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매화를 노래함
정도전(鄭道傳 : ? ~ 1398)
옥을 깎아 옷을 짓고
얼음 먹고 넋을 길렀네
해마다 눈서리 맞으며
봄날의 영화는 알지 못하네
詠梅(二)영매
鏤玉製衣裳(누옥제의상) 啜氷養性靈(철빙양성령)
年年帶霜雪(연년대상설) 不識韶光榮(불식소광영)
[어휘풀이]
-鏤玉(누옥) : 옥을 깎다. 鏤(누) : 아로새기다. 깎다. 쇠붙이 장식
-啜氷(철빙) : 얼음을 먹다. 啜(철) : 마시다. 맛보다. 먹다.
-性靈(성령) : 영혼. 넋.
-韶(소) : 순임금의 음악, 아름답다. 봄기운
[역사 이야기]
정도전(鄭道傳 : ? ~ 1398)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로 호는 삼봉(三峯)이다. 그는 젊은 시절 단양의 도담 삼봉을 좋아했는데 여기에서 호를 따왔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저서로 『삼봉집(三峰集)』이 있다.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세 때 충주삵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공민왕의 유학 육상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어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했다. 공민왕이 죽자 이어 우왕이 즉위했다.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나주에 속한 화진현에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그는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른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도 불타올랐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민왕 때 고려 조정의 한편에는 정몽주를 중심한 온건 세력과 정도전, 조준과 같은 급진 개혁 세력으로 나뉘었다.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살해된 후 1392년 7월 정도전은 조준, 남은 등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 개국의 주역이 되었다.
1392년 5백년 고려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부여했다. 정도전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하여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는 수도 건설 총책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한양 궁궐과 종묘의 위치, 궁궐과 궁문의 위치, 사대무과 사소문의 칭호 등도 정도전에게 짓도록 하였다. 명칭의 대부분은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것이었다. 사대문을 정할 때도 동쪽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숙청문의 최초의 이름은 소지문(昭智門)으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 되었지만 최종 낙점은 숙청문으로 정해졌다. 북쪽의 문에 지(智)자를 쓰지 않고 청(淸)자를 쓰게 된 것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는데. 이후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나오게 된다. 그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했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주요 요직을 거치며 권력의 핵심 인물이 된다. 그가 주창한 요동정벌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 외교문제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그 후 정도전은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했다. 첫 번째 왕비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로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아들들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이를 무시하고 나이 어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관여한 것이다. 더구나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私兵)의 혁파 문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정도전은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다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피살당하게 된다. 정도전은 조선초 내내 신원되지 않다가 고종 때에 이르러서여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