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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태조에서 순종까지 27대에 이르는 왕과 왕비(계비 포함)의 능은 모두 44개이다. 여기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능이 아니고 묘이므로 정확하게는 42개의 능과 2개의 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일단 왕으로 쳐주고 44개 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500년 왕조를 이어가다 보면 이런 왕, 저런 왕 다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도자를 잘 만나면 백성은 편하고,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백성은 고달파진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민주주의사회라고는 하지만 지도자가 중심을 잡아주어야 나라는 반듯하게 돌아간다.
조선왕릉 44개 중 북한지역에 있는 제1대 태조의 정비 신의고황후 한씨(태종의 생모)의 '제릉'과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을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왕릉 대부분을 서울근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인은 근래에 남한쪽의 조선 왕릉을 대부분 돌아보면서 느낀 생각의 일단을 사다리 낙서판에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여 다시 이곳에 올려놓습니다.조선왕릉을 통해서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시대를 들여다 본 편린의 일단입니다.
- 도성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 -
(원릉, 목릉, 휘릉,원릉, 경릉, 숭릉, 혜릉, 수릉, 현릉)
1. 조선왕릉 돌아보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근교에는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와 창덕궁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의 문화유적 및 잔재들이 옛날의 영화 혹은 상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나 부끄러운 역사나 모두 우리 역사임에는 틀림없고 숨기거나 뿌리친다고 그 역사가 우리의 곁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외국에 다니면서 그 나라의 문화유적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우리의 것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것을 모르고 외국을 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산행을 하면서도 인근에 어떠한 문화유적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습관이 있는데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산행이 없는 날 가족과 함께 조선시대의 왕릉을 전부 한번 돌아보면서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지방에 있는 여주의 영릉(제4대 세종의 英陵과 제17대 효종의 寧陵이 있다)과 영월의 莊陵(제6대 단종), 화성의 융건릉(장조와 정조의 능)을 빼고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 구리, 고양, 남양주, 화성, 김포 등 수도권에 소재하고 있다. 물론 제2대 정종의 厚陵과 태조의 원비 한씨의 능인 제릉은 북한의 개성시에 있어 현재 이 능만은 갈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종은 말만 왕이지 왕 노릇 제대로 해보지 못한 왕이었고, 대한민국의 최규하 대통령 비슷한 사람이라 당장 그곳에 가지 못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
먼저 사람을 묻는 장소인 능, 원, 묘 등의 무덤의 명칭은 다음과 같이 구별됨을 상식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 능(陵) : 왕과 왕비의 무덤
◇ 원(圓) :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 또는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 무덤
◇ 묘(墓) : 대군, 군, 공주, 옹주 등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 장희빈의 무덤은 능이 아니라 대빈묘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는 능이 아니고 묘이다.
◇ 총(塚) : 누구의 무덤인지 알지 못하지만 벽화나 유물 등 특징적인 것이 있는 경우
◇ 분(墳) : 유물이 없고 주인공도 없는 경우
2. 동구릉 : 서울 동쪽에 있는 아홉 개의 능
2004. 1. 11. 일요일 오후 오늘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어저께 태백산 산행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면서 오늘 예정된 민주지산 산행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면서 나의 [조선왕릉 돌아보기]를 이어가기로 하였다. 디지털 카메라 하나만 갖고 가벼운 마음으로 차를 몰아 워커힐 방면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퇴계원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다 보면 교문사거리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동구릉 표지판이 나온다. 워커힐에서 10여km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으로 송파동 집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다.
동구릉이란 도성 동쪽에 있는 9개의 능이라는 뜻으로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경릉까지 9릉에 17위의 왕과 왕비가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조선 왕릉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청 동구릉지구관리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구리시에서는 동구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구릉은 가히 조선 왕릉의 집단시설지구라 할만 하고, 면적이 60-70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에 검안산으로 안온하게 둘러싸인 분지 내에 조성된 왕릉들을 둘러보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능이 많기 때문에 능들을 대충 둘러보는데도 두 세 시간이 소요된다.
동구릉의 조감도를 보면 정중앙의 제일 위쪽에 마련된 건원릉(제1대 태조의 능)을 중심으로 왼쪽(서쪽)으로 휘릉(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 원릉(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경릉(제24대 헌종과 효현성황후 및 계비 효정성황후의 능), 혜릉(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 숭릉(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이 있고, 건원릉 오른쪽(동쪽)으로 목릉(제24대 선조와 인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의 능), 현릉(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수릉(추존황제 문조와 신익정황후의 능)이 있다.
동구릉 조감도
동구릉 주차장에 주차비 2,000원을 내면 능 관람 종료시간인 오후 5시 30분까지 차를 주차할 수 있다. 매표소로 들어가기 전 동구릉 입구에 “조선 태조고황제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삼각산(현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포부를 읊은 “登白雲峯”이라는 시다. 태조 이성계를 단순한 무장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성계가 위와 같은 시깨나 쓴 것을 보면 한 조선왕조를 개창한 자로서 일국을 설계하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登白雲峯” 시비
우리는 은연중에 무인 또는 무장이라고 하면 그저 힘깨나 쓰고 무식한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 옛날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가고 나라의 물줄기를 바꾸는 사람들은 무인이고 무장이지 심약한 문인들이 아니었다.
3년 전쯤 실크로드 탐방시 서안의 화청지(이곳에 중국현대사의 물길을 바꾼 ‘서안사변’의 현장인 오간청이 있다)에 들렀다가 모택동의 ‘장한가’라는 시가 벽면에 새겨져 있는 것을 놀란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모택동은 유명한 시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모택동의 시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모 출판사에서 시집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문정희의 시모음집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에도 모택동의 사(詞)한수가 실려 있다. 문정희는 서방정치평론가들이 마오(毛)의 정치를 시적(poetic)이라고 표현할 만큼 고도한 시적 진실을 추구한 그는 메마른 정치에 ‘시’로서 멋을 부여했고, 나약한 시에다가 ‘힘’을 불어넣었다고 평하고 있다. 메마른 ‘정치’에 ‘시’로서 멋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람료 500원을 내고 드디어 동구릉 안으로 들어가 차례로 살펴보자. 우선 동구릉 가운데의 제일 위쪽에 있는 건원릉부터 보고 발길이 닿기 쉬운 능을 차례로 보기로 한다. 매표소를 통과하자마자 커다란 홍살문이 서 있고 그 뒤로 홍송들의 호위 아래 능으로 가는 길이 마사토로 잘 다져져 있다. 이 홍살문은 동구릉 전체를 수호하는 문이고, 각 능마다 개별 홍살문이 있다.
지금까지 몇 차례 조선 왕릉을 둘러보았으므로 그 구조는 대충 알만 하지만 여기서 간단히 다시 정리하여보자.
조선 왕릉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을 보호하는 주산을 뒤로 두고 그 중턱에 봉분이 자리를 잡으며,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왕릉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참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정자각 앞 동서 양쪽에 능을 관리하는 관원들이 머무는 수복방과 제물을 차리는 수라방이 있고, 다시 동쪽에 비석이 있는 비각이 있다.
왕의 봉분은 능원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앞에 고석으로 받쳐진 혼유석(석상)을 두고 좌우로 망주석을 배치하고 있다. 석양과 석호는 교대로 배치하여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혼유석 앞에는 장명등을 세우고 봉분의 동서북 3면에 곡장(낮은 담)을 두르고 있다. 봉분 앞 한층 낮은 곳에 문인석과 무인석 1-2쌍을 세우고 그 뒤에 석마를 배치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는 봉분도 있는 등 약간씩 변용되고 있음은 그때그때 보기로 한다.
3. 건원릉(健元陵 : 제1대 태조의 능)
동구릉 홍살문을 통해 나아가다 보니 큰 소나무들이 쓰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긴 철봉들로 받쳐놓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홍살문을 지나 난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우측으로 관리사무소가 있고 능으로 가는 이정표가 운치 있게 세워져 있다. 건원릉을 먼저 보기 위하여 우측에 있는 수릉과 혜릉을 지나쳐 나아가면 정중앙에 건원릉이 웅자를 들어낸다. 건원릉 좌측에 휘릉이, 우측에 목릉이 위치하고 있다.
건원릉 홍살문에서 바라보면 정자각 뒤로 일직선으로 봉분이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 바로 우측에 왕이 능행을 할 때 절을 하는 망료위(배위)가 있고, 정자각 앞으로 놓인 참도는 좌측에 신도, 우측에 어도로 구분되어 있으나 하도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높낮이가 비슷하게 되어 있다. 원래는 선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는 높게, 왕이 다니는 어도는 낮게 조성되어 있다. 참도 좌우로는 원래 잔디밭인데 이곳의 참도 좌우에는 박석들이 듬성듬성 깔려 있다. 참도에서 떨어진 오른쪽에는 수복방이 있다.
건원릉 홍살문과 참도 및 정자각
참도를 따라 정자각 우측으로 난 두개의 계단(왼쪽은 선왕이 혼령이 오르는 곳이고, 오른 쪽은 왕이 오르는 곳으로 왼쪽의 계단이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다)으로 올라가 정자각에서 제향이 끝나면 선왕의 혼령은 능으로 올라가고 왕만 정자각 우측의 계단(이쪽에는 계단 한개만 있다)으로 내려와 돌아가게 된다. 정자각 뒤로 보면 왼쪽에 능제가 끝나고 축문을 태우는 叡感(예감, 소전대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건원릉의 예감은 다른 곳과 달리 특이하게 돌로 좌대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대개 비각은 정자가 우측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건원릉은 정자각 뒤 바로 우측에 비교적 크게 만들어져 있다. 비각 안에는 전서체 한자글씨로 ‘대한 태조고황제건원릉’이라는 비석과 태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비각은 태조의 신도비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 밖에 없다고 한다.
봉분으로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다. 왕릉의 봉분들은 멀리서 보면 윗부분이 대충 보이나 능원 아래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다른 능은 몰라도 조선의 건국자 태조의 봉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므로 사람들도 없고 해서 잠깐 실례하기로 하고 재빨리 능 왼쪽으로 기어 올라가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왔다.
건원릉 봉분(벌초를 하지 않고 있다)과 석물 등
건원릉의 봉분은 억새풀이 자란 채 그대로 있어 다른 능과 달리 자주 벌초를 하지 않고 있다. 왜 이 능만은 벌초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인지 의아해 하다가 정자각 내에 조그만 안내문이 걸려 있다. 태조가 아들 태종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나의 고향인 함흥의 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또한 그곳의 억새풀을 심어 달라”고 하였고, 효성이 지극한(?) 태종이 그대로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억새풀은 그 특성이 잔디처럼 자주 깎아주면 죽어버리므로 1년에 한번 4월의 한식 때에 깎아준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은 억새풀이 생명력이 강하여 묘에 억새풀을 심지 않는데 태조의 건원릉만은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봉분 주위로 곡장이 둘러싸고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쳐져 있으며, 난간석 밖으로 석호와 석양이 4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고석 5개가 받치는 널따란 석상(혼유석)이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이 서 있으며 중앙에 장명등이 서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우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석마 한 쌍과 함께 서 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때 벼슬길에 나아간 후로 왜구와 홍건적 토벌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명성을 얻고 위화도회군으로 결정적 승기를 잡아 1392년 7월 15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열었다.
易姓革命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위화도회군은 요새말로 일종의 반란이고 쿠데타였다. 태조는 재위기간 중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왕조의 이름을 조선으로 짓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놓았다. 물론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정도전 등의 뒷받침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태조의 재위기간은 1392년 7월부터 1398년 9월까지 6년 2개월이고 3명의 부인에게서 8남5녀의 자녀를 생산한다.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 6남을, 계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방번, 방석 2남을 두는데 이 형제들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골육상쟁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인 태조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태조는 3남인 방원을 더 이상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이 역시 방원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태종이 왕위에 오르고 태상왕 자리에 있다가 태종 8년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죽고 하륜의 천거로 이곳 건원릉에 안장되었다.
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은 개성에 있고,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은 정릉(貞陵)에 있어 태조는 어느 부인과도 같이 잠들지 못하고 홀로 건원릉에 누워있다.
4. 목릉(穆陵 : 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건원릉을 나와 목릉으로 가기 위하여 건원릉 우측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가보니 철제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산림회복을 위하여 목릉은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목릉은 동구릉의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어서 밖에서는 홍살문만 보이고 정자각도 봉분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목릉은 숙종이 묻혀 있는 서오릉의 명릉과 같이 동원이강형식으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이 한 곳에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목릉 - 비공개
목릉의 내부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여기서 선조시대 선조를 둘러싼 이야기를 보자.
선조는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의 셋째 아들(하성군)이다. 선조는 후궁의 아들로 처음으로 왕이 된 사람이다. 선조시까지 정비가 아닌 후궁 소생으로 왕이 된 경우는 없었다.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했을 경우 왕족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면 그 왕의 생부를 대원군에 봉하는데 선조의 생부인 덕흥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조선역사상 덕흥군을 포함한 3명의 대원군이 있는데 덕흥대원군과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그들이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고 16세의 하성군(선조)이 조선 제14대 왕으로 즉위했으나 선조는 명종의 3년상이 끝날 때까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가 의인왕후 박씨를 왕비로 책봉했으나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선조의 마음은 후궁인 공빈 김씨에게 기울어져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 아들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는다. 그러나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5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병으로 죽는다. 선조의 정실부인 의인왕후 박씨는 선조의 후궁들이 낳은 아이들을 자신이 아이처럼 잘 돌보는 후덕한 여인이었다.
선조의 정실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후궁들은 선조의 승은을 입어 아들 낳기 경쟁체제에 돌입했으나 이미 공빈 김씨가 낳은 임해군, 광해군 중 장자인 임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임해군은 성질이 광폭해 광해군을 세자로 미는 중신들이 많았다. 그런데 다른 후궁 인빈 김씨가 의안군과 신성군을 낳으면서 후계구도는 복잡해진다. 의인왕후 박씨가 아들만 낳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복잡한 문제가 세자책봉을 둘러싸고 혼미를 거듭한다. 옛날에는 왕가나 일반 사가나 아들을 낳지 못하면 여자는 여자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시 사림들은 삼사의 관리를 뽑을 수 있는 이조전랑 자리(요새의 청와대 인사수석 비슷한 자리)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데 1589년의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는다. 그런데 동인들은 세자책봉 문제를 계기로 반전을 노린다. 서인의 영수 정철은 공빈 김씨의 2남 광해군을 세자로 찍고 있었으나,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인빈 김씨의 2남 신성군을 제자로 책봉하려고 한다. 그런데 정철이 동인의 꼬임에 빠져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지목했다가 진주로 유배되고 서인의 세력은 약화된다.
그러나 정철이 강계로 유배지를 옮겨간 동안 임진란이 발생하고 신성군은 피란 도중 죽고 선조는 현실을 쫓아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임진란에 피란을 가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정실부인 박씨는 챙기지 않고 후궁 인빈 김씨만 데리고 다녔다. 아들을 낳지 못하여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었던 의인왕후 박씨는 46세 나이로 죽는다. 조선시대 왕비나 일반 백성이나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야말로 별 볼 일없는 존재였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죽은 후 계비로 맞아들인 여인이 인목왕후 김씨이다. 김씨는 19세 나이에 50세의 중늙은이 선조와 혼인을 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시어머니 인목왕후 김씨는 며느리인 세자빈 유씨(광해군의 부인)보다도 열한 살이나 어렸다. 조정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세력과 영창군을 지지하는 소북세력으로 갈라졌다. 세자인 광해군은 서자출신인데 영창대군은 적자출신인데서 파란은 시작된다. 이제 선조는 적출인 영창대군만 끼고 돌뿐 광해군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선조가 어린 영창대군을 남기고 59세로 죽는 바람에 상황은 반전되고 인목왕후도 광해군을 즉위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일파는 몰락하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정권은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인목왕후의 친정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영창대군도 폐서인되어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는다. 광해군은 설움 속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인목왕후 김씨에게 대비라는 존호를 폐하고 서궁(현재의 덕수궁)으로 유폐시켜버린다. 이는 조선 역사상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시킨 유일한 사건이다.
서궁에 유폐된 인목왕후는 한과 복수심에 이를 갈고 있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에 대한 복수의 화살을 겨눈다. 인목왕후는 대비의 위호는 찾았으나 서인들의 뜻에 밀려 결국 광해군을 죽이지는 못하고 강화도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낙착이 되고 만다. 인목왕후 김씨가 죽은 후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선조의 즉위기간은 1567년 7월부터 1608년 2월까지 40년 17개월이고,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의 자녀를 둔다. 선조는 재위기간 중 이이와 이황을 등용하는 등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면도 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화를 겪은 군주로서 비난받아 마땅한 지위에 있는 왕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왜놈들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黃允吉과 부사 金誠一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내부 상황을 살펴오게 했으나 다음해 돌아온 그들의 보고는 상반된 것이었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황윤길은 귀국보고에서 전운이 임박했다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걱정할 일이 못된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세력이 우세했던 동인의 의도대로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치욕을 당하고 선조는 의주로 피란(실제로는 도망)가는 형국에 처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金誠一의 행태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당시 김성일은 민심의 안정을 바라 사실과 다르게 보고한 뿐이고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과 진주성을 지키다 순직한 애국자라는 평가가 있다(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에서). 김성일은 충신이었음에도 김성일을 임진왜란의 참화를 유발한 역사의 죄인으로 만든 자는 황윤길의 후손이었던 黃義敦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대마도 시라다케 산행을 마치고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조선통신사의 숙소인 서산사에 들렀다가 2000. 11. 의성김씨 종친회에서 세운 “조선통신사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를 보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역사 뒤집어보기를 시도하더라도 과연 김성일을 충신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김성일의 내심이 민심동요를 걱정하였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사실과 달리 판단하고 보고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임진란을 통해 우리민족이 겪은 수난을 생각하면 민심의 동요를 걱정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는 국가가 처한 위기상황을 정직하게 알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었을까? 물론 김성일 혼자 임진란의 책임을 뒤집어쓸 것은 아니고 무능한 선조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것이지만…
4. 휘릉(徽陵 :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
목릉에서 나와 다시 건원릉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휘릉이 나온다. 휘릉은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 조씨는 예송논쟁의 한 가운데 서면서 자의대비로 더 알려진 왕후이다. 홍살문, 참도, 망료위, 정자각, 능원의 구조 등은 다른 능과 비슷하다. 다만 봉분에 병풍석은 처져 있지 않다. 비각에는 ‘조선국 장렬왕후 휘릉’이라는 전서체 한자로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능원이 다른 능의 능원에 비하여 그리 높지 않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휘릉 홍살문과 정자각
휘릉
인조는 두 명의 정실부인과 세 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이 인렬왕후 한씨이고, 둘째 부인이 장렬왕후 조씨이다. 인조는 인렬왕후와의 사이에 장남 소현세자, 차남 봉림대군(효종) 등 4남을 두었다. 소현세자의 세자빈 간택을 두고 논란을 빚다가 강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소현세자는 처음에는 강씨에게 별로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인렬왕후 한씨가 44세 나이에 잉태하였다가 사산을 한 후 그만 죽고 말았다. 인열왕후 한씨는 인조와 함께 파주 탄현의 장릉에 묻혀있다.
병자호란이 발생함으로써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가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소현세자는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접하게 된다. 8년간의 볼모생활 후 돌아온 소현세자 가족은 인조와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죽음을 맞는다. 인조는 자신의 큰 아들과 며느리를 죽음으로 내몬다.
인렬왕후가 죽고 3년만에 인조의 계비로 간택된 여인이 15세의 장렬왕후 조씨이다. 그러나 15세의 어린 처녀가 내명부를 다스리기에는 너무 힘이 부쳤고, 인조가 정을 주는 소용 조씨의 권세가 더 세었다. 더욱이 장렬왕후 조씨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역시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왕비도 별 볼 일이 없다.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아들도 낳지 못한 장렬왕후는 인조가 죽으면서 드디어 기를 펴는데 왕세자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자신이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효종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대비로서의 위엄을 지킨다.
그러나 10년 동안 북벌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효종이 죽으면서 조씨의 상복 입는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요새 보기에는 웃기지도 않는 예송논쟁이 벌어진다. 원래 성리학의 상례에 따르면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3년복을 입고, 맏아들이 죽으면 부모가 3년복을 입으나 맏아들이 아닌 아들이 죽으면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다.
인조의 맏아들이 죽었을 때 장렬왕후는 맏아들의 예로써 3년복을 입었다. 그런데 효종이 죽으면서 서인 송시열은 효종이 장남이 아닌 둘째이기 때문에(장남인 소현세자의 동생) 장렬왕후 조씨는 상복을 1년만 입어야 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고, 남인 윤휴는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됨으로써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한다.
15년 후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며느리가 죽었을 때 시어머니 장렬왕후 조씨의 상복을 입는 기간이 1년이냐, 9개월이냐를 두고 다시 제2차 예송논쟁이 벌어지는데 서인들은 인선왕후는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설을 주장하고, 남인들은 왕비이므로 1년설을 주장하여 결국 남인들이 승리하고 15년 전의 상복도 3년으로 고치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남인들 세상이 된다.
옷을 입을 사람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옷을 입힐 사람들만 어머니 또는 시어머니에게 상복을 몇 년을 입힐 것인지 싸우고 볶은 이러한 논쟁은 지금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보기에는 한심한 일이라도 당시로서는 주자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논리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장렬왕후 조씨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가 숙종 14년에 42세의 나이로 죽는다. 전처인 인렬왕후 한씨가 인조와 함께 장릉에 안장되어 있어 남편과 같이 묻히지 못하고 이곳 휘릉에 홀로 묻혀있다.
6. 원릉(元陵 :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
휘릉을 나와 바른 쪽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원릉이 나온다. 원릉은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쪽으로 가서 정중앙에서 능을 바라보니 홍살문과 참도와 정자각과 봉분이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우측에 비각이 있어 원릉은 정통 조선 왕릉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홍살문 우측의 망료위는 타 능에 비해 넓은 편이고, 참도는 신도는 높게, 어도는 낮게 만들어져 있다.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참도 주위가 다른 왕릉에 비해 넓다.
원릉 홍살문과 정자각
정자각 밑에서는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왼쪽 편 구릉으로 잠시 기어 올라가 봉분을 보니 쌍릉으로 되어 있고,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으로 서로 두개의 봉분이 연결되어 있다. 능 앞에서 바라보아 왼쪽의 능이 영조의 능이고, 오른쪽의 능이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영조의 능과 정순왕후의 능 앞에 각 혼유석(석상)이 하나씩 놓여있고, 망주석, 장명등, 석호와 석양, 문인석과 무인석 등의 석물은 다른 왕릉과 비슷하다.
원릉의 봉문과 석물들
영조는 원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정성왕후가 묻혀 있는 서삼릉의 홍릉에 빈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나(현재도 정성왕후의 능 옆에 빈 자리가 그대로 있다) 홍릉에 묻히지 못하고 이곳 동구릉에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묻혀 있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다(첫째 아들은 장희빈과 사이에 낳은 경종). 숙종은 3명의 정실부인 사이에서는 아들이 없었다. 숙종은 본처 인경왕후 김씨가 죽자 인현왕후 민씨를 계비로 맞았다가 장옥정에 눈이 맞아 아들 균(경종)을 얻고, 서인들에 대한 공세의 일환으로 인현왕후를 폐비시킨다. 이때 왕비 폐비에 반대하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사사된다. 김만중이 숙종이 장희빈에 눈이 멀어 민씨를 내쫓은 사실을 풍자한 『사씨남정기』를 쓴 것도 이 때다.
TV드라마 “장희빈”에서도 대충 그려졌지만 민씨를 축출한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나, 5-6년이 지나면서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고 싫증이 나자(원래 숙종 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여자를 다 그렇게 대한다) 민씨를 그리워하며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 방에서 무수리 최씨가 폐비된 민씨를 축원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무수리라는 하찮은 존재가 폐비를 그리워하며 축원을 드리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대역죄일터. 그러나 숙종은 민씨에 대한 그리움이 대역죄를 범한 무수리 최씨와 같이 합궁하는 것으로 승은을 베푼다.
최씨가 처녀(정확하지는 않다?)를 바친 숙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연잉군이 바로 영조이다. 숙종이 이 때 무수리 최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영조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씨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최씨는 무수리에서 일약 내명부 1품 벼슬인 숙빈으로 지체가 수직상승한다. 여자의 운명은 이렇게 남자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하루아침에 하늘과 땅을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갑술옥사로 남인들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폐위된 민씨도 복위되나, 허약한 체질의 인형왕후 민씨는 시름시름 앓다가 35세의 나이에 죽고 서오릉의 명릉에 숙종과 같이 묻혀있다. 그런데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장희빈이 궁궐 내에 신당을 차려놓고 민씨를 저주했기 때문에 민씨가 죽었다고 고자질하는 바람에 장희빈은 결국 민씨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43세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후 숙종의 계비가 된 여자가 인원왕후 김씨이다.
어쨌든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후원으로 후사가 없는 경종의 뒤를 이어 우여곡절 끝에 제21대 왕위에 오른다. 인원왕후가 없었으면 신축환국 등 노론과 소론이 치고받는 싸움의 와중에 영조가 즉위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파싸움의 와중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책을 씀으로써 붕당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을사환국, 정미환국을 거치면서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이 오락가락 하는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을 두루 중용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숙종의 명릉을 둘러보면서도 간단히 언급한 바 있지만 당쟁이라고 하는 것은 견제와 균형의 현대판 정당정치의 중세적 형태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당시 조정에서 벌어진 토론과정이 자연스럽게 근대적 의미의 정당제도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옛날 당쟁이 첨예했던 시기일수록 백성은 살기가 편했다. 당쟁(실제로 당쟁이라는 말은 일본인 사학자들이 조선인의 당파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억지로 만들어낸 말이고 우리말로는 黨議라는 말만 있었다)이 심했던 시기에는 정적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라 부정부패가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우리 역사상 당쟁이 활발했던 시기에 백성들은 태평가를 불렀다. 그런데 영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이라는 것을 쓰면서 당쟁이 없어지고 오히려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심해지고 백성들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탕평책을 실시함으로써 이른바 세도정치의 폐해도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든 영조는 50년 이상의 재위기간 중 많은 업적을 남겼고, 이른바 영ㆍ정 시대의 문화부흥기의 초석을 놓는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활약한 시기도 이때이다. 영조의 재위기간은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51년 7개월로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고, 83세까지 왕위에 있었으니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어린 나이로 66세인 영조의 계비가 된다. 15세 처녀와 66세 노인이 궁합이 맞았는지는 모른다. 정순왕후는 아들이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도 10세나 어렸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모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마마로서 수렴첨정을 하면서도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를 조진다. 그녀는 천주교를 박해하는 등 여장부로서 활약(?)하다가 1805년 61세의 나이로 죽고 영조와 같이 이곳 원릉에 묻혔다.
여기서 잠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는 10세의 나이에 동갑인 사도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된다.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정빈 이씨 소생)는 10세의 나이에 이미 죽었으므로 영조의 아들은 사도세자 밖에 없었다. 영조는 56세가 되는 해 15세의 사도세자에게 국왕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대리청정을 명한다.
문제는 영조가 노론을 지지하는데 반해 사도세자는 소론을 지지하면서 노론의 반격을 받고, 정성왕후가 죽고 새로운 왕비가 된 정순왕후가 노론쪽에 서면서 사도세자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진다. 결국은 영조 38년 28세의 나이로 뒤주 속에서 굶어죽는 신세가 된다. 세자빈 혜경궁 홍씨도 폐서인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시파(사도세자 동정)와 벽파의 대립 이후 당쟁은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영조는 훗날 세자를 죽인 일을 후회했다고 하는데(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은 세손(정조)이 즉위할 경우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보복할 것이 두려워 세손폐위에 나서고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등이 이에 가세한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세손을 폐위시키려는 친정의 움직임에 반대하였고, 영조가 세손의 지위를 지켜주고 죽는 바람에 세손 정조는 왕이 되었다.
정조는 곧바로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세력들을 척결하게 되고, 혜경궁 홍씨의 친정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정조 즉위 후 아버지 사도세자는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된다. 혜경궁 홍씨가 아들(정조)을 왕으로 즉위시킨 결과 친정의 몰락이라는 비운을 맞는 것이다.
후일 정조가 죽고 혜경궁 홍씨는 이 나라 궁중문학의 효시인 『한중록』을 쓰면서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하여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상성격자로 몰고 자신의 아버지 홍봉한은 세자와 세손에게 더없는 충신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에게 시아버지(영조)나 남편(사도세자)보다 아들(정조)과 아버지(홍봉한)가 더 소중했던 것이다.
원래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 중에서 자식을 선택한다. 여자들에게 남편이야 없어도 되는 존재이지만 아들만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아들은 바로 여자들의 존재근거라는 사실은 혜경궁 홍씨에서 바로 나타난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남자들이여 조심할 지어다!!
7.경릉(景陵 : 제24대 헌종과 효현성황후 김씨, 계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
원릉을 보고 나와 앞으로 나아가다가 화장실이 있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길을 꺾으면 한적한 소나무숲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경릉이 나온다. 경릉은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따라 정자각으로 간 다음 능원 뒤 봉분을 보기 위하여 잠시 실례하였다. 선정릉이나 헌인릉의 경우는 능원 가장자리로 올라가 가까이 능 주위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동구릉의 모든 왕릉은 가까운데서 봉분을 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경릉 홍살문
경릉은 3개의 봉분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 삼연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이 능 3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조선 왕릉은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 경릉이 유일할 것이다. 능을 바라보고 제일 왼쪽의 능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성왕후의 능이며, 오른쪽이 효정성왕후의 능으로 정실부인과 둘째 부인이 사이좋게 “성님, 아우” 하면서 지아비와 같이 한 곳에 잠들어 있다.
경릉
헌종은 순조의 큰 아들인 익종(효명세자, 후일 문조로 추존)의 아들로 순조가 죽자 제2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현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할머니인 순조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된다. 그러나 헌종의 외척인 풍양조씨가 가세함으로써 안동김씨 일문과 풍양조씨 일문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안동김씨 김조근의 딸(효현왕후)이 헌종의 정비가 된다.
효현왕후가 후사 없이 16세의 나이로 헌종 6년 죽자 효정왕후가 14세의 나이로 왕비가 된다. 홍씨가 헌종과 첫날밤을 치르면서 마침 생리일이라 방문 미닫이를 꼭 잡고 헌종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 있다. 헌종과 효정왕후는 사이가 좋지 못했는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순원왕후는 후궁을 맞아들여 경빈을 하사하였고, 헌종은 경빈만 사랑하여 경빈을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까지 지어주었다(이 낙선재에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서 살았다).
헌종이 23세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순조의 계비 순원왕후는 강화도령 원범을 제24대 철종으로 추대한다. 효정왕후 홍씨는 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광무7년(1903년) 후사 없이 73세로 죽고 이곳 경릉에 묻혀 있다. 효현왕후와 효정왕후는 후에 황후로 추존되어 효현성황후와 효정성황후가 된다.
현종의 재위기간은 1834년 11월부터 1849년 6월까지 14년 7개월로 3명의 부인에게서 1녀가 있다. 헌종이 14년 이상을 왕위에 있었다고 하나 죽을 때 나이가 23세로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나이였다. 현종대에는 세도정치와 천주교탄압 등 좋지 않은 일만 있었고 별다른 업적도 없다. 업적을 쌓을 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었다. 현종의 재위기간은 이른바 3정의 문란 등 조선왕조 체제가 와해되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한다.
8. 혜릉(惠陵 :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
경릉에서 나와 한적한 길을 걸어 쭉 내려가면 혜릉과 숭릉으로 가게 된다. 소나무뿐만 아니라 신나무, 오리나무, 들메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등 숲 속 사이사이에 능들이 조성된 것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게 터를 잡았다. 동구릉이 있는 지역이 구리시라고 하지만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차 소리나 소음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곳에 조선시대 왕들이 잘난 왕이나 못난 왕이나 같이 터를 잡고 있다.
혜릉
혜릉은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홍살문, 참도, 정자각, 비각, 능원의 구조는 다른 왕릉과 비슷하다. 참도 우측에는 수복방 터가 남아있다. 다만 다른 왕릉의 참도는 곧게 일직선 1단으로 놓여 있는데 이곳은 2단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능의 높이도 다른 능에 비해 낮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경종은 어머니 장희빈을 살리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경종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숙종은 경종이 왕위에 오를 경우 연산군처럼 보복을 할 것을 우려했고,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폐위시킬 것을 획책하다가 59세를 일기로 죽는 바람에 경종이 왕위에 오른다.
경종에게는 원비인 단의왕후나 계비인 선의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을 한 번 보기를 원해 경종을 보자 장희빈은 악이 받쳐 “이씨 집안 씨를 말리겠다”고 발악하며 아들의 자지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악이 받친 장희빈으로서는 능히 그럴 만도 했다.
단의왕후 심씨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병약한 세자를 잘 섬겼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 병으로 33세의 나이로 죽고, 이곳 혜릉에 묻혔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즉위한 후 왕비로 추존되었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 의릉에 묻혀있다.
9. 숭릉(崇陵 :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
혜릉을 보고 나와 우측으로 숲길을 조금만 더 가면 숭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숭릉은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도 원릉과 같은 쌍릉으로 되어 있다. 숭릉도 목릉과 같이 산림회복을 위하여 공개하지 않는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숭릉으로 가는 철문이 열려져 있어 한번 들어가 볼까 하다가 문화재보호특별사법경찰관인 동구릉소장의 입산금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어 기회가 되면 나중에 보기로 하고 되돌아 나왔다.
숭릉-비공개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효종의 뒤를 이어 1659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제18대 왕위에 오른다. 현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현종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아버지 봉림대군(효종)과 장씨(인선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 귀국하여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아버지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고, 인조가 죽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세자가 되었다가 효종이 죽자 제18대 왕으로 즉위한다.
현종은 정실왕후 한 사람만을 부인으로 두었는데 그 여인이 명성왕후 김씨이다. 아마도 조선의 왕들 가운데 정실이든 후궁이든 일편단심 부인을 1명만 둔 예는 현종밖에 없다. 우리가 성군으로 아는 세종도 부인이 6명이나 있었다. 그 부글부글한 후궁들 가운데 누구도 현종의 승은을 입지 못하였으니 현종은 후궁들에게 인기는 없었을 듯하다(?).
현종의 재위기간 1659년 5월부터 1674년 8월까지 15년 3개월, 부인 1명에게서 1남 3녀의 자녀를 둔다.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의 외아들이 숙종이다. 현종의 재위기간 내내 예송논쟁이 불을 붙었다.
현종이 34세의 나이로 죽고 14세의 숙종이 즉위한 후 명성왕후는 정청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정사에 관여하고, 집권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노심초사한다. 남인계열인 장옥정(장희빈)을 대궐에서 쫓아낸 것도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는 인현왕후 민씨를 숙종의 계비로 들어앉히는데도 일익을 담당한다. 명성왕후로 인해 왕비와 후궁이 조선의 국가권력에 본격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성왕후 김씨는 외아들인 숙종을 생각하는 마음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삼복형제를 제거하기 위하여 ‘홍수의 변’을 일으킨다. 남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앞장섰던 명성왕후 김씨는 숙종 9년 42세의 나이로 죽어 남편과 같이 이곳에 묻혔다. 명성왕후가 죽자 서인들이 쫓겨나고 다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다. 장옥정도 바로 궁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권력의 부침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0. 수릉(綏陵 : 추존황제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
숭릉에서 발길을 돌려 길을 되돌아와 관리사무소에서 다시 위로 올라간다. 건원릉으로 가면서 스쳐 지나간 수릉과 현릉을 보기 위해서이다. 수릉은 동구릉의 정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능이다.
수릉
수릉은 문조와 신정익황후의 합장릉으로 외견상 단릉으로 보인다. 순조와 순원숙황후를 합장한 인릉과 비슷하다. 홍살문, 참도, 정자각, 비각, 능원의 구조는 다른 왕릉과 비슷하다. 다만 참도 주위로 박석이 깔려있고, 망료위가 홍살문 앞에 있는 것이 다른 능과 다르다. 다른 능의 경우 망료위는 홍살문을 지나 바로 우측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은 홍살문 들어가기 전에 설치되어 있다.
수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남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 조씨의 능이다. 익종은 아들인 헌종이 즉위한 후 문조로 추존된다. 문조는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지만 대리청정 3년만인 22세의 나이에 죽는다. 문조의 비 신정익왕후는 남편의 사후까지도 오래 살아 83세의 천수를 누린다.
신정익왕후는 헌종과 철종 대에 대왕대비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흥선군과 손잡고 흥선군의 아들(고종)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선군과 신정왕후가 정치적으로 결탁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종말을 고한다. 신정익왕후는 고종 27년(1890년) 죽고 수릉에 합장되었으며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여기서 이큐태 코너(조선일보 2005. 3. 16.자)의 조대비를 보자.
[이규태코너] 趙大妃(조대비)
철종이 병석에 누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나돌 무렵, 조 대비는 그의 친정조카인 조성하(趙成夏)로부터 편지 한 통을 은밀히 전해 받았다. 그 편지는 조성하의 장인인 이호준(李鎬俊)이 전한 것이요, 이호준과 막역한 사이인 흥선대원군의 밀서였다. 처가가 같은 여흥 민씨이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호준의 서자인 이윤용(李允用)과 대원군의 서녀가 혼인을 한 겹사돈이다. 그 편지는 후사가 없는 철종의 후계로 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천거하는 밀서였다. 대통의 승계자를 왕이 정하지 못하고 죽으면 대비가 결정하게 돼 있으므로 철종이 숨 거둘 때까지 안동 김씨의 접근을 막기만 하면 조 대비는 수십 년 원한을 풀 기회를 잡게 되는 셈이다.
김좌근 및 김문근 부자, 그리고 김병학 형제 등 안동 김씨 세도가들은 철종의 병문안을 핑계로 세도를 이을 계책을 세우고자 대궐에 들렀으나 조 대비가 미리 병석을 차지, 접근을 금한 가운데 철종은 눈을 감았고 그 순간 대권의 상징인 국새(國璽)는 조 대비 치마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정치 드라마로 대권은 고종에게 돌아갔고 조 대비는 수십 년 한을 풀었으며 그런 지 5년 후에 맞는 회갑잔치다.
1등 공신인 이호준은 고종 등극과 더불어 벼락 출세, 군수직에서 승지 참판 전라관찰사 병조 형조 이조 판서를 두루 지냈고, 그의 양자인 이완용은 총리대신으로, 그의 서자인 이윤용은 군부대신으로 수직 상승을 했다. 하물며 김씨 세도로부터 왕정복고를 한 조 대비였음에랴. 병풍에 나타난 융숭함말고도, 궁에서만 기리기엔 너무 큰 경사라 하여 사형수 이외의 모든 죄수를 석방하고 세금을 내년으로 미뤄 주어 경사에 동참케 했다. 이 병풍은 정치 드라마의 한 막을 접는 라스트 신으로서 부가가치가 크다 하겠다.
11. 현릉(顯陵 :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
수릉에서 다시 길을 올라가면 현릉과 만나게 된다. 현릉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이 능은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다른 능에 비해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다. 망료위도 홍살문을 들어가기 전에 설치되어 있다.
현릉의 참도와 홍살문(뒤에 보이는 능이 문종의 능)
홍살문을 들어가 참도가 일직선으로 가다가 바로 좌측으로 직각으로 꺾어 나아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직각으로 꺾어 나아가야 정자각으로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형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로 참도를 일직선으로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정자각 뒤로 문종왕릉이 있고,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언덕에 현덕왕후의 능이 있다.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다.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단릉처럼 만든 것이 동원이강이다. 선릉의 성종의 능과 계비 정현왕후의 능도 이와 같다.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세자(문종)는 세자빈 김씨와 잘 어울리지 않아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되돌린다고 일종의 비방을 쓰다 발각되고 세자빈에서 쫓겨난다. 세종은 둘째 세자빈으로 봉씨를 맞았으나 동궁도 후궁을 들일 수 있도록 법제화됨으로써 세자는 후궁들에게만 눈길을 주자 봉씨는 세자를 추양장장 긴긴 밤을 기다리다가 시비와 사랑을 나누는 스캔들이 발생한다.
세자빈 봉씨와 시비는 조선 최초의 동성연애자 레즈비언이었다. 이 소문은 세종에게도 들어가 봉씨도 폐출된다. 당시 궁녀들 사이에서는 ‘對食’이라고 불리는 동성연애가 성행하였다. 궁녀들의 생활자체가 정상적으로 본능을 해결할 수는 없었고 궁녀들이 그런 식이라도 아니면 구중궁궐에서 그 답답함을 어떻게 풀고 끓어오르는 욕망을 달랠 수 있었겠는가? 역시 이해할 만한 일이다.
세종이 다시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승격시켰고, 권씨가 세종 23년 왕세손(단종)을 낳는다. 권씨는 24세의 나이로 산후병으로 곧 죽고, 문종이 즉위한 후 현덕왕후로 추존된다. 현덕왕후는 남편보다 11년 전에 세상을 뜨고 그 뒤 5년 만에 아들 단종도 수양대군에 의해 비명에 저 세상으로 간다. 현덕왕후는 참으로 비운의 여인이다.
문종의 재위기간은 1450년 2월부터 1452년 5월까지 2년 3개월로 얼마 되지 않고, 3명의 부인에게서 1남2녀의 자녀를 둔다. 문종의 외아들이 단종이다. 문종은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조선역사상 처음으로 적장승계의 원칙을 따른다. 그전에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 맏형 양녕 대신 왕위에 오른 세종 등 적장승계의 원칙을 비켜가고 있었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제왕수업을 대단하게 받지만 문약하였고, 재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업적은 없다. 문종이 죽고 아들인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는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본래 현덕왕후의 능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현 안산신 목내동)에 소릉으로 조성된 것을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자기 아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고 크게 꾸짖고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은 자국이 실제로 악성 부스럼이 됨에 따라 세조가 크게 열받아 소릉을 파서 관을 바다에 띄웠는데 이상하게도 거슬러 올라와 갯벌에 묻혀 있는 것을 56년 후인 중종 8년에 종묘에 벼락이 떨어짐에 놀라 비로소 소릉을 남편인 문종이 묻혀있는 이곳 현릉 옆자리고 이장한 것이다. 현덕왕후는 죽은 지 70년 만에 남편을 찾아 같이 묻힌 것이다.
12. 東九陵 雜想
이제 현릉 답사를 마침으로서 비공개 능인 목릉과 숭릉을 제외하고는 동구릉의 능들을 대충 둘러보았다. 오후 5시가 되면서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고 관람종료시간이 되어 더 이상 동구릉에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2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능을 쫓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더니 구두에 허옇게 흙이 올랐다. 평지를 10km 이상 걸은 듯하니 산 하나를 갔다 온 셈이 되었다.
조선 왕릉들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인생 백년간 덧없기 바람 앞 촛불”(人生百世間 忽忽如風燭)이다(崔惟淸의 雜興)이라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세상을 호령하던 왕이라 할지라도 백년을 못살고 땅속으로 들어간다. 살아있을 때 설친 것이 죽어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 살다가는 한 세상이 별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은 죽기 전에 더 많은 권세와 욕망과 재물을 쌓으려고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이슬처럼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가? 어둠이 내리는 동구릉을 떠나면서 느끼는 감회 아닌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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