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3.25.PM 2시)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일도심심(一道甚深)/ 부처님의 경계심심(境界甚深)
화엄경 한단락 공부하겠다.
오늘도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아홉 번째 일도심심(一道甚深)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한 길인데 매우 깊다. 한 길로 매우 깊다.
9. 일도심심(一道甚深)
1) 문수보살이 현수보살에게 묻다
(가지가지로 다른 열 가지 일)
이시(爾時)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문현수보살언(問賢首菩薩言)하사대 불자(佛子)야 제불세존(諸佛世尊)이 유이일도(唯以一道)로 이득출리( 而得出離)어시늘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현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오직 한 가지 길로 벗어남을 얻으셨거늘”
오직 한 가지 길로 벗어남을 얻으셨거늘
운하금견일체불토(云何今見一切佛土)의 소유중사(所有衆事)가 종종부동(種種不同)이니잇고 소위세계(所謂世界)와 중생계(衆生界)와 설법(說法)과 조복(調伏)과 수량(壽量)과 광명(光明)과 신통(神通)과 중회(衆會)와 교의(敎儀)와 법주(法住)가 각유차별(各有差別)이니 무유불구일체불법(無有不具一切佛法)하고 이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而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니이다
“어찌하여 일체 부처님 국토에 있는 여러 가지 일이 가지가지로 같지 아니함을 보게 됩니까? 이른바 세계와 중생계와 설법과 조복(調伏)과 수명과 광명과 신통과 대중이 모임과 가르치는 의식과 불법의 머무름이 각각 차별이 있습니다. 일체 불법을 갖추지 아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이가 없습니다.”
일체 불법을 갖추지 아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이가 없습니다.
제불세존은 오직 일도(一道)로써 생사를 벗어났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갖가지로 같지 아니한가. 세계와 중생계와 설법과 조복(調伏)과 수명과 광명 등등의 차별이 있는가?
2) 현수(賢首)보살의 답
현수보살의 답이다.
가.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
시(時)에 현수보살(賢首菩薩)이 이송답왈(以頌答曰)
그때에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문수법상이(文殊法常爾)하야 법왕유일법(法王唯一法)이니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이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니라
문수보살이여, 법이 항상 그러해서
법왕께서는 오직 한 법이시니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느니라.
문수법상이(文殊法常爾)하야 법왕유일법(法王唯一法)이니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이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일도(一道)로,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고 하는 말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주 유명한 글로 되어 있다. 원효스님께서 시내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래 불렀다고 전해지는 무애가(無礙哥)의 무애는 바로 이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의 불교는 신라시대에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국민들에게 화엄경을 가르쳐서 그 토대를 삼았다. 의상스님은 화엄 법성게를 지어 이생을 마지막으로 하직하는 사람들이 듣고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49재의 마지막 시간에 법성도(法性圖)를 돌면서 이별의 노래로 들려드리도록 하였다. 원효스님은 경남 천성산 화엄벌에서 일천 명의 수행자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일천 명의 성인을 배출하였다고 하여 천성산(千聖山)이라고 부른다. 또 한국의 불교도들은 일 년을 맞이하는 정월 초에 화엄성중 기도를 올려서 한 해를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한국의 불교는 오로지 화엄불교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 화엄불교가 부활하여 화쟁(和諍)과 원융과 조화와 소통으로 세상이 다시 평화로워야 할 것이다.
제가 이런 말을 달았다.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우리 모두가 한 마음 가지고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 되고, 한길로 생사에서 벗어나는 삶을 이런 데서 배워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일체제불신(一切諸佛身)이 유시일법신(唯是一法身)이며
일심일지혜(一心一智慧)니 역무외역연(力無畏亦然)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
오직 한 법신(法身)이시며
한 마음 한 지혜이시니
힘과 두려움 없음도 또한 그러하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
부처님이 얼마나 많으며, 부처님의 몸은 또 얼마나 여러 가지인가? 그런데
오직 한 법신(法身)이시며
오직 한 법신인데 거기에서 부처님 따라서 여러 가지 몸이 있고, 또 법신 보신 화신이니 무슨 열 가지 몸이니 등등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편으로 표현을 한다. 그런데 결국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 오직 한 법신이다’ 이것은 꼭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내용이다. 오직 한 법신이다.
한 마음 한 지혜이시니
한 마음이고 한 지혜다. 한 법신이고 한 마음이고 한 지혜다.
힘과 두려움 없음도 또한 그러하니라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도 또한 그러하다. 전부가 한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고, 한 지혜, 한 법신, 일심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 화엄경을 ‘일심사상(一心思想)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도 있고, 마음 하나를 가지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 이렇게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엄경 전체의 뜻은 사실은 ‘깨달음에 대한 내용’과 마지막에는 ‘보살행을 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하자, 꽃처럼 아름답게 꾸미자’ 라고 하는 정신이 바로 화엄경의 올바른 해석이다, 저는 그렇게 본다.
그래서 보살사상(菩薩思想)을 제일 우선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이, 여기 경전에 있는 것과 같이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이 오직 한 법신(法身)이다. 한 마음 한 지혜다. 그리고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도 또한 그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본다.
나. 근기를 따라 보는 것이 다르다
여본취보리(如本趣菩提)에 소유회향심(所有廻向心)하야
득여시찰토(得如是刹土)와 중회급설법(衆會及說法)이니라
처음 보리에 나아갈 적에
가진 바 회향심(廻向心)과 같이 해서
이와 같은 세계와
대중과 설법을 얻느니라.
처음 보리에 나아갈 적에
깨달음에 나아갈 때에
가진 바 회향심(廻向心)과 같이 해서
중생들에게 회향하기 위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와
대중과 설법을 얻느니라
일체제불찰(一切諸佛刹)이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이나
수중생행이(隨衆生行異)하야 여시견부동(如是見不同)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장엄이 모두 원만하나
중생들의 행이 다름을 따라서
이와 같이 보는 것도 같지 않도다.
중생들의 행이 모두 다르니까 수중생행이(隨衆生行異)하야 중생의 행이 다름을 따라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장엄이 모두 원만하지만 그러나
중생들의 행이 다르니까
중생들의 업이 다르니까, 중생들의 업이 다르고, 업이 다르므로 행이 다르다.
이와 같이 보는 것도 같지 않도다
우리가 화엄경을 같이 공부하지만 중생들의 성향과 취향, 안목, 견해, 업 이런 것이 거기에 밑바탕이 되어있어서 전부 달리 이해하고 다르게 본다. 좋아하는 구절도 각각 다르다. 사람마다 다 좋아하는 구절이 다르다. ‘누구는 이 구절을 좋아하는데 누구는 이러한 구절을 좋아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다. 부연하여 해석하다
불찰여불신(佛刹與佛身)과 중회급언설(衆會及言說)이여
여시제불법(如是諸佛法)을 중생막능견(衆生莫能見)이니라
부처님 세계와 부처님 몸과
대중의 모임과 그 말씀이여
이와 같은 모든 불법을
중생들이 능히 볼 수 없도다.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 몸, 대중의 모임 이러한 것들이 화엄경에 얼마나 많이 소개되는가? 대중의 모임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중의 모임을 소개하고, 부처님 세계라든지 부처님의 몸도 그렇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불법을
중생들이 능히 볼 수 없도다
중생들은 업에 의해서 안목에 한계가 있고, 지혜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심이청정(其心已淸淨)하고 제원개구족(諸願皆具足)한
여시명달인(如是明達人)이라야 어차내능도(於此乃能覩)니라
그 마음이 이미 청정하고
모든 원(願)이 다 구족한
이와 같이 밝게 통달한 사람이라야
이것을 능히 보게 되리라.
일반 중생들은 능히 볼 수 없는 경계다.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몸, 대중의 모임, 화엄회상 대중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이는 대중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아니한 대중들도 무수히 많이 있다. 그러한 것을 알려면
그 마음이 이미 청정하고
모든 원(願)이 다 구족한
이와 같이 밝게 통달한 사람이라야
이것을 능히 보게 되리라
이렇게 경(經)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수중생심락(隨衆生心樂)과 급이업과력(及以業果力)하야
여시견차별(如是見差別)하니 차불위신고(此佛威神故)니라
중생들의 마음에 즐기는 것과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힘을 따라서
이와 같이 차별함을 보게 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이로다.
중생들의 마음에 즐기는 것과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힘을 따라서
이와 같이 차별함을 보게 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이로다
업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경전에, 제대로 된 경전이라면, 펼쳤다 하면 중생의 업에 대한 이야기, 중생업뿐만 아니라 업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여기도
중생들의 마음에 즐기는 것과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힘을 따라서
이와 같이 차별함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중생들이 각각 차별하게 살고 있다. 견해가 차별하다.
시내에 한 번 가보라. 많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는데 똑같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물어보면 각자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자기에게 잘 어울리고, 자기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입고 있는 것이다.
시골 시장에 가보면 아주 알록달록하고 별의별 색깔, 정말 줘도 갖지 않을 옷들인데도 그것이 또 잘 팔리는 이유가 있다. 다 업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저런 옷을 누가 입을까’ 싶은데도 그 옷을 사가는 사람들이 또 그렇게 많이 있다.
참 신기하다.
그래서 세상은 여러 가지로 장엄이 잘 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살아야 된다. 그러한 이치를 잘 이해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불찰무분별(佛刹無分別)이며 무증무유애(無憎無有愛)로대
단수중생심(但隨衆生心)하야 여시견유수(如是見有殊)니라
부처님의 세계는 차별이 없으며
미워함도 사랑함도 없으나
다만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
이와 같이 다름이 있음을 보도다.
부처님의 세계는 차별이 없다
한 마음의 세계는 차별이 없다.
미워함도 사랑함도 없다
아예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이 처음부터 싹수가 없다.
다만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
이와 같이 다름이 있음을 본다
전부가 중생 세계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세계로 돌아가야 그것이 완전한 답을 얻지,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부처님 마음으로 돌아가야지, 그렇지 않고는 각양각색의 차별한 세상에서 그러한 것을 우리가 겪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시어세계(以是於世界)에 소견각차별(所見各差別)이니
비일체여래(非一切如來) 대선지과구(大仙之過咎)니라
그러므로 온 세계에
보는 것이 각각 차별함이니
일체 여래와
대선(大仙)의 허물이 아니로다.
대선(大仙)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허물이 아니로다.
일체제세계(一切諸世界)에 소응수화자(所應受化者)는
상견인중웅(常見人中雄)하나니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니라
일체 모든 세계에
교화를 받을 사람은
사람 중의 영웅을 항상 보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도다.
일체 모든 세계에
교화를 받을 사람은
사람 중의 영웅을 항상 보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이 이와 같도다
제불법여시(諸佛法如是)로다. 그다음에 이 보살문명품이 한 번 더 남았는데 오늘 다 해버릴까 한다.
10. 부처님의 경계심심(境界甚深)
1) 여러 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묻다
(부처님의 열 가지 경계)
이시(爾時)에 제보살(諸菩薩)이 위문수사리보살언(謂文殊師利菩薩言)하사대 불자(佛子)야 아등소해(我等所解)를 각자설이(各自說已)로소니 유원인자(唯願仁者)는 이묘변재(以妙辯才)로연창여래(演暢如來)의 소유경계(所有境界)하소서
그때에 모든 보살들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불자여, 우리들이 아는 바를 각자 말씀드렸사오니 오직 원컨대 어진 이께서는 미묘한 변재로 여래가 소유하신 경계를 말씀하여 주소서.”
그동안에 문수보살이 여러 각각 다른 보살에게 묻고 그 각각 다른 보살이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제는 여러 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묻고 문수보살이 마지막에 대답을 한다.
어진 이께서는 미묘한 변재로 여래가 소유하신 경계를 말씀하여주소서
여래가 소유하신 경계, 그랬다.
하등(何等)이 시불경계(是佛境界)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인(是佛境界因)이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도(是佛境界度)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입(是佛境界入)이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지(是佛境界智)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법(是佛境界法)이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설(是佛境界說)이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지(是佛境界知)며 하등(何等)이 불경계증(佛境界證)이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현(是佛境界現)이며 하등(何等)이 시불경계광(是佛境界廣)이니잇고
“어떤 것이 부처님의 경계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인(因)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제도함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에 들어감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지혜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법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말씀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앎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증득함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나타남이며, 어떤 것이 부처님 경계의 넓음입니까?”
이렇게 열 가지를 죽 나열해서 물었다. 그래서 이제 문수보살이 대답하는 것이다.
2) 문수보살의 답
가. 여래 경계의 광대함
시(時)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이송답왈(以頌答曰)
그때에 문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여래심경계(如來深境界)여 기량등허공(其量等虛空)하시니
일체중생입(一切衆生入)호대 이실무소입(而實無所入)이니라
여래의 깊은 경계여
그 양(量)이 허공과 같으시니
모든 중생이 다 들어가되
실은 들어간 것이 없도다.
아주 미묘한 설법이다.
여래의 깊은 경계여
그 양(量)이 허공과 같으시니
허공, 얼마나 허공이 넓은가. 한계가 없다. 허공은 끝이 없다.
모든 중생이 다 들어가되
실은 들어간 것이 없도다
우리 모두가 허공에 이미 들어가 있다. 다 들어가 있다.
나. 억겁 불가설
여래심경계(如來深境界)의 소유승묘인(所有勝妙因)은
억겁상선설(億劫常宣說)하야도 역부불능진(亦復不能盡)이니라
여래의 깊은 경계의
수승하고 미묘한 원인은
억 겁 동안 항상 연설하여도
또한 능히 다할 수 없도다.
여래의 깊은 경계를 억 겁 동안 연설한다 하더라도 능히 다할 수 없다. 다른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설명해달라고 하는데 문수가 제일 지혜가 뛰어나서 잘 안다고 하지만 어찌 여래의 경계를 다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억 겁 동안 항상 연설하여도
능히 다할 수가 없다
다. 부처님 경계의 제도
수기심지혜(隨其心智慧)하야 유진함령익(誘進咸令益)케하시니
여시도중생(如是度衆生)이 제불지경계(諸佛之境界)니라
그 마음과 지혜를 따라서
나아가기를 권해서 다 이익하게 하시니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로다.
그 마음과 지혜를 따라서
나아가기를 권해서 다 이익하게 하시니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로다
라. 부처님 경계가 세간에 들어감
세간제국토(世間諸國土)에 일체개수입(一切皆隨入)하사대
지신무유색(智身無有色)하시니 비피소능견(非彼所能見)이니라
세간의 모든 국토에
일체를 다 따라 들어가지만
지혜의 몸은 색상이 없으시니
저 세간들이 능히 볼 수 없도다.
세간의 모든 국토에
일체를 다 따라 들어가지만
지혜의 몸은 색상이 없으시니
형상이 없고 색상이 없기 때문에
저 세간들이 능히 볼 수 없도다
색상이 있고 형상이 있으면 다 본다. 그것이 없는 까닭에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속에 다 들어간다.
마. 부처님의 지혜는 허공과 같다
제불지자재(諸佛智自在)하사 삼세무소애(三世無所礙)하시니
여시혜경계(如是慧境界)가 평등여허공(平等如虛空)이니라
모든 부처님은 지혜가 자재하사
삼세에 걸림이 없으시니
이와 같은 지혜의 경계가
평등하여 허공과 같도다.
허공과 같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 않는가. 마음의 세계는 허공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사실 마음의 크기와 허공의 크기를 비교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면, 그야말로 허공은 큰 바다의 물거품 하나와 같다고 하였다.
바다는 마음이고, 물거품은 허공과 같다. 그렇게까지 설명한 경전도 있다.
바. 일체 경계를 다 안다
법계중생계(法界衆生界)가 구경무차별(究竟無差別)을
일체실료지(一切悉了知)하시니 차시여래경(此是如來境)이니라
법계와 중생의 세계가
구경에 차별이 없음을
일체를 다 밝게 아시니
이것이 여래의 경계로다.
법계와 중생의 세계가
구경에 차별이 없음을
일체를 다 밝게 아시니
이것이 여래의 경계로다
여래의 경계는 법계, 중생세계, 그리고 허공계와 동일하게 보는 것, 그것이 여래의 경계다.
사. 모든 음성을 다 안다
일체세계중(一切世界中)에 소유제음성(所有諸音聲)을
불지개수료(佛智皆隨了)하사대 역무유분별(亦無有分別)이니라
일체 세계 가운데에
있는 바의 모든 음성을
부처님의 지혜로 다 따라 아시나
또한 분별이 없도다.
일체 세계 가운데에
있는 바의 모든 음성을
부처님의 지혜로 다 따라 아시나
또한 분별이 없도다
아. 식(識)으로써 알 수 없다
비식소능식(非識所能識)이며 역비심경계(亦非心境界)라
기성본청정(其性本淸淨)을 개시제군생(開示諸群生)이시니라
식(識)으로써 알 바가 아니며
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니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을
모든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도다.
‘비식소능식(非識所能識)이며 역비심경계(亦非心境界)라’
이것도 화엄경에서 유명한 말이다.
앞에 나온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도 유명한 말이었다.
식으로써 능히 알 바가 아니다[非識所能識]. 알 식(識)자가 다섯자 중에 두 자나 들어 있다.
식(識)으로써 알 바가 아니며
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니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을
모든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도다
의식 가지고, 알음알이 가지고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마음의 경계도 아니다
그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을
텅 비어 청정한 것을
모든 중생에게 열어 보이시도다
자. 업도 번뇌도 아니다
비업비번뇌(非業非煩惱)며 무물무주처(無物無住處)며
무조무소행(無照無所行)일새 평등행세간(平等行世間)이시니라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며
사물도 없고 머물 곳도 없으며
비춤도 없고 행할 곳도 없어서
평등하게 세간에 행하도다.
부처님의 경계는 업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번뇌로써 나타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업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며
사물도 아니다 그래서
사물도 없고 머물 곳도 없으며
비춤도 없고 행할 곳도 없어서
평등하게 세간에 행하도다
차. 한순간에 다 안다
일체중생심(一切衆生心)이 보재삼세중(普在三世中)이어늘
여래어일념(如來於一念)에 일체실명달(一切悉明達)이시니라
일체중생들의 마음이
삼세에 널리 있거늘
여래는 한 순간에
일체를 다 밝게 통달하도다.
이것이 마지막 말씀이다.
일체중생들의 마음이
삼세에 널리 있거늘
보재삼세중(普在三世中)이라, 일체 중생들의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있다.
여래는 한 순간에
일체를 다 밝게 통달하도다
중생이 아무리 많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가득히 마음을 쓰고 산다 하더라도, 여래는 그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안다, 이런 표현이다.
여기까지가 열 개의 문제에 대한 열 개의 해석을 다 살펴보았고 그다음엔 총결이다. 전체를 결론 짓는 내용이다.
11. 총결(總結)
1) 사바세계의 온갖 차별
이시차사바세계중(爾時此娑婆世界中)에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소유법차별(所有法差別)과 업차별(業差別)과 세간차별(世間差別)과 신차별(身差別)과 근차별(根差別)과 수생차별(受生差別)과 지계과차별(持戒果差別)과 범계과차별(犯戒果差別)과 국토과차별(國土果差別)을 이불신력(以佛神力)으로 실개명현(悉皆明現)하니라
그때에 이 사바세계 가운데 일체중생의 법(法)의 차별과 업(業)의 차별과 세간의 차별과 몸의 차별과 근(根)의 차별과 생(生)을 받는 차별과 계(戒)를 지니는 과보(果報)의 차별과 계를 범하는 과보의 차별과 국토의 과보 차별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환하게 나타났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부처님의 마음에 그러한 차별들이 다 나타나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법계의 온갖 차별
여시동방백천억나유타(如是東方百千億那由他)와 무수무량무변무등(無數無量無邊無等)과 불가수불가칭불가사불가량불가설(不可數不可稱不可思不可量不可說)인 진법계허공계일체세계중(盡法界虛空界一切世界中)에 소유중생(所有衆生)의 법차별(法差別)과 내지국토과차별(乃至國土果差別)을 실이불신력고(悉以佛神力故)로 분명현현(分明顯現)하시니 남서북방(南西北方)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니라
이와 같이 동방의 백 천억 나유타와 수없고, 한량없고, 끝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온 법계와 허공계의 일체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의 법의 차별과 내지 국토의 과보 차별을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았습니다.
한 가지 법문 내용이 끝나면 으레 이렇게 ‘어느 한곳에만 해당되는 법문이 아니다, 온 우주 법계 모든 곳에 있는 중생들에게 다 공히 해당되는 것이다’ 하는 보편성과 평등성을 이야기한다.
다시 한 번 읽겠다.
이와 같이 동방의 백 천억 나유타와 수없고, 한량없고, 끝없고, 같을 이 없고, 셀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온 법계와 허공계의 일체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의 법의 차별과 내지 국토의 과보 차별을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었습니다
다 드러나 있다. 현재 그렇다. 현재 다 드러나 있다.
아무리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다. 저절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았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사바세계의 온갖 차별을 그와 같이 나타내듯이 온 법계와 허공계의 일체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의 법의 차별과 내지 국토의 과보 차별을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라고 하는 내용이다.
여기까지 보살문명품이 이제 끝났고, 권수로 화엄경 81권 중에서 제13권이 끝났다.
다음 월요일에는 14권에 들어갈 차례다.
그동안 13권까지 잘 들어 주셔서 고맙다.
14권에서 또 함께 하도록 부탁드린다.
*
오신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아, 조의숙 보살님.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_()()()_ 지난 시간부터 (2월 11일 목요일) 큰스님께선 이제 오후 2시에 동참하시는 분들의 이름은 안부르기로 하셨는데... 오늘 실시간 법문때 또한 번 설명을 하시고, 그렇지만 '내가 다시보기를 할 때, 거기 올린 사람들의 글을 다 읽는다' 하시네요. 이름을 불리울 때 우리가 느끼는 위로와 온기를 잘 알고 계시나 보다...하는 생각^^ 이번 법문녹취 마지막에 조의숙보살님의 이름을 부르시고 나서 목이 메이신 순간이 있었어요. 누구든 어느 때, 큰스님의 음성으로 이름을 불리우고 따뜻하게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기 때문에...이 다음의 저를 위해 .. 그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보살문명품을 60화엄경에서는 보살명난품(菩薩明難品)이라고도 하고 믿음을 성취하는데 방해가 되는 의심, 어려움에 대해서 밝히고 있기 때문에 난(難)자를 쓴 것이다'....라고 하네요. 명난품의 구절들을 인용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어요. 부처님은 몇 번이고 반복반복하며 친절하게 일러주시네요.
두 권째 읽는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에서는 딱 잘라 '원하는 것을 얻고자 실천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용기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던데....^^
모든 선지식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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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불법을 갖추지 아니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이가 없다.
중생들의 마음에 즐기는 것과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힘을 따라서
이와 같이 차별함을 보게 되나니 이것은 부처님의 위신력이로다.
一切智智를 갖추신 부처님, 예경하옵고 찬탄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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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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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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