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지방(후쿠오카와 유후인, 구마모토) 여행기
연휴에 일본 규슈지방(후쿠오카와 유후인, 구마모토)에 다녀왔다. 명절에
외국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수십만이라는 뉴스를 예전에 보고서 부럽다,
생각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때가 오다니 인
생 참 살고 볼 일이다. 본격 여행기, 까지는 물론 아니고 그냥 뭔가를 경험
하면 뭔가 생각하고 적어야 할 것 같은 강박증에 이끌려 몇자를 적어본다.
멀리 거대한 유후산 (1583m) 이 내려다보는 한적한 산간 마을 유후인은
주업이 관광이다. 쉴새 없이 꿈틀대는 일본의 불안정한 지층들이 지하수를
데워 온천물을 끓인다. 작지만 품격 있는 휴양 시설들이 노상 온천을 만들
어 관광객을 맞이한다.그곳에서 한겨울 깊은밤 온천에 몸을 누이고 하늘의
별을 보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문을 열고 나가 노
천탕까지 가는 몇미터의 거리.한겨울의 찬바람 속으로 몸을 잠시 꺼냈다가
호들갑스럽게 온천수 안으로 뛰어들어 깊숙이 몸을 담갔다.마치 언 몸으로
고된 노동을 마친 겨울날 따뜻하게 데워진 솜이불 속에 몸을 넣은 것 처럼,
달콤 하면서도 완강한 안온함이 온몸을파고든다.새로운 차원의 경험이었다.
내가 묵었던 사이가쿠칸(saigakukan)
유후인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만큼 작은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동네에 대기업 마트나 휴양시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아는
바로 유후인에 이름이있는 숙박, 온천 시설들은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것
이고 프랜차이즈도, 대기업 계열사도 아니다.내가묵은 료칸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관광책자에 소개될 정도로 사람이 줄을 잇는 곳이었지만 한 곳에서 오
래 영업을 해온 나이 지긋한 여사장이 주인이었다. 이곳은 객실 수를 늘리지
않고 늘 적은 수의 손님을 들인다.그 덕분에 대부분 시간에 온천을 개인적으
로 쓴다는 느낌으로 깊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일본의 대도시에는 세븐일
레븐, 패밀리마트가 즐비하지만, 유후인의 거리에서는 그런 흔한 대기업 계
열 편의점조차 잘 찾을 수 없었다. 거리에는 지역의 특색있는 맛집과 상점들
이 저마다 조용히 빛을 내며 자리를 채우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번잡하지 않
은 거리를 고요하게 걸으며 유후인의 특색과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오후의
금빛 햇살이 내려 앉은 유후인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밤바다의 물비늘 처럼
고요하게 반짝이는 마을이었다.
유후인 거리의 오후
구마모토 성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15세기)에 만들어졌고 이후 가토 기요
마사가 대규모로 축성한 곳이다. 일본 3대 성으로 꼽히고 벚꽃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내가 방문한 날은 주말이긴 했지만 벚꽃 메리트가 없는 겨울이었
음에도 각국의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절반 정도가 외국인이었고 나머지가
일본인으로 보였다.
살육의 흔적을 관광하는 사람들 : 구마모토성
성은 전쟁터다. 기이할 만큼 높이 쌓아올린 천수각에서는 구마모토 시 전체
를 조망할 수 있었다. 수백 년 전 이 자리에 서 있던 병사들은 멀리 산 너머
짓 쳐들어오는 적들 군마의 모래 구름까지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적병
의 본대가 당도하기 까지 한두 시간 동안, 전투태세를 하달받은 일선 병사들
은 긴장에 떨며 죽고 죽이는 살인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곳에
들어선 수백 년 후 방문객들은 더욱 효과적인 살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
축물들을 한가롭게 관광했다.
구마모토 성 천수각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마모토 시내
전쟁은 섹스만큼 인간의 본능 이어서, 섹스를 성사하기 위해 인간이 장시간
의 노력을 하는 것처럼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와 시설들은 항상 대규모
의 자원과 노동의 투입을 거쳐 각 시대의 첨단 과학과 문화를 이뤄 냈다. 구
마모토 성의 건축물과 장벽들도 규모와 섬세함에 있어서 정신을 아득하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다만 성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수로와 국내에서 결코 보기 힘든 높이의 석벽
을 보면서는, 수백 년 전 축성 노역에 동원되어 물에 빠지거나 성벽에서 떨어
져 죽었을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한이 느껴지는 듯했다.그런 이유로 이질
적 조형미가 주는 미감에 마냥 넋을 놓고 있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아득하게
높은 석벽을 바라 보다 중국의 맹강녀 설화를 떠올렸다.맹강녀는 남편 범기량
이 만리장성 축성에 동원되어 갔다 수개월째 돌아오지 않자 온갖 고초를 겪
으며 행방을 찾으러 간다. 하지만 남편은 고된 노역 중에 이미 죽었고 장성의
돌더미에 묻혔다는 말만을 듣는다. 이에 맹강녀가 남편이 묻힌 석벽 앞에 주
저앉아 몇 날 며칠을 통곡하자 돌더미가 무너졌고, 남편의 유골과 함께 40리
길이의 성벽에 묻힌 숱한 한 많은 유골들이 쏟아져나왔다고 한다. 이 설화는
사실이 아닐 수 있겠으나 민초들의 입을 거쳐 내려오는 동안 전쟁에 관한 가
장 정확한 진실을 담게 되었다. 수많은 범기량과 맹강녀들의 곡소리가 구마
모토 성의 곳곳에서 환청처럼 울려왔다.
구마모토 성은 거대한 방어용 수로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 도시인들의 낮과 밤 : 후쿠오카 시내
매춘부를 비추는 홍등처럼 관광지의 그럴듯한 행색만으로 한 나라의 문화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잠시나마 일본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후쿠오카 시내
규슈 곳곳을 돌아본 뒤 마지막 날 후쿠오카 시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그날
밤 옷을 챙겨입고 일본의 밤거리로 나섰다. 카날 시티와 나카 강이만나는 중
심가에서 출발해 일본식 포차들이 자정 넘게 불을 밝히고있는 강변을 걸었다.
웃기게도 늦게까지 줄 서 있는 일행 중 상당수가 한국인들이었다. 밤 음주문
화에서는 역시 따를 곳이 없는 국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도 동행자만
있었으면 분명 저기 앉아있었을 것이다.
나카 강변의 포차들
몇 km를 더 걸어 조금 한적한 주택가 쪽으로 들어섰다. 겨울에도 곳곳에 자
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대도시의 청년들이 다르
지 않겠지만, 그들도 고단한 표정으로 방들이 빼곡히 들어찬 낡은 건물로 향
했다. 걷다 보니 곳곳에 은은한 전등을 켜놓고 영업을하는 작고 멋스러운 주
점들이 보였다. 작은 창 너머로 일본인들이 두셋씩 모여 사케를 따르며 한담
을 나누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풍경. 언어만 되면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건네고 싶었다. 도시살이하는 사람들의 동질감이랄까.
이튿날에는 새벽부터 부산을 떨고 일어나 다시 거리로 나섰다. 출근길 일본
인들의 인파 속에 섞여봤다. 그들이 아침을 먹는 패스트푸드 느낌의 덮밥집
에서 자판기로 메뉴를 주문해 신속 식사를 했다.컵밥 파는 노량진의 포차와
비슷한 풍경. 서른 살 전후의 사람들이 5~10분여 짧은 틈에 밥을먹고 다시
인파 틈으로 묻혀흘러간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가격이 불과 3500원가량
임에도 양과 질 모두 괜찮았다는 것.간단한 식사나 생필품 경우 일본 물가
가 한국보다 싼 경우가 많았다.
후쿠오카 시내의 아침 거리
식사를 끝내고 문화 체험 삼아 대중교통 버스를 타봤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
기 반대 편에서 오던 차가 우회전을 하겠다고 (일본과 한국은 차량 운행 방향
이 반대다) 버스앞을 가로막고 지나갔다. 덕분에 버스는 살짝 급정거를 해야
했는데, 그때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순간 기사 아저씨의 표정을 살폈다.
한국 같으면 대번에 욕지거리가 나왔을 상황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 달
리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시 멈췄다가 무심하게 운전을 계속했고 입 한 번
씰룩하지 않았다. 컬쳐쇼크!
짧은 시간 훑어본 여행으로 무슨 국가 간의 문화 차이를 평하고 사람살이를
논하겠냐만은, 곳곳의 새로운 풍경이 주는 이질감은 내 영구적인 삶터에 대
한 여러 생각거리들을 불러일으켰다. 거울에 나를 비추듯 내가 아닌 것 앞에
서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특히 일본이 한국 만큼의 정치 후진국이라고 하
지만 일선 현장에서 보면 조금 다르다. 그들은 대자본과 정치권력이 자원을
독점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듯 보인다.이렇게 독점 권력이 차지하는
몫이 줄어들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 늘어난다. 거기서 자영업자들
의 표정이 달라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친절이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여행, 느리게 두루 살피며 돌아보고자 했던 시간들이 내가 길
든 일상을 새삼 낯설어보이게 했다. 길들지 않으려고 상상하고 발버둥치는
나같은 사람에겐 이런 여행은 소소한 성과라고 하겠다.(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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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색동저고리님 다녀가셨군요.오랜만입니다.
넘 반가워요. 그렇게 무덥드니 아침 저녁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람이 어쩜 그렇게 시원한지
가을이 문턱에 와있네요.요즈음 전시회 준비로 바쁘시군요.
건강이 많이 회복되신 듯 감사한 일입니다.이 글을 올릴때
한일 문제를 생각하며 마음이 편치않았습니다.
님의 아름다운 추억 여행담은 어느 날 들을 기회가 있겠죠.
아름다움의 휘날레로 장식 하고싶은 마음으로..도전..
노년에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요.전시된 님의 멋진 작품들
무척 기대되네요.꼭 초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심혈을 기울인 수 많은 텃치로 이루어지는 작품!
보람있고 행복한 일이지만 무척 힘든 작업이란 생각이듭니다.
사진을 담았을 때 마음에 들면 행복하든데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은 더 크겠죠.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죠.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관리 잘 하시며 보람찬 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개강이 얼마 남지않았군요. 기다려지네요.
색동저고리님! 오늘도 멋진 하루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