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1 | ||||
이 근 자 | ||||
철쿵. 모정이 대문을 툭 밀어서 닫는 소리가 들렸다. 문간에 서서 걸쇠가 맞물리는 진동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당으로 내려서는 남편과 달리, 저 철문이 닫힌 지금쯤 모정은 현관 앞에까지 다가왔을 것이다. 거실을 서성이던 여자는 닌자가 어둠에 스며들듯 문간방으로 숨어들었다. 곧 현관문마저 제 손으로 따고 들어온 모정이 자목련 봉오리가 새겨진 거실 테이블 위에 열쇠꾸러미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크고 작은 열쇠 여섯 개가 엉키고 부딪치며 내려앉는 소리였다. 여자는 저 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딸아이 뒤를 밟아야겠다는 얄궂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
하지만 여자가 잠자는 병에서 깨어난 첫날에 그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여자는 흰색 바둑알처럼 명료한 각성시간이 지속되자 남편과 모정을 불러 축하파티라도 벌이고 싶었다. 거실 벽에 매달린 화이트보드엔 둘의 휴대폰 번호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여자는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려다 그들을 수없이 실망시켰던 첫날 중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자신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네 시가 되어 학교에서 돌아온 모정이 깨어 있는 여자를 보자 뛰듯이 다가와 다정하게 껴안았다. 여자가 차려준 간식을 먹으며 선생님과 친구들 얘기를 조잘조잘 쏟아냈다. 여자는 정애, 영민이라는 모정 친구들의 키가 얼마인지 얼굴 모양은 동그란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모정에게, 지난번과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시키기 싫어서였다. 여자는 모정에게 학원을 하루 쉬고 엄마와 분갈이나 하자고 권할까 갈등했다. 모정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오늘 땡땡이 칠까? 모정의 물음에 여자는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는 어느 때부터인가 모정과 남편의 일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워나갔다.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이나 무책임한 일탈이 그들의 생활을 흐트러뜨릴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여자가 놀란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모정이 가방을 매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뭔가를 지우고 다시 쓴 다음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아쉬운 듯 머뭇거리며 현관을 나가는 모정을 배웅한 뒤 거실로 돌아온 여자는 화이트보드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호루라기 열쇠 휴대폰/ 엄마 모정이 학원 갔다 올게요/ 쑥 미나리 두부 혹시 여자가 외출할 때를 대비해 써 놓은 첫째 줄, 호루라기에 붉은 동그라미를 여러 개 둘러놓은 것도, 장 봐 올 반찬거리를 써놓은 줄도 한 시간 전에 본 그대로였다. 다만 모정이 중학교 갔다 올게요, 줄에서 ‘중학교’가 ‘학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학원은 독서실이기도 했다가 시내나 친구 집으로 바뀌기도 했다. 학원으로 바꿔 쓴 모정의 심리를 다 짚어내기도 전에 온몸에 소름이 쏴아 돋았다. 모정이 방금 손잡고 얘기한 여자는 누구인가. 자신은 딸아이와 얼마나 먼 시공의 아가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가. 여자가 잠을 잔 6년8개월24일의 간극이 안개 낀 로렐라이 언덕의 노랫소리보다 아득할지도, 아니 빙산을 수킬로미터나 갈라놓는다는 북극의 크레바스보다 더 깊을지도 모르겠다. 인식이 불명료할 경우 눈에 보이는 물질로부터 현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지.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여자는 필기도구를 챙겨들고 모정의 방을 샅샅이 훑어나갔다. 2학년 4반 26번, 수학문제지 67쪽 2문제 틀림, 일기장, 한빛입시학원/ 느티나무침대, 곰 인형, 장미꽃이불에 묻은 생리혈/ 화이트칼라 5단 서랍장에 든 속옷, 바지 혹은 치마들, 여자의 키만한 겨울 코트
혹시 모정이 포옹이라도 하려 이불을 들춘다면 외출 차림인 것이 들통날 것이다. 여자는 이불깃을 온몸에 돌돌 말고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은 채 소리로만 모정의 동선을 따라다녔다. 변기에 물 내리는 소리, 서랍장을 여닫는 마찰음, 후루루룩 국물 마시는 소리에 이어 사이드테이블에서 열쇠를 집어든 모정이 여자의 방문을 열었다. “아직 태평양이야? 엄마, 모정이 간다이.” 엄마가 잠에서 못 깨어나는 건 바다 때문이야. 엄마는 먼 바다 깊은 곳에서 잠을 자거든. 모정에게 엄마의 기면(嗜眠)증이 표류와 같다는 말을 했던가? 어느 날부터 모정은 엄마의 잠이 동해쯤인지, 하와이 근해인지 농담처럼 묻곤 했다.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여자는 이불 밑에 숨겨두었던 선글라스와 선캡을 꺼내 쓰고 모정이 뒤를 밟았다. 간다이? 말끝에 전라도 사투리가 남아 있던 사람은 미스 최였다. 잠수 이전의 메모리 무더기에서 여자는 미스 최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렸다. 미스 최가 아직 남편의 가구점에 근무하는가. 모정이 골목을 돌아나갔다. 모정을 놓칠세라 골목을 뛰어나가 삼거리 경희슈퍼 앞에서 중학교 방향으로 난 내리막길에 들어서서야 여자는 자신이 깨금발로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며칠 만에 눈뜬 시간이 새벽이나 한밤중인 적이 많았다. 살금살금 걸레질을 하고 누렇게 마른 나물을 다듬어 된장국을 끓이면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쓴 습관 탓이리라. 발꿈치를 들고 걷는 걸음걸이는 남의 눈에 쉽게 띌 것이었다.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은 것도 어색했다. 몸이 뒤뚱대는 느낌 때문에 얼음 위를 걷듯 발을 끌었다. 혹시 모정이 돌아볼까 건물 그늘에 붙다시피 따라갔지만 모정은 또래 아이 몇을 지나치며 손을 흔들었고 길가에 나와선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등 앞만 보고 걸어가 입시학원이라 적힌 건물로 들어갔다. 여자는 간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학원은 밤 아홉시가 되어야 수업을 마친다고 했다. 여자는 훗 웃었다. 탐정놀이 첫날, 모정의 동선이 짧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인 내일이 기다려졌다. 여자는 뒤돌아서 오르막을 오르며 내리막 끝을 돌아보았다. 절대 욕심내지 말자 다짐해도 모정의 학교 앞 벚나무가 가득 심어진 그 담을 돌아 가구점까지 걸어보고 싶은 미련이 남았다. 지금쯤 학교 앞길엔 훌훌, 벚꽃이 날릴 텐데. 바깥 걸음이 피곤했던지 모정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여자는 잠이 들었다. 여자의 잠은 너무나 겹이 많아 며칠 혹은 몇 생애 이전의 시간 층이 현재의 기억과 소망들에 섞여들었다. 수억t의 수압 같은 꿈을 가르고 쫘르르 열쇠 내려앉는 소리, 저 소리의 희미한 징후를 잡아채 미행을 결심한 순간이 진짜 깨어난 시점이라고, 여자는 단정했다. 이렇게 정리된 생각도 잠의 일부였다. 여자는 잠 속에서 생각하는 방식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다. 그곳엔 뚜렷한 장면들만이 구성이 느슨한 영화처럼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모정의 것만 추려냈다. 임신 팔 개월째 진눈깨비가 날리는 날 여자는 뱃속 아기가 공주라는 걸 알았다. 가구디자이너인 여자와 남편은 원목으로 아기 침대와 흔들의자를 만든 후 색을 고르던 참이었다. 여자아이일 경우 침대에는 분홍색을, 흔들의자에는 녹색을 칠할 예정이었다. 페인트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여자가 바람이 잘 통하는 문간에 앉아있는 동안 남편은 색을 내느라 작업장을 여러 번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아이보리 톤이 도드라진 분홍색. 여자가 남편에게 요구한 침대 난간 색깔이었다. 남편의 시색용 막대기가 경계가 불분명한 분홍 터치로 가득 찼을 때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수입가구에서 이미 샘플을 보았던 흔들의자의 색은 쉽게 결정이 났다. 둥글게 굽은 의자 다리엔 짙은 녹색을 칠하고 몸체는 연두색, 아이의 시선이 닿는 손잡이엔 보색인 빨강을 칠하기로 했다. 노랑 포인트를 주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모정의 나이 네 살이 되던 때 여자는 아이 키높이에 맞는 책상을 만들었다. 그때 여자는 일주일씩 잠을 못 자 새빨간 눈동자를 가리려 선글라스를 끼고 작업장에 출근했다. 불면이 깊어지자 무섭게 살이 빠졌다. 망치 손잡이 굵기밖에 안 되는 얇은 팔뚝으로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고 망치질을 해 꼬마책상 세트를 완성했다. 모정이 그곳에 앉아 간식을 먹고 뚝딱뚝딱 블록도 끼우고 영어를 배우는 걸 보며 여자의 잠은 불면에서 기면으로 옮겨갔다. 여자의 수면주기는 해와 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은하의 외계별과 닿아있는 것일까. 수면제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각성제도 여자의 잠을 조절하지 못했다. 기면이 심각한 정도에 다다르기 직전 여자는 백 년이 넘은 느티나무로 모정의 침대를 만들었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혼자 잠들지 않으려는 모정과 그 침대에 함께 누워 책을 읽었다. 얕은 난간을 두른 침대에서 잠이 든 여자는 아침이 되어도 깨어나지 못하기 일쑤였다. 갈수록 잠꼬대와 몸부림이 심해져 소리까지 격리된 문간방으로 이동했다. 툭 잘린 의식 안으로 모정의 방 풍경이 펼쳐졌다. 한쪽 벽면에 놓인 느티나무 침대에는 여자가 새로 꺼내놓은 보라색 이불과 곰 인형이 놓여있었다. 유명상표가 붙은 주니어 옷장과 서랍장. 남편은 더 이상 가구를 만들지 않는 것인가. 서랍장에 든 옷은 평상복 하나도 세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모두 아빠가 골라준 것들일까. 책상 위에 시선이 꽂혔다. 모정은 2학년 남녀 합반이었고 유격수라는 수학문제지를 푸는 중이며 도데의 별을 읽고 있었다. 눈에 익은 일기장을 책꽂이에서 뽑아 펼쳤다. 아이는 일기장에 엄마가 체체파리에 물렸다고 써놓았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기억했다. 여자의 잠이 바닷속 깊이 침잠하기 전이었다. 수면 가까이 헤엄치는 물고기 등 위로 햇빛이 투과돼 보일만치 잠이 얕았다. 여자는 모정과 어울려 노는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고 체험학습을 떠나는 날 아침이면 억지로라도 눈을 떠 김밥을 싸주던 때였다. 그러다 자신을 어디로 싣고 가는지 모르는 고래 등 같은 잠에 납작 엎드려서도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 읽고 남편에게 몇 시에 귀가하느냐고 전화를 걸던 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미안한 마음이 분열적으로 엇갈리던 시기였다. 이후 체념과 함께 여자는 해일이나 태풍을 감지할 수 없는 깜깜한 암흑에 갇혔다. 여자가 잠의 바다에서 발광(發光)하는 물고기밖에 볼 수 없었고, 물속으로 구부러진 손을 들이밀던 빛살 따위 완전히 잊어버렸던 때, 모정의 일기는 멈춰 있었다. 여자의 잠 속에서 재구성되는 나쁜 기억은 생시보다 더 생생하고 끔찍했다. 잠결에도 여자의 손이, 푸들푸들 떨렸다. 토요일 아침, 여자는 다른 엄마들이 등교 준비를 위해 일어나는 시간에 깨어났다. 두부를 졸이고 된장을 끓여 상을 차리고 운동화를 털어놓아도, 모정은 조금도 망설이지 ●고 ‘학원’을 ‘중학교’로 바꿔 썼다. 그냥 학교도 아닌 ‘중’학교! 바다에 똑같은 그물을 자꾸 던져 넣는 어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라고 반듯하게 쓴 모정의 글씨가 여자를 향해 던진 낚싯바늘처럼 보였다. 모정이 여자에게서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은 무얼까. 대신할 것이 없는 허전한 위안, 그리움이라는 글자만 그득한 빈 시간들, 원망을 삼켜 늘 서걱대는 왼쪽 가슴 아래. 가느다란 낚싯바늘에 매달아 건네고 싶은 여자의 소망도 모정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중학교라고 쓴 아래에 잡채 재료를 적었다. 쇠고기 채 썰어 300g, 옛날당면과 야채. 막 젓가락질을 배운 모정이 잡채만큼은 손으로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커다란 접시를 제 앞으로 당겨 배가 부른 후에야 상 중앙으로 밀어 다른 이가 먹도록 허락했다. 입이 짧아 음식에 욕심 내지 않던 모정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문득 제 앞섶에 묻은 잡채가닥을 떼어먹는 것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그 모양을 구경하려 자주 잡채를 만들었고 그때마다 남편은 으르렁 곰돌이야 잡채 먹어, 라며 한동안 모정을 놀렸다. 그 밥상에 함께 앉았던 남편은 어디에 있을까? 느닷없이 치솟는 눈물을 삼키며 거울 앞에 가 앉았다. 모정과의 간극에 아이의 시공간이 느껴진다면 남편은 어떨까. 바싹 마른 칫솔, 녹슨 면도기, 바닥이 보이는 남성용 로션/ 체육복 한 벌과 파자마, 구멍 난 양말, 목과 소매 깃이 늘어진 셔츠들/ 자목련 테이블 여자는 잠깐씩 깨어있을 때 늘 그랬던 것처럼 화분을 꺼내 씻었다. 담 너머로 노랑빨강 꽃잎을 업어가던 바람결을 눈으로 쫓던 여자가, 대문간을 하염없이 서성이던 날 찾아낸 일이 꽃씨를 심는 일이었다. 아이의 책상 위에 식목일 숙제로 받아온 채송화 씨앗이 첫 파종이었다. 야생화들은 씨앗만 뿌려놓으면 몇 달을 손보지 않아도 제각각의 생명력을 뽐내듯 작고 앙증맞은 꽃을 피웠다. 그저께 인터넷으로 주문한 씨앗이 도착했다. 화단엔 새싹과 봄꽃이 가득했다. 담 아래 음지엔 파설초(破雪草)라 불리는 노루귀가 두툼히 내려앉은 낙엽을 피해 삐딱하게 대를 뻗고 자랐다. 연필심만 한 꽃대에 탐스러운 꽃망울이 매달려 있었다. 여자는 인터넷에서 본 사진을 떠올렸다. 겨우내 켜켜이 쌓인 잔설을 동그랗게 녹이며 돋아나 작가의 사진에서 살아난 푸르고 흰 자태의 노루귀. 여자는 사진에서보다 더 예쁘고 귀한 분홍노루귀 주변의 낙엽을 걷어내며 상상했다. 이곳이 자신의 좁고 그늘진 마당가가 아니라 봄볕이 따스하게 든 산기슭 바위틈이라고. 여자는 붉은 등산모를 쓰고 화질이 좋은 수동 사진기를 들고 있었다. 바위의 경사에 따라 삐딱한 자세로 쭈그려 앉은 채 지름 1.5㎝의 경이로운 꽃송이에 감탄하며 앵글을 당긴다. 탁 트인 산등성이를 넘어온 차가운 바람조차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여자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부토와 거름을 섞은 밑흙을 화분바닥에 깔고 분홍노루귀를 한 삽 떠 넣었다. 흙을 채워 꼭꼭 누른 뒤 마른 낙엽을 부수어 흙 위에 덮었다. 솜털이 저리 많은 노루귀는 분명 추위를 많이 타는 식물일 것이다. 노랑제비꽃은 무리 지어 피어나니 넓은 사금파리 항아리가 제격이었다. 곧 화단이 빈 만큼 흙갈이를 끝낸 화분이 마당에 가득했다. 새 장소에서 몇 날 며칠 동안 비와 바람을 견딘 꽃들은 가구점으로 옮겨 갔다. 여자는 사실 원목을 다듬고 싶었다. 집 안에 작은 작업실을 들이겠다는 여자의 제안을 남편은 반대했다. 전기톱만 위험한 공구가 아니라 작은 조각도라도 치명적인 무기일 수 있다고 했다. 티끌만 한 사고는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집 안에 들어앉은 여자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씨앗을 뿌리고 잡채까지 만드느라 오후 세 시가 지났는데도 모정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학교에서 점심을 주지는 않을 텐데.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학원으로 곧바로 간 것인가. 벌청소라도 받는 것일까. 꾸덕꾸덕 마르고 있던 잡채를 데워 먹고 난 여자는 모정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동안의 일을 다 고백하고서라도 모정이 보고 싶었다. 어, 엄마다. 수화기를 입에 대기 전 멀리서 들리는 들뜬 딸아이의 목소리에 여자는 감동했다. “엄마?” “……” “여보세요, 엄마!” “으응, 모정아. 어디니?” “학교. 우리 축제 기간이야, 엄마. 이제 일어났어?” “아니, 왜?” “그럼, 학교에 올 수 있어? 친구들이 내가 최고래. 내가 만든 모형…… 안되겠다.” “갈게. 교실로 가면 돼?” “응? …… 안 돼, 오지 마! 여기 시끄러워. 완전 야단이야. 그리고 나 이따 시내 갈 거야. 친구랑 약속 있어.” “엄마 금방 갈 수 있는데…….” “나 지금 가봐야 해 엄마, 집에서 봐.” 모정과의 연결공간이 닫히고 있었다. 잠깐만! 바닷물을 가르기라도 할 듯 여자가 허공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축제? 가벼운 장난질인 탐정놀이 때문에 모정이 축제에 가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했다. 아니다. 모정의 약속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여자는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서 탐정 포즈를 으쓱 취해보곤 집을 나섰다. 어제는 모정을 따라가느라 경희슈퍼가 새로 지은 옆의 큰 건물에 가려 부러진 몽니처럼 조그마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여자는 이혼녀인 경희슈퍼 주인이 아직 카운터에 앉았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돌리고 지나쳤다. 몸무게가 불었지만 눈썰미 좋은 주인이 자신을 알아채면 금세 모정 귀에 들어갈 것이었다. 모정은 화이트보드에 쓰인 찬거리를 사거나 군것질을 하러 경희슈퍼에 들락거렸다. 산동네 같았던 골목이 명동 뒷길만큼이나 번성했다. 낯익었던 그대로 남아준 길거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여자의 예상대로 학교 앞길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중학교와 초등학교 담을 따라 이열종대로 마주 선 벚나무 길엔 하얀 꽃잎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 사이를 오가는 아이들이 모두 모정의 친구처럼 보여 정겨웠다. 중학생 아이들의 들썩이는 생기가 행복한 꿈결인 양 여자를 들뜨게 만들었다. 여자는 굳게 잠긴 2학년 4반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을 기웃거리다 강당으로 갔다. 강당에 아이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자는 작품보다 이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곤 뜻하지 않게 로봇과 집 모형 앞에서 모정의 이름을 발견하곤 소리없는 대소를 터뜨렸다. 모정이 이과(理科)로 컸구나. 여자는 건축과를 반대하는 부모님의 의견에 밀려 미대로 진학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기억했다. 로봇과 집 모형 옆엔 프리지아 꽃다발과 장미 한 송이가 붙어 있었다. 꽃 한 송이 없는 작품이 거의 전부였다. 모정을 좋아한다는 전교부회장이 프리지아 다발을 붙였을 거라고 여자는 멋대로 상상했다. 아닌 척하지만 모정도 그 애를 좋아했다. 그렇지? 라고 물으면 제 감정을 숨기려 펄쩍 뛸 나이의 모정. 여자는 사탕꽃을 모정의 이름 옆에 붙였다. 여자는 강당 밖에 나와 학부모들이 떡볶이나 어묵 등을 만들어 파는 간이매점을 지켜보았다. 모정이 음료수라도 사 먹으러 들르면 볼 수 있는 위치였다. 벌써 시내에 나간 건 아니겠지. 작품 철수는 만든 본인이 직접 한다고 했으니 모정이 아직 교정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운동장 곳곳엔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알록달록한 전시부스나 체험공간이 십여 개 흩어져 있었다. 페이스페인팅을 그려주는 부스 앞에는 팔뚝을 걷은 아이 몇이 줄을 서 있었고 다트판을 향해 철심이 꽂힌 화살을 날리는 아이도 있었다. 농구코트엔 여자애들이 공을 따라 뛰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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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당선작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잘 썼어요. 축하, 축하.
순갑이에서 요술펜으로 바꾸더만 정말 펜이 요술을 부리듯 현실과 꿈의 조화가 환상적인듯 합니다. 소재의 치밀성이 부럽기만합니다. 나는 언제쯤 흉내라도 낼 수 있을런지...고생하셨고 축하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부탁해요.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