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속으로 사라지다 / 이원규
봄비를 맞으며
몽유병 환자처럼 걷고 싶다
잘 모르는 여인과
팔짱을 끼고
무작정 빗속을 걷고 싶다
아카시아 이파리들이
저문 강의 은어 떼처럼 반짝이면
머리카락이 젖고 얼굴이 젖고
속살이 다 젖을 때까지
잘 모르는 여인의 체온을 느끼며
아무 말 없이 걷고 싶다
전라선 밤 열차를 타고 가다
구례구역이나 어느 간이역에 내려
비 내리는 섬진강변을 걷다가
마침내 아랫도리까지 젖으면
강물도 저의 친구로 받아주리니
산성비면 어떻고 감기면 어떤가
뼛속 깊이
묵언의 강이 흐르고
소쩍새 울음이 귓불을 스치면
이따금 아카시아 꽃잎들이
눈썹에 콧잔등에 달라붙겠지만
개의치 않고 걸어가고 싶다
가다 지치면
십오 촉 외등 하나 안쓰러운
소읍의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가
마침내 나란히 눕고 싶다
젖은 구두가 마르고
속옷이 마를 때까지
알몸의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비릿한 봄비향 속으로 멸입되고 싶다
무덤 속 합장된 부부처럼
수백 년간
백골의 마디마디를 걸고
비로소 깊은 잠을 청하고 싶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시 읽는 방
봄비 속으로 사라지다 / 이원규
김연희
추천 0
조회 20
24.05.10 21:02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