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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미륵전 (金山寺 彌勒殿국보 제62호) 그리고 경내전각과 보물들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1635년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모악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금산사는 국보 1점, 보물 10점이 있는 대사찰이다. 백제 법왕(599년) 원년에 창건된 왕의 자복사찰이며,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의 중창으로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신라 경덕왕과 왕실의 시주로 신라 오교(구산을 이르는 말)의 하나인 법상종의 꽃을 피운 이 대가람은 후 백제 시조인 견훤(甄萱)이 큰 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3개월 동안 갇혀있던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며, 최근 태조 왕건의 드라마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미륵전(彌勒殿/국보 제62호) 동양에서 최고로 큰 미륵불이 있는데 이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는 곳이 미륵전이다. 이 미륵전은 외형은 3층으로 되어 있지만 내부는 단층 구조로 된 한국에서 하나뿐인 건물로 국보 제62호이다. 그 안에는 동양최대의 실내 입불인 미륵존불(11.82m), 대모상보살(8.8m), 법화림보살(8.8m)이 있어 전북지역에서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석연대(보물 제23호) 높이가 167Cm, 둘레가 10m, 상대석의 지름이 190Cm 10각형으로 되어 있는 하대석의 1변의 길이가 1m가 되는 거대한 연화(연꽃)가 새겨진 석조물로 그 위에 꽃봉오리가 얹혀 져 있는 독특한 석연대이다.
대장전(보물 제827호) 금산사 대장전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기능은 없어지고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짓고, 1922년에 지금 있는 위치로 옮겼다. 지붕 위에 남아 있는 조각들은 목조탑이었을 때 흔적이며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우물천장이고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는 정교한 장식문을 조각해 놓았다.
나한전(羅漢殿) 이 전각에는 사성제(四聖제)를 깊히 깨달아 일체一切의 무명無明과 애착愛着을 여의고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에 이른 나한羅漢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금산사 나한전은 원래 적멸보궁 자리에 있었는데, 1996년 방등계단을 성역화聖域化할 때 현재의 자리로 새로 지어서 옮겼다. 전각내內에는 옮기기 이전의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불, 미륵보살,제화가라보살, 그리고 16나한상이 조상되어 있고, 1986년 대적광전 화재때 전소된 오백나한상은 1996년 새롭게 조상하여 봉안하였다.
조사전 (祖師殿)
범종각이 보이는 금산사 경내
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미륵전 정면 오른쪽 15m 지점에 특이한 다층탑이 있다. 3단으로 된 기단은 6각으로 되어 있고, 그 위로 11층의 옥개석이 쌓여 있는데 10층과 11층은 높지도 않지만 탑신이 생략된 채 옥개석만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형태가 기이하며, 어찌 그러한 탑을 쌓았는지 궁금하다. 기단부는 화강암이고 탑부분은 검은 색의 점판암으로 쌓은 것도 특이하다.
새로 지어진 7칸 건물의 금산사 대적광전
금산사 원통전
금산사 명부전과 지장보살 상
용명당龍溟堂 각민대사覺敏大師 가람伽藍 수호기守護記 용명당 각민대사 龍溟堂 覺敏大師는 1846년(朝鮮 憲宗12年) 8월 9일 전주에서 아버지 동래정씨 석로(東萊鄭氏 錫魯)와 어머니 청송심씨 (靑松沈氏)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 (瀛州 淨土寺) 지진장로(智眞長老)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조선말 국내외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재직하는 동안 안으로는 금산사의 가람수호를 위해서 그리고 밖으로는 호남 도승통(都僧統)을 이곳 금산사에 두어 호남지역 전체의 불교발전을 도모하는 등 그의 열과 성의를 다 하였다.
그 무렵 인근 지역에는 금광(金鑛)의 불법 채굴이 크게 유행하였다.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는 금산사 사리탑 아래까지 채광을 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이에 대사는 지방판서와 서울의 중앙내장원(中央內藏院)에 경내境內의 불법채광에 대한 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진정(陳情)을 올리는 등 혼신의 노력으로 가람(伽藍)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901년 12월 말에는 공식적으로 불법 채광이 금지되었다. 채광꾼들은 불법채광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광무6년)1월1일 금산사로 모여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채광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사내 대중승려들과 함께 이 소란과 채광을 막고 가람을 수호하려다가 채광꾼들의 손에 의하여 57세의 나이로 불의(不意)에 돌아가셨다. 용명대사龍溟大師의 이와 같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여 가람수호 정신의 사표師表로 삼고자 기록을 남긴다.
사진, 2010.01.17.일. tnsdudghldptj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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