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水原華城)
① 수원 방화수류정(水原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수원 방화수류정(水原 訪花隨柳亭, 보물 제1709호)은 동북각루(東北角樓)로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된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년~1799년)의 글씨이다. 화홍문 바로 옆의 용연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방화수류(訪花隨柳)라는 뜻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린다’이다
② 팔달문(八達門)-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습니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③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1796년(정조 20) 3월 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습니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습니다. 1797년(정조 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합니다.
④ 화서문(華西門)-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입니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습니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⑤ 화성행궁(사적 제478호)-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습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화성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었습니다. 화성행궁은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⑥ 서장대(西將臺)-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입니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습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입니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습니다.
⑦ 북수문(北水門) 또는 화홍문(華虹門)-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습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습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합니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⑧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습니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 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 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 층 덮개판으로 둘렀습니다. 아래 층 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⑨ 서남암문(西南暗門)-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됩니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입니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입니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 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습니다.
⑩ 봉돈(烽墩)-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입니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냅니다.
⑪ 동포루(東砲樓)-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 (정조20) 7월 16일에 완공되었습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입니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⑫ 동북포루(東北舖樓)-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습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