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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 차별 없이
로마서 3장 21-24절 / 옥한흠 목사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22.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롬3:21-24 KJV)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 이야기를 할 때만 절대로 빠트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은 24절에 말씀이 나오지요. 그 말이 빠지면 그 본문말씀의 전부가 나사가 부속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라는 뜻 전혀 받을 가치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무조건 베푸시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말을 하나 또 붙입니다.
전적인 은혜라 믿는다.
그래서 전적인 은혜가 무엇이냐?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보태드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라고 하던 전적인 은혜라고 하든 값없이 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입체적으로 두 가지 22절 끝에 차별이 없다. 24절에 말씀입니다. 흔히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혼돈을 우리가 선택한 예쁜 마음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된다. 하는 말로 표현이 구원이라고 그러느냐 하고 여러분이 의심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곧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두 말씀을 같은 말로 모셔도 됩니다. 오늘은 구원이라는 말로 대신 하겠습니다.
첫째로 구원을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십시다.
아마 가장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본문 말씀이 12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성경이니 ➤로마서 10장11-13절 “11. 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12.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 위에 계신 같은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니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차별이 없다는데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세계의 산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은 전통적으로 선택받은 유대인이라 선택받지 못하고 우상 숭배하던 헬라인이나 하나님은 전혀 구별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설명합니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돼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주]가 되서 구원자도 하나입니다. 문명이 발달된 예수님 아닌 다른 분, 또 아주 무식하고 모든 사람에게 주께서 자비를 한 주님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차별화를 안 하십니다. 저를 부르는 분은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은혜는 꼭 같이 부요하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넘치게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주는 것이 아니고 어떤 나라는 하나님이 열을 주고 어떤 날은 다섯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똑같이 넘치도록 허락하신다고 그러므로 구원자도 한 분이요, 그 다음에 주시는 선물도 하나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방법도 사람 따라 한 가지 방법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부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것만이 우리에게 구원 문명국에는 어떤 다른 a라는 방법을 주시고 미개한 국가에는 b라고 하는 방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세계종교 회의를 주최하는 사람들의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를 하나 되는 운동을 하자] 기독교, 천주교, 불교, 회교, 심지어 어떤 코인들의 종교까지도 우리는 더 흡수해서 하나 됨을 세계 앞에 보이자 어느 종교든지 믿는 시기는 꼭 같은 하나님인데 단지 부르는 이름이 다를 뿐이라, 그리고 어느 종교든지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단지 궁극적인 종착점에 도달하는 다를 뿐이다. 기독교는 동으로 올라간다면 불교는 서로 올라가는 것 밖에 다른 것이 없다. 마지막에는 모든 종교는 하나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며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나라의 종 이루어 주시고 어떤 나라에는 구원받는 길을 b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차별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그 이름으로” 뭐 받는다. [구원 받는다.]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라는 걸 우리는 여러분 저나 여러분이나 한 가지 고백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근성이 이마 은근히 나는 다른 사람과 좀 다루기를 원하는 강한 욕망이 존재로 내가 좀 그렇게까지는 안 된다 할지라도 있다 하는 그런 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는 응원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도 1등실 무슨 국가로부터 혜택을 하는 이런 말들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것을 추구하는 어떤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사지 아니한 꿈을 고가로 사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만 생겨도 아니면 인기가 조금 많이 있어도 공부를 안 보다도 우리는 벌써 특별 의식 아니면 차별 의식을 마음속에 가지고 은근히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하려고 합니다. 강남에 살고 있다는 이것 자체까지도 우리에게는 밑바닥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하고 생각을 갖도록 하는 이상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이 왕왕이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람과 좀 구별된다 하는 이것이 다 있습니다.
이건 차별로 식으로 특별히 높았던 사람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바리새교인들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대하는 그 밑바닥에는 예수님의 교리가 그들이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하나 잔기나 괴리가 먼저 우선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말의 다윗의 교인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우리를 세리와 천지와 동등하게 대하느냐?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세리가 지금 받는 모든 그 당시에 세리가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리가 철저하게 세속화된 속물이었다고 한다면 바리새교인들은 타협도 하지 아니하는 경건 파였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누가복음 18장11-14절에 가면 그 우연히 바리새인은 세리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이 세리와 나란히 같은 좌석에서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하면 바리새교인이라고 특별하게 되어가지 아니하셨고 세리라고 태어나지 아니하셨고 그 기도를 하나님은 다 들으셨는데 오히려 선한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더 잘 들으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차별 의식이 하나님이 차별하지 않는 그 놀라운 진리를 감격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차라리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특별히 생각해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면 아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각자가 한번 바울은 차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이 은혜를 정상적으로 어떤 면에는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을 형제들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는 바람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부르시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약 70%가 노예출신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감안할 때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노예들의 가슴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우리도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 이 때문에 가난한 고통을 이길 수가 있어 구원을 주신 이것 때문에 나는 그 더러운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이 놀라는 은혜를 남들이 보이도록 감격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야 될 꼭 알아두세요. 하나님은 사람을 옷을 입혀 놓고 보시지 않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모두가 옷을 벗고 있습니다. 거기에 신분이 어디 있으며 거기에 잘 살고 못난 사람이 어디 있나요? 똑같은 인간 꼭 같은 육체를 가진 연약한 존재뿐입니다. 그러나 옷을 입혀 놓고 보지 않습니다. 똑같이 벗은 사람들로 동등하게 보시고 우리를 구원할 때문에 나 같은 죄인도 아무것도 아닌 나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이 되어 간단해서 이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은혜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처럼 나와서 오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은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를 주셨다.
유대인들이 까닭 없이 예수님을 미워했다. 하는 말은 아무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어떻게 보면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돈 없는 자도나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저절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하나님 앞에 생각하지 말고 빈손 들고 나오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값없이 너희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빈손 들고 나오라 하는 말씀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문제의 내용을 바꾸어 가지고 한번 질문을 각자에게 해 자기에게 자기가 질문하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신다면 하나님이 무슨 대가를 요구하실까?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실까? 분명히 알아두세요.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할 수 있는 대가라면 하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천성이 어떤 문을 통과할 때 천사가 무엇을 나와서 내놓으라고 한다면 아마 틀림을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 사람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의롭지 아니하면 어떻게 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과 마주보는 생활하실 것이고 거룩한데 우리가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있고 천성에 들어가기 위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히 요구하는 대가가 있다면 우리가 있으니 내놓을 것이 있나요? 한때 양심을 속이지 아니하고 양심껏 무엇을 한 것을 기억할까요?
더 나는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특별히 기억하고 우리는 비자를 만들까요? 여러분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도 정의감이 강하다는 사실을 들고는 모르지요? 행여나 하나님이 통과시킬지 모르니까 한번 기록해 봅시다. 하여튼 하나님 앞에 3년 전에 내가 가난한 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못 견뎌서 내가 욕을 퍼부었으면 좋겠는데 잠깐 참았나요? 그래서 나중에는 서로 사랑으로 화목한 일이네 하여튼 무엇이든지 울었다는 것은 다 적어보자고요?
한번 따져 보고 대답할까요? 그것이 썩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굉장히 어려운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트를 내는 감적으로 끝이 있는지 한번 적어 보자고요. 아무것도 적어서 들고 나간다고 해도 죄가 있지요. 태양 앞에 촛불이라니까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태양신으로 오신 하나님 태양으로 들고 가서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의로움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에게는 전혀 내놓을 것이 없는 줄 아시고 무조건 누구에게나 값없이 오라고 합니다. 아멘입니까? 내놓을 거 없어도 돼요. 내려오는 거예요. 의로움이 없어도 돼요. 그대로 오는 거예요.
여러분 옛날에 주일학교에서들은 예화가 생각납니다. 어떤 화가가 지나가다가 보니까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길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길을 쓸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너무 참 무엇인가 예술적인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모자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옷을 입고 빗자루를 들고 쓰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 화가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 오늘 몇 시에 내 화실로 오십시오. 그래서 몇 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길을 쓸던 사람이 가만히 생각하니 야 그래서 유명한 사람인데 만나려면 무엇인가 좀 내가 준비를 해가지고 가야지 하고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 깨끗이 하고 옷을 완전히 갈아입고 빗자루를 던져 버리고 그 다음에 새 모자 쓰고 찾아갔습니다. 화가가 보니 영 세 사람이 돼서 왔단 말입니다. “당신이 누구요?” 제가 아침에 결실된 사람입니다. “여보! 당신에게 내가 부탁한 것은 그대로 오라고 그랬지 누가 그렇게 깔끔하게 꾸며 가지고 오라고 그랬나요?” 하고는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되 값없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서 주일학교에서 흔히 많이 사용하는 예화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그대로 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지 않고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에 나만이 하는 어떤 특정한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가 내 구원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대부분이 보면 남편도 모르는 죄, 부인도 모르는 죄, 그러면서도 스스로 고민을 자주 하는 죄, 나만이 알고 하나님만이 아는 죄, 이런 특정한 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 오늘날 같이 도덕적으로 없이 부패한 사회에서 자라나는 애들 나중에 아마 성인이 되면 자기만이 아는 어떤 죄 때문에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죄가 있어요. 이런 죄의 특정적인 죄가 있어도 이 죄가 나의 구원을 막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나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죄가 있는 사람은 제어시킨다면 벌써 갚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특정한 죄도 나를 구원시키는데 방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고 잊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죄의 양도 나의 구원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죄에 대해서는 10번이 아니라 20번이 아니라 100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이런 분이라도 그만 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의 양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자주 짓는 죄를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 참 용서받을 수 있느냐?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것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다 처리하시고 무조건 오라고 합니다.
구원 받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러므로 내 죄가 아무리 죄가 많이 있어도 죄의 양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것을 방해받지는 아니합니다. 값없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값없이 주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소극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요?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원해서 해주시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값도 받지 않고요. 여러분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스케줄을 누가 짜셨습니까? 내가 짜나요? 아니요. 하나님이 짜셨어요. 창세전부터요, 나를 구원시키기 위한 모든 스케줄을 짜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복덕방에 가서 글을 몇 자만 써도 수고비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수업이 전혀 내지를 않았는데 하나님이 스스로 나의 구원 스케줄을 다 짜 두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환경을 누가 다 만들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다 만들어 주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내 마음이 열려서 구원받게 되도록 하나님이 모든 청사진을 다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한 푼도 받지 않고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자매들이 세례를 받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믿음 때문에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흔히들 보면 믿음 자체도 내가 믿기를 원해서 믿었다고 하는 자기 어떤 공로의식이 도사리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믿은 것은 내가 믿은 것 아니며 그러므로 믿음은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믿음도 누가 주는 선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물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고백했지요.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기까지 마음 밑바닥을 굳은 것을 부드럽게 만드시고 사랑하는 마음을 죽여주시고 하나님을 모르겠다고 버티는 그 교만한 자세를 꺾어 주시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려서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드신 손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도대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내놓으신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웃음 대가로 하나님께 지불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이에요.
끝으로 제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조그마한 농촌교회 30-40명 모이는 교회 주일날 외삼촌 되시는 분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인데도 우리가 가난한데도 아무 신분도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처럼 생각하시고 놀라운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고 설교하자 설교를 듣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너무 좋아서 설교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살려주어 감사하다고 일어나서 둥실 둥실 춤을 추는 걸 보았습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너무너무 좋아서 춤추는 우리는 이 정도도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흉내를 보낼 만큼 내 마음이 감격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리 하나님이 값없이 주셨다고 해도 평범하게 듣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큰 문제예요.
세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왜 그렇게 감각이 없는지 첫째는 잘 몰라서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만 상당수가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시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요? 부탁드립니다. 성경을 좀 부지런히 보시고 말씀을 좀 연구하시고 빨리빨리 깨달으세요. 그래서 이 놀라운 구원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 여러분이 하루빨리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고맙게 들려지지를 않아서 그저 평범한 이야기로 들려서 감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마음에 어두움이 깔려 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믿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빛이 들어가지 못한 어두움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 심각한 병이 있습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상당수 예수님 오래 믿으신 분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런 병에 걸려 있을 줄 압니다. 너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귀가 아프도록 없기 때문에 이제 감각이 없어 졌어 이제는 무슨 말을 들어도 마음의 감격이 없어 바로 이것이 에이즈라는 병입니다. 무슨 처방을 해도 면역이 되어간 듣지를 않는 거야 이것은 병중의 병입니다.
요사이 흔히들 의학자들이 말하듯이 천벌이라고 그러지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세속화되었는지 하나님께서 값없이 차별 없이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는데 이것이 고마운 줄 모르고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무뎌 지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권태로워질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듣는 마음 이것만큼 병든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하루 빨리 고쳐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차별 없이 값없이 주시는 이 은혜의 사로잡히는 감격이 우리 가슴을 부득이 채우면요.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압니까? 우리를 우리의 삶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막강한 능력으로 변합니다. 수력이 어떻게 전력으로 변하는지 우리는 잘합니다. 수력이 어떻게 전력으로 변하는지 잘합니다. 주님이 거저 주신이 구원의 은혜에 강력한 눈물이 얼마만큼 우리의 어두운 삶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횃불로 변하는지 우리는 체험한 사람만이 압니다.
어제 저는 우리 교회당에서 돕는다고 하기보다는 우리가 기도해주고 후원해주는 선교사가 보내준 달력 한 장을 저는 유심히 보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련이 있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을 배경으로 해서 만든 달력입니다. 그 달력 앞에는 올망졸망하게 7남매가 식탁에 둘러앉아 초라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자리 하나가 비어 있습니다. 그 그림의 사진 그림이 아니고 사진의 제목을 보니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석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뒤면 넘겨보니까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두 번째 투옥된 아빠가 돌아오는 날이 1월12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계속해서 읽어보니 아빠인 에드워드 씨가 남몰래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가슴에 넣고 소련 어느 도시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 서적을 전해 주다가 붙잡힌 것입니다. 끝날 아침 수사관들은 반나절 동안 가택 수색을 하고 있고 엄마와 아이들은 붙잡혀온 아버지 옆에 둘러서서 수사관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물을 삼키며 애를 쓰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눈물을 보이는 것은 비웃음을 당할 위험이 있으니 우리는 절대 울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주 소련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아픈 이별을 당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는지 저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그 어린애들이 아빠가 없는 자리에서 초라한 음식을 먹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저 자신이 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저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무서운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아니하면 견디지 못하는 그 마음의 불길 너무나 당연하고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알면서도 성경을 품에 넣고 다니다가 붙들려가는 그 마음속에 능력 감정 이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만약에 그들이 내 옆에 있다면 에드워드가 내 옆에 있다면 지금도의 부인이 내 옆에 있다면 아버지가 참여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눈물을 삼키며 참고 인내하는 12살짜리 어린 아들이요. 나는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대응할 수가 있느냐? 아마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실 수 가봅시다. 영원한 나라를 영원한 나라의 영생을 나에게 주셨는데 그 은혜 너무 감격해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기를 원하며 할 수만 있으면 나의 몸을 주님께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분명히 대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데 왜 더 감사를 해야 될 우리의 입에 감사가 싫어지고 더 만족하고 더 하나님의 은혜에 내 마음이 녹아 주님의 영광 위해서 생명이라도 바쳐야 될 우리들인데 오히려 더 세속화 되어서 구원을 주셨다는 말은 들어도 만만한 움직이지 아니하는 이와 같은 삭막한 신앙생활을 왜 우리는 하고 있을까 저 자신이 느끼는 마음에 갇혀있고 이것 때문에 저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떤 위대한 선배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이렇게 평안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은혜인 줄 모르며 감격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를 시도한다면 주여 차라리 핍박을 주소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저는 바랍니다. 핍박을 당하기 전에 평안할 때 값없이 차별 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 모두가 감격하고 그 앞에서 내 모든 마음이 눈높이고 온전히 하나님의 그 사랑의 흠뻑 젖어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고 아껴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님 위해서는 주님의 목적대로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겠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우리를 사로잡기만 한다면 가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핍박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보다도 못 살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늘 뭐 생각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열정이 우리 안에서 솟아날 것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이 놀라운 감격의 능력을 우리 모두가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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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