국 학생들의 데모가 공산당의 조종이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정축재자와 3ㆍ15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와 발포 책임자 및 하수인을 처벌하고 정ㆍ부통령 선거를 다시하며,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하고 구금 학생을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학생들에게는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여기에 자극받은 시민들은 오후 7시 반,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을 신호로 세종로에 집결하여 철야시위하면서 임화수,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의 집을 부수고 이기붕의 승용차를 탈취하였다. 이때 이기붕의 집에서 실탄사격을 하여 다시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이기붕의 집은 서대문 적집자병원 옆의 4ㆍ19기념관 자리에 있었다. 후에 그 집을 헐고 4.ㆍ19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하였으며 미국대사 매카나기는 이승만을 만나, 예정되어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취소하고 미국이 원조를 중단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동경, 오사카 등의 해외 동포들도 이승만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이날 아침 7시부터 3만여 명의 서울시민들이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계엄군의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를 누볐다. 시민대표들은 이승만과 면담하여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을 부수고 파고다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또 시민들에게 실탄사격을 하여 수십 명을 살상한 동대문 경찰서를 불태웠다. 부정선거의 원흉중 하나인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집도 불길에 휩싸였다. 수송초등학교생들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들도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며 애절한 데모를 벌였다.
오후 1시, 드디어 대통령의 하야 담화가 전국에 녹음 방송되었다. 학생ㆍ시민ㆍ계엄군이 하나로 어우러져 환호성을 울렸다.
이 위대한 민주혁명의 승리에 너나없이 하나가 되어 기뻐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국회는 3ㆍ15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개헌과 총선거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 수습안을 제시하였다. 국립방송은 '해방의 노래'를 방송하며 4월혁명을 힘찬 어조로 찬양하였고, 시인들은 민주혁명의 승리를 노래했으며, 온 나라가 새로운 희망으로 들떳다.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들과 노동조합의 어용간부, 발포 책임자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온 국민의 원성을 산 이기붕 일가족은 온갖 악행을 일삼아 온 아들 이강석이 쏜 총으로 자살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는데 국민들은 어제의 원한을 잊고 그의 마지막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석달 후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민주당은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장 면을 선출하여 제2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백86명이 생명을 바치고 6천 명이 피를 흘린 대가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월혁명은 단지 부정선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3ㆍ15부정선거는 민중의 저항이 폭발한 계기에 불과하였으며 김주열의 죽음은 그 뇌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불만은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일찍이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하여 미국 정부에 청원서를 넣으며 소일했던 2류 독립운동가였다. 미ㆍ소가 38도선 남북을 각기 점령하고 동서양 진영 사이의 냉전이 시작되자 그는 외교론자답게 냉전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이용하여 일약 민족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친일 지주와 일제에 복무했던 일본군ㆍ관리ㆍ경찰 출신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백범 김 구 선생은 스스로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청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이 아니면 임시정부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같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는 이승만의 사대주의적 청원운동을 경멸하면서 임시정부와 모든 관계를 끊었다. 그가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주장했을 때 백범은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을 용서할 수 없다며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해방이 되면서 달아났던 매국노들은 남한에 반공정부를 세우려는 한 가지 목표에만 집착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모두 제자리에 돌아왔다. 일본 특별고등계(사상문제 담당) 형사 출신들은 경찰 수뇌부를, 일본군 출신들은 군 지도부를, 친일 관료배들은 행정조직을 점령했고, 천황 숭배에 앞장섰던 교육관료들이 학교를 차지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황의 충복'임을 자랑하던 자들이 하나같이 '반공투사'라는 허울을 쓰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던 친일 지주들에게도 미군정과 이승만은 구세주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동아시에서 미국의 반공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대리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승만은 겉으로는 극단적인 반일주의를 내세웠지만, 국회 결의로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반민족적행위 조사 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불법적으로 해산시킴으로써 매국노들을 모두 하수인으로 끌어들였다. 비민주적인 군대 규율과 부정부패, 경찰의 상습적인 고문과 인권유린, 국민을 통제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행정조직의 관료주의, 교육기관의 어용성 등 비민주적인 제반 악습은 모두 이같은 과정에서 온존된 일제의 유물인 것이다. 이승만은 매우 호전적인 북진통일론을 주창하면서 "3일이면 평양을 점령한다"고 큰소리를 쳐댔지만 북한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고, 6ㆍ25가 터지자 불과 며칠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 또 "아군이 반격중이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 방송을 되풀이하면서 자기들만 피난한 다음 북한 군대의 추격이 두려워 한강교를 폭파함으로써 수많은 시민들을 빠져 죽게 하고 서울을 아비규환에 빠뜨렸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지배하는 군대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1.ㆍ4후퇴 당시 급조한 국민방위군을 후송하면서까지도 군 예산을 착복함으로써 수천 명의 장정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었다. 아무 죄도 없는 경남 거창의 남녀노소 수백 명을 골짜기에 몰아넣고 학살한 다음 공비소탕 전과로 보고하는가 하면, 진상을 조사하러 내려간 국회의원들에게 인민군 복장을 입은 국군 병사들로 하여금 총격을 가하게 하여 조사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사바사바'가 횡행하여 특권층의 자식들은 마음대로 병역을 기피했으며, 농림부와 은행들의 착복과 부정대출로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가 2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흘러넘쳤고 농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부황이 들었다.
뿐만 아니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안을 국회에 냈다가 1표 차로 부결되자, 이틀 후에 사사오입(반올림)으로 통과된 것으로 선포하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하는가 하면, 정부를 비판한 대구매일신문을 어용 깡패들이 습격하자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며 그것을 옹호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의 깡패집단을 육성하였고, 허황한 북진통일론에 반대하여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안을 내놓은 죽산 조봉암을 북한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한편 일본인이 버리고 달아난 토지와 공장, 각종 재산을 그것을 관리하던 한국인 하수인들에게 넘겨주거나, 터무니없이 싼갑에 불하함으로써 권력자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뇌물을 착복했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행패를 대변한 것이 소위 '가짜 이강석사건'이다. 강성병이라는 상습 사기꾼 청년이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사칭하여 전국 주요 관청과 기업체를 찾아다니면서 고관대작과 재벌들에게 호화판 향연과 뇌물을 받았다. 내노라 하는 고관대작과 재벌들은 이강석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앞다투어 달려가 갖은 아부를 다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암행어사로 나섰으니 나를 보았다는 말을 절대 퍼뜨리지 마시오"라고 엄하게 분부했다. 한 민완기자가 추적하여 폭로한 이 사건은 온 국민의 경멸과 조소를 불러 일으켰다.
3ㆍ15부정선거는 이같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발악이었으며,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무능, 독재, 가난과 불평등에 대한 민중의 항거였다. 그러나 이 혁명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1961년 5ㆍ16군사쿠데타로 이승만 정권보다 더 혹독한 독재정권이 들어섬으로써 4ㆍ19 정신이 모두 짓밟혀 버렸기 때문이다.
4월혁며은 정의로운 학생들의 가두시위에 시민들이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학생들은 그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정열만 있었을 뿐 새로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주체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을 받아 정권을 잡았고 미국의 비호와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할 수 이었다.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가 이승만의 사퇴를 종용한 것은 한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그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을 가지고서는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강력하고 안정된 반공정부의 유지-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4ㆍ19의 주역들은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 감사의 꽃다발을 걸어 놓을 정도로 한미관계의 실상에 어두웠다.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호응하기는 했지만 눈앞에 열린 민주주의의 새 길을 밟아 나갈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사조직과 노동조합에서 농민단체에 이르기까지 당시 존재하던 모든 조직은 어용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역시 친일파 지주들에게 뿌리를 둔 보수야당으로서 신구파로 갈라져 권력투쟁을 일삼았을 뿐, 혁명을 책임질 만큼 강력한 조직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오랜 탄압 때문에 혁신세력은 별 힘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어느 정도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자 각계각층 민중은 빠른 정치적 각성을 이루면서 조직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를 결성한 노동자들은 어용노총을 배격하면서 자주적으로 결집했고, 교사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회대중당과 사회당을 중심으로 만든 민족자주통일연맹은 즉각적인 남북협상과 외세 배격, 통일 협의를 위한 남북 대표자회담을 제의하고 중립화 통일을 주장했다. 혁명의 주력인 대학생들은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민족 주체세력을 총집결하고 내외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적절한 시기에 서신왕래와 인사교류 및 기술협정 등 단계적 남북 교류를 단행할 것"을 주장했으면, 전국 17개 대학 학생대표가 모여 결성한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은 남북 학생회담을 5월에 열자고 제안했다. 5월 13일에는 민족자주통일연맹과 통일사회당 등의 혁신정당이 이 제안을 지지하는 통일촉진궐기대회를 열어 통일운동을 대중화시켜 나갔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회담이 며칠 앞으로 박두했다. 4ㆍ19는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우리 민족 최대의 고통인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만일 이 중립화 통일운동이 국민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분단을 존립 조건으로 하는 군부의 기득권과 아울러, 남한의 공정권을 유지하여 극동의 냉전체계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였다. 그래서 5ㆍ16군사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정치장교들이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틈타 4ㆍ19이전부터 준비해 온 군사쿠데타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민족통일운동은 물론이요, 민주주의운동마저 총칼과 탱크 바퀴에 짓밟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후 30여년 동안 대통령의 이름만 몇 번 바뀌었을 뿐 포악한 군사정권이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미완의 혁명 4ㆍ19
4월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미완(未完)의 혁명' 이다. 4월의 주역들이 숱하게 변절하고 좌절하여 군사정권에 빌붙거나 체제에 적응해 버렸지만, 해마다 4월이 오면 수유리 묘지에 수천 수만의 참배객이 모여들어 최루탄 가스를 마셔 가며 "4월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이룩하자!", "독재지원 미국 반대!"라는 구호를 외친 것이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4월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의 혁명이며, 87년 6월민주항쟁도 4월혁명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비록 미완성의 혁명이라 하더라도 4ㆍ19는 세계사를 빛낸 혁명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일찍이 주은래, 유소기 등 청년학생들이 주동한 중국의 5ㆍ4운동 선언문은 "저 조선 인민을 보라! 우리가 생명의 불이 끊어진 것으로 알았던 조선 인민은 맨가슴을 펴고 일본제국주의 총칼에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 중국 인민이 조선인들보다 비겁하고 무력하단 말인가! 조선인을 본받아라! 일어나자, 중국의 혁명을 위해!"라고 절규한 바 있다.
그 위대한 3ㆍ1운동이 있은 지 40년 만에 우리 민족은 4ㆍ19로 다시 한번 전세계에 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것이다. 터키 청년학생과 시민들은 4월혁명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끝에, 4월 28일 독재자 멘델레스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한국 국민들보다 어찌 못하랴!" 그들은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계엄군 탱크 앞에 연좌한 채 한국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 (AP통신, 4월 28일).
"한국에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희망하기보다는 쓰레기통에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악담을 퍼부었던 영국 언론도 경의를 표했다. "마치 이 나라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과 같았다. 스스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역사적인 지난 한 주일은 외국의 비평가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한국인이 자유정부를 향유할 자격을 가지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런던 타임즈, 4월 27일).
"나는 최근 한국 학생들의 행동이 보여 준 바와 같은 그 고귀한 정신과 그들의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크나큰 존경심을 품고 있다. 나는 프랑스 국민의 축의를 한국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 (5월 10일 드 브레 파라시 의회 의장의 성명).
4월 혁명은 드골정부를 주저앉힌 프랑스 학생운동과 미국 대륙을 휩쓴 대학생들의 베트남전 반대운동 등 세계 각국을 휩쓴 학생운동의 서곡이었다. 그러나 일본, 미국, 프랑스 등 다른 모든 나라의 학생운동이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잦아든 데 반해 한국의 학생운동은 70년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이라는 4월혁명의 과제를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4월혁명은 지금도 진행형의 역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