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호흡
이 제 우
봄은 새색시 기척처럼 왔다. 벌써 이레째, 부등깃같이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 산이 무릎을 세워 겨우 들어앉은 도린곁. 해발값 사백여 미터인 주봉主峰에서 가위 벌림으로 벋은 산이 남향받이 스무 가옥을 감싸 안은 곳이다. 길은 숲으로 스며들 듯 끊어져 지도가 말을 잃은 여기에도 봄은 만연하다. 붓끝이 기지개를 켜고 돌에도 촉이 돋으려는 쾌청한 봄날. 조각보 같은 논밭을 청보리가 들어 올리기 시작한다.
간밤에 비가 별조차 뽀득뽀득 씻어놓고 다녀갔다. 새맑은 식후의 아침, 산펀더기에 마을 사람 몇몇이 이슬처럼 맺혀 있다. 친구 한재도 보인다. 어린 햇살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이랑에 거름질을 한다. 거름 탐이 심해서 푹신 깐다. 불과 한 마지기에 붙매여 살아온 지가 꽉 찬 육 년. 산출물의 대부분은 자식들 차지지만 나름대로의 보람과 재미를 깨친다. 우리 저이의 몸을 지탱해 주기 위한 방편은 숨겨 두고.
마을 위뜸엔 우리 두 집이, 다른 이웃과는 팔매질 거리로 떨어져 있다. 뒷집엔 친구 내외가 산다. 처음에는 그네를 성호 엄마, 성호 아빠라 불렀다. ‘한재’마을이 친정인 한재댁의 택호를 따서 친구더러 한재라 한다. 나와 여기서 태어나 군대에까지 같이 다녀온 맞춤친구다. 대처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이며 농사체며 벌초까지 우리 일을 띠앗처럼 꿰차고 돌봤다. 아들 성호가 있긴 했으나 한재네 지붕을 개량하다가 한창나이에 떨어져 죽은 지 오래다. 며느리는 하나뿐인 손녀를 데리고 어딘가에 재취로 들어간 것 말고는 더 알 길이 없다.
지난밤에 그 아들 제사였다며 점심은 한재네에서 먹는다. 두 집이 마루 위 두레상에 앉았다. 안다미로 담은 제찬에, 향그런 봄나물까지 똑따먹게 차렸다. 거섶에 밥을 비벼 후려 먹는다. 잘난 음식은 아니지만, 입이 맛을 움켜쥐고 혀를 농락한다. 수저가 속도감을 가진다. 씹을수록 밥맛이 극락이다. 도란도란 웃음까지 젓가락질한다. 집에서는 맛이 폭탄인 음식도 맛있다고 해댄 헛소리가 아니다. ‘세상맛의 종류는 모든 어머니 숫자와 같다.’ 하시던 아버님 말씀이 새롭다.
이를 후비러 홰기를 구한다. 개나리가 노랗게 숨넘어가는 뒤울 아랫니다. 우리 집 백구와 이 집 암캐가 이 백낮에, 아무도 가르쳐 준 바도 없는 초야의 부끄러움을 치르고 있다. 턱짓으로 한재를 오랬다. 낌새를 채고 다 모였다. 다들 민망스러워 흘깃 보고 물러난다. 걸쭉한 웃음을 베물은 한재가, “우리 사돈됐네.” 라며 앞소리를 메기고, “참 개사돈 됐네.”라며 저이가 뒷소리로 받아넘긴다. 한재댁은, “잔치날 음식이 이.래.가 되.겠.능.교.” 하는 어눌한 겸사를 한다. 말 속에 보이지 않는 점을 딛고 집으로 온다.
한재와 소주 한 병을 눕혔더니 알알하다. 낮잠을 한 숨 붙인 뒤 마루에 나왔다. 부옇게 버캐진 바람벽의 거울을 본다. 입은 비뚜러지고 머리 모양새는 봉두난발이다. 맷돌보다 무거운 걸음을 놓아 밭으로 간다. 밭들도 붙었다. 두 밭 살피에 앉아 있는 한재가 멀찍이 보인다. 언제 나왔냐고 물어도 “응!”할 뿐 고개만 떨구고 있다. 옆에 앉아 얼굴을 살핀다. 눈알이 발갛다. 눈가의 물기를 감추려고 허둥댄다. 누가 부부가 아니랄까 봐! 손님이 오면 차릴 게 없어 허둥대며 우리 집에 달려오던 한재댁 형세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색하지 않던 한재. 버겁고 힘든 일이라도 자기 몫이라 생각하던 친구가 조금씩 달라져 간다. 일을 하다가 빼마른 목을 자주 헐근거린다. 점심 후, 우리가 나온 뒤 몇 잔을 더 꺾었단다. 아들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호되고 깊었나 보다. 몸이 풀려 힘꼴깨나 쓸 모퉁이 하나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일손이 애터지게 느린 나보다야 낫다. 온몸의 뼈를 추켜세우며 둘은 일어선다. 둘은 자기 밭에 돌아와 일손을 다잡는다. 허리가 아파도 핏기가 가시도록 입술을 깨물고 홑되게 버틴다. 햇볕 한 벌을 덧입은 등골은 땀에 젖어, 불개미가 기어가듯 따갑다.
어제와는 달리 하늘이 먼지를 틀듯 뿌옇다. 희미한 도장발 같은 해가 설핏 기운다. 밭을 벗어나 집을 향한다. 마을 초입의 둥구나무 솔개그늘에 앉아 쉰다. 정수리에 뭔가가 떨어져 착 달라붙는다. 선득한 이물감을 손으로 움킨다. 멧비둘기가 물찌똥을 지렸다. 닭이 알겯는 소리처럼 골골거리는 빨래터에 급히 간다. 오물 부위를 씻는다. 까르르 물러나는 물살에 햇살은 꼬리를 친다. 물주름을 몰고 가던 오른손으로 윗도리 아랫자락을 당겨 머리를 훔친다. 물거울에 저이가 얼비친다. 몸빼바지에 등허리 살 다 드러내고 어른거린다. 주어도 모자람 뿐인 나와의 만남이 마흔하고도 여섯 해. 평생을 손톱이 빠지게 최선을 다했으나 사는 길은 산밭처럼 가파르다.
해 질 무렵이 다가온다. 저이는 저녁밥을 지을 테지. 지난날을 돌이킨다. 밥물을 잡던 그 고운 손이, 북두갈고리손이 되도록 억척으로 살아온 것만 같다. 저 손으로 분초를 꼬집어 살아 왔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당신의 손을 꼭 쥐고 태어난 모습이라 좋아하시던데. 시장에 나가도 멍 앉은 과일을 몇 번째 들었다 놓았다 하시던 당신 손의 형용까지 닮았다 하시면서…. 하지만 저이는 성한 몸이 아니다. 산채로 소금에 절여지는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큰 수술 후 고집을 세워 일부러 여길 데리고 왔다. 식습관에서부터 생체시계까지 그에 맞추기 위해서다. 자칫한 힘부림에도 동티가 날까 봐 일이라면 뭐든 밀막는 편이다. 그러나 몸을 사리지 않아 얄밉다.
산골의 밤은 통곡처럼 깊어간다. 통증을 모시고 사는 듯 ‘아이고’ 하며 몸을 누이는 저이가, “이느므 일 안 하마 안 되나.” 또 불어터진 소리다. “당신, 오늘 땀 흘리지 않으면 내일 눈물을 흘린다는 말 알아 몰라.” 응대도 없이 티브이의 볼륨만 높인다. 저이가 잠든 한참 뒤일 거다. 노루잠이 들었나 보다. 드릴로 벽을 뚫는 소리에 놀라 깬다. 옆에서 목숨껏 코를 고는 소리다. 소리를 잡으러 어깨를 흔든다. 반동을 붙여 돌아눕는 저이의 몸속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난다. 통증과 엎치락뒤치락하던 그때가 스쳐간다. 요의가 잦아 마당가에 나온다. 오줌발을 세운 계곡 물소리가 적막을 찢고 있다. 한재네 티브이 불빛이 문살을 발기는 자정쯤이다.
밤잠을 설친 탓이다. 늦은 아침을 물리고 나와 밭이랑을 짓는다. ‘이느므 일 안 하마 안 되나.’ 하는 환청에 허리를 펴고 귀를 턴다. 산녘 부모님 묘소를 향해 손을 모은다. 사그러지는 저이를 잡아달라고 간구한다. 저어도, 저어도 나아가지 않는 삶이 물차도록 답답하다. 앞으로 얼마를 어떻게 살아낼까. 한재네와 하늘의 부름을 들을 때까지 여기 사랑치고 살리라는 내 꿈이 매몰차게 뽀개지려 하는 순간이다. 멧비둘기 두 마리가 고랑 끝 산수유에 날아든다. 휘추리와 애채에 앉아 제 울음에 제 고막이 터지도록 겨끔내기로 울음을 쏟는다. 계곡물도 노예처럼 엎드려 운다. 잠시 눈가로 눈물이 다녀갔을까. 떨구지 않으려고 목고개를 있는 대로 젖힌다. 우러른 하늘에 몇 송이 흰구름만, 이 산골을 한가로이 벗어나고 있다.
첫댓글 "저어도, 저어도 나아가지 않는 삶이 물차도록 답답하다."
"우러른 하늘에 몇 송이 흰구름만, 이 산골을 한가로이 벗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