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내시경] 문래동 골목-문래동은 오늘도 쇠망치 소리가 들린다
주간경향 2020.12.21
문래동은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흔적을 지닌 동네일 것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일이고, 지금의 골목길과 집들의 자취는 그때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방직공장과 그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으로 지어진 후 몇차례 주인을 바꿔 1960년대부터 청계천 등지에서 이주한 철공소들의 집단지역이 됐다.
갈대밭을 밀어내고 반듯하게 줄을 그어 만든 골목길은 네모난 구역으로 집과 공장 사이를 구분 짓는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컸다던 방림방적과 경성방적 공장이 문래동에 있었다. 문래동이란 이름은 실 공장의 물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실을 잣던 물레는 사라졌어도 이름은 그 사연을 기억하고 있다.
문래동의 공장들은 대부분 대형공장에 필요한 기계장비를 생산한다.
실을 잣던 물레는 옛이야기로
문래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쩌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시간의 호리병 속에 고스란히 갇혀 있을까 신기하다. 신도림역 북쪽으로 도림천을 맞대고 경부선 철길을 따라 문래역까지 그 너른 땅은 대부분 낮은 단층 공장에서 쇠 깎는 소리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공간을 메운다. 서울 어느 골목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연립주택이나 다세대주택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집들은 고친 흔적은 엿보이나 아주 오래된 터전을 아예 헐어 뭉개고 새로 세운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골목에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남아 있는 노동의 영토이다.
공장에 필요한 장갑이며 작업복과 장비를 파는 가게 주인에게 요즘 경기를 물었다. “우리는 공장보다는 사정이 나은데도 전부 경기가 없으니 힘들다는 소리를 달고 산다”고 한숨짓는다. 문래동 일대가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 제조업이 줄고 주요 공장들이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이다. 해방 이후 누렸던 번영의 시기는 오래되고 정체된 공장의 모습처럼 흔적 속의 일일 뿐이다.
철판을 자르던 공장 노동자는 “문래동은 주로 공장에 필요한 기계와 장비를 만들고 있다. 지방 공장들이 잘 돌아가야 여기도 일이 넘친다. 일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펑펑 돌아갈 정도도 아니다”고 설명한다. 제조업에 관한 경기의 흐름은 문래동이 풍향계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문래동의 집과 골목들은 참으로 알뜰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길가의 가게나 공장들 뒤편으로는 겨우 한 사람이 어깨를 움츠리고 걸어야 할 샛골목들이 모세혈관처럼 나 있다. 그 골목길로 좁은 문들이 닫힌 채 줄을 잇고, 들창들이 골목 샛바람을 맞아들인다. 한낮 골목 안엔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알 수 없을 적막함이 흘렀다. 골목 밖 공장의 기계 소리가 살짝 흘러들어 좁은 골목을 서성거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낯선 골목 안 모습이다.
문래동의 골목 집들은 1941년부터 건설된 영단 주택이 고스란히 남은 모습이다. 노동자를 위한 집들이 20평에서 6평까지 옹기종기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그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은 문래동 1가와 2가, 4가. 나머지는 시대의 조류를 따라 모두 사라졌다. 기찻길과 붙어 있는 문래동 1가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다만 인쇄공장들이 있던 자리에는 빌딩이 들어서서 아파트형 인쇄공장들로 채웠다. 그 나머지 곳들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거리 모습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공장 뒤편으로 샛골목 안 살림집들이 있다.
고층 아파트에 포위된 도시의 섬
영등포초등학교 주변으로 문래예술공장이 있고, 길 건너엔 예술가들이 들어와 자리 잡은 문래예술촌이 있다. 거리엔 이 골목 안에서 수십년을 보냈을 기계와 공구들이 조형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눈길을 끈다. 철공소 사이사이로 예술의 흔적은 강렬했다. 이곳 골목길은 이미 명소가 돼 버린 탓에 구경꾼들의 발길도 잦고 이리저리 소개하고 홍보하는 프로그램도 활발하다.
한때 싼 집값 덕분에 젊은 예술가들이 문래동 사이사이로 스며들면서 골목의 분위기는 반짝 살아나는 듯했다. 덕분에 예술공간도 생기고 유명세도 치렀다. 한동안 문래동의 화제는 철공소보다는 예술가들에게 쏠렸다. 뒷골목에 간간이 남아 있는 벽화와 조형물이 그들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이 한 곳에 붙박이로 정박할 리 없지 않은가. 요즘엔 오히려 젊은 감각을 앞세운 가게들이 공장 사이에 생기고, 인터넷 맛집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골목을 오가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예술가들은 떠나고 그 사이사이에 카페와 음식점이 밀려들고 있다.
1960년대부터 철공소 밀집 공단으로 바뀌었다.
새로 생긴 가게들은 철공장과 어울리지 않는 듯 따로 선 모습이다. 쇠를 깎고 철판을 자르는 공장 곁 커피공방이며 맥주공장은 조화가 깨진 모습이다. 일본식 술집이나 태국식 식당에서 철공소 노동자들이 지친 하루를 위로하는 일은 없을 듯 보인다. 오히려 공장 옆에 붙은 날선 문구가 문래동 노동자들의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함부로 담배꽁초 버리지 마시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방해가 됩니다.” 문에 기댄 공장주인 “이젠 싸우기도 입이 아프다”고 혀를 찼다.
골목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나들이 나온 이들의 입장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쉐프란 생경한 이름의 주방장이 고기를 써는 모습보다 늘 대하던 밥집 아줌마가 더 편할 수 있다. 과테말라산 원두를 직접 볶고 갈아 커피를 내리는 멋진 카페가 텅 비어 있다. 그 옆으로 오래된 아크릴 간판을 지고 있는 ‘길다방’은 낮에도 부지런히 커피를 배달하고 손님을 맞는다. 큰길가 2층엔 다문화극장과 이국적인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이 동네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츰 늘고 있단다.
문래동 곳곳에 젊은 감각의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다.
길가에 예스러운 모습의 대한성공회 문래교회는 이 동네뿐 아니라 우리 노동운동 역사에 흔적을 남긴 곳이다. 1980년대 후반 교회 안엔 ‘개똥이네’라는 야학이 있었다. 방림방적 등의 노동자를 위한 교양교실에서 노동조합 관련 교육을 했다. 경찰의 감시와 수색도 당했다. 당시 영등포 일대 양평동·당산동·문래동 등지의 교회들은 노동자를 위한 생활 야학교실을 열었고, 이곳에서 소위 민주노조운동의 시발이 됐다. 문래교회를 지나치면 우리가 지나온 한 시절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교회에서 길 건너 남쪽 문래동 2가와 4가는 공업지대로 건재하다. 쇠 다루는 노동자들이 이 골목의 주인들이다. 철판을 자르던 공장 사장은 “지금은 철판 가공은 대부분 컴퓨터로 제어해서 사람 손이 덜 간다. 이제는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대충하던 시절은 지났다. 컴퓨터도 알고 자동화 장비를 잘 아는 젊은 세대가 주력이 됐다”고 이야기했다. 점점 발전하는 기술은 이 골목 안의 풍경도 바꿔가고 있다.
CNC라는 컴퓨터 제어 가공 장비가 대세가 됐다. 결과물이 더 정교하고 품질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 공장 사장의 설명이다. “이제 이 일은 끝났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나이 든 노동자가 이야기한다. 좋은 시절은 지났고, 이제 다시 그 시절이 올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골목 안 군데군데 입맛을 사로잡는 맛집들이 숨어 있었다. 식사로도 든든하고 술안주로도 그만이라는 골목집 오리 감자탕도 유명하다고 한다. 칼국수를 비롯해서 안 하는 것이 없는 분식집도 문래동 골목 맛집이다. 방송에 몇 차례 나간 후 멀리서 일부러 오는 손님들도 많다고 한다. 인심 넉넉해 보이는 주인은 “내 집 찾아오는 손님 맛있는 음식 대접하는 것이 내 일이다”고 말한다.
젊은 예술가들이 골목에 예술의 자취를 남겼다.
집값 싼 덕분에 예술가 몰리기도
수십년 자리를 지켰던 주물공장은 반을 뚝 떼서 파스타집에 자리를 내주었다. 주물공장은 명패로만 흔적이 남았다. 이 골목엔 그런 집들이 여럿 보인다. 공장에서 쇠를 깎는 일보다 파스타 면을 삶아 내는 일이 더 돈이 되는 시절인가 보다.
이방인이 보아도 터줏대감인 가게들이 눈에 띈다. 붉고 푸른 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발소는 척 봐도 연륜이 있다. 늙은 이발사의 눈에는 세상은 변한 것 같아도 그다지 변치 않았다고 한다. 하루 살면 하루치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이 세상일이라는 것이다. 가위 쥘 힘만 남아 있다면 이발소 문을 닫는 일은 없을 것이란다. 이발소나 이발사나, 그 손님들이나 참으로 무던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간판 중 자주 눈에 띄는 것은 ‘빠우’라는 말이다. 어디서 유래한 말인지 모호하나 기계를 연마하고 광내는 일이란다. 쇠를 깎아 가공한 후 최종적으로 연마하고 광을 내 마무리하고 제 모습과 기능을 살리는 일을 그렇게 부른단다. 현장에선 기리며 기대빠시, 이바리, 스베루 따위의 일본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나이 든 노동자는 “요즘엔 그나마 많이 줄었다”고 했다. 사수로부터 일과 함께 일머리며 말까지 배우고 이어진 자취가 반백년을 넘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직은 건재한 듯 보이지만 골목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무겁다. 재개발 이야기도 나오고, 군데군데 문을 닫는 공장들도 보인다. 공장 임대 매물도 늘고 있다고 했다. 문래동 일대는 도시의 섬이다. 온통 고층 아파트로 포위된 공장들은 그 명맥이 언제 끊어져도 놀랍거나 아쉽지 않아 보인다. 오직 여태 버텨온 것이 놀랍다. 주변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낮은 건물들이 들어선 곳. 인근 공원을 여유롭게 걷거나 도림천 길을 따라 한가히 운동하는 사람들과 달리 하루하루 노동의 나날들을 감당하는 이들이 살아 있는 곳이 문래동이다.
도시가 변했고, 그 안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노동보다 불로소득을 더 부럽게 보는 시절이다. 문래동 골목길을 걸으면 나지막한 지붕 너머 높은 아파트가 산맥처럼 보인다. 그곳의 삶과 이 골목의 풍경은 확실히 다르다. 언제까지 변치 않는 것이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 골목길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지 더 궁금해진다. 문래동을 걸으면서 자기 힘과 일로 이 도시에서 버티는 이들의 건강함을 배운다. 문래동은 오늘도 쇠망치 소리가 들린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