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상투적인 말처럼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어떤 영감같은 것이 스친다.
그 느낌으로 그의 말을 내맘대로 적어 보았다.
로빈손 주인은 타고난 부자인 줄 알았다.
아울러 그의 어릴적 상대 루시오 탄 같은 인물들도 말이다.
필리핀 유지들이 오래 지켜온 밥그릇이 아니었다.
새롭게 떠오른 사람들.
어떤 악운도 유리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협업과 업무 지속성에 대한 뼈에 사뭏친 경험.
큰 일을 이뤄내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누구도 탓하지 않고 상황에 최선을 다해 평생을 달려온 느낌이다.
돈에 대한 열망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 느낌을 함께 해 보려한다.
죤 고콩웨이. 3천억불 부자의 꿈.
John Gokongwei ($3B) Billionaire Dream
Cebu Pacific, Robinsons Mall, Universal Robina Food Manu. Robinsons Bank.
세부퍼시픽. 로빈손몰. 유니버샬 로비나. 로빈손은행 회장.
3. 실패와 성공
1957년 31살이 되어 옥수수 전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주요업체인 루도와 루임과 경쟁해야 했었지요.
이 회사는 세부에서 가장 크고 돈많은 회사였습니다.
나는 대부를 받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어요.
첫 은행은 2시간 이상 기다리게 만들고는 거절하더군요.
두번째 차이나은행은 500페소 대부를 승인했습니다.
몇년이 지나 대부 연장을 해준 은행원 알비노 시킵 박사는 나에게 당시 무언가 특별함을 보았다고 했어요.
아직도 그것이 무언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지금껏 시킵 박사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첫 물건이 시장에 나갔습니다.
우리 판다 옥수수전분이 나오자 가격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한판 전분 시장에서 전쟁이 끝나고 3등 회사는 도산했지만 유니버셜은 건재했습니다.
이 회사가 JG 써밋 홀딩스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지요.
도산된 회사의 화학자인 루시오탄은 나를 매번 놀리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직업을 잃게 됩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절대 필리핀 부자에 손꼽히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거라 되뇌입니다.
내 사업이 성장하자 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필요했어요.
내 가족, 전문가, 상담가, 종업원. 나는 내가 아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34살에 돌아가실 때 아무런 가르침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언제든지 누구든 사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에게 배운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가족들의 겨우 고등학생일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6년 전 은퇴를 선언하고 동생 제임스와 아들 랜스에게 사업체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가 매일 사무실에 나가기 때문에 짜증내는 기색입니다.
이제야 첫 비서를 고용하고 좀 크고 멋있는 사무실로 이사를 했어요.
사업체를 JG 써밋 처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험한 세파가 길을 막았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남아 작은 사업을했지만 대신 안전했습니다.
때때로 싸움을 선택했지만, 항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6년 50살이 되었을 때 중요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블랜드45 라고 하는 커피였습니다.
로비나 농장에서 나오는 농산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실패하면서 나는 내 인생 최대의 고초를 겪었습니다.
나의 패배가 만방에 알려졌으나 인생의 순간 중 하나라 믿었습니다.
이 시기는 정치 경제적 환경으로 인해 사업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이미 자기 돈을 다른 나라로 빼돌린 후였습니다.
필리피노로서 나는 필리핀 돈은 반드시 여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산 미구엘 주식을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산미구엘은 필리핀에서 가장 큰 회사입니다.
1976년 이사회 진입할만한 충분한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방송은 누가 고콩왜이냐 왜 그는 이런 최악의 선택을 하느냐고 다투어 떠들어 댔습니다.
신문은 나를 신에게 거역하는 피그미로 그렸습니다. .
산미구엘 이사회 이사들 조차 주요 신문에 왜 내가 이사회에 가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사를 냈습니다. .
제 기억으론 이 논쟁을 확인하려는 주주들로 산미구엘 이사회가 열린 강당이 가득찾던 것 같습니다.
동생 제임스와 나는 몇시간에 걸쳐 이 이사회를 준비했어요.
우리는 매우 긴장했었고, 아울러 상당히 흥분했었지요.
결국 대법원의 결정으로 이사회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는 나 자신과 타인에게 내가 진정 싸울 자세가 되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나의 두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시도했습니다.
이 일이 오늘의 이미지를 규정하는데 이바지했다고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5년 후에 안스코와 산미구엘 홍콩에게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좀 잃으면 다시 얻게 마련인가 봅니다.
이후로 비지니스 세계에서 무게 있는 사업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근 3가지 도전을 이야기하자면 통속적인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드디어 대자본 골리앗 시장에 발을 딛었습니다.
항공사와 무선전화사업, 그리고 음료업입니다.
첫댓글 그런데... 정말 다양한 사업에 뛰어드는군요. 하기사 돈이 돈을 부르니.. 이래서 대기업은 갈수록 더 부자가 되는건가봐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