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익두 목사의 생애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甲戌)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安岳郡大遠面坪村里)에서 김응선(金應善) 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응선 씨는 기와집에 사는 부자였으나, 불쌍한 걸인 구제와 동네 노인들을 잘 존경하여, 동민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아울러 받아, 동네 유지로 동네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분이시다.
(2) 유년시절 6세 되는 해부터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천재적인 총명과 재능으로 10세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독하여 신동(神童) 소리를 들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 가문과 동민들의 기대가 컸었다. 김익두가 13세 되던 해, 모친이 불행하게 '장질부사'라는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고, 드디어 사경(死境)에 이르렀다. 황급해진 김익두는 30리(12km) 밖에 사는 용한 한의사를 모셔오기 위하여 캄캄한 밤중에 30리 길을 단숨에 달려갔더니, 의사는 김익두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되어 즉시 달려가서, 병을 고쳐줄 뿐 아니라, 김군의 효심에 감동되어 치료비를 한 푼도 안 받았다는 미담도 남아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출세하려면 과거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출세의 길이 열리던 시대다. 김익두의 부친은 총명한 아들을 출세시키려고 과거를 치르도록 원했고, 김익두 자신도 신동소리를 들으며 공부했으니 좀더 노력하여 과거를 치르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준비하여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응시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수험생들과 겨루었는데 그 결과는 애석하게도 낙방이었다. 예선에도 못 들었다. 그만 실망하고 낙향했다. 아들의 과거 낙방으로 충격을 받은 부친은 심적 타격을 받았음인지 병석에 누었다가 별세했다. 부친은 운명하기 전에 아들에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다. 애통 중에 장례를 치렀다.
(5) 불도 입문과 장사 시작 사랑하는 부친을 보내고 난 익두는 날마다 부친 산소에 가서 아버지를 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고, 따라서 인생문제에 고민이 커졌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장차 어디로 가는가?" 등 제법 인생문제로 고민하다가 이를 해결해보려고 불도에 입문했다.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이 납득이 안가고, 점점 더 미로에 빠졌다(사람이 짐승 버러지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었다. 점점 미궁에서 방황하다가 절을 떠났다).
(1) 생계를 위해 장사 시작 부친이 별세했으니 가족 생계를 위하여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한 익두는 '장똘뱅이'가 되었다. 익두는 자전거를 타고 평양을 왕래하는 장사를 했다. 고향 안악에서 지방 토산물을 사 가지고 평양에 가서 팔고, 또 다시 평양에서 생활용품, 일용잡화를 사다 팔고 해서 제법 가정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한번은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주웠는데,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익두는 추호도 야심과 욕심이 없이 며칠간 애를 써서 돈 임자를 찾아 돌려주었다. 익두는 본성이 정직했기에 예사롭게 이 일을 치렀는데, 돈 임자는 안악읍에서 큰 상점을 경영하는 상인이었다.
김익두의 정직한 선심을 인정한 주인은 김익두를 자기 상점 지배인으로 채용하였으며, 정직한 김익두의 소문 때문에 점포에 손님이 많이 찾아와 주인도 익두도 크게 만족했다. 부자들이 자기네 귀중품을 김익두에게 가져다가 보관을 의뢰하는 까닭에 무료 전당포 노릇도 잘 하였다.
김익두는 이제 가정 생계에 안정도 되었고 나이도 들었기에(18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부는 이웃 마을에 사는 규수 전익선(田益善, 16세)인데 이 분이 한국 할렐루야 축구팀 부장 김용식(金龍植)의 생모이다. 신혼생활에 한참 재미있을 때 시험되는 일이 생겼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자기 동네에 큰 공장이 들어서는데 투자하면 큰 돈을 벌 터이나 자력으로는 미달이니 연대보증을 서주면 고맙겠다는 부탁이었다. 익두는 아무 의심 없이 친구를 믿고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런데 그 일이 몇 달 후에 사기(詐欺)가 되어 조상 전래의 땅과 집이 차압으로 몰수되고, 익두는 일조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장꾼들이 장에 오면서 성황당에 들러 "오늘 김익두 안 만나게 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곤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방탕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인생문제(人生問題)'가 감돌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가 언제나 문제였다. 김익두는 어느날 장터에 나갔다가 서양 선교사가 전도하는 것을 보았다. 선교사가 주는 전도지(傳道紙)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그 전도지를 읽어보았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익두는 '세세토록'이란 글자에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세세토록이란 말이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을 찔렀다. 그러던 참에 며칠 후에 친구 박태환(朴泰煥, 그는 후일 장로가 되었다)이 찾아왔다. 선교사가 와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가보자는 권면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동요가 되던 익두는 기꺼이 친구를 따라 나섰다. 부흥회는 이웃 동네 금산교회(金山敎會; 安岳郡龍順面長山里 1895년 창립)에서 열렸다. 강사는 선교사 소안론(蘇安論, W. L. Swallen) 목사였다. 그런데 어쩌면 조선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특히 영생에 대한 설교는 김익두를 사로잡았다. 인생문제에 실패한 김익두, 술망나니가 된 김익두, 그는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고민하던 인생문제를 풀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소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날의 무섭고 지긋지긋한 모든 죄를 모두 쏟아 놓았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모두 자복했다. 엄청난 죄짐이었다.
소목사는 기쁨과 놀라움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여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게 해 주옵소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렸다. 아마도 소목사는 영감을 통해서 김익두의 앞날을 예언적으로 믿고 기도했다. 그리고 성경책을 주면서 부지런히 읽으라고 당부했다.
김익두는 그날부터 미친듯이 기도하기에 전력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또는 시간 나는대로 성경읽기에 재미가 나고 또 모르던 진리를 깨닫는 맛이 과거 술 마시던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전도하기로 결심했다. 제1호 대상자가 옛날 술친구 김선봉(金先奉)이었다.
제일 힘들고 어려운 전도 대상자인데 비상한 결심과 기도 끝에 전도했더니 그는 곧 믿기로 작정하고 둘이서 교회도 같이 다니며 교회의 일할 것이 생기면 둘이 모두 해버렸다. 두 친구는 의논하기를 자기네가 술을 끊고 신자가 되고 보니 술 마시는 분들이 모두 불쌍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전도하기로 하고, 그 대상자가 술집에 기생들인데 우선 월선(月仙)과 옥화(玉花)였다.
둘은 기도많이 하고 단단한 결심으로 술집에 가서 기생들에게 전도했더니, 그 태도와 진심을 알고 기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믿기로 작정했다. 김익두도 기뻤지만 친구 김선봉이 너무 기뻐서 기생들이 믿게 되었으니 '이별주'나 나누자고 무심코 한두 잔 마시다가 김익두가 감전(感電)된 사람처럼 충격을 받더니 새파랗게 질려 기절하고 쓰러졌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변화되어 매일처럼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로 미친 사람 같으니 모두들 이상시하고 어머니는 아들이 미쳤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성경에 예수님이 40일간 금식기도하신 것을 본받아 자기도 기도하려고 산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시작하여 마지막 날 익두의 몸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할 신비경에 도달했을 때, "익두야! 익두야!"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익두는 깜짝 놀라 사면을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주저하는데, 음성이 거듭 들려와서 그때야 깨닫고 떨리는 음성으로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더니, 이상하게도 달걀 같은 큰 불덩어리가 자기 가슴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주의 음성 "너는 불의 종이 되어라. 너는 삼천리 금수강산을 신유와 회개로 진동시키고 한반도를 성령의 물결로 휩쓸어라" 하여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김익두의 육과 영은 불덩어리 상태였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이 쏟아지고 그의 몸에서 광채가 나며 이때부터 김익두는 불의 사자가 되었다. 믿고 난 지 한 달 만에 교인들 앞에 공개자복을 하고 헌신 선포를 했다. 교인들은 모두 놀랐다. 덕분에 일반 모든 교인들도 함께 변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7월에 세례 받기로 예정되어 부부 분방하고, 매일같이 냉수 목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세례 받기를 기다리는데 선교사의 순행이 늦어져 1년이 지난 다음해 7월에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까지 한결같이 준비한 덕분에 성경을 100독했다고 한다(일설-신약 100독). 성령받은 김익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노방전도에 나섰다. 전도 대상자는 안악 장터나 과거에 자신이 술망나니가 되어 장꾼들을 괴롭히던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성경을 들고 전도자로 나타났다. 장꾼들은 모두 놀랐다. 미치광이 깡패 김익두가 한동안 보이지 않아 조용하던 참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위장을 하는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같이 됩소서"(253) 안보이던 김익두의 재현도 이상한데 이제는 술망나니 깡패가 아니고 전도자로 나타났다.
김익두의 진심을 깨닫고 오히려 보복하려고 달려들어 때리던 사람들이 멋쩍게 되었다. 그의 간절한 참회와 뜨거운 전도 말씀에 감동되어 즉석에서 믿기로 작정한 분들이 여러 명 생겼다. 김익두는 처음에 매를 약간 맞았어도 전도 결실에 감명하여 기쁨으로 춤을 추며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김익두가 회개하고 노방전도에 나서서 활동하는 소문이 퍼지자, 재령(載寧)교회에서 담임 전도사로 모시겠다는 청빙 교섭이 왔다. 회개한 지 2년, 28세의 청년이 담임 교역자 전도사가 되는 길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수락하려고 하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격으로 시험거리가 생겼다.
서울에 있는 어떤 큰 약방에서 그의 정직성과 또 지금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으니 더욱 미더워서 점원으로 청빙하되 파격적인 대우조건으로 월급 150원이라는 조건이었다. 재령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하면서 월 사례비는 단돈 30원 서울 약방의 5분의 1이다. 인간 김익두는 일시 고민이 생겼다.
그러나 기도하는 중에 이왕 종살이할 바에는 돈 많이 주겠다는 사람의 종보다, 하나님의 종살이가 옳다고 결심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재령으로 하나님의 종살이를 떠났다. 당시 재령교회는 교인이 남자 1명, 여자가 10명이었다.
부임 즉시 여름성경학교를 했는데 김익두의 설교를 듣고 어린이들의 회개운동이 일어나니 웬 이적인가? 한국교회 역사 중에 어린이 성경학교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난 역사가 언제 있었는가. 일이 이렇게 되니 어른들의 회개가 자동적으로 뒤따랐다.
이것은 강사 김익두가 철저한 회개를 한 사람이기에 어린이들에게도 회개를 역설했고 또 그 결과 어린이고 어른이고 회개가 뒤따랐다. 재령교회에서 목회가 성공하자 이웃 군 신천(信川)교회에서 선교사와 동사전도사로 일하도록 청빙을 받았다. 선교사들의 권유도 있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청빙을 수락하고 신천교회에 부임했다.
그런데 신천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교인 신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날마다 철야기도하며 애쓰는 중에 6개월 만에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찾아왔다. 그러나 찾아온 사람은 초라한 옷을 입은 여자요 절름발이 불구자였다. 낙심하려는 생각을 물리치고 환영해서 좋은 신자로 키웠다.
6개월이 자나서 또 한 사람의 남자 거지가 찾아왔다. 그 거지도 잘 돌보고 모셨더니, 김전도사의 사랑의 목회 소문이 퍼져 교인들이 모여드는데 한 주일에 10명, 20명씩 떼를 지어 몰려와 등록하게 되어, 3년만에 300명 교인으로 대부흥되었다. 결국은 교역자의 진실한 목회정신은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법이다.
4. 신학수업, 목사안수 (1) 평양신학교 입학 평양신학교는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로 이미 1901년에 창립되었다. 당시 교장은 마펫(馬布三悅, S. A. Moffett) 선교사였다. 그 당시 신학교 학제는 3년 수업이고 1년에 1학기씩 3개월 집중 수업했다. 교회를 장기 비울 수가 없고 또 교통의 불편으로 매주일 교회에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한번 등교하면 기숙사에 머물면서 3개월 계속 수업하는 제도였다.
김전도사는 입학 후 쉬지않고 계속 수업했기 때문에 6년만인 1910년 제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동창 졸업자 중에는 김관근(金灌根), 박정찬(朴禎燦), 김종섭(金宗燮), 안승원(安承源), 우종서(禹鐘瑞), 주공삼(朱孔三), 채정민(蔡廷敏) 등 저명 목사들이 있었는데 모두 27명이었다.
임시 가건물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었다. 새 성전을 건축하기로 작정하고 3일간 금식기도했더니 비몽사몽간에 노아의 방주 모양의 큰 예배당이 환상 중에 나타났다. 큰 교회당을 건축하라는 계시로 믿고 다음 주일 건축헌금을 했더니 헌금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실제 설계한 성전 건축비 예산에는 절반도 못 미쳤다.
김목사는 기도하는 중에 불신자들이지만 선천 부자 몇 사람을 내정하고 건축헌금을 요청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색하고 강퍅했던 불신 부자들이 한결같이 기쁨으로 호응해 주었다. "김목사님께서 우리 선천을 위하여 애쓰는데 우리들이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다"고 나섰다. 이적이 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적은 계속되었다. 불신자의 헌금에 자극받은 본 교회 교인들이 추가헌금을 함으로 무난히 건축이 완성되었다. 또 하나의 이적은 건축헌금을 한 불신 부자들이 모두 믿게 된 사실이다.
기적의 부흥사로 명성을 떨친 김익두도 그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한 번은 길가의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의 이적을 연상하며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사실 그 때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났고, 확신이 없이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결국 1주일간 금식하고 다시 도전하여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베드로의 이적을 연상하며 전적으로 믿고 나섰기에 성공했다. 이 일은 성전 헌당식을 한 직후였다. 그 후 39년간 수십만 명의 병자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가 지속되었다.
서울 승동교회 부흥회를 인도할 때(1920. 10), 2주간 완전히 금식하며 집회를 인도했다(1918년 총회장 역임 후). 그때 부흥회는 승동, 연동, 안국동, 저동, 새문안, 남대문 교회 등의 연합부흥회였다. 교통도 불편하던 그때 1만여 명이 모였는데 예배당 내에 감당할 수 없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대부분의 교인이 옥외에 모였다. 당시 김목사의 신유이적을 반대하던 밀스(J. M. Mills) 선교사는 "숨가쁠 만큼 인상적이었다"라고 간증했고, 로즈(H. A. Rhodes) 선교사는 "사상 최대의 집회였다"고 격찬했다.
승동 집회에서 19세로 은혜받고 예수 믿은 김재준(金在俊)은 목사가 되고 대 신학자가 되었고,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1921년 웅천 집회 시 성령 받고 목사가 되고 순교까지 했다. 당시 언론의 대표격인〈기독신문〉제259호는 "세계 3대 불가사의를 논함"을 기사화했고, 일간지인〈동아일보〉제58호,〈매일신보〉제4645호 등이 기사화하여 교회를 사회에 크게 소개하였다.
- 국내 부흥집회 통계 경남 : 부산, 동래, 양산, 울산, 밀양, 창원, 창영, 통영, 마산, 함안, 합천, 의령, 거창, 고성, 산청, 진주, 사천, 함양, 삼천포, 남해 등 20개 처
* 총 설교회수 : 28,000회 * 연 집회 참석 인원 수 : 15,000,000명 * 새 신자 수 : 2,880,000명 * 헌금 누계 : 185,000,000원 * 새 교회당 건축 수 : 150여 개 처 * 증축 교회당 수 : 140여 개 처 * 유치원 신설 : 120여 개 처(증수 : 110여 개 처) * 불구자 치유자 수 : 10,000여 명 * 전도해서 믿고 목사된 자 : 58명
6. 신사참배 했느냐? 안 했느냐? 장로교 총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시, 불법적으로라도 일단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요, 국민의 의무라고 핑계대며 가결했다. 개별적으로 보면 주기철 목사는 전후 5차례나 구속되고, 전후 7년간 옥중 고초를 치르다가 끝내 옥중 순교했다(1944. 4. 21). 기타 최봉석, 박관준 등도 옥중 순교했다.
몽둥이로 개 패듯 두드려 때리고, 시멘트 바닥에 눕히고 구두발길로 차고 밟으며, 얼굴에 보자기를 씌우고 물을 붓고 고춧가루 탄 물을 주전자에 넣어 코구멍에 붓는 등 갖은 잔인한 방법을 계속하기를 1개월. 이제는 김목사가 빈사상태가 되어 아무런 반응도 없자, 목사를 데려가라고 가족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조건을 붙이기를 "승동교회에서 설교를 못한다. 목사직은 파면이다. 서울을 떠나라"는 조건부였다. 목사직은 노회가 주관하는데 경찰에서 목사직을 마음대로 파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집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 큰 바위위에 자리를 정하고 매일 기도를 계속했다. 그 바위 근처에는 특히 뱀(蛇)이 많아 기도하는 목사님 몸 위로 여러번 기어 다녔으나, 목사님을 물거나 한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충성된 종아, 내가 네 충성을 아노라, 내가 네 인내를 아노니 너의 소원을 들어주리라"는 음성을 듣고, 광복의 날이 임박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 때가 1945년 신년 벽두였다고 한다.
일본 형사들은 김목사와 한참 동안 승강이를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본서에 돌아와서 서장에게 "김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했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으므로 그들의 기록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경찰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다"라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 김목사가 그렇게 쉽게 굽힐 것이면 어째서 종로경찰서에서 한 달 동안 모진 고역을 당하면서 투쟁했겠는가?
그로부터 4년이란 세월이 흘렸다. 1945년 조국 해방의 날이 돌아왔다. 평양을 위시한 전국교회 지도자들의 감격은 말할 수 없었다. 평양신학교 대강당에서 일제 때 강제에 의해 신사 참배했지만 이를 참회하고 새 출발하자는 취지의 부흥회가 열리어 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데 오히려 김목사는 침착하고 웃는 얼굴로 "형님, 내려가시오. 왜 이러십니까? 조용히 말씀으로 하세요"라고 했고, 동석자들이 채목사를 만류하여 하단시켰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는 태연히 설교를 계속했다. 김목사의 설교에 모두 감동되어서 통회 자복하고 큰 은혜를 받았다. 김목사가 만인 앞에서 사실 해명을 했으니 누가 감히 정죄하리오. 김목사가 억지로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공식화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김목사에 대한 오해가 풀려지도록 하신 것이다. 김목사가 약점이 있다면 어찌 강사 수락을 할 수 있으며, 출옥성도인 채정민 목사가 대드는데 태연히 설교를 감했겠느냐라는 문제이다. 강사로 추대 받을 만한 유일한 자격자였기에 추대된 것이다. 주최자들이 충분히 규명을 하고 강사로 청빙했던 것이다. 그 자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교회 대부흥사요, 대표적 권능의 사자이다. 2. 한국 교계의 원로 목사 중 한 분이시다. 3. 증경 총회장이다.(1920, 제9회 총회)
8·15 해방 직후,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적을 두고 있던 직전리교회(稷田里敎會)를 담당했다. 직전리 교인들은 한국에서 제일 훌륭한 목사님을 감히 모시겠느냐고 황송해하고 기뻐했으나, 김목사는 "그동안 돌보아 준 것에 대한 보답이며, 또 하나님 교회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느냐"며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재령 해창교회(海昌敎會)에서 청빙해 갔다. 그러자 신천서부교회에서는 옛날 인연을 빙자로 자기네가 모시겠다고 나섰다. 일이 이렇게 되매 다른 교회에서는 단념을 하고 마니, 신천서부교회로 정함이 모두 타당하게 생각하여, 이 교회에 정착해서 목회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 기독교는 3, 4십만의 교인이 있었고, 교인들은 이미 민주주의 생활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또 단체적 행동이 수월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근거하고, 기독교는 절대 유신론이라 쉽게 공산 정체에 순응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무력으로 위협 공갈해도 불응하니, '이전제전'(以錢制錢)격으로 만든 것이 이른바 '기독교도연맹'이다.
김일성은 자기 친척 중에 목사 출신이요, 외조부 격이 되는 강량욱(康良煜)을 내세워 기독교도연맹을 날조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이용하였다. 여기에는 목사는 되었어도 목회를 못하고 과자 장사를 하는 곽희정(郭希貞) 외에 신영철(申英澈), 나시산(羅時山), 이웅(李雄), 심익현(沈益鉉), 김치근(金致根), 황기황(洪基璜) 등이 가담했다.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도연맹은 자기네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고 나서서 총회를 구성했다. 남한에서도 이미 총회를 구성 진행 중에 있으니 총회 창립에 구실이 좋았다. 여기에 총회장으로 추대된 분이 곧 김익두 목사이다. 회원들이 총회로 모여서 투표하여 당선된 것도 아니고, 또 총회장이 되었으니 취임식을 한 것도 아니다.
교인들도 어리둥절하고 김목사는 "총회장이란 무슨 소리냐?"라고 따져 물었더니, "이것은 다만 명예직이니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마시고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총회장이라고 해서 오시오, 가시오 하는 일도 없고 그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김목사가 계속하여 추궁하자, "오늘은 중앙에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 후일 다시 찾아와서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뺑소니치듯 달아나고 그 후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강양욱은 평양에 돌아가서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널리 선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김목사가 어느 방송국에 가서 총회장이 아니라고 거부방송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신문지상을 통해서 해명 성명서를 낼 수 있었겠는가, 결국 꼼짝 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자주 참석한 분들은 최지학(崔志學), 임채윤(林采允), 김정묵(金正默), 오윤호(吳允浩), 전재선(全在善), 윤여현(尹汝鉉), 류해천(柳海天), 정한용(鄭漢鏞), 임재형(林載衡)이었다. 또 인민군에 끌려 나갈 반공청년들 8명을 오랫동안 유치원 지하실에 비밀하게 숨기고 식사를 제공하느라고 많은 신경을 썼다고 전해진다.
6·25전쟁이 나던 전해 1949년 5월 1일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노동절'이다. 강양욱은 신천에 김익두 목사를 찾아가서 이번 노동절에 김일성 수상께서 특별 초청을 하니 반드시 참석하시라는 간곡한 전달을 하고 돌아갔다. 김목사는 입장이 난처했다. 가서 마음에 없는 연설을 하기도 난처하고, 그렇다고 비겁하니 핑계대고 불참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7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비장한 결의를 하고 당일 평양에 갔다. "조선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선포한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수요한다"의 표어가 찬란했다. 대회장 단상에는 김일성을 위시하여 김두봉, 강양욱, 최용건 등이 위세 높이 앉았는데 김익두 목사도 큰 성경을 들고 지정된 자리에 좌정했다.
김일성, 김두봉이 연설하고 김목사 차례가 되었다. 큰 성경을 손에 들고 김목사가 천천히 앞 연단에 섰다. 그러자 김일성이 선두에서 큰 박수를 치자, 단상 단하의 많은 청중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요란하게 쳤다. 공산당원들은 박수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다. 더구나 김일성이 선두에서 치니 청중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김목사는 이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내 앞에 여러분이 다 하였으니 지루하게 할 것 없고, 만세나 부릅시다." 만세를 부르자니까 단상 단하에 모든 군중이 총 기립하였다. 김목사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김일성 장군 만세"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노동절 만세"라고 고함쳤다. 단상의 김일성 이하 여러분들이 만세를 부르니, 군중들이 더욱 힘차게 불렀다.
뒤이어 제2장 제3장 만경대 지경이 흔들리는 듯 했다. 김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불렀는데, 김일성 이하 만군중이 따랐다. 그리고 김일성을 장군이라고 안 부르고 "씨"라고 불렀고, 남한의 이승만과 동격으로 "씨"라고 했으니 김익두 목사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김목사는 만세를 마치고 뒷자리로 돌아가면서 김일성에게 "목사가 성경말씀 외에 다른 말을 알아야지요" 했더니 김일성도 맞받아 "목사가 목사 냄새 피웠으면 잘했지요." 그것으로 연설은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김목사는 김일성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전도했더니 김일성은 "예 믿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내용인 즉 김목사의 음성을 채취하고, 그 음성을 닮은 성우(聲優)를 시켜서 김목사의 연설인 양 꾸며 가지고 며칠 동안 방송을 했다. 김목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방송을 할 수도 없고, 신문을 통하여 해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억울해도 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의 모든 인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난받으며 견디고 살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남한의 모든 국민들은 김목사를 의심하기도 하고 비난도 했으며, 일부에서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6·25 전쟁이 일어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불법 남침했던 괴뢰군들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한 달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쓰는 것 같았으나, 국군이 정비를 갖추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반격을 개시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낙동강변에서 괴뢰군 주력부대가 전멸하자, 나머지는 북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아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해 갈 무렵이었다. 때를 맞추어 북한에 잠재해 있던 반공 청년들이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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