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등산이나 관광시즌이 따로 없지만, 무더운 여름 내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한 단풍여행을 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중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있는 천년고찰 ‘부석사(浮石寺)’는 고즈넉한 자태로 여름철에는 울창한 녹음에 둘러싸이고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문화재청 헤리티지 채널의 이미지 헤리티지에서 ‘극락에 이르는 길’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절이다.
사실 부석사는 경북 영주 이외에
최근 일본 쓰시마의 관음사에서 훔쳐온 금동관음보살좌상을 원래 조성했던 서산시 부석면의 부석사와 같은 절 이름인데다가 두 곳 모두 의상(義湘;
625~ 702) 대사와 깊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영주 부석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 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서 신라 5교9산 중 5교의 하나인 화엄종(華嚴宗)의 본산인데, 의상 대사는 귀국한 그 해에 강원도 낙산사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으며, 그 뒤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다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종을 전파했다고 한다.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 대사가 당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선묘 낭자가 용으로 변해서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 곳 의상 대사를 보호하다가 이곳에 절을 지을 때 바위로 변해서 숨어 있던 도적떼를 날려버린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는데, 부석사란 이름도 무량수전 뒤편에 있는 뜬 돌(浮石)이라는 이름을 땄다고 한다. 두곳의 절 부석사에도 비슷한 선묘 낭자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영주 무량수전 뒤에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전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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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위치한 부석사 전경. 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은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
신라 진평왕 42년(625년) 경주에서 한신(韓信)장군의 아들로 태어난 의상
대사의 속성은 김씨로서 그는 26세 때인 진덕왕 4년(650) 불법을 연구하러 당나라로 가려다가 고구려 군에 붙잡혀서 실패하자, 10년 후인
36세 때 원효와 함께 당항성을 거쳐 입당하려다가 원효는 포기하였음에도 홀로 입당하여 당의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 대사로부터 화엄계를 배우고
661년 귀국했다.
부석사는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으로 본다. 1372년(공민왕 21) 원융(圓融)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부석사를 크게 중창하고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있는 화엄경판도 원융 국사가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석사는 현재 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있다.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은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풍기나들목을 빠져나와 915번 도로를 이용하거나, 경부고속도로
김천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 상주를 빠져나가면 된다.
주차장에서 부석사로 올라가는 매표소 앞에는 커다란 둥근 연못이 있는데, 연못 중앙의
분수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 대체로 산사를 가는 길은 계곡 길을 걷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부석사는 계곡이 아닌 능선으로 난 산길을 오르게 되고, 주변에는 짓노란 단풍으로 유명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널리 알려준 모 교수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 은행나무숲 길이 일주문에서 사천왕문까지 약800m가량 펼쳐지는데, 근래 새로 지은 일주문이 가냘프게 서있는 곳을 지나 사천왕문은 너무 가팔라서 사천왕문 전경을 미처 찍지 못할 정도이지만 수령이 오래되지 않은 싱싱한 은행나무 길을 오르다보면 산사를 찾는 이들의 마음까지 덩달아 젊게 하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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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앞쪽에 있는 3층석탑, 2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좌우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이 동·서 양쪽에
세워져 있는데, 이 3층 석탑은 무량수전 앞에 있는 3층 석탑(국보)과는 다른 탑으로서 원래는 부석사 동쪽 일명사 터에 있던 것을 1966년경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또,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있다고 한다.
2층으로 된 범종각을 지나면 2층
누각인 안양루(安養樓)가 있는데, 안양이란 극락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
안양루 아래로 허리를 구부린 채 들어가면 국보인 석등과 무량수전이 있는데, 이런 고행은 부처를 뵈기 위한 고행의 의미를 안고 있다. 하지만,
가람배치는 거대한 사찰이 아니라 마치 어느 부유한 저택처럼 아기지기하다.
부석사가 유명한 것은 신라 5교 9산 중 5교의 하나인 화엄종의
발상지라는 점과 함께 현존하는 국내 최고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다는 점에 있는데,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서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주간거리가 크고, 알맞은 배흘림이 안정감을 주며, 간결한 두공과 네
귀퉁이에 귀솟음 수법은 건물 전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건물은 남향인데도 아미타여래(국보 제45호)가 서향으로 안치된 것은
아미타여래가 서방의 극락세계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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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안양문(왼쪽)과 무량수전 |
무량수전은 고려 공민왕 때 몽고침략으로 소실된 것을 우왕 때 새로 지은 건물로서 일제강점기인 1916년 무량수전을 전면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 명으로 1376년(고려 우왕 2) 중창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이 건축만으로도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최고의 목조건축물이다.
무량수전은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함께 한국 고대 사찰의 건축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부석사 경내의 1377년(고려 우왕 3)에 건립했다는 묵서명이 나온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건물과 비교할 때 약100년~150년 정도 먼저 건축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미술사학자이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로 더욱 유명한 부석사는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3층 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원융 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 국보 5점, 보물 6점, 경북도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