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이야기
⚘️ 가난 ⚘️
내가 소싯적 시절 6-70년대 시대 상황은 지금처럼
양극화니 진보니 보수니 이런 말은 없었습니다.
오직 입에 풀칠하기 바쁜 가난의 연속 이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파 오죽했으면 먹거리가 부족하여(나도 잘은 모르지만)
보릿고개(보리가 완전히 익기 전 베어서 말리어 개죽처럼 쑤어서 먹었음)라는
말이 있었겠습니까?
내 바로 앞 세대까지는 잘 아는 시대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 이전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세대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5000년 가난의 역사 눈물의 역사인데
지금은 대부분 깡그리 잊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하여 소말리아나 아프리카 일부 빈민국의
굶주림을 보노라면 이런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우리들도 당시에 보통 집짚마다 아이들이 6~7명 8남매 9남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가족이다 보니, 맏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방에
막내 갓난아기는 엄마 아빠방에 결혼 안한 삼촌이나 고모
큰누나 큰형은 건넌방에 나머지 조무라기 아이들은 큰 방에서 기거하였습니다.
겨울이면 가운데 무겁고 커다란 솜이불 하나 방 가운데 놓고
꾀 많은 녀석은 따스한 아랫목에 가로 누워 자다가 발길에 차이기도 하고
새벽녘 방이 식어 오면 서로 이불 잡아 당기다가 실밥 터지면
다음날 엄마에게 큰놈은 뒈지게 얻어 맞습니다.
어린 동생들이 창호지 문 찢어 놓으면 문틈으로 들어 오는
엄동설한 황소바람을 양말짝 끼워서 막았지만.
윗목에 물사발이 얼고 방안은 입김이 서립니다.
재래식 화장실이 멀어 겨울에는 윗목에 요강단지도 놓아둡니다.
먹거리야 김치와 무국이 태반이고 주전버리는 삶은 고구마나
생무우를 깎아 먹으니 이런 음식 먹고 나면 방귀는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여러 명이 한 이불 덮고 자다가 구들장 무너질 듯한 방귀를 끼면
이불 들썩거릴 때마다 쾌쾌한 지독한 무 방귀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지요.
아침에 일어나 내복바람으로 양쪽 문 다 열어 이런 공기 환기시키며
둘이서 큰이불 양쪽 맞 잡아서 개고 다른 녀석은 베게 쌓고
좀 더 큰 녀석은 요강단지 비우고 이렇게 문 열어 놓고 방 정리하며
쓸고 닦을 때, 어린 녀석은 내복만 입고 오들오들 떨다가 춥다고
다시 개어 놓은 이불 덮어 쓰고 아랫목으로 들어가다가
형 한테 얻어 맞고 아침부터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그때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목욕은 늦여름 개울에서 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가을 겨울 내내 낀 때가 눌어붙어 있습니다.
특히 다리 팔꿈치 등 관절부위는 때 자욱이 더 선명하게 나지요,
손등이나 발등에도 시커멓게 눌어붙은 때는 찬바람에 터져
피가 나기도 하지만 그 흔한 약도 화장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매주 수요일은 용의검사 날인데 검사를 대비하여
소죽 끊이고 난 다음 가마솥에 부어 놓은 꾸정물이 뜨뜻해지면
거기다 손발의 때를 불려서 씻어 내었습니다.
목욕은 음력설 대목 밑에 물을 끓여 커다란 다라.이나 옹기(버지기)
그릇을 동네 부자집에서 빌려다가 온 식구가 돌아가며 딱 한번 하고
나면 다음해 늦봄이나 초여름이 되어야 마음껏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가 득실거리고 아침에 이불 개다가 벼룩도 잡고
이도 잡고 어떤 아이는 학교 와서도 옷 밖으로 기어 나오면
옆 친구가 잡아 주었으며 밤에는 호롱불 켜 놓고 배 넙적 깔고
공부하다가 눈썹이나 앞머리 태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려우면 내복 벗어 호롱불 앞에서 이 잡다가
두 엄지 손톱으로 눌러 톡톡 터트리는 서케(이의 알)는
호롱불에 태우다가 옷도 누럿 누럿 그슬려 먹는데 불 오래 켜 놓으면
기름 닳는다고 밝은 대낮에 잡으라고 호통을 칩니다.
옷도 형이나 언니가 입다가 작아지면 동생에게 물려 입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명절 때 신발이나 새옷 한 벌 받으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이때야 말로 설빔이고 명절이 기다려 집니다.
여러 형제 중에 공부 잘하는 한 두명만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지요.
나머지 형제들은 공부시키느라 모두 희생됩니다.
그렇게 중학교 시험에 합격하면 온 동네 난리가 나며
명문학교라도 들어가면 장안에 화제가 됩니다.
지금은 이가 뭔지 배고픔이 뭔지 모르는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3일만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고 했는데
이런 가난을 물리치고 스스로 자급자족한 시점이 1977년 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해 12월 처음으로 쌀 막걸리가 등장했고 그 이전에는 밀주 단속이라 하여
집에서 술을 빚어 먹다가 세무서에 발각되면 벌금 물고 영창도 갔습니다.
지금처럼 자유분방 하였다면 못사는 사람이야 밥을 굶던 말던
부자는 떵떵거리며 술도 빚어 먹고 온갖 것 다 해 먹을 수 있었겠지요.
학교에서 혼분식 장려도 이런 식량난 때문이었는데 생각하면 눈물겨운
세월이고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속도로를 닦고 중화학 공업,
농업정책을 육성하여 통일벼를 비롯한 신품종을 꾸준히 개발하여 수확을 높여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퍼옥수수도 개발하여 농업기술을 북한에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초적 기반들이 그나마 배고픔의 한을 잊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6~70년대는 지금처럼 수확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난들을 극복하고 지금은 어디를 가든 전기가 들어 오고
목욕도 매일 할 수 있고 의복도 풍족하고 남루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최소한의 먹거리는 국가에서 보장하여 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성장하여 오기까지 누구 하나의 공로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전 국민이 노력하였고 부모님 할아버지 세대들의 피땀이 서려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서 선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이런 당시의 규제는 독재였고
학교에서 용의검사는 현재에선 인권침해입니다.
당시의 일은 당시의 잣대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조금 먹고 살만하니까 역사 바로 세우기니 과거사 조사니 하며
지금의 잣대로 마구 파헤친다면 우리도 다음 세대가 뭐라고 판단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생각하며 동시에 공과(功過)를 논해야 합니다.
이런 가난은 그냥 극복된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