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9 귀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8 - KBS에서 100분동안 <'대통령과의 대화'-질문있습니다> 방영
이명박 대통령은 9일 밤 5개 방송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질문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설명하려 애썼다. 이 대통령은 일관되게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임했으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국민들의 감성을 건드리며 진솔함을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다. 변명성이나 훈계성 답변도 적지 않아, 추석을 앞두고 ‘진솔한 소통’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는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다.
빨간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매고 나온 이 대통령은 경제위기나 남북문제 등 심각한 주제에 대한 질문에도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답변을 이어갔다.
이 대통령은 ‘초반 6개월 지지율이 10%대 초반까지 추락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첫 질문에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두른 감이 있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소홀한 점이 있다”고 자세를 낮추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경제 분야 질문에서 “제 자신도 실물경제를 해본 사람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은 임기 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 “경제가 파탄나는 일은 절대 없다”는 등의 단호한 표현과 경험담을 두루 섞어가며 거침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이 대통령은 또 “○○○씨가 고민이 많으시죠” 하는 식으로 일반 국민인 질문자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하려 했다. 초반에 농촌 살리기 질문 이후부터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큰 손짓과 함께 답변을 했다.
이 대통령은 비정규직 관련 질문에서 “기업이 좀더 넓은 마음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아량이 필요하다”면서도, ‘기륭전자 등 비정규직 분쟁 사업장의 사업주를 만날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2년, 3년째 그렇게 있는 것인데 3자 개입 없이 순수한 비정규직과 기업이 타협한다면 길이 있지 않을까 한다”며 직답을 피했다.
이 대통령은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대학생이 최근의 네티즌 수사 등을 비판하며 ‘제2의 촛불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자, 웃으면서 “아주 무섭습니다. 협박을 하시는데, (촛불집회에) 참여만 했지 주동자는 아니죠?”라고 되묻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 소통에 관한 물음에 “대통령이 그렇게 민심을 안 읽고 가만 있겠나”고 말한 뒤, “조계종 법전 스님이 청와대 불자회 회장인 강윤구 사회정책수석에게 ‘국민 통합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씀하셨다”면서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평소에 쓴소리를 많이 듣느냐’는 사회자 질문에 “집에 들어가면 집사람이 쓴소리 하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장관들이 다 고분고분할 줄 알았더니 불쑥불쑥 ‘그러면 안 된다. 이래야 한다’는 장관도 많다”며 웃음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청와대가 우려한 ‘돌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패널들의 질문은 깐깐했지만 예상된 범위를 넘지 않았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6개월을 자평해 보라는 질문에 이 대통령은 ‘국민의 평가와 다르지 않다’면서도 ‘뜻하지 않은 쇠고기 파동’을 주요한 이유로 들었다”며 “가장 큰 책임은 본인이 져야할 텐데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그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연극대사 같은 변명으로 일관한 ‘국민과의 대화’”라며 “질문자들은 어려운 경제상황을 토로하며 원인과 해법을 요구했으나, 대통령은 그동안 해왔던 변명을 판박이처럼 반복했다. 일방통행식 변명으로 어떻게 국민과 소통을 하겠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반면,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일 잘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신뢰감을 국민들에게 충분히 안겨주었다고 본다”면서 “특히 국민들과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대화함으로써 진정성이 전달되었을 것으로 본다”는 논평을 내놨다.
황준범 성연철 김태규 기자 jaybee@hani.co.kr /한겨레 2010-09-09 오후 07:44:38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309518.html
2007 - 2007 북경정율성작품 음악회 열림
- 명 칭 : 2007 북경정율성작품 음악회 - 한중 수교 15주년 공식 행사임- 일 시 : 2007년 9월 9일 (일) 19:30
- 장 소 : 북경 음악청- 주 최 : 중국문화부
- 후 원 : 광주광역시, 중국중앙방송국, 광주 MBC
- 주 관 : 세천문화 (북경) 유한회사
- 부 제 : 우정과 평화의 행진곡- 출 연 : 중국국립교향악단 / 지휘 - 샤오언
중국국립합창단 / 지휘 - 이언 리앙쿤 중국국립합창단 / 지휘 - 이언 리앙쿤 중국측 성악가 등
한국측 출연자 - 김선희(소프라노) 김미진(가야금)
http://www.gjimf.org/festival_02.html
북경 정율성음악제 참관記
그리운 나의 조국"…중국 밤 수놓다
中 대표 70인조 악단ㆍ군 장성 등 대거 참석 웅장한 선율 관객 휘어잡은 '열광의 도가니'
광주가 낳은 중국 3대 혁명음악가 정율성 선생. (1914-1976). 그의 음악세계와 중국 내 위상을 보여 준 '정율성 작품 음악회'가 9일 밤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날 음악회는 천안문 광장 인근 '베이징음악청'에서 1040개 객석이 모두 들어찬 가운데 '중국교향악단(지휘 소은)'의 웅장한 하모니가 서곡을 알렸다. 무대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70인조 악단과 40명의 합창단이 자리했으며, 객석에는 중국 당 원로와 군 장성들이 즐비했다. 일반 객석에는 머리가 히끗한 노 혁명가에서 청바지 차림의 발랄한 20대 여성까지 다양했다. 한ㆍ중 수교 15주년을 기념해 이한동 전 국무총리와 박광태 광주시장도 자리했다.첫 곡은 정율성 선생의 대표작 '팔로군행진곡'으로 스타카토의 경쾌한 리듬이 한순간에 객석을 후끈하게 만들었다. 팔로군행진곡은 일본군에 맞선 항일 부대의 용맹함을 묘사한 곡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의 공식 군가이자 아시안게임 오프닝곡으로 중국을 상징한다. 지난 2002년까지 영국 치푸더 관현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유럽 음악계에 명성을 날린 지휘자 소은의 지휘 아래 웅장한 선율이 콘서트 전용홀인 음악청을 휘감았다. 음악회를 개최한 중국 문화부는 축사를 통해 "이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은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이신 정율성 선생을 기리기 위함이다"면서 "정율성 선생은 한국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생애를 중국에서 보내면서 모든 재능을 중국 인민에게 바친 분이다"고 추앙했다. 교향악단 뒤편 대형 하프오르간에는 정율성의 젊은 시정을 그린 대형 초상화가 내걸렸으며, 음악청 벽면은 꽃으로 장식됐다. '팔로군 행진곡'에 이어 중국 운남성 소수민족인 백족(白族)의 설화를 뮤지컬로 만든 '망부운(望夫雲)'이 흘렀다. 망부운은 공주와 사냥꾼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1962년 초연됐다. 중국의 정상급 성악가의 이중창과 중국국가교향악단 합창단이 어우러지면서 사랑을 잃은 공주의 애상과 비애감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때로는 백족의 목가적인 평화로움과 공주의 아름다움이 맑은 클라리넷에 담기고, 경쾌한 백족의 흥과 멋이 바이올린의 군무로 연출됐다. 그러나 공주가 사랑하던 사냥꾼이 마법사에 걸려 숨지는 곡조에서는 번개가 치듯,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금관악기의 뇌성이 터졌다. 이날 음악회에 참석한 양회석 전남대 교수는 "정율성에게 백족은 어쩌면 백의민족이 아니었는가 싶다"면서 "아리랑의 선율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곡조는 처음 듣는 이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고 말했다.망부운에 이어 중국교향악단과 광주음악인과의 협연이 이어졌다. 1933년 셋째형을 따라 중국에 건너 온 뒤 한번도 가지 못했던 고향 땅 광주를 그리워하는 정율성 선생의 심정을 담은 '기억ㆍ고향(작곡 김현옥)'이 김미진씨의 가야금 연주로 전해졌다. 가야금 연주 후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때/ 매기 머리는 백발이 다되었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정율성 선생이 생전에 광주를 그리워하며 불렀던 옛 동요가 장내에 울렸다. 모두들 말없이 한국가사로 된 정율성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양림동 교회에서 배웠던 동요를 평생 잊지 않은 것이다. 50여 년을 중국에서 살았으면 우리 말조차 잊을 법한데 그는 10여 살 어린시절 배웠던 노래를 가사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객석에서 누군가 박수를 쳤다. 1000여 명의 관객들이 모두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음악회의 하이라이트는 중국의 원로 지휘자이자 현 중국음악가협회 주석인 옌양쿤의 지휘로 진행된 대합창. 정율성 선생의 대표작인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이 합창단에 의해 다시 울려퍼지자 중국 관객들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화답했다. 이어 중국인들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이 장내를 감쌌다.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의 모습을 그린 옌안송, 객석 앞줄에 자리한 노 혁명가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2시간에 걸친 음악회의 마지막은 정율성의 염원을 담은 '우의평화행진곡'. 마치 한ㆍ중 우호와 남ㆍ북간 냉전의 굴레를 벗고 동아시아 평화를 갈구하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정율성, 그는 우리에게 50년 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하지만 13억 중국 대륙의 심장, 베이징에는 아직도 음악 혼이 뜨겁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잊었지만, 그는 광주를 결코 잊지 않았다. 초가을 밤 북경 하늘에 울린 '옛날에 금잔디' .......
--------------------------------------------------------------------정율성 =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1933년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정율성은 1976년 타계하기까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옌안송' 등 가곡ㆍ가극ㆍ영화음악 분야에서 360여 곡에 달하는 작품을 남겨 중국 혁명음악의 대부로 칭송받고 있다.이건상 /전남일보 2007/09/13 18:07
http://blog.jnilbo.com/blog.php?Blog=gslee&query=post&menu=105&uid=745
- 역도 금메달(이민우) (올림픽복권)
2006 - 한국의 역도 선수, 씨름 선수 이민우(李民雨) 사망
이민우 [李民雨, 1965~2006.9.9]
역도·씨름 스타 이민우씨 간경화로 사망
1980년대 한국 역도의 간판이자 90년대 씨름스타였던 이민우(41)씨가 최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배우자 권문희씨는 이씨가 지병이던 간경화 때문에 지난 8일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다음 날 숨을 거뒀다고 12일 말했다.
이씨는 역도 최중량급 간판으로 활약하다가 갑자기 씨름으로 전향해 화제를 뿌린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울산고와 한국체대를 졸업한 이씨는 고교 1학년이던 1983년 전국신인역도선수권대회에서 인상 1위, 용상 2위, 합계 2위에 오르며 화려하게 플랫폼에 데뷔했다. 주니어로서 시니어 못지 않은 기량을 뽐냈던 그는 1984년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3관왕에 올라 한국 역도의 간판으로 자리를 잡았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두고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씨름으로 갑자기 종목을 바꿨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과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1987년 9월 삼익가구에 입단해 샅바를 잡은 이씨는 장사가 돼 꽃가마를 탄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1991년 7월 여수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 1품에 오르기도 했다.
1994년 11월 마산대회 출전을 마지막으로 모래판을 떠났다. 개인통산 전적은 221전 114승 107패로 승률은 51.6%였다.
이씨의 유족으로는 부인 권씨와 아들 상현(17)군이 있다.
장재은 기자 jangj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6-09-12 오전 10:52:05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156236.html
2004 - 삼성전자, 세계 최초 90나노공정 D램 양산
삼성전자가 90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 공정을 적용한 D램 양산에 들어갔다.양산에 들어가는 제품은 최첨단 300mm 라인에서 생산되는 512메가(Mb) DDR 400MHz와 DDR 333MHz 등으로 D램 부문에서 90나노 공정의 양산은 삼성전자가 처음이다.삼성전자는 ▲독자적인 트랜지스터 제작기술인 'RCAT (Recessed Channel Array Transistor) ▲데이터 저장 특성을 개선하기 위한 '고유전막 기술' ▲초미세 회로 구현을 위한 '불화아르곤(ArF) 광원' 등 핵심 기술이 적용됐다고 말했다.512메가 D램에 90나노 공정을 적용할 경우 기존(0.10미크론 공정)보다 생산성이 약 40%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라 제품의 원가경쟁력이 크게 올라갈 수 있다.이에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90나노 공정을 적용한 2기가 낸드형 플래시메모리도 양산하고 있다.시장조사기관 데이터퀘스트는 올 하반기부터 D램 시장이 점차256메가에서 512메가로 전환되고 있으며 내년 512Mb 제품이 130억달러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강호성기자 chaosing@inews24.com /아이뉴스24 2004년 09월 09일 오전 10:33
http://it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020200&g_serial=123468
[2000년대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 연혁]
2004-09-09 - 삼성전자, 세계최초 90나노미터 D램 양산
2004-08-19 - 삼성전자, 64M P램 세계 첫 개발
2001-02-07 - 세계최초 4기가 디램 반도체 제품기술 개발
2000-09-29 - 세계최고속 그래?메모리 출시
2000-05-27 - IMT-2000채용 16M S램 첫 개발
2000-01-04 - 288M D램 첫 개발
- 서태지 (공중전화 카드)
2000 - 서태지 4년7개월 만에 컴백 공연
4년 7개월만에 돌아온 서태지가 2000년 9월 9일 오후 8시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컴백 공연을 가졌다. 서태지 공연은 10대와 20대 팬들이 5000여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1시간10분 동안 펼쳐졌다.
경기장 앞 광장에선 초대권을 구하지 못한 팬들이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공연실황을 지켜보며 환호했다. 서태지는 빨강색 레게 머리에 힙합 패션 차림으로 등장, 미국 랩메틀 밴드 `림프 비즈킷`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하드코어 사운드를 들려줬다.
그는 새 앨범 타이틀곡 `울트라맨이야`를 비롯, `인터넷 전쟁` `대경성`같은 새 노래를 들려줬다. 공연전날 내놓은 새 앨범은 80여 만장이 팔려 서태지의 시들지 않은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조선
- 서울올림픽 스포츠과학 학술대회 기념 (1988.9.9. 발행)
1988 - 서울올림픽 스포츠과학 학술대회 개최(9~15일, 단국대학교/천안)
세계 스포츠과학 학술대회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거국적으로 이를 준비하려는 열기와 노력이 한창이던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이 해에 우리 대학교는 개교 이래 최대의 국제행사를 유치했다. 1897년 이래 올림픽 개최국은 스포츠와 관련된 범세계적 학술회의를 함께 마련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1914년 이래 IOC에 의해 이 학술회의는 올림픽의 공식행사로 경기 못지않게 중요한 행사로 인정됐다. 또한 아시안게임에도 이같은 관례는 그대로 적용되므로 우리나라는 1986년과 1988년, 두차례의 스포츠관련 학술회의를 준비해야 했다.경기종목을 유치하려는 단체나 대학은 많았지만 학술회의는 준비업무가 복잡하며, 범위가 방대하여 주관기관으로 나서길 꺼리는 형편이었다. 이런 현실을 앞에 둔 우리 대학은 두 개의 범세계적인 학술회의 주최를 자청하고 나섰다. 일차적으로는 천안시와 천안캠퍼스가 세계적인 행사를 감당할 역량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고, 둘째는 대회준비 과정에서 천안캠퍼스의 지속적인 성장을 지원할 시설확충을 앞당기면서 정부의 지원을 유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우리 대학은 조직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농학관에 국제회의장을 세우고, 학생회관과 체육관 공사를 서둘렀다.
열성적인 준비 끝에 1986년 9월 16일부터 3일간 천안캠퍼스에서 진행된 스포츠과학 학술대회는 유례없는 성황을 이뤘다. 세계 23개국에서 모인 체육관련 학자들 7백여명이 모여 각 분과와 주제별로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발표된 논문만 209편에 달했다. 2년 뒤인 1988년 9월 9일에서 15일까지 열린 학술대회에는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2천여명의 학자가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우리 대학교는 이들 학술회의를 통해 대학의 역량에 대한 자신감과 국제적 감각을 기르는 동시에 동구권 대학과의 교류를 시작할 수 있게됐다.
/단국대학교 www.dankook.ac.kr
- 中國(China), 1 圓(Yuan) (Banknote)
- 中國(China), 50 圓(Yuan) (Banknote)
1976 - 중국 초대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마오쩌둥[毛澤東, 1893.12.26~1976.9.9]
[어제의 오늘]1976년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사망
ㆍ청렴한 정치를 중시하던 애연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애연가로 알려져 있다. 죽기 2년 전인 81세까지 하루에 40개비에서 60개비쯤 피웠다고 한다. 그에 관한 글이나 사진을 보면 손엔 언제나 담배가 들려 있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현대 중국의 큰 그림을 그려나갔다. 18세 소년이 처음 담배를 피우던 즈음 중국은 신해혁명의 격랑에 있었고 소년은 혁명군 소속의 한 부대에서 사병으로 6개월을 보내면서 중국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했다.
28세, 흡연 10년차에 그는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가 열렸는데, 이때부터 공화국 건국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오쩌둥 외에는 단 1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혁명운동 중에 죽거나 변절했다고 한다. 그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농민이야말로 중국의 역사를 다시 쓸 주인공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31년, 그는 중국 공산당 주석으로 취임했고 34~35년 대장정을 거치면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보했다.그가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운 시기는 국공합작이 깨진 뒤 내전이 벌어졌을 당시로 알려져 있다. 못 먹고 못 자는 상황에서도 담배를 피우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는데, 중국 전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이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의 파죽지세에 밀려 대만으로 도피한 49년 10월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했다.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건국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급진적인 정책으로 논란을 빚었다. 중국을 영국과 같은 공업국가로 바꾸려던 대약진운동은 3년 만에 3000만명이 굶어죽는 대참극으로 끝났다. 이 여파로 2선으로 물러난 그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주도권을 다시 잡기 위해 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는 비판도 있다. 홍위병의 문화재 파괴와 조리돌림, 심문과 폭행, 고문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또 문화, 사회, 경제, 외교관계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혼란은 그가 죽을 때까지 10년간 계속됐다.하지만 추억은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걸까.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관료의 부패가 잇따르는 자본주의 중국에서는 청렴한 정치를 중시하던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가 일고 있다고 한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9-08 21:30: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9082130285&code=100100&s_code=ap005
1972 - ‘8·3 사채동결 조치’ 국회 승인
[어제의 오늘]1972년 ‘8·3사채동결 조치’ 국회 승인
ㆍ기업들 사채 일정기간 동결·탕감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사채시장의 급성장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기업들이 자기자본을 조달할 만큼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 이뤄지다 보니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기업의 자금수요는 급증했지만 제도권 금융기관의 자금공급은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사채시장이 기형적으로 커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증권을 발행해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했겠지만 1970년대는 주식시장의 기능이 유명무실하던 시기였다. 기업들은 은행의 단기자금을 차입하거나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의 명동과 소공동을 중심으로 100개 이상의 대규모 사채중개업소가 성행했다. 당시 사채의 가중평균금리는 월 3.84%, 연 46%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기업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야말로 돈 벌어 이자 갚기 급급한 상황이었다.사채업자들의 힘도 커졌고 자체적으로 직원을 고용해 기업들의 재무상태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특정 기업의 자금 사정이 악화돼 부실화 우려가 있다고 평가될 경우 정보를 공유해 해당기업의 어음을 교환에 회부했다. 어음을 막지 못하는 기업은 곧바로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설상가상 세계경기도 불황에 빠지면서 경제성장률은 주춤했고, 정부도 나름대로 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은행을 통해 돈을 풀다보니 물가상승률은 가팔랐다. 경제지표에 빨간불이 들어왔고 기업들이 부실화하기 시작했다.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들의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흔히 ‘8·3사채동결 조치’로 불리는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이 그것이다. 기업들이 떠안고 있는 사채를 동결해 일정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초법적 조치였다. 1972년 8월2일을 기준으로 기업이 부담하는 모든 사채를 관할 세무서나 금융기관에 신고하고 신고된 사채는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새로운 채권채무관계로 전환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자율도 월 1.35%, 연 16.2%로 대폭 낮췄다.‘8·3조치’는 그해 9월9일 국회에서 승인됐다. 기업들이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탕감해준 것으로 부실기업에는 엄청난 특혜를 제공한 셈이다. 정부의 비호 아래 선택받은 재벌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고 뿌리 깊은 정경유착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9-08 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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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3선 개헌안 국회상정
1969년 오늘 박정희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3선 개헌안이 민주공화당에 의해 국회에 상정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2번째 임기를 2년 반 남겨둔 시점에서 이뤄진 일이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의사당 점거 농성을 벌인다. 그러나 닷새 뒤인 14일 새벽 2시 25분 공화당이 야당에 통고조차 하지 않은 채 이효상 국회의장의 사회로 개헌안을 10분 만에 표결처리한다. 그 결과 투표자 122명 전원의 찬성으로 전체 국회의원 수의 3분의 2를 넘어 3선 개헌안이 통과된다. /YTN
1968 -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서울 개막
'내일의 번영'을 테마로 하는 종합무역박람회가 현재의 구로동 공업단지 대지에서 1968년 9월 9일 열렸다.
40일간의 회기로 발전의 비젼을 표현할 6만평 대지에의 이 박람회는 디스플래이의 개념과 기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험이기도 하였다. 당초 졸속한 기획은 공사가 착수되면서 계획과 실제가 틀리고, 계획 자체의 수정이 공사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등 미숙한 전개를 보였다.
그러나 옥외극장, 안내센터, 심볼 탑의 디자인은 당시 부족한 재료와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주목되었다. OB관, 럭키관 등의 民間企業館과 農漁村開發公社館, 韓國電力館 등의 公共館, 獨逸館 등의 外國館이 설치되었었다. 디스플레이에서 한국관과 외국관의 격차가 드러났으나, 우리의 장치계로서는 그 후의 博覽會 建築을 위한 주요한 체험이 된 것도 사실이다.
韓國綜合技術開發公社의 종합계획과 총괄작업에 의해 이루어지고, 金圓錫와 李汶祖(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劉康烈와 韓道龍(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학과 교수), 趙聖烈, 孫동규 등이 디자인의 실무를 맡았다.
/http://www.kia.or.kr/kia_image/html/01_02_01_02_03.htm
- 11th Intl. Audiology Cong.,
Budapest, 1972 Oct. 3
1962 - 제1회 '귀의 날' 행사
귀의 날은 1958년 11월 이달호가 발의하고 정기섭이 '구'와 '귀'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9월 9일을 '귀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1961년 의약관계 신문잡지에 귀에 관한 특집을 마련하여 '귀의 날'을 홍보하였다. 백만기가 특집을 기획하였으며, 연제는 이병현의 중이염, 신홍수의 농아, 백만기의 난청을 가져오는 질환, 신규식의 귀의 청각생리, 김홍기의 난청의 치료 등이었다. 1961년 9월 18일 의사시보 제 325호에 '귀를 보호하자' 라는 제목으로 대한이비인후과학회학회에서 '귀의 날'을 제정한 취지와 연혁을 소개함으로써 국민행사로 발전시키고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하였다.1962년 8월 18일 임원회에서 필히 '귀의 날' 행사를 갖기로 하였고, '귀의 날' 설정요지를 작성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고 후원을 건의하며, 사업으로 무료상담과 진료, 강연회 개최와 보도기관을 동원하여 선전하자는 사항을 의결하여 보건사회부의 승인을 얻었다. 귀병에 대한 무료상담과 진료는 9월 9일이 공휴일이었으므로 9월 10일에 실시하였고, 의학관계 신문, 잡지에는 '귀의 날' 특집 프로그램을 게재하여 획기적인 대민홍보 업적을 성취하였다.제1회 귀의 날 강연회(1962년 9월 9일 오후 7시, 서울시민회관 소강당).
/대한이비인후과학회
http://www.korl.or.kr/about/history3.html
1956 - 엘비스 프레슬리,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해 열창
1956년 9월 9일 미국의 록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가 열광적으로 전신을 뒤흔들며 무대에서 열창하는 모습이 수백만명의 TV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주로 10대들을 상대로 한 TV프로 ‘에드 설리반’에 출연한 21세의 프레슬리는 ‘하운드 도그(hound dog)’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등 두곡을 불러 청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의 시골청년으로 2년 전까지만 해도 테네시 주의 트럭운전사였던 그는 선 레코드 사장 필립스의 눈에 띄어 세계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굵고 부드러운 바리톤, 냉소적으로 입을 비트는 표정, 허리를 꼬는 제스처는 그를 남성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흑인음악의 중심가였던 멤피스 출신답게 컨트리&웨스턴 스타일의 백인음악에 흑인음악 리듬&블루스를 결합해 새로운 록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그로부터 ‘엘비스’는 그 이름만으로 신화가 되었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빌 보드 톱 랭킹을 독차지했다.그가 출현하자 당시 청소년이었던 비틀스의 존 레넌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폴 매카트니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엘비스는 대중의 시대 20세기가 만든 우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조선
[어제의 오늘]1956년 ‘에드 설리번 쇼’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
ㆍTV로 로큰롤 황제의 등극 알리다
<에드 설리번 쇼>는 1950~60년대 일요일 밤마다 미국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CBS TV의 쇼 프로그램이다. 진행자인 설리번은 화려한 말솜씨와 재치로 스타가 됐지만 까칠하고 거만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쇼가 두고두고 기억되는 것은 56년 9월9일 이 쇼를 통해 ‘황제의 등극’을 세상에 알린 한 출연자 덕분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멤피스의 트럭 운전사 출신으로 레코드를 취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당시 21세의 청년이 이 쇼를 통해 자신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한 것이다.
엘비스의 TV 출연이 처음은 아니었다. 두 달 전인 7월1일 엘비스는 NBC의 <스티브 앨런 쇼>에 먼저 나왔다. 하지만 이 쇼의 진행자인 앨런은 엘비스에게 ‘가족 모두 함께 보는 쇼’의 게스트 역할에 충실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스스로 가치를 망쳐버렸다. 흰 나비넥타이에 검정 연미복 차림으로 출연한 엘비스는 ‘하운드 도그(Hound Dog)’를 불렀지만 방송에 나간 시간은 1분도 안 됐다. 앨런은 녹화 뒤 “재능도 없고 바보 같은 가수”라고 혹평했다. 이튿날 싱글레코드로 녹음된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엘비스가 경쟁 쇼에 먼저 나간 것에 화가 난 설리번은 “내 쇼에는 절대로 그 자를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2주 만에 말을 바꿔 엘비스에게 5만달러를 주고 3회 출연 계약을 맺었다. 9월9일 첫 출연 때 엘비스는 특유의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웃음을 지으며 기타를 메고 ‘하운드 도그’와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불렀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설리번 쇼의 명성에 한창 떠오르던 엘비스의 이름값이 합쳐져, 무려 5500만~6000만명이 이날 브라운관 앞에 모여들었다. 엘비스는 이 쇼를 통해 가수들의 무대가 ‘레코드’에서 ‘TV’로 바뀌었음을 보여줬다.정작 엘비스의 모습은 당시 화면에 절반밖에 나오지 못했다. 방송사가 엘비스의 ‘허리 윗부분’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연출자 말로 루이스는 “그가 춤을 출 때에 여성팬들의 눈길을 끌려고 바지 속에 콜라 병을 넣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설리번이 엘비스를 내심 견제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설리번은 엘비스를 불러놓고도 프로그램 내내 노골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엘비스는 상반신만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미 방송계에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듬해 1월 설리번은 마지막으로 출연한 엘비스에게 무려 7곡을 부를 시간을 내줬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9-08 17: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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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남한에서 대통령과 제헌의원을 선출하고 정부수립까지 선포하자 북한도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했다.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를 실시해 221명을 선출했고, 9월 9일에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앞서 북한에서는 1945년 10월 북조선 서북5도 공산주의 대표자와 열성자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수립됐고, 이듬해인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을 구성했다. 1948년 2월 8일에는 인민군을 창설하고, 4월 2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확정했다. /조선
1945 - 맥아더 사령관 서울 진주, 포고문 1호, 2호, 3호 공포
한국을 적대시한 맥아더 포고문1945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시내 각처에는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이라는 벽보들이 나붙었다.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고하는 일황 히로히토의 떨리는 목소리는 경성중앙방송국의 중계로 라디오를 통해 국내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9월 8일 미 제24군은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9월 9일 서울에 진주했다. 하오 4시 30분 초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였던 것이다!미국은 그 날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항복 조인식'을 거행하였다. 아베 조선총독은 할복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로 끝나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조인식장에 나와 항복하는 조인 문서에 서명하였는데, 이 조인식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다.바로 그 날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문 1호, 2호, 3호가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포고문들은 한국민을 적대시하는 것들이었다. 포고문 1호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했으며 포고문 2호는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9월 11일 하지 중장은 기자 회견을 통해 앞으로 언론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언론 자유의 보장'을 선언하였다. 당시 "매일신보" 9월 12일자에 실린 하지의 발언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 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 사람들의 사상과 의사 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 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 같은 것을 하려 하지 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론을 진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 데 그 직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군은 언론 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 하지는 않으나 그것이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언론의 둑은 터졌다.'미 군정은 9월 25일엔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일본어)를 접수하였고 10월 2일엔 ‘매일신보’(한국어)도 접수하였다. 미 군정의 실시와 함께 신문의 발행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수많은 신문들이 창간되었는데 이는 곧 정치적 자유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 1일 현재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과 정치 단체의 수는 무려 250여 개에 이르렀으며 1945년 말까지 창간된 신문만도 40종 이상이 되었다. 1947년 미 군정의 발표에 따르면 일간지 85개(서울에 40개), 주간지 68개, 격주간지 12개, 월간지 154개 등에 이르렀다. 중앙대 교수 최준은 그의 저서 ‘한국 신문사’에서 당시 상황을 '언론의 둑은 터졌다'는 소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홍수와도 같이 쏟아져 나오는 전단, 포스터와 신문 특히 민간 신문의 일체 폐간 이후, 6년만에 아무 장해 없이 실로 자유 활달하게, 우리의 손으로 감격에 넘쳐 만든 신문지는 서울 장안을 휩쓸었다. 활판 인쇄로 된 것은 물론이고 등사판 인쇄의 전단 비슷한 신문 등등... 진정한 뉴스에 굶주렸던 무리들은 종이에 그저 빨려들어가는 듯하였다.그러나 그러한 감격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미 군정의 태도가 '절대적인 언론의 자유 보장'을 선언한 지 한달도 안돼 돌변했다. 군정장관 아놀드는 "어리석고 경박한 많은 발언이 미숙한 편집자가 편집하는 신문 지상에 실리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남한에는 오직 하나의 정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맥아더 원수의 포고, 하지 중장의 일반 명령, 군 정부의 민정 명령에 근거하여 창설된 정부이다."라는 기사를 모든 신문의 1면 톱기사로 다루도록 명령함으로써 사실상 언론통제에 착수하였다.감격이 큰 만큼 갈등도 심각했다. 가장 눈에 띄는 갈등은 좌익지와 우익지 사이의 이념적 대립이었다. 당시 25개 주요 일간지의 정치 성향은 좌익 7개, 우익 8개, 중립 10개였지만 발행 부수로는 좌익 22만 3백부, 우익 14만 4천 부, 중립 2만 7천부 등으로 좌익이 우세를 보였다.그러나 과연 무엇이 좌익이고 무엇이 우익인지 그 구분이 늘 명확한 건 아니었다. 그게 답답했었던지 문필가 김동리는 ‘백민’ 1946년 11월호에 쓴 ‘좌우간의 좌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 하였다."만약 토지 개혁과 주요 기업의 국유를 주장하는 것이 좌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모두 전부 좌익이요, 민족 해방과 완전 독립을 갈망하는 것이 우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가 우익일 것이다. 조선의 소연방화 거부를 우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우익이어야 할 것이고, 조선의 미국 식민지의 배격을 좌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좌익일 것이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이정환닷컴 2001/12/26(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100
1944 - 프랑스, 드골 임시정부 수립
제2차 세계대전중의 프랑스1940년 6월 18일 샤를 드골 장군이 전투를 계속할 것을 프랑스 국민에게 호소했으나 국민의 대부분은 페탱에게 기대했다. 7월 9~10일에 비시에서 열린 의회는 제3공화국을 폐지하고 비시 프랑스를 수립했다.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가 미국군에게 항복하자 히틀러는 독일군에게 프랑스 전국토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비시 프랑스는 오직 독일의 관용으로 그 생명을 유지할 뿐이었다. 비시 프랑스의 쇠퇴와 때를 같이하여 독일에 대항하는 지하운동이 일어났다. 1940년의 붕괴 후 수일 내에 프랑스인들은 집단저항을 시작했으며, 런던에 본부를 둔 드골은 '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1943년말에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표가 되었으며, 1944년 8월 25일 드디어 자유 프랑스의 기갑부대가 파리에 입성했다. 1944년 10월에 미국·영국·소련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은 드골의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Macropaedia| 閔錫泓 참조집필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3p4386b029
1941 - 미국의 가수, 작곡가 오티스 레딩(Redding, Otis) 출생
레딩 [Redding, Otis, 1941.9.9~1967.12.10]
미국의 가수·작곡가.
조지아주(州) 도슨(Dawson)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말 리처드의 밴드였던 업세터스(Upsetters)에서 활동했다. 이후 자니 젱킨스(Johnny Jenkins)의 밴드 파인타퍼스(Pinetoppers)에 가담하여 이 그룹의 앨범에서 자신의 노래 두 곡을 불렀다. 이 중 《디즈 암스 오브 마인 These Arms of Mine》(1962)이 레코드 회사의 간부인 짐 스튜어트(Jim Stewart)와 매니저인 필 월든(Phil Walden)의 관심을 끌어 솔로로 활동하게 되었다. 목구멍을 열고 부르는 독특한 창법으로 《아이브 빈 러빙 유 투 롱(투 스톱 나우) I've Been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1965), 《리스펙트 Respect》(1965), 《새티스팩션 Satisfaction》(1966), 《파파파파파(새드 송) Fa-Fa-Fa-Fa-Fa (Sad Song)》(1966)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했으며, 작곡가로서도 활동하여 새로운 종류의 리듬앤드블루스 선율을 선보였다. 1967년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에서 히피음악에서 솔뮤직으로 변신하여 새로운 인기를 끌었으나 그해 12월 전세 비행기 추락사고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들은 그가 죽은 후 더 인기를 얻어, 크라퍼와 함께 작곡한 《(시틴 온) 더 독 오브 더 베이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1968)가 인기순위 1위에 올랐다.
이밖에도 1968년 한해 동안 《더 해피 송(덤 덤) The Happy Song (Dum Dum)》, 《아멘 Amen》, 《파파스 갓 어 브랜드 뉴 백 Papa's Got a Brand New Bag》이 인기순위에 올랐다.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naver
- Calvin Coolidge, 1872~19331919 - 보스턴 경찰 파업
1919년 9월 9일 보스턴 경찰이 노동조합 결성을 거부당하자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보스턴 경찰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노동총연맹(AFL) 가입을 추진했으나 시(市) 경찰위원회로부터 노동조합 결성권을 거부당했다. 이에 항의해 보스턴 경찰의 80%가량이 파업에 동참했다. 경찰이 파업에 들어가자 시 전체는 폭도들의 약탈과 횡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앤드루 J. 피터스 시장은 보스턴 민병대를 소집해 파업을 진압했다. 당시 주지사로 있던 캘빈 쿨리지는 이 사건을 이용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기도 했다. 쿨리지는 처음에는 파업을 막기 위한 조치에 반대했지만 파업이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뒤늦게 매사추세츠 주 전역의 민병대를 소집해 파업 진압에 나섰다. 그는 "언제, 어디서, 어느 누구에게도 공공안녕을 저해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없다"고 천명하고 법과 질서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국민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활약에 크게 힘입어 192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후보에 지명되었고, 1923년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브리태니커
- 'The English Girl from the Star' - 'Yvette Guilbert Singing'
- 'Moulin Rouge' - 'Moulin Rouge'
1901 - 프랑스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 Henri de) 사망
툴루즈 로트렉 [Toulouse-Lautrec, Henri de, 1864.11.24~1901.9.9]
알비 출생.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 R.프랭스토에게 배웠고 1882년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본명 F.A.Piwstre)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 있는 소묘화가(素描畵家)로서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이 무렵 고흐, 고갱 등과 알게 되었고 드가의 예술에 끌리기도 하였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그후 13년 동안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18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30대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18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에는 물론 퇴원 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3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고향인 알비시(市)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에 로트레크미술관이 개관되었다. /naver
1900 -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턴(Hilton, James) 출생
힐턴 [Hilton, James, 1900.9.9~1954.12.20]
영국의 소설가.
〈사라진 지평선 Lost Horizon〉(1933)·〈굿바이 미스터 칩스 Goodbye, Mr. Chips〉(1934)·〈랜덤 하비스트 Random Harvest〉(1941) 등이 영화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둔 작품들을 썼다.
1921년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이미 신문에 기사를 기고하고 첫번째 장편소설 〈캐서린 Catherine Herself〉을 출판했다. 저널리스트가 된 그는 그밖에도 몇 권의 장편소설을 출판했으나 눈에 띌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중편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는 1934년 〈브리티시 위클리 British Weekly〉지를 통해 발표되었고 같은 해 미국에서 〈애틀랜틱 먼슬리 Atlantic Monthly〉에 재수록된 뒤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933년 출판되었던 장편소설 〈갑옷 없는 기사 Knight Without Armor〉와 〈사라진 지평선〉은 곧 중판에 들어갔고 역시 광범위한 독자를 사로잡았다. 1941년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자신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했다.
〈굿바이 미스터 칩스〉는 유려한 필체로 온화한 중년의 학교장과 그가 몸담고 가르치던 학교와의 오래고 친밀한 관계를 다룬, 약간은 감상적인 이야기이다. 〈사라진 지평선〉은 티베트의 샹그리라 계곡에서 낙원을 발견하는 한 영국 남자의 이야기이다. 머나먼 낙원을 뜻하는 샹그리라란 말은 이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지막 장편소설 〈랜덤 하비스트〉는 기억상실증으로 자기 삶의 3년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시련을 그리고 있다. /브리태니커
1899 - 헝가리 태생 프랑스의 사진가 브라사이(Brassai) 출생
브라사이 [Brassai, 1899.9.9~1984.7.8]
1899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옛도시 브라소(Basso)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와 베를린의 미술학교에서 그림공부를 하였고, 1923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기자생활을 하였다. 이후 계속 파리에서 살았다.그림도 잘 그렸고 글도 잘 썼으며 여러 방면으로 두루 조예가 깊었는데, 그 당시 예술계를 이끌던 피카소, 브라크, 헨리 밀러 등과 친하게 지냈다.1930년 보도사진가들과 함께 취재활동을 하면서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파리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찍어나갔다.1931년 자신의 사진과 시인 폴 모랑의 글을 함께 수록한 사진집 《밤의 파리 Paris de Nuit》를 펴냈고 이 책으로 유명해졌다. 이 사진집은 1932년 영국의 권위 있는 사진문화상인 에머슨상을 받았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는 파리 뒷골목 벽의 낙서 등을 찍다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사진에서 손을 떼고 그림과 판화 작업을 하였다. 전쟁 후 1945년부터 1965년까지는 주로 《하퍼스 바자》지의 사진을 찍었다.1956년 10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벽의 낙서》 전시회를 하였고, 1968년에는 특별기획 회고전을 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밑바닥 인생들의 삶의 애환과 파리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이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대표적인 사진으로는 파리의 밤풍경과 뒷골목 담벼락에 쓰여진 《밤의 파리》, 《벽의 낙서》등이 있다. /naver
1898 - 프랑스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Mallarmé, Stéphane) 사망 말라르메 [Mallarmé, Stéphane, 1842.3.18-1898.9.9]
프랑스 상징파 시인. 파리 출생. 16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세에 런던에서 영어교사자격을 취득하고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일찍이 E.A. 포의 작품과 C.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깊은 영향을 받아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제1차 《현대고답시집(Le Parnasse contemporain, 1866)》에 11편의 시를 발표하였는데, 이 무렵에 이미 고답파(高踏派)의 영향이 줄어들고 보들레르의 교감(交感)의 수법이 농후하게 보이며, 그 특유의 유추에 의한 상징적 수법이 두드러진다. 이어 제2차 《현대고답시집(1871)》에 장시 《에로디아드(Hérodiade, 1871)》를 발표하여 고답파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으며, 제3차 《현대고답시집(1876)》에 발표가 거부된 《목신(牧神)의 오후(L'Aprè-midi d'un Faune, 1876)》는 그의 시작완성을 이룩한 것으로 19세기 서정시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보들레르에게 영향을 크게 받고 점차 상징적 시풍을 인정받게 되었다. 프랑스 근대시의 최고시인으로서 그는 포의 의식적·분석적 방법과 신비적 미학사상을 기초로 하여 언어의 영상과 유추에 의한 이미지를 창조하였으며 한 편의 시를 교향악과 같이 편성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언어의 순수성을 존중하고 절대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시가 난해하였다. 그의 살롱에는 매주 화요일에 많은 지기(知己)·후배들이 모여 <화요회(火曜會)>가 만들어졌으며, 여기에서 P. 발레리·A. 지드·P. 클로델·P. 루이스 등이 배출되었다. 작품에는 장시 《던져진 주사위(Un Coup de dès jamais n'abolira le hasard, 1897) 》, 산문시 《디바가시옹(Divagations, 1897)》, 번역 작품 《E.A. 포 시집(1888)》 외에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1887)》 등이 있다. /야후 백과
1891 - 파나마의 시인 올림피아 데 오발디아(Olimpia de Obaldia, Maria) 출생
올림피아 데 오발디아 [Olimpia de Obaldia, Maria, 1891.9.9~1985.8.14]
María Olimpia de Obaldía (9th of September, 1891 - 14th of August, 1985), was a Panamanian poet. The daughter of Manuel del Rosario Miranda and Felipa Rovira, she was born in Dolega, in the province of Chiriquí. She studied at the Escuela Normal de Institutoras in Panama City, qualified in 1913, and worked as a primary school teacher in her native town until her marriage to Don José de Obaldía in 1918.
She published her first book, Orquídeas, in 1926. In 1930, she was granted the title Maria Olimpia de Panama by the Instituto Nacional de Panamá. In 1951, she became the first female member of the Academia Panameña de la Lengua. In 1976, she was made a Commander of the Panamanian Orden Vasco Nuñez de Balboa and in 1983 was decorated with the Orden Belisario Porras. The same year, she received the papal award Augusta Cruz Insigne Pro Ecclesia et Pontifice from John Paul II.
Her writings generally deal with subjects such as maternity and love of family. Her most famous poem Ñatore May, expresses the suffering of women of the Ngöbe Buglé (an indigenous Panamanian Indian group).
http://en.wikipedia.org/wiki/Mar%C3%ADa_Olimpia_de_Obald%C3%ADa
- Philippines, 50 Piso (Banknote)
1878 - 필리핀의 정치가 세르히오 오스메냐(Osmeña, Sergio) 출생
오스메냐 [Osmeña, Sergio, 1878.9.9~1961.10.19]
세부시티 출생. 1906년 세부주(州)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07년 필리핀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1916년까지 의장직을 맡았으며, 같은 해 양원제 성립 후 1922년까지 하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필리핀이 공화국이 되자 대통령 케손 아래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2년 일본군의 침입을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44년 케손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자 이듬해 귀국하였다. 1946년 선거에서 마누엘 로하스에게 패배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naver
1873 - 독일의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Reinhardt, Max) 출생 라인하르트 [Reinhardt, Max, 1873.9.9~1943.10.31]
본명 Max. Goldmann. 빈 교외의 바덴 출생. 빈과 잘츠부르크의 연극학교에서 수학한 후 1893년 잘츠부르크에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O.브람에게 발탁되어 베를린의 도이치극장에서 활약하였으나 브람적인 자연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연출로 전향, 1930년 상징주의 ·인상주의적인 새 경향의 희곡작품을 연출하였다. 조명 ·음악 ·음향 등을 구사하여 희곡의 문학성보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를 중시한 상상력 풍부한 무대를 만들었다. 소극장 ·신극장을 활동무대로 한 《밑바닥》《살로메》를 연출하여 명성을 얻고, 생애를 통하여 연출한 《한여름 밤의 꿈》 첫 공연의 해(1905)에 도이치극장 총감독이 되었다.
무대 장치를 마음껏 구사하고 저명한 배우를 모아 앙상블을 이룬 그의 연출은 무미건조한 자연주의 무대에 연극성을 부활시켰다. 이른바 ‘액자틀 무대’에서 셰익스피어극이나 고전극을 시도한 그는 소극장을 열어(1906) 근대극이나 반자연주의극에 손을 대고, 한편으로 서커스에서의 《오이디푸스 왕》의 상연(1911)이나, 성당에서의 《기적》의 상연, 잘츠부르크 축제극에서의 야외극 《누구나 Jedermann》의 상연(1920) 등으로 극장의 영역을 넓혀 관객과의 새로운 교류를 꾀하였다.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연출도 하였으며 연극에 축제적인 성격을 부여, 바로크연극의 세계극장 이념을 부르주아 연극 속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표현주의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 제1차 세계대전 중 이미 그룹을 조직하여 신작을 상연하였고, 전후(戰後) 표현주의 전성기에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베를린으로부터 본거지를 빈으로 옮겨 심리적인 대화극에 구심점을 찾았다.
유대계이기 때문에 1933년 국외로 망명하여 미국에서 영화 《한여름 밤의 꿈》을 감독하였다. 마술사로까지 일컬어진 그는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 배우 중심의 조화로운 조형에 천재적인 감각을 보였으며, 일류전(illusion) 연극 최대의 연출가로 칭송되었다. 망명 후에는 미국에 영주하였다. /naver
1843 - 스웨덴의 고고학자 오스카르 몬텔리우스(Montelius, Oscar) 출생
몬텔리우스 [Montelius, Oscar, 1843.9.9~1921.11.4]
스톡홀름 출생. 1863년부터 스톡홀름 국립고대유물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 1888년 교수가 되었으며, 1907~1913년 관장을 지냈다. 당시 트로이발굴, 미케네 등의 그리스 유적발굴에 자극을 받아 북유럽의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문화 해명에 뜻을 두었다. 이탈리아의 시침바늘 연구를 기초로 하여 그 연대고정(年代考定)을 내렸는데, 이것이 근대고고학에서 최초의 형식학적 방법이다. 저서에 《오리엔트 및 그리스에서의 청동기시대》 《이탈리아 고전 이전의 편년(編年)》(1912) 《오리엔트 ·유럽에서의 고대문화의 여러 시기》(1903∼1923) 등이 있다. /naver
1828 -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Tolstoy, Lev Nikolayevich) 출생
톨스토이 [Tolstoy, Lev Nikolayevich, 1828.9.9~1910.11.20]
톨스토이는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1865~69)와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 <부활 Voskreseniye>(1899)을 남긴 러시아의 작가이자, 개혁가이며, 도덕사상가이다. <전쟁과 평화>는 7년에 걸쳐 쓴 대서사시로서 세계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805~14년을 무대로 러시아의 5개 귀족가문의 역사를 다룬 이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사실적이고 정교한 세부묘사와 다양한 심리분석으로 여러 인생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서술기법과 문체가 <전쟁과 평화>와 비슷하지만 예술적인 통일성에서 훨씬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뇌, 자살 충동 등 당시 톨스토이가 겪고 있던 갈등을 엿볼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를 탈고할 무렵 톨스토이의 정신적 고통은 극에 달했고, 그는 그 돌파구를 그리스도교에서 찾았다. 만년에 그는 종교·사회·도덕·예술 등 여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저술로 남기는 데 시간을 바쳤다. 이 시기의 저술로 <교조신학 비판 Kritika dogmaticheskogo bogoslaviya>·<나의 신앙 V chyom moya vera>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양심의 소리는 다름아닌 신의 소리이다. "
- 레프 N. 톨스토이
1778 - 독일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Brentano, Clemens) 출생
브렌타노 [Brentano, Clemens, 1778.9.9~1842.7.28]
독일의 시인·소설가·극작가.
독일의 민담과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독일 낭만주의의 제2단계인 하이델베르크 낭만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머니 막시밀리아네 브렌타노는 1772~74년에 괴테와 친교를 맺었으며, 누이 베티나 폰 아르님은 괴테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예나대학 시절 초기 낭만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과 루트비히 티크를 알게 되었다. 학업을 포기한 뒤 독일을 두루 여행했다. 하이델베르크에 잠시 머무는 동안 아힘 폰 아르님을 만나 그와 함께 독일 민요집 〈소년의 마술 피리 Des Knaben Wunderhorn〉(1805~08)를 펴냈는데, 이 책은 후세의 독일 서정시인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동화로서, 특히 〈고켈·힌켈·가켈라이아 Gockel, Hinkel and Gackeleia〉(1838)를 들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정직한 카스페를과 아름다운 안네를의 이야기 Geschichte vom braven Kasperl und dem schönen Annerl〉(1817)는 뛰어난 단편소설로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위해 독일 민담에서 따온 주제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밖의 주요작품으로는 희곡인 〈폰세 데 레온 Ponce de Leon〉(1801)·〈프라하의 건설 Die Gründung Prags〉(1815) 등을 비롯하여, 구낭만주의와 신낭만주의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소설 〈고트비 Godwi〉(1801)가 있다. 브렌타노는 매우 풍부한 상상력과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글로 잘 알려져 있다. 사생활 역시 독일 낭만주의자들과 관련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극단적인 성격과 기분에 좌우된 고통스럽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817년 심한 우울증에 걸려 가톨릭 신비주의로 전향했고 6년간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브리태니커
1754 - 영국의 해군 제독 윌리엄 블라이(Bligh, William) 출생
블라이 [Bligh, William, 1754.9.9~1817.12.7]
영국의 제독.
유명한 선상(船上) 반란이 일어났던 왕실 소유 '바운티호'의 함장이었다.
7세 때 선실 급사로서 선원이 되었고 1770년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1772~75년에 제임스 쿡 선장의 2번째 항해에 참여했으며 쿡 선장의 마지막이자 3번째 항해(1776~80)에서는 '레절루션호'의 선장이었다. 1787년 215t급 '바운티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배는 서인도 제도에 이식할 빵나무를 타히티에서 채집해 실어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바운티호가 예정에 따라 타히티로 가서 빵나무를 채집하고 자메이카로 기수를 돌려 프렌들리 제도(통가)에 이르렀을 무렵인 1789년 4월 28일, 항해사인 플레처 크리스천이 갑자기 배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18명의 선원들은 배에 있던 대형 보트에 실려 쫓겨났다. 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반란자들은 그를 폭군이라고 비난했는데 그가 자기 배의 많은 장교들을 모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반란이 순전히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일어났으며, 선원들이 "타히티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영국에서보다 더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고 이것이 여자문제와 관련해 이 모든 일의 1차적 원인이 된 듯하다"고 주장했다.
덮개 없는 대형 보트로 약 5,800㎞를 항해한 놀라운 위업을 이룩한 블라이는 1789년 6월 14일 결국 동인도 제도의 티모르에 도착했다. 바운티호에 남은 크리스천과 나머지 8명의 선원들은 핏케언 섬에 상륙해 작은 식민지를 세웠다. 이 식민지는 1808년에야 발견되었는데, 아직까지 그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 나중에 타히티로 간 반란분자 3명은 영국으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블라이는 이 반란사건에도 별다른 지위변화를 겪지 않았고, 1792년에는 다시 타히티를 방문하여 더 많은 빵나무를 서인도제도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디렉터호'의 선장으로 있던 1797년에는 노어 반란에 가담한 부하 선원들에 의해 해변에 버려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같은 해 그 배를 지휘하여 캠퍼다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801년 코펜하겐에서도 '글래턴호'로 공을 세웠다. 1805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에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1808년 그의 '강압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이 또다시 반란으로 번졌다. 이번에는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스 군단장 대리인 조지 존스턴 소령이 반란을 지휘해 블라이를 체포했다. 그러나 결국 반란자들에게는 모반죄로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나중에 해군소장(1811)·해군중장(1814)으로 진급했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터무니 없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사나운 입심과 거만한 태도 때문에 지휘관으로서 인기가 없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의심할 바 없는 용기를 발휘했으며 항해가로서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 /브리태니커
1747 - 영국의 감리교 성직자 토머스 쿡(Coke, Thomas) 출생
쿡 [Coke, Thomas, 1747.9.9~1814.5.3]
영국의 성직자, 감리교 초대 감독, 감리교 선교회의 창시자.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친구였으며, 웨슬리는 그를 가리켜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했다. 1772년 영국국교회 사제로 임명되었으며, 1772~76년 서머싯의 사우스페더턴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웨슬리를 만난 뒤 그의 권유대로 야외와 농가에서 예배를 인도하다가 쫓겨났다. 1777년 정식으로 감리교에 가입했으며, 1782년 아일랜드 감리교 협의회 초대 의장이 되었고, 2년 뒤 웨슬리에 의해 북아메리카의 새로운 선교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미국을 모두 9회 방문했고, 1787년의 방문 때 웨슬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독'이라는 직위를 얻었다. 1797, 1805년에 열린 영국 감리교 협의회에서 의장을 맡았으며, 영국 감리교에 감독이라는 직위를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총리 리버풀 경(卿)에게 인도 성공회의 주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 요청마저 거절당하자 독자적인 감리교 선교를 위해 기금을 모아 인도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죽었다. 그는 많은 글을 남겼고, 그중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주석 Commentary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5권, 1801~03), 〈서인도제도의 역사 A History of the West Indies〉(1808~11), 여러 권의 설교집, 〈존 웨슬리의 생애 Life of John Wesley〉(헨리 무어와 공저, 1792)가 있다. 노예제도를 열렬히 반대했으며, 성직자로서 감리교와 성공회 사이의 불화를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1737 - 이탈리아의 의학자, 생리학자, 물리학자 루이지 갈바니(Galvani, Luigi) 출생
갈바니 [Galvani, Luigi, 1737.9.9~1798.12.4]
볼로냐에서 태어났다. 볼로냐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 대학의 해부학교수를 지냈다. 해부실험중 개구리의 다리가 기전기(起電機)의 불꽃이나 해부도(解部刀)와 접촉할 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고, 그 현상을 연구한 결과 이것이 전기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작용하는 전기는 공중전기(空中電氣)와는 관계가 없고, 전기가 뇌(腦)에서 발생하여 동물의 근육에 흘러들어간다고 생각하여 ‘동물전기(動物電氣)’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이 동물전기설은 후에 A.볼타에 의해 수정되었다.
1791년 발표한 갈바니전기에 관한 논문은 당시의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으며, 전기생리학 ·전자기학(電磁氣學)·전기화학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naver
1629 - 네덜란드의 해군 제독 코르넬리스 트롬프(Tromp, Cornelis) 출생
트롬프 [Tromp, Cornelis Maartenszoon, 1629.9.9~1691.3.29]
네덜란드의 해군 제독.
마르텐 트롬프의 차남으로 영국·프랑스·스웨덴에 대한 일련의 작전을 지휘했다. 1645년 부친의 함대에서 대위로 복무했고 1649년 대령이 되었다. 지중해에서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소탕했고(1650), 제1차 영국 - 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과 싸웠다. 레크호른 전투(1653)에서 대(對) 영국전에 참전한 후 해군 소장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독자적인 작전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격렬한 전투에서 기쁨을 찾았다. 1654년 알제리인들과 싸웠으며, 1656년 스웨덴과 폴란드 사이에 벌어진 제1차 북방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발트 해로 항진했다. 1663년 지중해의 네덜란드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치고 제2차 영국 - 네덜란드 전쟁 때인 1665년 중장으로 함대에 되돌아왔다. 1666년 마스 해군본부의 대장대리로 승진되었으며, 네덜란드 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도 제도에서 미힐 데 로이테르 대장이 되돌아왔고, 이 나이들고 경력이 더 풍부한 장군이 트롬프의 직책을 대신하게 되자 트롬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불만이 생겼다. 1666년 트롬프는 암스테르담 해군본부로 전임되어갔고, 곧 로이테르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666년 7월 로이테르가 트롬프의 지원을 받지 못해 영국에 패했다고 책임을 전가하자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 사건으로 트롬프는 대장대리의 직위에서 물러났고 그후 해군을 떠났다.
1673년 오라녜의 빌렘 3세가 오라녜 가문의 친근한 동조자인 트롬프와 로이테르를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트롬프는 암스테르담 해군본부의 대장대리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스호네벨트와 케이크도인 전투에서 로이테르와 함께 싸웠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웨스트민스터 조약(1674)을 맺은 뒤 프랑스 해안을 따라 순항하다가 하달된 지시를 어기고 지중해로 원정을 떠났다.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는데 이때문에 그는 해군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1676년 트롬프는 스웨덴에 대항하기 위해 구성된 덴마크 - 네덜란드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78년까지 덴마크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도와 스웨덴으로부터 뤼겐 섬을 되찾았다. 그후 네덜란드로 돌아와 1691년 공화국의 최고위 제독으로서 해군 총지휘권을 부여받았으나 병에 걸려 항해를 못하고 곧 사망했다. 그는 영국 왕 찰스 2세로부터 준남작작위를 받았고, 덴마크 왕에게서 백작작위를 받았다.
- France, 10 Francs (Banknote)
1585 - 프랑스의 정치가, 추기경 리슐리외(Richelieu, Cardinal et Duc de) 출생
리슐리외 [Richelieu, Cardinal et Duc de, 1585.9.9~1642.12.4]
프랑스 파리 출생. 지금의 앙드르 에 루아르현(縣)에 영지를 가진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5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배우고, 1606년 서부 해안의 뤼송 주교(主敎)로 임명되었다. 1614년 전국 삼부회(三部會)에서 열변을 토하여 루이 13세의 모후이며 섭정인 마리 드 메디시스를 섬겼다. 2년 후 왕실 고문관으로 있었으나 루이 13세의 친정(親政)과 함께 궁정을 쫓겨나(1617) 아비뇽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최초의 저서 《교리문답》을 썼다.
왕에게 저항 중인 모후 마리의 초청을 받아 측근으로서 각지에 전전(轉戰)하는 한편 화평을 위한 조정에 힘썼다. 1624년 궁정 복귀가 허용되어 왕의 고문관으로서 루이 13세의 신용과 신뢰를 얻었다. 1627년 왕과 협력하여 라로셸에 근거를 둔 신교도의 반란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진압하였다.그러나 왕과의 긴밀한 관계는 옛 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사이를 멀게 하였다. 마리는 왕의 동생인 가스통과 마리약 형제 등 화평파(和平派) 고문관과 함께 부국강병·적극외교를 주장하는 리슐리외와 대립하였다. 야망파인 황족·구귀족들은 모후인 마리편을 들었다.1630년 11월 그들은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왕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것을 ‘뒤프(속은 사람들)의 날’이라고 한다. 그후 리슐리외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왕으로부터 재상의 지위를 인정받아 책임관료제를 수립하고, 왕권의 위력이 전국에 스며들게 하였다.
1635년 리슐리외는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황제를 후원하는 에스파냐와 대치하였다. 이듬해 프랑스는 에스파냐 육군의 침입을 받아 한때 파리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으나, 적을 국경선에서 저지시켜 곧 반격전을 폈다. 1642년 프랑스왕이 에스파냐의 지중해 연안 르루숑 지방을 제압하기 위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을 때 리슐리외도 동행하였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파리로 되돌아와서 12월에 죽었다. /nave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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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첫댓글 서양의 단편적인 역사를 한장쯤 본겄 같습니다.재미 있고 역사공부가 많이 되었 습니다, 해양국가인 네델란드와 영국, 스웨덴등 바다에 강한 나라들이 예전에는 전쟁을 많이 한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보고 공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익한 자료에 감사 드립니다
오랜만의 인사 드립니다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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