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여행] 서동리 3층석탑.........16
.
.
16.[봉화군 여행] 서동리 3층석탑.........16
.
유랑자는 이제 춘양면 서동리에 있는 신라시대에 있었던 3층 불교 석탑을 찾아가는 길이다. 외씨버선길상에 있
는 석탑, 사실 우리나라의 불교의 역사는 깊다. 삼국시대 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약 1천 년간 국교의 위치에 서서 정치권력과 관계가 깊었다. 이는 2021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다.
.
종교와 정치 둘의 공생관계, 이는 지배계층이 불교의 교리에 자신을 끼워맞추어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라는 성골 왕실을 전륜성왕, 석가모니 가문과 동일시했다. 궁예나 견훤은 본인을 미륵
과 동일시했고, 고려의 창업군주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불교의 입지를 대대로 공고히 하도록 못박아두었다.
.
보물 제52호. 2기. 높이 동탑 3.85m, 서탑 3.94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
.
서탑
.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불교행사를 국가적으로 치렀고, 수도에 궁궐보다 더 크고 높은 황
룡사, 흥왕사 같은 거찰을 지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3대왕인 태종(이방원)때어 들어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
다. 처음 조선 초기 태조는 그 개인적으로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인 사람이었지만 건국 과정에서 급진적 개혁을
위해 기존 세력인 불교의 억불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에 조선 건국과 거의 동시에 하나하
나 시행되었다.
.
2대 정종은 유교나 불교 같은 것에 큰 관심 없고 재위기간이 짧아 뭘 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억불정책은 태
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우리는 불교탄압을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이라고 배웠다, 숭유억불은 불교 교단
의 세력을 강제로 축소시키고 약하게 유지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주요 국가시책이었다.
.
.
동탑
.
.
숭유(유교를 숭상함)라는 단어가 있지만, 포인트는 억불에 있음에 주의.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
佛政策)이라고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방치되거나 여기저기 남아있는 전국의 수많은 석탑들. 오늘은 그중 춘양
면 서동리 소재의 봉화군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춘양중학교 서벽분교) 교정 동쪽에 국보의 이름을 걸고 2기의
석탑이 유존하고 있다.
.
유랑자는 학교 정문에서 학생들 등교를 통제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석탑구경을 좀 하려고 왔다하자 흔쾌
히 허락하신다. 교정은 산림과학고와 춘양중학교 분교 두 학교가 공존하고 있는 교정이다. 앞동은 중학교. 뒷동
은 고등학교, 암튼 13.5m 거리를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는 2기의 석탑은 신라 고찰인 남화사지(覽華寺址)로 추
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탑(塔)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 모두 같은 양식이다.
.
.
.
.
보물 제52호. 2기. 높이 동탑 3.85m, 서탑 3.94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라 675년(문무왕 16)
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절이 폐사되었다. 두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
받침돌과 아랫기단 중석을 각 면 1장씩, 모두 4장의 돌로 구성하고, 아래·위층 기단 모두 4면의 모서리와 가운
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위층으로 갈수록 크
기가 줄어드는 형태를 보인다.
.
.
*꽃말은 좀 야하다 ;서서히 깊숙이 들어가다.
*메꽃 효능 :본초강목에서는 부인의 불감증이나 방광염, 요실금 등에 효험이 있으며, 남성의 정력감퇴,
조루, 음위, 당뇨병에 좋다고 합니다.
.
.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간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서
쪽 탑에만 노반이 남아 있다. 기존 탑은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년 10월
탑을 해체·복원할 때 서탑에서는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99개의 작은 토탑이 발견되었다.
조형미와 아름다운 비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계의 이견이다.
.
석탑은 말 그대로 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탑이다. 이러한 탑을. '석조탑파(石造塔婆)'의 줄인 말로서, 재료로는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안산암이나 점판암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구조는 크게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상륜부(相輪部)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기단부가 생략되고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는 경우
도 있다.
.
*비비추는 서늘한 곳을 좋아합니다. 잎에는 약간의 독성이 있어 먹기전에 물속에 넣어 거품이 나올 때까
지 손으로 비벼준 후에 먹는다고 해서, 또는 잎이 비비 꼬여 있어서 비비추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비비추는 사포닌과 철분, 비타민C 등이 풍부하게 함유 되어 있어, 피부 궤양, 진통, 소염, 원기 회복 등에 효
과를 보이며 특히 염증과 통증에 효과가 있다. 비비추의 효능은 동의보감에도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예로
부터 약초로도 많이 쓰였습니다.
.
비비추 꽃말 : 좋은 소식, 신비로운 사람, 하늘이 내린 인연
.
.
우리나라에서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6
세기 말엽까지 약 200년간은 목탑(木塔)의 건립 시기로, 오랜 목탑의 건조에서 쌓인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드디
어는 석탑(백제가 시초)을 발생하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
초기의 목탑은 삼국이 모두 중국의 고루형(高樓形) 목탑 양식의 조형을 모방하여 누각형식(樓閣形式)의 다층으
로 건립하였을 것이며, 방형 혹은 다각의 평면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탑들을 보면 백제계의 석탑
은 화강암만을 사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른 반면, 신라는 화강암을 혼합하였으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
탑계 양식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
.
.
.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영향력을 아주 컸다는 점이다. 특히 일반인의 생활에도 불교는 현대인이 생각
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아주 강했다. 예를 들어 조선 이전 장례에서는 화장(火葬)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으며 제
사 음식도 절에서 차렸다.
.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도 말하는 것도 불교시대에 제사상에 차를 올리던 역사의 흔적이다. 조선
시대부터 불교 색을 빼기 위해 술을 대신 올렸지만 여전히 옛 이름은 아직도 남은 것이다. 차를 올렸던 절집 차
례상이, 지금은 술로 음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
.
.
.
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9toB/1990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 91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원촌길 8-14
연락처 :054-679-6392 대표번호
소개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
.......
첫댓글 드디어 학교에오셨군요 ㅎㅎ
삼층석탑....
무더운날씨에 연일폭염주의보가
도심에는 내려져있는데....
외씨버선길로 거포서과마을지나서 샛터마을이있고 운곡천다리건너면 배고개마을 제가태어나서자란곳이지요
군대가기전까지는 냇가양쪽옆으로는 버드나무와 찔레 ...등 숲이우거진 천방뚝이고 넉접다위들과 크고작은 돌멩에도 많은 넓은냇가이고 다리밑에 소 는 어른키보다깊은 뮬이있어서 멱삼하고 냇가가장자리에엔 모래밭도있었는데
그래서 비만오면 홍수로 냇가근처 논과밭이물에잠기고 했는데 홍수피해를막고자 자갈돌들을모두 밖으로밀어내고
사방공사로 둑을쌓고 홍수막이로 하면서 자연그대로 냇가는 사라졌네요
그렇습니다.
결과작으로 개발이라는 것이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자연훼손 이것 막고자 환경 운동가 들이 그 반대를 하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4대강 사업 한답시고 마구 까 뭉개고 파내고 병형시켜 놓은 하천들 정말 보기 싫어요.
하천은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순리대로 내 버려 주어야 토종 민물고기들이 살고 하는 법인데
마구잡이 훼손하는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큰 예가 낙동강과 섬진강의 차이지요.
전 매년 봄만되면 봄맞이 여행을 섬진강으로 택합니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따라 이어지는 때 묻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섬진강이 좋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적은 또 하나 더있지요. 벚굴을 먹기 위해서 해마다 뺴 먹지 않고 달려가는 곳입니다.
벚굴은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섬진강에서만 나기 때문이지요.
낙동강. 금강 임진강 같은곳은 벚굴같은 그런것 없지 않습니까. ㅎㅎㅎ.
이 모두는 자연을 모두 파괴시겨 버렸기 때문 입니다.
@원유랑자 맞습니다.
저도 우리동네앞 냇가를벗삼아 너록바위가 펼처져있고 강가에 크고작은 돌들이 이리저리 장마에바뀌며 매년다룬모습이고
냇가양쪽에 우거진 숲들이있고
그숲아래 피래미나 물고기들이
많이살고
꺽지 꾸구리 텅고리/퉁가리(메기처럼생긴 침에찔리면 무지아픔)배가빨간 송사리 꽃불거지 ....
어릴짼 뱡장어도 간혹잡히고
장마지나면 수박향이나는 은어도
볼수있었는데 안동댐이 생기면서
그강을 거술러올라오던 은어가
못올라오고...
그래서 지금도 휴거지는 반도 어항챙겨서 물고기잡는곳으로 자주갑니다
전 맨손으로 바위속에 손넣고잡기도합니다.
여름에비만오면 아부지가 반도를손보시고 흙탕물내려올때면 반도들고 강가펀방뚝으로 물이넘친곳에
반도로 숲을도둠으면 물고기가
한움큼씩 잡히죠
홍수나면 물고기들이 밖에수풒쪽으로 다나오거던요
그때는 깊은물에살던 평상시엔 보기힘든 큰물고기도잡히지요
팔뚝만한 메기도잡운적있고요
그런날이면 물고기 한바게스에
배따는게 고역인데
가장맛있었던요리는 석쇠에 고추장바른후 화로숯불에 엄니가
구워주던 그맛
요즘도해보는데
그맛이 안나더군요
골뱅이도 강바닥애 까맣게 많았고.....
해마다 양식은어로 봉화은어축제
행사는합니다
송이축제와더블어 봉화대표축제입니다.
9월송이축제때 오세요
@chraliepark 그렇잔아도 명호면 이나리 출렁다리에서
은은한 수박향이 나는 은어는 맛 보았습니다.
감히 저도 상상해 봅니다.
비온 다음날 강가에 나가 족대로 고기잡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재미 있을것 같습니다.
님에게 운곡천이 그런 추억이 묻어 있었군요.
사람은 나이들어 갈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전 춘양에 대한 추억은 이 여행기로 대신해 봅니다. ㅎㅎ
곳곳을 누비면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심정으로
그렇게 봉화 여행을 하고 있답니다.
감사 합니다.
@원유랑자 너무좋은추억을 소환해주셔서 감사드리며 휴일밤 편안한밤
되십시요^^
@chraliepark 넵 ~님께서도 편안한 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