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시민의숲
안내도
우리나라 최초로 숲 개념을 도입한 공원 ‘매헌시민의 숲’
매헌시민의숲은 우리나라 최초로 숲 개념을 도입한 공원으로 도심에서 보기 힘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공원이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서울의 관문이었던 양재 톨게이트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자 1986년에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매헌로를 기준으로 북측 구역에는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 바닥분수, 어린이놀이터 등이 있으며 사계절 풍경이 아름다워 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남측 구역에는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과 1987년 미얀마 안다만해협 상공에서 북한의 테러로 폭파된 대한항공 858편의 위령탑,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 등이 있다.
개원일 : 1986. 11. 30.
면적 : 총 258,991m2
- 서울시 관리 178,635㎡, 서초구 관리(문화예술공원) 80,356㎡
주요시설 :
- 조경시설 : 잔디광장, 파고라, 정자
- 운동시설 : 배구장(족구장 겸용), 농구장, 테니스장 등
- 편의시설 : 매점, 음수대, 화장실 5개소 등
- 기타 : 야외 예식장, 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의사 동상, 백마부대 충혼탑, 대한항공 858편 위령탑, 삼풍백화점 희생자 위령탑,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 등
※ 문화예술공원과 관련된 문의사항은 서초구청 공원녹지과(02-2155-8601)로 문의
공원 안내
어린이놀이터
면적 : 1,300㎡(모래놀이터 : 426㎡)
조성년도 : 2013년
놀이기구 : 조합놀이대 등 2개
야외운동장
농구장 2면(우레탄)
배구(족구)장 5면(클레이)
이용방법 : 선착순
이용료 : 무료
문의 : 공원관리사무실(☎ 02-575-3895)
* 이용방법 및 시간 등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테스니장 이용 관련은 서초구청(☎ 02-2155-8710)으로 문의바랍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상(동상)
건립년도 : 1992.04.29.
규모 : 높이 9.2m
건립자 : 매헌윤봉길의사 의거 제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교통안내
-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 1번출구에서 약 200미터 보행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매헌로 99 (양재동)연락처 02-575-3895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에 관한
안내문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글 : 대학생 인턴기자 우유진
작성일 : 2022-01-20
켈로부대(KLO : Korea Liaison Office)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북한 정부·군·산업 기관에 침투해 정보 수집을 하기 위해 1949년 6월 1일 북한지역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로 그 당시 ‘주한국연락반’ 산하에 있던 10여개 부대를 통칭하던 용어다. 6·25전쟁 때 켈로부대원들은 비정규군 신분으로 군번과 계급도 부여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결성돼 유격대 역할을 했다. 이 가운데 1950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 번좌리에서 결성된 KLO8240 유격백마부대(유격백마부대)는 켈로부대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위부대였다.
이들의 활약은 1950년 10월,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던 UN연합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철수하자 평안북도 정주군과 박천군 일대에서 치안 활동을 하던 청년들과 오산학교 학생들이 그 해 11월 22일 KLO 8240 유격백마부대를 조직하고, 정주군 갈산면 번저리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김응수를 부대장으로 한 대원 2,600여명은 군번도 계급도 없고 무기 등 변변한 지원이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애도, 철산반도, 월사리, 대화도, 신미도, 압록강, 청천강 하구 등에서 공산군과 500여회의 교전을 치렀다. 정식 부대 이름도 없이 '유격백마부대'라고만 불리던 이들은 전쟁기간 동안 적 사살 3,000여명, 중공군 생포 600여명, 반곡애국청년과 민간인 구출 18,000여명과 북한군의 철도, 터널, 교량, 기타 주요시설 파괴 등 북위 40도선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어 UN연합군의 정규작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6.25전쟁 과정에서 552명의 부대원들이 희생되었고 생존 대원들은 1952년 백령도에서 추도식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1992년 7월 15일 서초구 양재 시민의 숲에 충혼탑을 세웠다. 매년 10월에는 유격백마부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유격백마부대 전몰552위 추도식이 열린다.
충혼탑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건립 취지문이 각인되어 있다.
‘여기 잠드신 호국영령 552위는
6.25 공산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이르렀을 때
평안북도 정주를 중심으로 분연히 일어난 애국청년들로서
향토방위를 위해 스스로 유격백마부대를 결성하고
침략군과 싸우다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하신 분들이다.
우리는 이에 엄숙히 머리 숙여
조국을 위하여 초개같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의 애국심과 충의정신을 기리며
육군 전 장병과 더불어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 매헌 시민의숲에는
매헌로를 기준으로
남쪽 구역에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대한항공기 버마 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
삼풍아파트 붕괴 희생자 위령탑이
위치하고,
북쪽 구역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 동상,
야외 운동장, 어린이 놀이터,
야외 예식장, 실내 테니스장,
실외 테니스장 등이
있다.
유격 백마부대 선서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
1987년 미얀마 안다만해협 상공에서
북한의 테러로 폭파된
대한항공 858편의
희생자 위령탑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폭파된 사건
1987년 11월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하던 중 공중폭파됐다. 이로 인해 승객 95명과 승무원 20명 등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사고기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바레인에 내린 북한의 김승일은 체포되자 독극물 앰플을 깨물고 자살했으며, 김현희는 서울로 압송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사면됐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특수공작원들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10여 년 뒤 이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일부 피해자 유족이 2001년 청와대에 재조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이에 대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나, 2009년 3월 11일 폭파범 김현희가 18년만의 기자회견을 열고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의 테러가 분명하다며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가 벌인 자작극설이라는 의혹을 부인했다.
대한항공 858편 항공기
버마 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의
비문
대한항공 858편 항공기
버마 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
1987년 미얀마 안다만해협 상공에서
북한의 테러로 폭파된
대한항공 858편의
희생자 위령탑과
왼쪽에 보이는
양재리본타워2단지아파트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시
[우면산의 눈물]
우면산 산사태와 강남 물난리
2011년 집중 호우가 부른 대형 참사
“서울이 바다가 됐다…폭우피해 속출·교통대란” 2011년 7월 27일 경향신문 기사제목이다. 경향신문은 기사에서 “27일 새벽부터 아침까지 서울 지역에 시간당 최고 30㎜가 넘는 기습 폭우가 쏟아지면서 출근길 시내 도로 곳곳에서 극심한 혼잡이 빚어지고 있다. 전날 오후부터 300㎜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26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평년 전체 장마 기간 동안 내리는 비의 절반가량을 하루 만에 쏟아 부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서울에만 하루에 301.5mm의 비가 퍼부었다. 백 년만의 폭우가 쏟아졌던 2011년 7월 26~28일, 많은 지역에서 집중호우 기록을 경신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시간당 1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지면서 주택과 도로가 침수되며 강남에 물난리를 가져왔고 기록적인 우면산 산사태를 만들어냈다.
우면산 산사태 발생원인 및 피해상황
강남물난리와 우면산 산사태를 불러온 2011년 수도권 집중호우의 원인은 무엇일까? 기상청에서 제공한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남·동 중국해를 지나는 따뜻한 수증기를 머금은 하층의 제트기류와 중국 내륙 상층 저기압으로부터 침강하는 건조한 찬 공기가 중부지방에서 만나면서 비구름대가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호우가 발생했다. 우리나라 북동쪽 사할린 부근에 지상에서 상층까지 잘 발달한 키가 큰 고기압으로 인해 기압계의 흐름이 정체되면서 좁은 지역에 강수가 집중되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이 시너지 효과를 불러오면서 폭우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유독 강남과 우면산 일대에 집중호우가 내린 까닭은 무엇일까?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울·경기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비가 집중된 이유는 관악산 북쪽에서 광주산맥(경기도)의 북쪽으로 강한 남서류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형적 효과로 인해 강남에 물난리가 나고 우면산 일대에 강한 산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산사태 발생 전후의 강우기록은 다음과 같다. 7월 27일 산사태 발생 3일 전부터 강우가 시작되어, 7월 24일 5.5mm, 7월 25일 20.0mm, 7월 26일 92.0mm, 7월 27일 241.5mm의 강우량을 기록하였다. 재해발생 1일 전 누적 강우량은 208.5mm이고, 산사태 유출기간(7월 27일, 06:00~09:00) 동안의 시우량은 14.0~49.5mm/hr로서 최대 강우강도를 보인 시간과 산사태 발생 시기는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2011년 긴 장마기간 동안의 강우에 의해 표면 유수에 의한 침식, 흙의 포화로 인한 단위면적당 중량의 증가 등이 원인으로 사면붕괴가 촉발되었다. 물 폭탄과 같은 100년 강우빈도 이상의 시우량으로 산사태가 발생하였고, 계류를 따라 토사가 하류지역으로 유출되었다. 우면산을 구성하고 있는 모암은 편마암류로 호상편마암이 우세하며, 일반적으로 편마암류는 토심이 깊게 형성되어 산사태가 발생하기 쉽다. 일단 산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피해량이 증가한다. 우면산 산사태의 피해가 커진 것은 지질적인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집중호우로 인해 변경된 수로가 만들어지면서 일시에 물이 유입되었던 것도 재해를 가중시켰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우면산 지역은 주로 사유림지역으로 사방구조물의 시공이 어려웠으므로 재해를 경감시키는 사방구조물이 비교적 적었다. 산사태에 강한 산림으로 조성하기 위한 숲 가꾸기 등 산지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우면산 생태공원 저수지는 예전부터 하단지역 논농사를 위해 있던 저수지로 상부지역 산사태발생으로 토사가 저수지로 유출되어 메워지고 둑이 일부가 붕괴되면서 피해가 가중되었다. 2010년 9월 21일 집중호우 때 산사태는 남부순환로(북서사면) 방향으로 발생한 데 비해 2011년에는 우면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림처럼 다양한 방향으로 산사태가 발생하였다. 2010년 발생한 산사태에 따른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2011년에는 많은 인명피해 및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전문가들은 2010년 산사태에는 산사태 계류의 최하류에는 1980년대 시공한 사방댐(상장 약 25m)이 있어 토석류 및 토사의 유출을 억제하였으나, 2011년 산사태 지역의 계류에는 사방구조물이 없어 직접적인 피해를 가중시켰다고 말한다.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
위령탑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三豊百貨店 崩壞 事故)
요약 :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의 한 동(棟)이 붕괴된 사고.
부실설계, 부실공사, 유지관리 부실 등의 원인으로 발생한 사고로,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6·25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되었다.
지상 5층, 지하 4층, 옥상 부대시설이 있는 2개 건물로 이루어진 삼풍백화점은 1989년 말에 완공하였다. 설계 시에는 종합상가 용도로 설계되었으나, 건물구조 전문가의 정밀한 진단 없이 백화점 용도로 변경하였다. 완공 이후에도 무리한 증축공사를 시행하였고, 1994년 11월에는 위법건축물 판정을 받았다.
사고 며칠 전부터 벽면에 균열이 있는 등 붕괴의 조짐이 있었다. 사고 발생 당일 오전에는 5층 천장이 내려 앉기 시작했으나, 경영진은 영업을 중단하지 않고 보수공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사고 당시 백화점 안에는 고객 1,000여명과 직원 500여명이 있었다. 오후 5시 52분경 5층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20여초 만에 2개동 중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정부는 1995년 7월 19일 당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다. 이 사고를 계기로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가 실시되었으며, 긴급구조구난체계의 문제점이 노출되어 119중앙구조대가 서울, 부산, 광주에 설치되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
위령탑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
위령탑
건립취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
위령탑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
위령탑 비문
매헌시민의숲
매헌시민의숲 발자취
매헌시민의숲에서
나무 타기 하고 있는
고양이들
매헌시민의숲 관리사무소
주변 풍경
매헌시민의숲 관리사무소
주변 풍경
매헌시민의숲의
어린이놀이터
매헌시민의숲의
야외 예식장
매헌시민의숲의
독서 쉼터
매헌시민의숲의
야외 운동장
매헌시민의숲의
실내테니스장
매헌시민의숲의
실외테니스장
매헌시민의숲 탐방로
매헌시민의숲을 흐르는
여의천에
놓인 다리에서 바라본
청계산
2023년10월15일(일요일)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매헌시민의숲] 탐방기 탐방지 :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매헌시민의숲] 탐방일 : 2023년 10월 15일(일요일) 날씨 : 높은 구름이 낀 맑은 날씨 [서초구 : 최저기온 12도C, 최고기온 2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8분 소요) 09:57~09:58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인릉 버스 정류장에서 양재2동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440번 버스 승차 대기 09:58~10:09 헌인릉 버스정류장에서 440번 버스를 타고 양재2동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1분 소요] * 10:09~10:16 양재2동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으로 이동 * 10:16~10:32 서울 서초구 매헌로 99 번지에 있는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을 탐방 [16분 소요]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 주소 : 서울 서초구 매헌로 99 영업시간 : 오전 10시에 운영 시작 주차요금: 10분 300원, 1일 최대 10,000원 (부가세 별도)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의사의 삶과 업적을 알리고 농촌계몽과 의열투쟁을 통한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자 1988년 12월 1일 개관하였으며, 2018년 전시시설 현대화 사업으로 다양한 전시자료와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중앙홀에는 윤봉길의사의 동상이 모셔져 있고, AR, VR, 크로마키 등 최신 영상기술을 이용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제1전시관은 윤봉길의사의 출생과 소년시기, 농촌계몽운동과 칭다오 생활을 전시하고 있고, 제2전시관은 상하이 의거, 순국, 선양에 이르기까지 윤봉길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윤봉길(尹奉吉) 출생 1908년 6월 21일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현내면 조량리 사망 1932년 12월 19일(24세) 사망지역 :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별칭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아호 매헌(梅軒) 학력 1919년 충청남도 예산 덕산초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추서 종교 무종교 부모 윤황(부), 김원상(모) 형제 윤성의(친동생), 윤영의(친동생), 윤영석(친동생) 배우자 배용순 자녀 3남 1녀(장남 윤종, 차남 윤경, 삼남 윤담, 딸 윤안순) 활동 정보 관련 활동 독립운동 주요 활동 훙커우 공원 사건 경력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한인애국단 단원 상훈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현 예산군) 출생이다.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그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현 덕산초등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조선인이 조선말을 못 쓰고 일본말을 써야 하는 것과 교장이 일본인인 것에 불만이 많았고, 게다가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일본말을 배우는 것과 일본인 교장 밑에서 교육을 받는 식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부모님 앞에서 학교를 자퇴할 것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학교를 그만 두었다. 대신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하고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농촌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 계몽 활동, 농촌 부흥 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훙커우(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를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일본군 1만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든 급조 폭발물이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천황탄생일)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아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는데, 바로 그 허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 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하고 나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하고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 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퇴장하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그 틈에 노림수를 사용하여 수통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키고 나서 힘차게 던진 찰나에, 단상으로 정확하게 명중이 되었다. 그 틈을 노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폭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의 기폭장치를 작동시켰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되는 그 찰나에 일본 헌병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윤봉길을 덮쳐 제압하였다. 윤봉길은 제압을 당하면서도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절단하여,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되는 등 일본 군 고위 간부들이 여기저기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었는데, 당시 기념식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내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하면서, 윤봉길을 극찬하였으며,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준 도화선이 된 것이다. 당시 쑨원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11월 2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 받았다. 반면, 일본 헌병대와 순사들이 조선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일제의 복수에 불과할 뿐 의사의 탓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당시 상하이 시에 위치해 있던 임시 정부 청사를 충칭으로 옮겨야만 했다. 순국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5월 28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처절한 복수였다. 유언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홍커우 숙소인 동방공우(東方公寓)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사후 유해발굴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km 떨어진 가나자와(金沢)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기념사업 1965년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준비위가 구성되고 같은 해 6월 29일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준위가 서울 조계사에서 발족되었다. 2012년 그의 일본 순국 기념비에 모욕적인 문구가 담긴 말뚝을 박는 사건이 벌어져 논란이 되었다. 기념관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시민의숲역의 부역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경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의사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이 4세 때부터 망명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의 장소였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梅亭)이 있다.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 대해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던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장제스의 이러한 감탄은 이 말이 가장 많이 나올 수 있는 백범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와 장제스 일기에서 사실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장제스 일기에서는 "옛 사람이 말하길 국가의 원수(怨讐)와는 한 하늘 아래서는 같이 살 수 없다 하였다. 공적을 쌓고자 무력을 앞세워 침략을 일삼는 자들이 깨달은 바가 있지 않겠는가?"고 의거를 굉장히 높게 칭송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 푼도 돕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김구 선생은 만주사변 발발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더욱더 위축된 상황으로 정무적 정세적 판단하에 과감한 결단이 윤봉길의 거사였으나,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논란 1999년, 강효백 경희대학교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현재 널리 알려진 훙커우 의거 이후 체포사진(오른쪽 사진)이 가짜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오른쪽 사진과 표제 사진의 인물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은 물론, 윤봉길은 중절모를 쓴 적이 없으며, 트렌치 코트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관해 대한민국 정부는 오랫동안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던 2008년 10월 8일,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의 주장에 근거하여 이 사진 속 인물이 윤봉길이 확실하다고 답변하였으며, 강효백 교수는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한편, SBS스페셜에서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봉길의 유족들 중 6촌 동생인 윤명의는 "윤 의사가 생전에 입지 않았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봉길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과 동생 윤남의는 1976년에 위 사진의 인물이 윤봉길이 맞다고 증언한 바 있다. 조작 판명 2011년 3월 1일 SBS 스페셜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 방송에서 윤봉길의 사진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상해 총영사관의 외무성 경찰사에서는 "윤봉길은 두들겨 맞고 기절해 군인과 헌병의 힘에 의해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아사히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두 장 또한 컴퓨터 그래픽 판독 결과 각각 동일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저서 《오추》(嗚推) 《옥수》 《농민독본》3권 《기사년 일기》(己巳年日記) 가족 관계 증조: 윤재 조부: 윤진영 아버지: 윤황(????~1950년) 어머니: 김원상(1889년~1952년) 부인: 배용순(1907년 8월 15일 ~ 1988년 7월 10일) 장남: 윤종(尹淙, 1927년 ~ 1984년 4월 22일) 자부: 김옥남(1936년~) 손녀: 윤주경(尹柱敬, 1959년 5월 3일 ~ ) 손녀: 윤주원 손자: 윤주웅(尹柱雄, 1971년 1월 26일~) 증손자:윤행복 차남: 윤경(尹涇, 1928년 ~ 1929년) - 2살 때 홍역으로 사망 외동딸: 윤안순(尹安順, 1929년 ~ 1929년) - 1929년 아직 만나이 한살바기도 채 아니 되어 홍역으로 사망 삼남: 윤담(尹淡, 1930년 ~ 1938년) - 덕산보통학교 1년 중퇴 후 9살 때 복막염으로 사망 ] * 10:32~11:15 매헌시민의숲을 탐방 [43분 소요] [우리나라 최초로 숲 개념을 도입한 공원 ‘매헌시민의 숲’ 매헌시민의숲은 우리나라 최초로 숲 개념을 도입한 공원으로 도심에서 보기 힘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공원이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서울의 관문이었던 양재 톨게이트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자 1986년에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매헌로를 기준으로 북측 구역에는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 바닥분수, 어린이놀이터 등이 있으며 사계절 풍경이 아름다워 공원을 산책하는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남측 구역에는 유격 백마부대 충혼탑과 1987년 미얀마 안다만해협 상공에서 북한의 테러로 폭파된 대한항공 858편의 위령탑,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 등이 있다. 개원일 : 1986. 11. 30. 면적 : 총 258,991m2 - 서울시 관리 178,635㎡, 서초구 관리(문화예술공원) 80,356㎡ 주요시설 : - 조경시설 : 잔디광장, 파고라, 정자 - 운동시설 : 배구장(족구장 겸용), 농구장, 테니스장 등 - 편의시설 : 매점, 음수대, 화장실 5개소 등 - 기타 : 야외 예식장, 윤봉길의사 기념관, 윤봉길의사 동상, 백마부대 충혼탑, 대한항공 858편 위령탑, 삼풍백화점 희생자 위령탑,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 등 ※ 문화예술공원과 관련된 문의사항은 서초구청 공원녹지과(02-2155-8601)로 문의 공원 안내 어린이놀이터 면적 : 1,300㎡(모래놀이터 : 426㎡) 조성년도 : 2013년 놀이기구 : 조합놀이대 등 2개 야외운동장 농구장 2면(우레탄) 배구(족구)장 5면(클레이) 이용방법 :선착순 이용료 :무료 문의 : 공원관리사무실(☎ 02-575-3895) * 이용방법 및 시간 등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테스니장 이용 관련은 서초구청(☎ 02-2155-8710)으로 문의바랍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상(동상) 건립년도 : 1992.04.29. 규모 : 높이 9.2m 건립자 : 매헌윤봉길의사 의거 제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교통안내 -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 1번출구에서 약 200미터 보행 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매헌로 99 (양재동)연락처 02-575-3895 ] 11:15~11:17 걸어서 매헌시민의숲에서 매헌시민의숲/언남고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1:17~11:18 매헌시민의숲/언남고교 버스 정류장에서 양재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서초6번 마을버스 승차 대기 11:18~11:21 서울시 서초구 매헌시민의숲/언남고교 버스 정류장에서 서초6번 마을버스를 타고 양재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3분 소요] 11:21~11:25 양재역으로 이동하여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1:25~12:09 양재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연신내역으로 이동 [44분 소요] 서초구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매헌시민의숲] 지도 매헌 시민의숲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