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게 자기의 생애를 탐구해 간 단 한 권의 소설로 세계문학사에 우뚝 선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 7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소설이다.
나는 그 첫 권을 차지하는 '스완의 사랑'에서 흥미로운 세계를 발견했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문학의 세계에 눈 뜬 햇병아리 시절에 내가 맹렬히 덤벼들었지만 현란하고 너무나도 심오하고 난해해서 첫 권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 첫 권이 바로 '스완의 사랑'이다.
첫 권은 모두 마르셀이라는 작가 자신이 화자로 되어 있는 전 7권의 소설 중에 유일하게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되어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스완이라는 사람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롤 모델이라고 봐도 무방한 인물로서,
작가 자신처럼 신흥 부르조아 출신이며 평생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고 예술과 사교 생활을 병행한
딜레탕트이자 한량이다.
당시 (20세기 초반) 프랑스 사회는 '벨 에포크(좋은 시절)'라는 말로 대변되는 유럽 문명의 중심지로서 부르조아 문화가 꽃피우던 시절이었으며, 동시에 아직은 부르조아가 앙시엥 레짐(구 체제)의 귀족 문화를 모방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유럽은 왕족과 귀족이 명맥을 유지하는 문화이다.)
그러한 귀족 중심의 고급 사교계를 드나들던 전형적인 딜레탕트ㅡ예술 애호가ㅡ 스완은 어느날
극장에서 친구로부터 오데뜨란 한 여인을 소개받는다.
이 여인은 첫눈에는 그에게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외모에 있어서나 분위기에 있어서나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초대에 의해 그녀가 자주 드나드는 작은 부르조아 살롱에 드나들면서 그는 오데뜨에게 점차 집착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그라는 사람이 세상에 대해 왕성한 호기심을 느끼는 사유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화자의 서술에 의해 지적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어디까지나 고급 사교계와 천박한 유흥가를 동시에 드나들 수 있는 양서류적인 기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완이 오데뜨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의 이런 기질 탓에 호의를 느낀 그곳 살롱의 분위기와, 우연히 그가 오데뜨에게서 발견한 심미적인 면모 때문이었다.
그는 오데뜨에게서 보티첼리의 그림 속에 나오는 여인 '제포라'의 면모를 발견한다.
또한 그곳 살롱에서 연주된 피아노 소나타가 우연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오데뜨를 그 곡과 결부지어 자신과의 관계를 축성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사랑은 장소와 분위기에 힘입어 생각지도 않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데뜨라는 여인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그녀는 흔히 남자들이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요염한 여자에 불과했다.
주위에 마치 성좌처럼 남자들을 포진시키고 동시다발적인 연애를 진행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고급 창녀와 같은 여인, 그것이 그녀가 가진 정체성이라는 것을
오직 스완만이 몰랐다.
그렇다고 스완이 순수하고 순진한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마음에 드는 대상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손에 넣고자 하는 남자였다는 점에서 오데뜨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스완이 사랑하는 방식은 오데뜨와 달랐다.
전술한 바와 같이 스완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 여자가 속한 모든 세계를 사랑하게 되며, 반대로
어떤 특정한 장소와 사물, 분위기 때문에 그것과 결부된 여자를 사랑하는 타입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 눈길이 가는 모든 것을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남자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소설은 이러한 스완의 행각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러니컬하게도 점차로 오데뜨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으로 전개된다.
스완의 사랑은 다름 아닌 '질투하는 남자'의 숙명에 다름 아니었다.
스완은 오데뜨의 행방을 찾아 밤거리를 배회하고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사랑은 열병을 앓듯이 깊어만 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스완의 사랑이 예민하고 치열한 그 만큼 진실은 불가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질투하는 남자의 숙명이다.
어느 순간 발해진 오데뜨의 눈짓이 자신이 아닌 누구를 향하는가, 그가 없는 순간 그녀의 집의 문을 노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등등의 의문은 스완으로 하여금 '기호 탐색자'의 면모를 갖추게 한다.
어느 순간 스완은 오데뜨가 다수의 애인을 거느린 정복할 수 없는 여인이자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사랑의 한 싸이클을 완성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타입도 아닌 여자에게 그토록 큰 홍역을 치르고,
죽어 버릴 생각까지 했으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몇 년을 허비 했다니 기가 막히는군!"
그렇게 탄식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소설이 말하는 것은 한낱 사랑의 헛됨이 아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삶의 헛된 순간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의 모든 순간은 '비의지적인' 뜻하지 않은 진리를 내장하고 있기에 의미로 가득차 있는 보물이다.
과거와 잃어버린 시간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시간의 작용에 의해 그것이 감춘 보물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알아채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통해 오데뜨라는 여자가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또는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인공 스완은 탄식하지만
이 소설의 숨은 화자인 마르셀의 시각을 통해 오데뜨가 가진 본질적인 존재 가치가 불후의 여인상으로 찬미되는 것이라고.
후일 프랑스의 철학자 질르 들뢰즈는 이 프루스트의 소설에 근거해 철학의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끊임없이 '기호'의 의미를 탐색하는 '질투하는 남자'의 이미지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떤 본질적인 동일성의 이미지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때 그 장소, 모종의 특별한 분위기,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기호의 효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찌기 내가 춤세계에 매력을 느낀 것도 생각컨대 스완의 사랑과 같은 효과에 혹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무도장의 독특한 분위기, 그곳을 둘러싼 독특한 군상들 틈에서 나는 나 자신의 오데뜨를 탐색하였던 것일까.
그러한 나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결코 흉작을 거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나 또한 스완처럼 탄식하는 날이 찾아왔다.
나는 더 이상 춤세계에서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는 여인을 찾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춤세계에서 만난 여인이란 '향락을 찾아 불로 뛰어드는 부나비'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검은 수트의 여인이 춤을 춘다.
플로어의 어둠이 짙어지며 강렬한 조명이 그녀를 감싸고
마치 어둠이 조금씩 먹어들 듯하다가 마침내 목 위로 그녀의 얼굴만을
동그랗게 남겨놓았다.
마치 절정을 헤매이듯 지긋이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은 그 얼굴 위로
빛은 빨려들듯 사라지고
곧 이어 흔적 없는 어둠의 흔적만이 남았다.
2015.
첫댓글
잃어버린 시간속에서도
얻은것이 있었겠지요
소중한 그 무엇 ᆢ
사랑의 화신이 되시길~
일찍 기침하셨습니다.
늘 일찍 일어납니다.
저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입니다.
컨디션 조절 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