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음악 / 배영주
명인 명가 식당이 아니라도 맛으로 승부를 내면 조그만 식당이 늘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런 음식점은 가는 곳마다 줄을 한참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 일본의 어느 거리를 기웃거리며 다니는 와중에 내 귀가 쫑긋하며 반응하는 무언가 있었다. 귀에 익숙한 재즈 음악 소리였다.
일본인들이 재즈 사랑이 각별하다는 것을 대중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다. 편의점, 빵집, 심지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조차 경쾌한 재즈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맛집 기행보다 나는 음악에 쏠려 가게를 살피곤 했다. 재즈를 좋아해 소설가가 되기 전 재즈바를 운영하기도 했다는 재즈 덕후,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 그가 제일 아끼는 엘피 음반의 재즈 음악을 함께 들어봤으면 참 좋겠다는 당치도 않을 깜찍한 상상을 하며 일행을 따라다녔다.
길을 가다 어디선가 끌리는 음악이 들리면 내 귀는 즉각 반응을 일으킨다. 제목이 무엇일까를 끝까지 알아내고야 마는 오기도 부린다. 곡이 맘에 들면 질릴 때까지 듣다가 잠시 잊은 후 훗날 다시 듣곤 한다. 요즘도 나는 진공관 라디오를 켜고 습관적으로 음악을 듣는다.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바쁜 직장 생활을 하느라 처녀 시절에 미친 듯 끌어모았던 음반도 그땐 뒷전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다시 음악을 찾았다.
늦은 나이에 들어간 대학원을 다니던 길목에 내가 가끔 들르던 아늑한 재즈바와 엘피 음악카페가 있었다. 음악에 정통한 사람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괜찮은 음향장비를 갖추고 있어 음악 듣기엔 최적의 공간이었다. 오늘도 그 길목을 지나쳐 다닌다. 어느 날엔가 엘피 음악카페의 붉은 간판이 자취를 감췄고, 재즈클럽의 푸른 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늘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아쉽고 허전하다. 영원할 것 같은 실체들이 사라지면 한때의 추억만 남는다.
고요한 산골에 살다 부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정없이 내달리는 자동차 소음에 어리둥절했다. 자주 목울대가 아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명태처럼 말라 갔다. 내 힘으론 어쩔 도리 없이 처한 상황이라면 끝까지 버티고 살아야 한다는 각오는 그때부터 생겼다. 음악의 관심은 라디오로부터 시작됐다. 자취방에서 밤이 이슥토록 공부를 하다 일어나면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을 차린 후 주파수가 맞지 않아 지직대는 작은 라디오를 탁탁 두들겨 들려오는 멜라니 사프카의 ‘가장 슬픈 일’은 나의 마음을 달래 주는 매개체였다.
그 시절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팝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후 재즈, 블루스, 싸이키델릭과 락발라드도 자주 듣곤 한다. 클래식은 FM 라디오 방송으로 부담 없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지칠 땐 음악은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는 고마운 존재다. 젊은 시절, 술버릇 하나가 있었다. 술의 마력인지 장난인지 평소엔 조용한데 술을 마신 뒤엔 스피커에 스파크가 일도록 볼륨을 크게 올려 음악을 듣는 객기를 부렸다. 요즘 아파트에선 언감생심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전통 재래시장이 있다. 새로 들어선 건물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허름한 시장은 등 휘어진 할머니의 평생 일터다. 풍파에 거칠어진 손으로 정성스레 다듬어 놓은 쪽파나 콩나물 그리고 보드라운 상추나 푸성귀들은 재래시장에서 즐겨 사 먹는다. 한 곳에 정착하면 낯선 곳으로 선 듯 옮겨가지 않는 성향에 익숙해진 시장 골목을 지나다니게 된 지도 오래다.
비가 내리는 날엔 구멍 뚫린 검은 천막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엔 따뜻한 칼국수가 생각난다. 처음 이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칼국수 집주인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들어 요양병원으로 가고 요즘엔 아들딸들이 대를 이어하는 가게들도 있다.
늘 가던 집을 고수하지만 더러는 이곳저곳 돌아가며 맛을 보기도 한다. 시장을 보러 지나칠 때마다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다. 주인이 음악을 좋아하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스피커를 살펴보니 꽤 괜찮은 중고 스피커다. 입구 양쪽에 덩그러니 거꾸로 매달린 스피커는 한때 어느 음악 애호가의 마음을 달래 주었을 울림통이었겠다. 긁힌 상처가 몇 군데 있었으나 소리는 괜찮았다.
음악이 흐르는 그 집에서 칼국수를 시켰다. 공사판에서 일하다 온 일꾼들, 깔끔한 정장을 한 직장인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한 줄로 앉아 기다린다. 경쾌한 음악 장단에 맞춘 국숫집 젊은이의 칼질 소리가 흥겹다. 비 내리는 오후, 시장통 칼국수 집 긴 의자에 낯선 사람들 틈에 나란히 앉았다. 국수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고 있다. 즐겨 듣는 핑크 마티니의 노래에 이어 조동진의 ‘음악은 흐르고’가 강물처럼 흐른다. 부조화 속의 조화, 음악이 흐르는 풍경이 그리 서먹하지 않다. 어디든 음악이 있는 공간이면 그곳이 좋다.
아파트 창밖에서 쉼 없이 들려오는 공사 소음이 신경 한 부분을 갉아먹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지금 당장 피할 수는 없다. 마음 같아선 어느 한적한 시골에 아담한 집을 짓고 오디오 볼륨을 높여 맘껏 음악을 듣고 싶다. 당장 줄행랑을 치고 싶지만 참는 수밖에. 언젠가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나로서 전원주택에 살며 텃밭을 가꾸는 얘기에는 내심 부럽기도 하다.
힘들거나 즐거울 때, 어느 때고 나는 음악을 듣는다. 사월이면 딥 퍼플의 ‘사월’을, 칠월이 시작되면 유라이어 힙의 ‘칠월의 아침’을, 시월이 되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찾아 듣는다. 노래에 얽힌 지난날은 따뜻한 추억으로 살아있다. 기분이 나쁘거나 좋을 때, 우울할 때, 더러 핏대를 세울 일에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수그러든다. 음악은 나에게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첫댓글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데 음악이 큰역할을 한다 들었습니다.처한 환경이나 심리상태에 따라 찾는 음악이 달라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