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4)-1
새벽의 참극
광화문은 왕궁의 남쪽 정면에 있고, 목표로 하는 왕부처의 편전(便殿), 건청궁(乾淸宮)은 최북단에 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궁전이 있고, 그 각 궁전이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통로는 극히 복잡하다.
대원군의 가마를 호위하는 일행이 5~60m를 앞으로 나가, 두 번째 문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뒤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광화문밖에 남았던 일부 수비대와 홍계훈 일단과의 사이에 총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총성은 그쳤다.
침입대는 두 번째의 중문을 빠져, 거대한 근정전(勤政殿)옆을 지나, 그 북쪽에 있는 강녕전(康寧殿) 옆에서 대원군의 가마를 내렸다. 이것은 대원군의 강한 요청에 따른 것으로, 그는 여기에서 「국왕의 윤허(允許/결재)를 기다린다」 고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국왕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 폭도들과 같이 임금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유교국가의 왕족인 대원군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일본 측에는 바람직한 여건이 된다. 민비 살해라는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대원군은 조용히 여기에서 기다리게 된다. 일부 일본 병사가 대원군 호위를 위해 남고, 다른 장병들은 왕궁 안을 목표로 전진했다.
왕 부처의 편전인 건청궁으로 가는 데는, 좌우에 두 길이 있다. 왼쪽 본도로 나아간 일본 수비대와 훈련대는, 시위대의 저항이 있어 혼전상태가 되었다. 시위대는 당직병의 수도 적었기 때문에, 「광화문에 폭도 내습」 보고를 접하고도 병력을 분산하지 않고, 내전 수호에 집중할 방침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부대가 주력이 되어 침입한 무리들에게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어, 금방 뿔뿔이 도망쳐 전투는 끝났다. 일본부대 장병은 내전을 목표로 전진했다.
왼쪽 본도로 간 수비대와는 달리, 오른쪽 간도를 선택한 민간인 일단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왕궁 내의 지리에 밝은 오기와라(荻原)경부를 선두로, 무턱대고 내전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본도에서 시위대의 저항을 받은 일본부대보다 먼저 건청궁(乾淸宮)에 도달했다.
일본인 집단의 경복궁 침입으로부터 민비 암살까지의 일∙한 양국 자료를 읽고 비교해 보면, 「민비는 일본인에 의하여 살해되고, 시신은 정원에서 소각되었다」는 기본에는 완전히 일치한다. 여기에는 의문을 계제시킬 여지가 없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 秀雄) 등 실행대에 참가했던 일본인의 수기에는, 후년의 것도 여전히 “미우라 안”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고, 거기에 곁들여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생각이 강하며, 또 “하수인”으로 도출하여 연결하는 기술(記述)은 피하려는 배려도 있어, 조선 측의 조사나 목격자의 증언과 일치하는 부분 이외에는,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민간인 무리들은 건청궁을 둘러싼 담 중앙의 중문을 빠져 오른쪽으로 돌아 2개의 소문을 빠져, 건청궁의 앞뜰에 진출했다. 여기 위병의 모습은 없고, 궁인들은 실색하여 당황할 뿐, 내전은 이미 무방비상태였다.
국왕은 문을 열어 재친 실내의 중앙에 섰고, 그 주위의 시신(侍臣)이 다가오는 일본인들을 손으로 제지하여, “국왕폐하이시다”라고 알리는데 열심이다. 코바야카와는 「지사(志士)들은 그가 국왕이라는 것을 알자, 경의를 표하고 감히 전내로 들어가는 자가 없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 측의 자료에 따르면, 몇 사람인가의 일본인이 왕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거칠게 굴었으며, 다음에 왕에게 온 왕태자도 “쓰개”를 부셔버리는 것과 같은 난폭한 행위를 당했다. 일본 측에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으며, 그 중에는 「오기와라 경부가 『왕과 왕태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 대원군과의 약속이다!』 하고 큰소리로 나무랬다」고 쓰인 것도 있다.
7일 밤부터 8일 아침에 걸친 시간을, 왕과 왕비는 어떻게 보냈던가----. 7일 밤의 왕궁에서는, 민영준(閔泳駿)의 영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날 밤 숙직으로 왕궁에 있었던 농상공부 협판 정병하(鄭秉夏)는, “8일 오전 2시 경 국왕을 배알하였을 때, 국왕, 왕비, 왕태자의 3분이 같이 장안당(長安당(堂)의 북연(北緣)에 계셨다”고 후에 우치다(內田)영사에게 말했다.
왕은 「일본 수비대에 평소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정병하가 왔으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 정병하는 “염려 없습니다”라고 답하여, 왕은 그것으로 안심했고, 머리 회전이 빠른 민비도 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다시 몇 시간 후, 정병하가 “건청궁 방향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신녕각(神寧閣)의 국왕 가까이로 급히 달려가자, 왕비는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중정(中庭)으로 물러나 있었다고, 말했다. 장안당도 신녕각도 건청궁 안에 있는 건물이다.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 것은 오전 7시쯤이었을 것이다. 민비는 「밤샘 연회를 좋아하고, 해가 뜨고 침실에 드는 때가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날 밤도 연회가 끝난 후에 왕과 같이 그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왕은, 불면증인 민비에게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유쾌하게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습관이었던 것 같다. 어떻든, 왕 부처는 침입자가 건청궁에 가까이 올 때 까지 다가오는 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권재형보고서(權在衡報告書)」는,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의 앞잡이가 된 정병하가, 민비에게 도피할 기회를 주지 않는 책략으로 “염려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여, 그를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박종근(朴宗根/都留문과대학 강사)은 저서 『일청전쟁과 조선』에서,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되지만, 정병하는 미우라의 책략에 걸려들었을 뿐으로, 미우라와 결탁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기술하고 있다.
코바야카와는 건청궁에 침입한 일본인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칼을 빼든 민간인은 일본 병사와 뒤섞여, 왕비로 보이는 여성을 찾아 종횡으로 띠어 다녔다. 그러나 어디에도 왕비인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중에 누군지 모르지만 『왕비는 도망쳤다!』라는 소리가 있었고, 사내들은 더욱 초조하여, 줄지어 있는 방의 장지문을 총 개머리판으로 때려 부수고, 가장 집물(家藏什物)을 넘어뜨렸으며, 마루 밑에도 기어들어가, 우왕좌왕, 모두 혈안이 되어 광분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붙잡힌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다니며, 『왕비는 어디 있어! 황비 있는 곳을 말해!』하고 목에 칼을 들이대고 노호했다. 일본어가 통하지 않는데 생각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각 곳에서 비명이 오르고, 건청궁 일대는 문자 그대로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의 코바야카와의 기술은 목격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시위대 교관 윌리엄∙맥∙다이(제너럴∙다이)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친, 2사람은 건청궁 앞뜰에 서서, 일본인 집단의 폭행을 처음부터 목격하고 있었다.
코바야시카와는, 「이 2사람은 국왕의 거실에서 불과 3,40간(약 6,70m) 되는 곳에 널찍한 양관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금방 나와서, 이 분쟁을 실지에서 목격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은 후일, 국제간의 분의(紛議)에 유력한 자료가 되었다」고 썼다.
대 혼란 가운데서 일본 사관 한 사람이 제너럴 ∙다이에게 마음이 쏠려,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万一)에게 “마당에 외국인이 있다. 이 자리에서 사라지도록 말해 줘”라고 했다. 호리구치가 그것을 프랑스어로 제네럴∙다이에게 전했으나 미국의 퇴역장군에게 프랑스어는 통하지 않는다. 다시 다른 남자가 영어로 그것을 전하자, 다이는 “나는 미국인이다. 일본인의 지시에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대답했으나, 반항해서는 위험다다고 판단한 듯이, 일시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다시 뜰에 나와서 폭행 현장을 계속해서 목격했다.
민비의 최후에 대해서, 코바야카와는 「그(국왕이 있는 방) 오른쪽이 민 왕비의 거실로, 몇 사람의 부인이 서로 섞여 있었고, 궁내대신 이경식(李耕植)도 그 가운데서 왕비를 옹호하고 있었으나, 왕비는 이 실내에서 예리한 칼날에 붕어하신 것 같다. 이경식은 실외로 뛰어 나가고」라고 쓰고 있으나, 이 기술에는 많은 성략(省略)이 있다. 구체적으로 쓰면 하수인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고, 「지사들 가운데 섞여든 조선인이 했다는 풍설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코바야카와의 결론으로 결부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선 측의 조사자료, 히로시마재판기록, 우치다(內田)영사의 보고서 등을 대조해 보면,----.
국왕의 방에 밀고 들어간 일본인 몇 사람은, 왕의 저지를 뿌리치고 오른쪽에 있는 왕비의 방에 난입했다. 이것을 밀어 멈추려고 했던 궁내대신 이경식은, 그들과 밀치락 달치락 하면서 왕비의 방에 들어갔을 때 권총으로 사살되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뜰에 면한 낭하(툇마루)로 피해 나왔으나, 다시 어깨를 칼로 찔려 지면에 굴러 떨어져 숨을 거우었다.
건청궁의 신녕각에는, 많은 궁녀들이 공포에 질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로 겹치듯이 몸을 맞붙이고 떨고 있었다. 폭도들은 그것을 거칠게 끌어 일으켜, 용모와 복장이 빼어난 두 사람을 참살했다. 다시 한 사람의 머리채를 잡고 가까이 있는 옥호루(玉壺樓)로 끌고 들어가 여기에서 살해했다. 그러나 누구도 민비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3시신은, 40대 중반인 민비 이기에는 너무나 젊디젊었다.
계속해서 여기저기 “왕비가 어디 있어”라고 고함치는 소리, 비참한 비명이 들려온다. 궁인이나 궁녀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제너럴∙다이나 사바친에게 까지도 왕비의 소재를 물었고, 한 사람의 폭도에게 붙잡힌 시위대 연대장 현흥택(玄興澤)은 맞고 차이는 폭행을 당하면서 신문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곧 이 자리를 피해 훗날 증언자의 한 사람이 된다.
건청궁 동쪽에 있던 일본인들은, 3시신 중에 혹시라도 민비가----라는 생각으로, 여관과 왕태자를 데리고 와서 얼굴의 진위를 확인 시켰다. 그 결과 옥호루에서 살해된 최후의 한 사람이 민비로 확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